가해 연중제 18주간 강론모음

 

연중 제18주일






        1. 김정진 신부(가)/ 2                 2. 김몽은 신부(가)/ 3


        3. 함세웅 신부(가)/ 5                 4. 최기산 신부(가)/ 6


        5. 강길웅 신부(가)/ 8                 6. 안규태 신부(가)/10


        7. 정덕진 신부(가)/11                 8. 최인호 작가(가)/12


        9. 교구 주보(가)/13                   10. 배고픈 이를 먹이시는(가)/15


        11.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가)/17     


1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빵을 불리신 기적


                                                           김정진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5천 명이 훨씬 넘는 많은 백성들을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아름답고 흐뭇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몇 개의 빵으로 이를 불리시어 피곤하고 허기진 수많은 사람들을 곤경에서 완전히 구출하여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같은 두드러진 기적을 행하시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기적을 행하실 적마다 예수님은 우선 둘레의 사람들의 신앙을 전제조건으로 하셨습미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실 때에도 백부장의 신앙을 보셨고(루가 7,10) 12년동안 하혈하던 부인의 경우에도 <안심하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였소>라고 말씀하셨고(마태 9,20-22), 맹인 두 사람을 보게 하실 적에도 <예, 믿습니다. 선생님>하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당신들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마태 9,27-31)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기적의 경우, 백성들의 믿음과 열성이 얼마나 지극하였던가를 살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전교하고 막 돌아온 제자들을 위로하고 휴식시키기 위하여 배를 같이 타시고 벳사이다라는 한적한 곳으로 향하여, 가시어 배에서 내리시자 이미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 20리나 되는 길을 뛰다시피하여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길이 멀건, 힘들 건 더구나 식사에 관해서도 조금도 관계치 않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보려는 마음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두터운 믿음과 참된 신뢰를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쫓아 온 것을 보시고 불쾌한 생각을 가지기는커녕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시어 그들을 측은히 여기자 예수님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시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을 격려하시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시고 그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이 저물자 그들에게 줄 먹을 것까지 걱정하신 나머지 저 유명한 오천 명을 먹이신 대 기적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이 빵을 많게 하시어 또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신 것은, 앞으로 당신이 세우실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빵의 기적에 관해서는 복음사가 네 분이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특히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불리신 기적을 통하여 장차 세우실 성체성사 제정의 기반을 튼튼히 하시며 백성들이 성체성사의 현의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없었다면 성체성사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5,56-59)하고 성체성사를 세우실 적에 많은 제자들 중에는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너구나 빵을 불리신 기적을 행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성체성사의 도리를 알아들은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적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일용할 양식이란 영원한 천상의 빵, 생명의 빵, 천상의 만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상의 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기도문을 외울 적에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청하는 동시에 현세의 빵도 아울러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리들 및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며 나누어주신 빵도, 최후 만찬 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빵도 이 지상의 평범한 빵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음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음에 붙여진 예수님의 몸이었으며 천상의 빵이었습니다.


 


결론을 말씀 드린다면, 예수님께서 피로하고 허기진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이상으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천상 양식인 성체 성사로 우리를 먹여 주시고 살찌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항로는 고해라고도 하는 힘들고 험준한 비탈길과도 같습니다. 자칫하면 힘없고 기운 빠지고 허기져서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의 길이 사막의 길과도 같아서 메마르고 굶주리고 고독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천상의 생명의 빵을 주십니다. 또한 오아시스와 같은 생명의 물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천상의 음식인 성체를 자주 영하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튼튼히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2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모든 이가 배불리 먹었다


                                                              김몽은 신부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심을 굳혀주시기 위해 빵을 증가시키는 기적을 보여주신다. 사도들의 사명이 무엇이며, 수난의 의미와 그 무한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의 신비 안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복음은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는 군중들에 대한 염려로부터 제자들이 스승에게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이르신다.


 


사도들의 사명은 이기심을 떠나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임을 깨우쳐 주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돌봐 주어야 한다고 시야를 넓히도록 일러주신다. 모든 사도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명의 일익을 담당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사도들을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시대고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제자들은 자기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호소한다. “우리에게는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진정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또 인간이 가진 것은 너무나도 빈약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궁핍한 처지 하나를 완화시키지 못하는 한계성, 장정만 해도 5천명이 넘는 군중을 외딴 곳에서 어떻게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까지도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면, 하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랴. 아무리 다른 이들을 돕겠다는 의지가 있고, 또 책임을 느낀다 해도, 힘에 넘치는 일이며, 전혀 방안도 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힘(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기적의 행위를 위탁하신다. 빵을 나누어 준 사람들은 사도들이며, 남은 것을 거두어들인 것도 사도들이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의 손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계속 기적을 행하신다. 사제의 손을 통한 성체의 빵은 전세계 어디서나 나뉘어지고 있으며, 각 강단에서는 말씀의 빵이 나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의 손을 통해서 자선의 빵이 도처에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풍요로우신 분이시다. 따지거나 계산하시지 않고 풍요로히 주신다. 그 많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그 생명을 풍성이 얻게코자 함이다”(요한 10,10).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으로부터 풍요로이 받아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을 거절하면 인간은 항상 가난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고, 인간 세계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것은 무한하고 한계가 없으므로 아무리 가져도 끝이 없고, 누구나가 원하는 대로 풍요로히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채울 수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그러나 하느님나라를 나눈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 또는 인간적인 물질로써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앙의 신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럴지라도 인간은 자기가 가진 바, 최대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3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기적의 빵, 그것은 곧 나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부르게 한 기적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무슨 마술사나 요술사의 괴상한 힘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이 미사 성제의 중심인 성체 성사의 신비를 위해 전표로 주신 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전능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중요한 날들을 기념하고 더욱 뜻깊게 기억합니다. 생일이나 축일이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이 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기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날에 우리는 내복 한 벌이라든지, 또는 용돈 얼마라든지 또는 혼배시에는 결혼 반지 같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선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접촉하며 그들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접촉 또는 현존에는 물리적인 접촉과 정신적인 접촉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향과 집을 떠나 공부하거나 일하는 자녀들이 부모님들의 사진을 귀중히 간직하며 기억하는 현존은 바로 우리가 손으로 접촉할 수 있는 물리적 접촉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고 깊은 것임을 우리는 모두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접촉보다 더 강하고 고귀한 것은 하느님과의 접촉인 신앙적인 접촉입니다.


  미사 중의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중동 지방에서의 식생활의 기본 요소입니다. 그것은 삶의 상징뿐 아니라 삶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취하면 그것이 완전히 소화되어 바로 우리 생명 자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바로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무슨 기념을 위해서 기억하는 기념물로서가 아니고 완전히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표지로 성체 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예수님의 그 기적, 그 기적을 우리는 호기심으로 지금 바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그것이 기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교회 이러한 삼각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계기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보리빵의 기적은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2000년의 시간 차이를, 공간의 간격을 우리 모두 우리의 정신력 또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모두 보리빵의 기적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며 우리 모두 기적의 보리빵, 기적의 물고기가 되어야 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가족, 나와 이웃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 모두와 미사 중에 사랑으로 맺어지는 일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4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최기산 신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못할 짓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도둑질 한 사람은 법정에서 정상참작을 받을 것이다. 3일 굶고 나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다. 눈이 뒤집힌다는 것이다. 아무리 금강산이 좋다해도 배가 쪼르륵 소리를 내면 구경도 시시해지고 귀찮아질 것이다.




그 옛날 훈련소에서 나와 훈련을 받던 사람 하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위 짬밥통에 손을 넣고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서 입에 털어 넣고 씹다가 조교에게 걸렸다. 조교는 무자비하게 그의 ꡐ아구창ꡑ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는 피와 콩나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콩나물만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먹을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돼지나 먹는 음식찌꺼기 통에 손을 넣었겠는가! 지금은 군대가 자유배식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설움 중의 설움




설움 중의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다. 남들은 배불리 먹고 있는데 나의 배만 쪼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면, 더구나 내 자식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다면 그 설움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설움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예수님은 매일 그 일을 위해서 여기저기 나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쉬고 싶으셨다.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애원하였다.




예수님은 팔을 걷은 채 하루종일 병자들을 낫게 하셨다. 해가 서산에 걸려서 이젠 집으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어서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재촉하였다. 그들은 지쳐있었다.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지치는가 보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쳐있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어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좀 쉬면서 맛있는 음식과 대포 한잔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소망같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내다보고 계셨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계셨다. 그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품고 계셨다.




인간의 배고픔을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ꡒ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ꡓ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들려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이다. 이분이 하루 종일 시달리시더니 맛이 좀 가셨나 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장정만도 5000명이라면 적어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합할 땐 만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외딴 곳에서 어떻게 빵을 구하여 먹일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오라 하셨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수천명, 아니 만여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구세주로서 본때를 보여주셨다. 다시는 의심치 못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복음의 메시지




구약성서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빵이 많아진 기적이 나온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였다.(Ⅱ 열왕 4. 42―44 참조)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Ⅰ 열왕 17, 8―16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만 5000명을 먹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범상치 않음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배고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분은 우리 교회더러, 우리 각자에게, 먹을 것을 배고픈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작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북한의 동포들이 배고파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도 굶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ꡒ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나에게 주라.ꡓ 우리는 가난할 수도 있다. 우리가 동전 한 닢, 1000원 짜리 지폐를 들고 이것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가지고 큰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배고픈 자를 가엾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찮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은 이 성서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영혼의 빵인 성체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로써 수많은 영혼들이 배부르게 되고 생기 넘치게 된다고 말한다.














5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5,1~3 (어서 와서 먹어라) 


제2독서 로마 8,35.37~39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복 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는 하나의 커다란 꿈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불신과 그리고 역대 왕들의 썩은 정치 탓으로 나라는 피폐할 대로 피폐되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 차례로 멸망당하면서 나라와 백성은 허탈과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빌론에게 망한 뒤의 처참한 현실 앞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할 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때는 나라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거의 모두도 바빌론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죽느니만도 못한 참혹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련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다 높으신 분의 뜻이 담겨져 있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리했을 때 과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던가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잔칫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결코 인색하거나 째째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싼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면서도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주시는데 그것도 후하게 넘치도록 주십니다. 옛날 광야에서의 만나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자라지 않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도록 그렇게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아주 계획적으로 오늘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백성들을 이끄시고 일부러 먼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식사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도록 안배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뭣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그저 감탄스럽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조건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황송스럽 게도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극적으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누구시라는 것을 알리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이적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배부른 것을 느낄 때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그들 앞에 등장하셨는지를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굶주린 배가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셨지만 백성들의 현실적인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복음 에 보면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자 예수님이 슬그머니 피하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시는 그런 식의 메시아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을 하실 때도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위대한 포부가 계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초대하신 잔칫상이 나 또는 광야에서 모자라지 않게 40년 동안 후하게 내려 주셨던 만나,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은 다 성체성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양식은 다 어떤 징표요 상징에 불과합니다. 오직 생명의 양식이 그 핵심이요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체의 그 진정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서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빵과 잔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성사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썩는 양식에만 치사하게 묶여 살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에 보다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자격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돈 없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도록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모시면 세상을 다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주지 못하고 베풀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나누고 베풀도록 합시다.












6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도움과 나눔의 존재


                                                             안규태 신부


 




으앙…….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포근한 모태에서 바깥 세계로 나온 다음 이 차갑고 낯선 세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나타내는 갓난아기의 반응이 울음이다.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는 이렇게 외치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당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연약한 저에게 좀 나눠주세요. 그래야만 저는 살 수 있어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진실을 향해 부르짖는 외침인 것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처음부터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아니 남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도움을 받고 살기에 당연히 남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 남과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써 외면하고자 통밥 굴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저절로 성장한 듯이 부모를 구박하는 사람, 자기 노력 하나만으로 부자가 된 듯이 가난한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국회의원이 된 듯이 떠벌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삭막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들에 의해서 동물적인 행태가 자주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타인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당연히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얻어먹었으니 이제 내가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삭막한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하리라.












7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기적의 의미


                                                             정덕진 신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따르던 5천여 백성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많게 하여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그 조각을 모은 것만도 열두 광주리라 하니 그 기적이야말로 실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기적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큰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안배는 실로 사람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묘한 것입니다. 외따른 무인지경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은 대단히 놀랄 기적이지만 이와 같은 기적은 지금도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성서에 사도들은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예수님께 제기했습니다. 실로 많은 군중은 예수님을 따라 여러 시간을 같이 있었으므로 배고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말도 당연한 말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먹을 것을 당신들이 주시오”하고 말씀하실 적에 이미 당신 마음속에는 배고픈 군중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실 의도가 계셨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배고픈 사정,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정, 헐벗고 병들어 있는 사정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들의 모든 사정을 확실히 보시고 그때 그 백성들에게 베푸신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도 나타내시고 계시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전연 모르시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알아듣지 못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수까지도(마태 10,30) 헤어 두고 계시다니 예수님은 우리 사정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항상 눈여겨보시고 지켜보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크나큰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면서…….


 


둘째: 그리스도는 지금도 끊임없이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오늘도 내일도 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구가 40억을 넘고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을 매일 매일 먹이고 계십니다. 한 알의 씨앗을 땅에 묻으면 백 배 천 배의 많은 결실을 하는 것, 오곡백과가 먹고 남을 만큼 결실맺도록 일기를 고르게 하시는 것 등 이것이야말로 큰 기적 중의 기적이요, 빵을 많게 하셔서 오천 여명을 먹이신 기적에 비하여 얼마나 더 큰 기적입니까? 전 한국의 오천 만의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음식물을 생각할 때 이같은 기적 외에 더 큰 기적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오늘 하루 뿐 아니고 내일, 모레, 글피… 계속해서 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생양 보존하시는 기적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때 감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째: 이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장차 성체를 세우셔서 우리 만백성의 영혼의 양식이 될 표상인 것입니다. 예수님 이래로 세상에 나서 성체를 영하고 영혼의 양식을 삼아 주님께로 나간 사람이 실로 몇 억만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참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자기 몸과 피를 음식으로 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같이 계시려는 이 사랑을 알아들어야 하겠고 한편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8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만남과 나눔


최인호 작가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다소 내용이 애매하지만 어쨌든 너와 나의 만남이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랑을 노래하기에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남았다는 이야기는 ‘나눔’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기적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 교 교우들이 자기가 가진 재물을 주님처럼 나눌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잘살 수 있다는 예화로 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물론 주님은 이 기적을 통해 ‘나눔’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나눔’의 기적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만남’의 소중함을 더욱더 강조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많은 군중이 모이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시는데 제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변명합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나눌 수 없는 이유’의 보편적인 세 가지 변명입니다. 그것은 ‘외딴 곳’이라는 공간적 변명과 ‘시간이 늦었다’는 시간적 변명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는 소유적 변명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변명은 오늘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것이 불가능함을 변명하는 우리들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옵니다. “난 시간이 없어”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구” “나누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주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시간적․공간적․소유적 변명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주님은 ‘나눔’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남’의 절대성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오천 명의 군중을 하나의 군중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셨으며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절대적인 만남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그러나 그 나눔이 참사랑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나눔’의 행위보다 먼저 ‘만남’의 행위에 더 운명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또한 나와 주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주님과 나는 함께 영원을 태우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는 노래말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9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구 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4,13-21)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異蹟史話)이다. 네 복음서의 이적사화를 크게 둘로 나누면 사람을 구제하신 치유․구마 이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한 이적사화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자연 이적사화에 속한다. 특히 자연 이적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전례(前例)가 구약성서에도 있다.


1. 구약성서의 빵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는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이야기(1열왕 17,8-16)와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2열왕 4,42-44)이다. 엘리사의 이적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떡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그것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어떻게 이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야훼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과연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빵 기적


따라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인즉, 엘리사 예언자도 위대하지만 예수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빵 스무 개로 고작 백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셨다. 아무리 엘리사가 능력있고 위대한 예언자라 해도 어찌 주님이신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 담긴 뜻이다.


3. 기적에 담긴 의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에는 성만찬례(聖晩餐禮), 곧 미사의 풍요함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 14,19)는 말씀은 예수께서 최후 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 마르 14,22;  루가 22,19; 1고린 11,23)과 흡사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되새기며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 성만찬례를 지내던 초대교회 교우들은 틀림없이 성만찬례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성만찬의 의미와 아름다움은 ‘나눔’에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을 것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을 것이다. 양식이 적어 부족할 것 같지만 나누어 주니까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아름다운 뜻이 오늘 이적사화에 담겨있다.                                               
























10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배고픈 이를 먹이시는 사랑의 기적




  마가렛 호레라는 아일랜드 태생의 여인은,「고아들의 어머니」 라 불린다.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열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다행히 나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작은 호텔에서 빨래를 하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결심을 했다.


「고아원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 돈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도울 일이 있을거야, 이것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인 것 같아‥‥」그녀는 작은 고아원을 찾아갔는데, 어려운 사정을 보고, 불쌍한 고아들을 도울 궁리를 하게된다.




  드디어 그녀는 젖소 두 마리를 사서 우유를 짜서 팔아 고아원을 도왔다. 우유가 잘 팔려 젖소 한 마리를 더 사고, 빵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장사가 굉장히 잘되어 큰 이윤을 남겼다. 마가헷은 돈을 많이 벌어도, 항상 자신은 누더기 옷을 입고 열심히 일을 했다. 자신이 번 돈을 항상 고아들을 위해 사용했다.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를「고아들의 어머니」로 존경받게 했던 것이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의 사랑스런 마음을 기리며「뉴올린즈」에 초라한 옷차림을 한 그녀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그녀가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이룰 수 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고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오늘 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다. 오늘 군중을 배불리 먹여주시는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간의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도 해결해 주신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성체성사와 말씀의 신비 안에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근처로 큰 군중이 몰려든다. 예수님은 배고파하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시고자 생각하신다.




  예수님은「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우리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는 늘 이런 실수를 한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만 무언가를 하려는 습관에 빠져있을 때가 많다.


주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태도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요!」 라고 겸손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빵의 기적은 어떤 아이가 갖고 있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기적을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 얹어졌을 때, 주님을 통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비록 내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 없다하더라도 나의 능력과 시간과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이 쓰시도록 했을 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능력과 결과로 바꾸어 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먹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모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스러기를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낭비를 해서는 안된다. 또한 작은 정성과 힘을 모아도 큰 결과가 나온다. 그 남은 열 두 광주리의 빵은 또 다른 배고픈 사람들의 몫이 된다. 우리는 쪼들리지 않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큰 죄악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하는 시간과 돈이 다른 이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빵의 기적은 사랑의 실천




  예수님이 빵의 기적을 이루는 계기는, 배고픈 군중들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물론 측은한 마음은 동정심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진정한 삶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시려고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다. 빵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을 보여주셨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과 영혼이 배고픈 이들이 많다. 정신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영혼의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그들과 사랑과 관심을 나눌 때,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처럼 사랑의 빵의 기적을 이루게된다. 우리 공동체,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이 항상 배고픔이 없는 공동체와 가족이 되도록 서로 나누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랑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사랑의 신비를 몸소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다.
























11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못할 짓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도둑질 한 사람은 법정에서 정상 참작을 받을 것이다, 3일 굶고 나면 도둑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다. 눈이 뒤집힌다는 것이다. 아무리 금강산이 좋다해도 배가 쪼르륵 소리를 내면 구경도 시시해지고 귀찮아질 것이다.




그 옛날 훈련소에서 나와 훈련을 받던 사람 하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위 짬밥통에 손을 넣고 콩나물을 한움큼 집어서 입에 털어 넣고 씹다가 조교에게 걸렸다. 조교는 무자비하게 그의 ‘아구창’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는 피와 콩나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콩나물만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먹을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돼지나 먹는 음식찌꺼기 통에 손을 넣었겠는가! 지금은 군대가 자유배식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설움 중의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다. 남들은 배불릴 먹고 있는데 나의 배만 쪼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면, 더구나 내 자식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다면 그 설움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설움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설움 중의 설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서였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예수님은 매일 그 일을 위해서 여기저기 나다니셨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쉬고 싶으셨다.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애원하였다. 예수님은 팔을 걷은 채 하루종일 병자들을 낫게 하셨다. 해가 서산에 걸려서 이젠 집으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어서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재촉하였다. 그들은 지쳐있었다.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지치는가 보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종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지쳐있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어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좀 쉬면서 맛있는 음식과 대포 한잔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소망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내다보고 계셨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계셨다. 그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줘야한다는 것을 가슴에 품고 계셨다.




  인간의 배고픔을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들려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을 것이다. 이분이 하루 종일 시달리시더니 맛이 좀 가셨나 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장정만도 5000명이라면 적어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합할 땐 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외딴 곳에서 어떻게 빵을 구하여 먹일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수 천명, 아니 만여명의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구세주로서 본때를 보여주셨다. 다시는 의심치 못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복음의 메시지




  구약성서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빵이 많아진 기적이 나온다. 엘리사는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였다. (2열왕 4,42-44)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 (I열왕 17,8-16) 이스랄엘 백성은 40년 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만 5000명을 먹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범상치 않음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배고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분은 우릴 교회더러, 우리 각자에게, 먹을 것을 배고픈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작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북한의 동포들이 배고파서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한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도 굶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나에게 주라.” 우리는 가난할 수도 있다.


우리가 동전 한 닢, 1000원 짜리 지폐를 들고 이것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가지고 큰 기적을 이루어내신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배고픈 자를 가엾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성서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영혼의 빵인 성체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로써 수많은 영혼들이 배부르게 되고, 생기 넘치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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