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2 주일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제 1 독서 : 창세 15,5-12. 17-18
제 2 독서 : 필립 3,17-4,1」
복 음 : 루가 9,28b-36
해 설
사순절이라고 하는 엄숙하고도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도니다는 것은 좀 뜻밖의 일이다. 왜냐하면 전례상 세 주기(A.B.C해)가 다 같이 항상 사순 제 2주에 전해주고 있는 그 이야기의 내용이 언뜻 생각하기에 사순절이라는 전례시기가 담고 있는 ‘속죄’와 ‘회개’의 특성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영광과 권능의 장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 내용 특히 오늘 루가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그 내용을 잘 읽어 보면 사실은 아주 다르다. 즉 실제로는 오히려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폭넓게 그리고 깊이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선 오늘 복음 내용(9,28-36)가운데서 우리를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특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특성은 ‘산’(후기 전승만이 타볼산에 대해 이야기한다)위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서서히 놀랍고도 신비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영적 분위기를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버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28-29절). 이 구절은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내용을 반복하여 강조함으로써 바로 그분께서 홀로 열정적으로 깊이 기도하시는 그분의 인성의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깊이 기도하시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처럼 생활 그 자체만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까지도 변모케 하는 빛의 섬광을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
우리는 기도에 관한 주제가 루가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주제가 바로 이 전례시기에 언급되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욱 참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의 생활의 변모가 오직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의 불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빠스카의 새로운 생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두 번째 특성은 다른 두 공관복음사가들이 단순히 모세와 엘리야가 다볼산 위에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을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가복음사가는 구약성서상 명성이 드높은 그 두 인물과 예수와의 신비스로운 대화 내용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멀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죽음’으로 번역되고 있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 원문상의 단어는 ‘엑소도스’(exodos:출애급, 대탈출)이다. 그러므로 결정적 해방과 약속된 땅을 향한 출애굽에 관한 모든 주제가 여기서 함축적으로 다시 취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변모에 관한 이야기는 에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달픈 여정이나, 또는 당신의 희생을 끝마치시게 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찬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루가복음사가는 이 변모의 이야기 후에 곧이어서 예수께서 성도를 향해 가시는 끝없는 여정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9,51)
사순절은 빠스카를 향해 가는 여정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바로 이와같이 두 개의 전례신비가 상통함으로써 사순절은 빠스카의 영광스러운 빛에 잠기게 된다. 사실 ‘변모’에 관한 이야기는 루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특수한 내용 외에도 그 이야기 자체의 총체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사순절의 의미를 보다 근본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놀라운 신비적인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서 복음사가들 사이에 일치되고 있지 않는 상충된 표현 그 이면에는 한가지 합치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즉 피곤하지마 잠에서 깨어나서 그 장면을 목격하는 행운을 가졌던 세 사도들의 졸리운 눈에 ‘글그리스도의 얼굴’(2고린 4,6참조)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doxa)드러났다고 하는 내용이다. 자, 루가가 어떻게 그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지 보자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32절). 그들은 엄습하여 둘러쌌던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상기시킨다. 계약의 방주(출애 40,35)와 솔로몬 성전(1열왕 8,10)위에 떠 있었던 구름을 생각해 보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직전에 그리고 또한 직후에 그리스도께서 비탄스럽게 알려주시는 죽음을 향한 여정 그 자체가 그분께서 많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지만 변함없이 성부께서 ‘택하신 아들’(35절)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지는 못한다. 특히 동산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번민의 증인이 도리 (마르 14,32-42참조) 그 세 사람은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되시는 그 순간의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다볼산의 영광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변모’는 부활의 영고아에 대한 ‘예표’와 같으며, 십자가의 죽음 자체에 다음과 같은 긍정적 의미와 이해의 실마리를 열어준다 : 예수께서는 부활의 빛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죽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사순절의 참 의미는 성부께서 ‘택하신 아들’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분께 대한 신앙고백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포기하고 못박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때 예수께 일어났던 것과 같은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즉 우리가 성부의 뜻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때 우리를 하느님의 빛 안에 완전히 자리잡게 할 그 마지막 변모의 반영 내지는 예표같은 것이 나타나게 된다. 사실, 우리의 모든 생은활은 신앙을 통해서 그처럼 조명되어 변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둘러쌌던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가 예수의 세례 때 울려퍼졌던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3,22참조)하는 선포에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라고 덧붙이고 있는 사실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비록 그리스도교 신자는 신앙 때문에 아직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그 약속된 땅의 찬란한 빛을 받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광야 즉 사순절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목적지에 보다 앞서 도착할 수 있는 나래를 펴게 해준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오늘의 제 2 독서(3,17-4,1)도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의 유일한 길인 십자가에 대한 기억조차 생활 속에서 지워버린 듯한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염려한다 :“내가 벌써 여러번 여러분에게 일러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가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18-19절).
아마 사도 바울로느 이미 앞서((피립 3,2)이야기했던 유다화된 사람들이나 또는 이완된 생활을 하는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잇는 것 같다. 어쨌든, 사도 바울로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의 암영을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가라바리아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어떻게 빠스카의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 사도 바울로는 우리 육신까지도 변모케 하는 그 마지막 결정적 변모의 빛이 어떻게 바로 현재 이 순간부터 미래를 바로 보며 사는 우리의 생활에 반영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20-21절). 비록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좀 다르지만 사도 바울로의 생각은 복음 내용에서 표현된 생각과 아주 일치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는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장차 얻게 될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추어 나감으로써 이미 신앙의 빛에 비추어 그와 같은 생활을 사는 것이다.
‘믿음’과 ‘계약’
오늘 제 1 독서는 그와 같은 믿음이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창세 15,6) 성 바울로가 이 대목을 그리스도께서는 법에 의존하지 않고 믿음의 힘에 의해서만 우리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로마 4,3 ; 갈라 3,6 참조).
그러나 여기서 특ㅎ히 관심을 두어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야훼의 계약 즉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 수만큰큼이나 많게 하고(5절) 팔레스티나의 땅을 영원히 거처할 곳으로 주시리라는 계약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에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18절). 그날 야훼와 아브라함 사이에 약정되어 전통적 희생제사로서 맺어진(9-17절) 계약의 실현 여부는 오로지 모든 것이 먼 훗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그 말을 믿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보다시피, 여기서도 믿음은 때를 예견하고 그 때를 기다리는 존재를 변모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든 생활은 사순절의 기다림과 앞당겨진 빠스카의 빛으로 신비스럽게 짜여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