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삼위일체 대축일 주일 강론 모음

 

삼위일체 대축일





        19. 강길웅 신부(다)/36               20. 조순창 신부(다)/37


        21. 강영구 신부(다)/39               22. 유영봉 신부(다)/42


        23. 지경대 신부(다)/44               24. 김신호 신부(다)/47


        25. 서웅범 신부(다)/49               26. 김순태 신부(다)/50


        27. 김정진 신부(다)/52               28. 신은근 신부/55


        29. 최상범 신부/56                    30.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57


        31. 삼위일체의 신비/58






19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하느님의 신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잠언 8,22~31 (땅이 생기기 전, 지혜는 이미 태어났다) 


제2독서 로마 5,1~5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복 음 요한 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모릅니다. 부모가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고 또 세상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지 그리고 부부간의 애정이나 사업에서 오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자녀들은 모릅니다. 부모는 그냥 자기들을 키워 주시는 분이며 달라면 주는 분이고 필요하면 찾는 분이지 부모가 과연 어떤 삶을 사는 분인지는 잘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의 두뇌를 동원하여 하느님의 속성을 파헤쳐 보고 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성서에서 등장되는 몇 가지 안되는 말씀들을 통하여 어렴풋이 짐작이나 하고 추측이나 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각 사람에겐 ‘인격’이라는 것이 있듯이 하느님께도 ‘위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격이 하나면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위격이 셋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 분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성서는 그 세 위격이 오직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 대목에서 고개가 자꾸 갸우뚱해집니다.




위격이 셋이면서도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면서도 위격이 셋이 되십니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하지 만 그러나 세상 끝날까지 이 시도는 제자리 걸음에 그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직접 뵙기 전에는 우리는 사실 확실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서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의 내용을 아스라이 비춰 주고 있습니다. 즉 ‘지혜’라는 위격화된 존재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작업을 하시고 특히 사람들이 있는 곳에 기쁘게 있으면서 어떤 목적의 일을 하십니다. 이 지혜가 도대체 누구냐?




이 지혜는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며 하느님과 세상과 관계를 맺는 중개자로서 등장되는 분인데 이를테면 요한 복음에서는 ‘로고스’ 로 나오며 그리고 그분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1독서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희미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2독서와 복음에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어 믿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일러주실 분,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하지 못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계속 전달해 주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 안에서도 그 역할이 분담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느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는 선후의 관계는 없지만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계시며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관계를 가능케 하고 또한 아버지와 아들에게 근본적인 힘이 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세 역할이 고유하면서도 그러나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인 아버지께서 창조 사업을 주도하셨다면 지혜이신 말씀께서는 구속 사업을 수행하셨고 그리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일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성자가 이룩한 구원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역할을 억지로 붙인다면 그렇지만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창조고 구속이고 모든 작업은 세 위격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 표현이 이상하지만, 하느님이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다 해서 한 위격씩 따로 따로 분해되는 것도 아니며 또는 조립된 것도 아닙니다. 한 위격을 빼면 다른 위격도 존재가 되지 않는 그런 공존과 공유와 공생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자체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 지구는 땅덩어리와 물과 공기가 있습니다. 마치 삼위일체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떼어 버린다면 생물체는 존재되지 않습니다. 지구는 하나의 신비이듯이 우주도 신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도 들여다보면 ‘신비’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은 미물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신비는 어떻겠습니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원인과 결과는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감히 그분의 사랑에 초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그분의 신비를 보다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20         삼위 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해) 아버지의 것은 내것


조순창 신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로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새롭게 하며, 믿음의 뜻을 지혜로 깨닫고, 깨달은 바를 ‘공동체 생활’에서 실천함이 이 삼위일체 대축일의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한처음(태초)에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오늘도 보존 진화케 하십니다. 이는 혼돈에서 지혜로 질서지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며, 그분을 아버지 하느님 성부라 부릅니다.




그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가교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총을 받고, 은총은 고통을 이기고,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으며,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자’라 부릅니다.




그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마치시고,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셨고, 말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부활의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하게 하셨으며, 진실한 형제애는 나누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창조로써 생명과 일치를 주시는 ‘성령’의 모습을 보는 것이며, 그분을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성삼위의 신비를 알도록 설명하고,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생활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오늘입니다.




삼위일체의 생활 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깨뜨렸어도 덩달아 취소하지는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성실히 약속을 지키심과 같이 우리도 일관성있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영세 때에 “마귀를 끊고, 하느님 믿는다”과 한 ‘신앙 고백’을 지켜, 변덕 부리지 않고,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 서약 때에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었거나, 일생 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죄하여 주시기 위해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찾아 주셨고, 사랑으로써 사람들간의 화합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도, 끼리끼리 뭉쳐서 파벌을 이루고, 무관심이나 원수처럼 담을 쌓고 사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민주․평등 사회라지만, 돈이나 지위나 학벌로의 넘나들 수 없는 계층간의 위화감이나, 공평하기보다 친한 사람만 봐 주느라고 질서를 어김으로써 사회의 불안과 불신 조성이 오늘의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계층과 파벌의 장벽을 쳐부수는 사랑과 희생적 사명감으로 화합의 가교를 놓아야 합니다.




성령은 새로운 창조를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을 주시고, 사랑의 위력으로 새로운 낙원을 이루게 하여 주셨습니다. 현대 산업화에 따라서 비인간화로 가정의 애정 기능이 깨어지고, 소외 등으로 비정의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걱정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한 탓으로 아기가 손가락을 빨고 있어도 무관심하여 2세들이 반사회적 인물이 되고 맙니다. 자녀의 실수에도 놀라지 않는 무감각과 비정한 태아 살인의 독을 녹이는 것은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고, 그것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당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합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21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  삼위일체 – 살아야 할 신비


강영구 신부




오늘은 하느님의 신비인 삼위 일체를 기념하면서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삼위 일체의 신비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어떤 일을 할 때나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송을 외우면서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면서 기도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언행이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라면서,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삼위 일체의 신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일도, 아니 나 자신도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하느님의 저 깊고 큰 신비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한 분이신 하느님, 그러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느님. 한 분이신 데, 성부도 계시고 성자도 계시고 성령도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신데도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다? 셋인데 하나다? 하나인데 하나가 아니고 셋이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한 분이시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무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런 신비를 하느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 일체의 신비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신비, 사랑의 신비, 일치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 특별히 구약성서는 절대 주권을 지니신 유일(唯一)하신 한 분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즉, 출애굽기는 절대적이며 배타적인 흠숭을 요구하시고, 당신 이외에 그 어떤 신(神)도 용납하시지 않는 한 분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한 분 하느님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하느님, 즉 우리 인간들의 삶과 무관하게 하늘 저 위에 계시는 어떤 분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마태 22,32),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인간들 가운데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인간들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인간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삼위 일체(三位一體)입니다.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의 주인으로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시는 하느님.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시고 숨결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당신 생명에 참여케 하시는 하느님, 타락한 인간을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사랑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주린 배를 채우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시는 하느님,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느님, 십계명을 통하여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신 하느님, 바로 이런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신약에서는, 또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시는 하느님,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행동으로 옮기시는 하느님, 인간을 옭아매고 있는 온갖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시고자 몸으로 부딪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끝내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써 참으로 무력하게 죽어 가는 하느님,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 같지 않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또는 구원받기도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셨으니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면서 헷갈릴 수밖에 없는 하느님이신 데, 그분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믿는 사람들은,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평화를 누리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심판받게 되는 그런 하느님입니다. 그분이 곧 성자 그리스도이신데 나자렛 사람 예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성서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느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하느님입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안에 숨결로 들어가시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하느님, 기드온이나 삼손 같은 평범한 인간 위에 내리시어 그들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어 그들을 판관이 되게 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는 하느님, 엘리야나 예레미야 혹은 이사야 같은 인물 위에 내리시어 그들을 예언자가 되게 하시는 하느님, 사울과 다윗 위에 내리시어 그들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시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변모시키는 하느님, 그리고 오순절 날에 사도들 위에 내리시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동하게 하는 하느님, 인간과 인간사이에 쌓여 있던 장벽을 허물어서 하나 되게 하는 하느님, 사도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게 하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령은 바로 그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변모시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삼위 일체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제2 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에서도 삼위 일체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삼위 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야 할 차례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 일체의 신비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 버린 하느님이나 머리 속에 관념적으로 들어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늘 저 멀리 우리와는 무관한 곳에 머물러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거듭나는 사람이 되었고, 모든 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살아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받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심으로 자신을 비우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은 쏟아지게 되고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실한 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충실히 하는 사람이 생명력으로 충만케 됩니다. 성서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명력으로 충만케 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사는 신앙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삼위 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셋이면서도 셋이 아니고 하나인 신비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럿이지만 사랑하면 하나가 됩니다. 너와 나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여 하나가 되면 우리는 모두 살아납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 되고 부모 자식이 사랑으로 하나 되면 생명력으로 충만한 가정이 됩니다. 사랑으로 이웃과 이웃이 하나가 되면 기쁨과 평화가 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심각한 분열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민족 분규가 끊이질 않고 나라와 나라는 서로 힘 겨루기를 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 분규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들이 죽었고 수백만의 전쟁 이재민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상을 겪으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에 늘 서로를 불신하고, 총부리를 겨눈 채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고 이산 가족들은 그들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도 부족한지 이제는 영남이 어떻고 호남이 어떻고 하면서 편가름을 하려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부부들의 이기심 때문에 파탄을 맞고 있습니까? 모두가 사랑하지 않기에 또 너그럽게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우리는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분열과 당파심, 이기심을 몰아내고 일치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삼위 일체의 신비는 머리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할 신비입니다. 우선 우리의 가슴속에서부터 나 중심적인 이기심을 쫓아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을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이 되게 합시다. 나아가서 이 사회 속에 분열과 불화를 조성하는 온갖 악들을 추방하는 데 앞장서 가도록 합시다.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하나 되는 삶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주와 항상 영원히. 아멘.”












22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 12-15> (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생활


유영봉 신부


 


묵상 : 三位一體 교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교리이기에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야 할 교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삼교리는 우리 신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우리는 매일의 생촬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신비를 체험해야 한다.




구원의 역사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죄악으로 인해 당신께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 성자를 파견하셨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발하시는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삼위의 모습은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이며 영광인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자(信者)라는 말은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고 물으면, 대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당신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전지(全知)하신 분이시고, 악의 그림자도 없는 전선(全善)하신 분이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은 철학자들이 그려낸 신(神)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시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 그리고 크신 사랑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8)고 하였다. 이 얼마나 마음에 바로 와닿는 표현인가?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시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지상의 온 생애를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때가 많이 묻은 말이라, 때로는 그 뜻이 애매한 경우가 많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향해 자신을 완전히 내놓은 사랑으로 한몸을 이루시는 사랑이시다. 셋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신비,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질이며 모습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삼위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주는 교리가 아닐 수 없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인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백성’이란 공동체를 뜻한다. 그런데 이 백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랑으로 한몸을 이루듯이, 신자 상호간에 서로를 위하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하나가 되는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네 것 내 것 없이, 가진 바를 나누고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화의 모습이다,(사도 2․4장) 서로를 향해 서로를 바치는 상호수여(相互受與)의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시는 성삼위(聖三位)의 신비는 바로 교회의 이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성삼위의 신비를 사는 생활




우리는 흔히 삼위일체교리는 잘 이해할수도 없고, 잘못하다가는 이단자가 되기 십상이므로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면 되는’교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삼위일체의 현의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매일 살아야 하는 교리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성삼의 신비,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가꾸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윤리의 근본 원리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가정에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간에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바치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그런 사랑이 흐르고 있다면, 그 가정에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생명이 넘치게 될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영광송과 성호경을 바칠 때마다 성삼의 신비를 되새기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성삼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자.












23       삼위일체 대축일 (다) 삶 속에서 체험하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평화


지경대 신부




오늘날 엄청난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생활문화의 윤택함은, 우리들로 하여금 마치 아무런 아쉬움과 어려움도 없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TV의 광고를 보고 있거나, 현란하게 번쩍이는 광고판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면 더욱 그러합니다. 마치 모든 것들을 다 충족시켜줄 수 있고 모든 심중의 불안들을 털어 버릴 수 있는 것들이 다 준비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신앙인의 길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세상이 풍족과 풍요로움보다는, 우리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공포와, 증오와, 폭력을 먼저 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풍족과 풍요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로 이기적으로 변해가며, 극에 치닫는 증오와 시기와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지, 우리는 그 현실에 치를 떨고 불안해하고 있지만, 나 또한 그 세상의 굴레 속에 점점 파묻혀 때로는 허우적거리고, 때로는 지쳐서 안주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공포, 근심, 걱정거리로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삶들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집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비록 공포와 증오와 폭력이 점철된 이 세상을 살지만, 세상의 굴레 속에 묻히지 않고,  하느님의 참 생명, 참 평화를 찾는 길을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1425년 안드레이 루불료프는, 위대한 러시아의 성인 세르기(1313-1392)를 추모하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이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가 이 성화를 그리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자기가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뿐 아니라, 공포와 증오가 가득찬 정치적인 불안 속에 살면서도, 늘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고 사는 길을 동료 수사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을 조용히 보고 있으면, 성당의 아름다운 장식이나 어려운 교리의 보조해설로 그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머물기 위한 장소로 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림은 세 거룩한 천사가 식탁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림입니다.


 


성자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깊은 사랑과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성삼위가 나누고있는 대화에 있습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성작, 그리고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어린양의 피를 성삼위는 각기 손짓으로 가리키면서, 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자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희생양이 되시는 당신의 사명을 암시하고, 성부는 성자를 축복하는 손짓으로 격려하고, 성령은 식탁 앞쪽에 열린 사각형을 가리키면서, 성자의 거룩한 희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가리키는 사각형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에 이르는 길이며, 좁은 길,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성삼을 찾기 위한 예수와의 이별




결국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가 인간의 지성과 역사를 초월하는 신비이지만, 결코 우리의 삶과 무관한 신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신적 신비이자 인간적 신비이기도 하며, 그 신비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초월한 즐겁고 영광스러운 신비이지만, 또한 모든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 건드리는 신비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동떨어진, 그래서 우리의 영광과 경외심만을 자아내는 신비가 아니라, 우리 삶 안에 아주 구체적으로 살아 있고 생생하게 체험되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는 성자께서 걸어가신 어린양의 길, 수난의 길을 선택할 때에만 터득할 수 있는 길이고, 그 길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공포와 폭력과 증오의 현실을 이겨나갈 것이고, 성삼위께서 누리시는 사랑과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을 통해서 지혜는 창조 이전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하늘나라에만 고고하게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고 사람들 안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어,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십니다. 그래서 흘러 넘치는 삼위의 사랑은 성자를 통하여 인간조건을 취하셔서 구원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비에 동참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찾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하십니다. 이별은 인간적인 면에서 슬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슬픔을 이겨나가도록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찾고 간직하려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육신을 떠나 보내는 것은 더 큰 하느님의 진리, 성령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가는 것은 숨는 것이 아니오, 삼위일체이신 그분의 신비를 더 드러내는 것이며, 끊어버리는 이별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그 신비의 삶을 끊임없이 찾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바로 더 큰 하느님의 신비, 즉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삼 사랑의 근거인 어린양의 피




제2독서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로는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루불료프가 그린「삼위일체」 성화 안에 성삼위의 사랑과 평화는, 세상과 동떨어진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는 환상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성삼위가 어린양의 피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자발적인 고통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선택적인 고통이 있을 때에만 성삼위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 아니 바로 고통은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성삼위의 영원한 집을 건설하는 초석이 됩니다.


 


공포와 증오와 폭력의 검은 세력이 구석구석 침투해 버린 세상, 거기서부터 혜어나기란 여간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력에 속하지 않고, 그 세상에 거처를 마련하지 않고, 사랑의 집을 끊임없이 우리의 집으로 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성삼위 안에 숨겨진 고통을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이며, 그 안에 자리잡은 사랑의 깊은 숨결을 끊임없이 들이마시는 생활입니다. 이때 성삼위가 이루는 사랑과 일치는 우리 삶 안에 깊숙하게 자리할 것이고, 우리는 세상의 굴레에 속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집을 이 세상 안에서 실현시킬 것입니다.






24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 본체적으로는 한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셋


김신호 신부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인간의 건전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것이라고까지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설명할 때에 단골로 등장하는 성인이 있는데, 이 성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성 토마스와 더불어 가톨릭 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분이시다.


 


우리는 또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일생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젊었을 때에 방탕한 생활을 했다느니, 그의 어머니인 모니카 성녀가 한 기도의 결과로 회개하여 히뽀의 주교가 되어 교회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느니,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개하고 교리를 연구하던 중에 삼위일체라는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 벽을 통과하기 위하여, 그는 깊은 생각 속에서 바닷가를 거닐며 사색을 하게되었다.


그때 그 바닷가에서 아주 어린아이 하나가 모래에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조가비로 물을 퍼내어 웅덩이에 계속해서 붓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상한 마음에서 그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 그 어린아이는 “바다의 모든 물을 이 웅덩이에 넣으려 한다”는 대답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에, 그 어린아이는 자기가 바다의 모든 물을 그 조그만 웅덩이에 넣을 수는 있어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이 이야기가 정말로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는지, 혹은 지어낸 이야기인지에 대한 진위여부는 가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삼위일체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앞서서 늘어놓은 일종의 인간의 무능을 변명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요즈음 우리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 속에서 우리가 간직하였던 여러가지 꿈을 상실하면서 살고 있다, 떡방아를 찧고 있던 토끼나 계수나무도 사라졌다. 그러면 이러한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모든 의문점이 사라졌느냐 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복잡한 가운데 의문점은 더 많아지고 인간은 더욱더 복잡한 한계성에 부딪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이 오시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여러 해 동안 같이 살면서 예수님께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도 예수님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는 아무런 조짐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本體 한분, 位格은 세 位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낙담을 했고, 희망이 사라져버린 상태에 빠지게된 것이다. 이를 예견하신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앞으로 오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고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말을 통하여, 아버지와 자신이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고 계신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게 들은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신다.




사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본체적으로는 한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셋임을, 이 서로 구분되고 있다는 설명으로 이해되도록 하는 내용을 가진 최상의 추상적인 실체이면서, 또한 이해될 수는 없지만 매우 구체적인 현실적 개념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현상적인 면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를 현상적인 면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처럼, 우리도 만약 진리를 현상적인 면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25 삼위일체대축일<요한 16,12-15>(다)사랑과 힘과 영(靈)」으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며


서웅범 신부




三位一體라는 용어에서「위(位)」라는 개념은 희랍어 Prsopon-가면(假面)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면극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 (役)의 연기를 합니다.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언제나 그이지만, 그는 자기가 쓴 가면의 역할에 따라 매번 다른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도 그 상황은 비슷합니다. 사람은 시간과 장소, 자격이나 주어진 소임의 성격 등등에 의해 각기 다른 호칭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또 다른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신부라고 불리며, 그에 따르는 여러 성무를 집행합니다. 그러나 생가에서 저는 아들․형 ․오빠․동생으로 불려지며, 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를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또 그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무궁세세에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을 성부 하느님으로, 인류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느님으로, 성부와 성자의「사랑과 힘과 영(靈)」으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며,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를 온전히 알고 또 그분께로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을 성령으로 인식하며, 그분께 믿음을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간과 그 역할에 따라 완전히 따로 존재하시며, 활동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께서,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에서,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에서 늘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태양에 견주어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불덩어리로서 밝은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덩어리와 빛과 열이라는 태양의 속성은, 언제나 「함께」입니다. 절대로 그 속성들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내적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이신 성부․성자․성령의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으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성부를 태양이라는 불덩어리에, 은총을 내리시고 계시의 빛을 인간에게 비추어 주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태양 빛에, 그리고 따뜻한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주시는 성령을 태양열에 비겨 생각하며, 3위1체의 신비를 묵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처럼 3위1체 신비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더 생각해야 할 일은, 성부․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을 겸손되이 느껴, 그에게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3위1체이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그 「사랑의 내적일치」를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들 안에서 온전히 이루며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 해 먼저, 자기자신의 Persona(가면, 역할)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살지 못해 그 이상(理想)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게될 때, 그 사람은 정신적 장애를 겪게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persona 곧 역할을 띠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때 우리가 늘 신앙인의 모습을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영육으로 건강하고 기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사랑을 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3위1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 사랑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은 「하늘나라의 좋은 친구」들임을! :‥‥ 기도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며, 사랑으로써 세상 모든 이와 일치하는 「3위1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위1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6          삼위 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해) 아버지의 것은 내것


김순태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 … 간략하게 축소된 이 말마디는 우리의 얇은 지식으로써는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전쟁터에서 어린 아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진 엄마의 젖을 빨며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앉아 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를 알기 위해 고심하다가, 어느 바닷가에서 천사 소녀를 만나 “내가 이 바닷물을 이 작은 구멍에 모두 퍼부을 수는 있어도, 당신은 그 교리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설화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믿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따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내게는 당신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하더라고 당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의 여러 군데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아들은 아무 것도 자진해서 할 수 없습니다”(요한 5.19)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당신들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오”(마태 28.19)


우리는 지금 들려드린 성서귀절로부터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위의 관계가 서로 하나와 같이 같다는 점입니다.




이 관계는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 친밀한 사랑으로써 한데 뭉친 관계입니다. 마치 물동이에서 물이 흘러 넘치면, 그 물동이 안에 있는 물이나, 흘러 넘친 물이나 꼭 같은 것처럼, 이 관계도, 사랑이 흘러 넘쳐 성부의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넘친 사랑이 이 바로 성령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손에 꽃 한송이를 들고 보면, 거리에는 꽃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의 신비스러운 생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 꽃의 생명과 그 꽃의 모양, 또한 그 꽃의 향기는 비록 3가지가 다른 것이지만, 그 꽃은 셋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주의 생명이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사랑은, 꽃과 같이 아름답고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성령의 감화가 마치 꽃의 향기처럼, 우리 마음 안에서 향기를 가득히 풍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터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삼의 관계가 사랑으로써 뭉쳐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자신에게로 눈길을 돌려봅시다. 우리들도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인 것처럼, 우리 신자 모두가 사랑으로 봉사하고 계십니까? 또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됨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기심을 버리고, 가정 안에서 먼저 화목하며, 또한 우리 신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전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성삼의 사랑에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렵게 실행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랑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면서 베풀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자기를 낮추고 인내하면서, 조그만 희생을 아끼지 않을 때에 베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에 소홀한 사람이 큰 일을 다할 수 없듯이, 조그만 희생을 갖지 못하는 자가 결코 사랑을 실천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형제에게 조그마한 희생을 실천함으로써,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27          삼위 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해) 아버지의 것은 내것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룩하여 주신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께 우리가 찬미와 감사의 영광을 특별히 바쳐야 될 날입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독생 성자를 보내 주셨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약성경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인류에게 점차적으로 당신 모습을 드러내 보이시다가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이 완전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일독하면,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을 압니다. 즉 성모 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던 가브리엘 대천사의 인사 말씀에서,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성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때와 타볼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변하시던 때에 일어났던 사건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교리가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더구나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마태28,19)고 하신 오늘 복음 말씀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더 한층 힘있게 세 위가 계시다는 신비를 우리의 이 미약한 머리로서는 도저히 다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옛날 아우구스띠노라는 유명한 성 학자는 삼위일체에 과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살아오다가 하루는 바닷가에 나가서 걷고 있었답니다. 이윽고 한 소년이 조개껍질로 모래사장에 파놓은 구멍에다 바닷물을 퍼 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성인은 하도 이상해서 “얘! 너 무얼 하고 있니?”하고 물었더니 “제가 이 조개껍질로 이 바다의 물을 다 넣는다고 해도 당신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퉁명스레 대답을 하고 어딘가 사라지더랍니다. 그 때서야 성인은 이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굳게 믿고 따라야 한다는 진리를 깊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리 시간에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이나 크로바니 전기 등으로 설명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훗날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직접 뵈옵고 성삼께 관하여 보다 더 많은 것을 깊이 알게 될 것을 기대하며 커다란 희망과 기쁨 속에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되겠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요, 기초이며, 중심이기도 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성자께서는 우리들 대신 속죄함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약속해 주셨고 성령께서는 성화의 은총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수월히 얻게 해 주십니다. 이러하건대 어찌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삼께 대한 사랑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겨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삼께 대한 신앙생활을 보다 열성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성삼께 깊이 감사 드리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도니 것을 창조주이신 성부께 감사 드리고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수고 수난하시며 죽으신 성자께 감사 드리고 유혹과 시련이 있을 적에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야 되겠습니다.




다음은 성삼께 대한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 하겠습니다. 「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픈 때나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과 흠숭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송’과 미사 때 외우는 ‘대영광송’을 열심히 바쳐야 됨은 물론, 십자성호를 정성껏 긋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는 정신을 가다듬고 정중히 할 것이요, 파리를 쫓듯이 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천천히, 되도록, 크게 정성어린 마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해야 합니다.




이같이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 세 위가 계심을 믿고 자기의 믿음을 선언하는 아주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십자성호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쉬운 기도이면서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우리는 성삼의 이름으로 온갖 은총과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삼의 이름으로 성세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사제는 바로 이 거룩한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사람의 죄를 사해 줍니다.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 때, 그리고 병자성사 때에도 성삼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빕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기도를 바치기 전에나 후에나, 아침에 일어날 때나 취침 전에나, 식사 전에나 후에나, 성당에 들어와서나 나갈 때에 십자성호를 언제나 긋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성호를 정성되이 자주 그으며 천주 성삼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28                           삼위일체 대축


신은근 신부






삼위일체는 한 분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을 뜻한다. 세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단순한 교리건만 늘 꼬리표가 붙는다. 삼위일체란 신비에 속한다. 하느님에 대해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 대충 이런 말들이다. 정말 인간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일까. 신비에 속한다면 왜 공적축일로 정해놓고 의미를 되새기려는 것일까.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완전하게 아는 자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다 자식을 낳고 살면서 비로소 부모의 심정을 깨치게 된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축복으로 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에는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데 무슨 이론이 절대적이겠는가. 그분들이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대해주셨던가. 이것을 깨닫고 느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도 이론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는 그저 하느님께서 사시는 모습(존재 양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이 모습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이것을 깨닫는 일이다.




삼위일체 교리 안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세 위이신 하느님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분은 높고 저 분은 낮다는 그런 삶이 아니라 서로 똑같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것이다. 일치가 얼마나 심오하던지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세상은 물질화 되고 있다. 물질을 가운데 두고 일치한다. 사랑을 중시하고 신의 때문에 일치하던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결과는 불신이다. 물질이 떠나면 마음도 떠나버린다. 삭막하고 단절된 관계가 된다. 그러니 위안을 찾는 쪽은 본능이다. 쾌락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돌아갈 본래의 위치는 사랑의 관계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는 일치에서 시작된다.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셨지만 일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우리의 가정에는 삼위일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모와 자녀사이에, 부부 사이에 일치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버지는 야훼의 역할을, 어머니는 예수님의 역할을, 자녀들은 성령의 역할로서 희망과 기쁨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전에는 너무나 우리를 간섭하시고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으로만 오인되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 그리고 그 일치 속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가족 안에서 일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축일의 메시지인 것이다.












29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최상범 신부




많은 경우 청소년 문제의 원인은 청소년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문제를 갖고 있고 균형잡히지 못한 삶의 태도를 가진 어른들과 함께 사는 청소년들은 사실상 어른들의 문제를 마치 거울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왜 적응하지 못하는가? 왜 문제를 일으키는가?하는 질문을 하다보면 그것은 그 청소년을 돌보고 교육하고 키우는 어른들과 연결돼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지시하고 요구하고 주문하는 분위기이기에 그들은 대화의 빈곤과 제대로 수용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는 오늘 청소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시는 아버지,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아들, 그리고 서로 한 몸이 되도록 일치시켜주고 그 일치에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영의 신비는 청소년과 맞물려 있는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통한 균형잡히고 건강한 문제해결은 가정의 복음화를 현실안에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성가정을 이루려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대학별로 또 동아리 활동이 가능한 중고등학교 별로 복음화에 대한 활동을 더욱 촉진시켜서 신앙에 갈증을 느끼는 학생들이 보다 쉽게 신앙에 다가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일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교육자들의 관심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면에서 전구교구 중등교육자회의 재기가 요청됩니다. 얼마전 어떤 변호사 한 분이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들이 있다면 법률적인 면에서 자문과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음악, 미술, 교육, 심리, 매스콤, 레크리에이션, 상담 등 각계 각층의 능력과 지식을 갖춘 신앙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기획과 협의에 물심양면으로 관심을 가질 때 교회내의 청소년 문화가 보다 더 복음적인 방향으로 촉진돼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일치안에 청소년에 대한 개인개인의 관심과 사랑과 경험을 합쳐서 보다 더 복음화되어 나가는 교구 공동체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30                 삼위일체 대축일 :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4세기말 정립된 교리 :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또한 하루에도 수 없이 여러 번 성호경과 영광송으로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드린다. 그러나 한 분이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내적 신비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해본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 계시며, 이 위격들은 선후(先後)나 높고 낮음이 없이 같은 신성(神性)을 지닌다는 것이 4세기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의 주요 내용이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신약성서에 명시된 이 신비를 주로 세례 때 고백함으로써 신앙생활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된 ‘가톨릭 교회교리서’는 이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261항)라고 강조하면서, 오직 하느님만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신앙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다'(266항)고 이 교리를 요약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신비를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이기도 한 동시에,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드러내는 신비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열어 보이고 기꺼이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고, 지극히 사랑해주는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성부,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 교회와 세상을 은총으로 이끌어가는 협조자로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는 성령의 세 위격이, 구세사 안에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방신학자 세군도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는 사랑으로 일치,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성삼위의 신비를 우리도 엮시 매일의 삶 속에서 생활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신강림 대축일 후 첫 주일에 기념한다, 이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삼위일체 신비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로 삼도록 권고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시듯이 우리도 삼위의 사랑을 이웃과 함에 나누도록 초대하고 있다












31                   삼위일체 대축일 :   삼위일체의 신비






▲ 성서 안에 감추어진 삼위일체 신비 = 구세주로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삼위일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신 하느님의 존재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고 제자를에게 가르쳤다. 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14,16-17)며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해 강조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의 신비를 추상적인 언어가 아닌 구체적인 계시의 말씀으로 풀이해 주었다.


 


▲ 교부들의 비유 =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많은 이단들이 발생하자, 교부들은 여러 비유를 이용해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태양’ , ’새 잎 클로버’ , ‘정삼각형’이다.


  “태양은 불꽃과 빛 그리고 열로 구성돼 있다. 이 셋은 서로 각자 존재하고 고유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태양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분되는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나, 한 분


이시다. “


“세 변의 꼭지점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듯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 고유하게 계시면서, 완전한 일치를 통해 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신다.”


 


▲ 이콘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 신약성서에서는 삼위일체를 표현할 때, 성부를 ‘아버지’로, 성자를 ’아들’로, 성령을 ‘비둘기’로 묘사하고 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그처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구약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콘 그림도 사뭇 다르다.


  루블료프가 그린 구약의 삼위일체 이콘을 보면, 성 삼위가 같은 천주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똑같이 푸른 빛 옷을 입고 계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배경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해 성삼위가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처럼 영혼과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닌, 순수한 영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삼위일체를 천사의 모습으로 그렸다.


신학자들은, 이런 교부들의 비유는 전통적으로 존중돼야 하겠으나, 삼위일체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한 비유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성서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찾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서는 복되신 성삼위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삼위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 가톨릭 기도문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신비 = 삼위일체 신앙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제대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호경’이다. 십자가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부르는 기도인 성호경은, 천주 성삼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 교회는 초세기부터 ‘사도신경’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선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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