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사순 제 5주일






        1. 김정진 신부(가)/2                  2. 김광식 신부(가)/3


        3. 강길웅 신부(가)/6                  4. 변희선 신부(가)/8


        5. 김현준 신부(가)/9                  6. 도현우 신부(가)/11


        7. 권혁시 부제(가)/12                 8.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14


        7.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17           9. 라자로야, 나오너라/17


        11. 최인호 작가/19                    12. 무덤을 열다/20


        


1.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드라마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전 복음 성서를 일별 해보면 예수님이 세 번 죽은 사람을 소생케 해 주신 것을 압니다. 즉 과부의 아들과 백부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라자로의 소생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이면에는 지극히 큰 교훈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고 생사 문제에 관하여 훨씬 능가하신 분이시란 점을 뚜렷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인간 사회에 커다란 비극이요 죄악의 벌이요 모든 것을 종식시키고 종말을 고하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이란 것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오늘 이 같은 죽음에서 라자로라는 한 인간을 되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란 가장 비참하고 죄악의 벌인 구렁텅이에서 인간을 구출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1,25) 하고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요즈음 사순절에는 우리 모두 영신상으로 재생하는 시기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죄악과 악습에 죽고 예수님을 따라 성령 안에서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죽어야만 소생이라는 새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악이란 무덤에 묻혀야 합니다. 또한 이기심, 사리사욕, 탐욕, 물질욕, 명예욕 등 자기 중심의 생활양식의 무덤에 단단히 묻혀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소생할 수 있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죄악에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우리 죄악을 참회하고 회개하며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같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육체적인 것에서 마음을 돌려 영신적인 것으로 마음을 쏟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물에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는 것보다 천상의 것과 신앙 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경이야말로 곧 우리의 정신적인 재산이며 소생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부활시키시기 전에 당신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관하여 말씀하셨고 마르타로부터 신앙의 고백을 받았습니다. 마르타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요한 11,27) 라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거나 어떤 병을 고쳐 주시거나 할 적마다 언제든지 믿음을 요구하시며 당신의 혜택이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보셨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실 적에도(마태 15,28),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자가 12년간이나 하혈증으로 앓던 병이 날 적에도(마르코 5,34) 그들의 믿음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다운 믿음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과 생명을 줍니다. 죽은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십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생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사순절을 통해서 점차로 굳세어지고 깊어지지 않는다면 라자로의 부활이든 예수님의 부활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부활이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의 정신을 따라 죄악을 참회하지 않고 극기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순절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도 허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죄악으로 인해서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도록 예수님께 열심으로 기도 바칩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죄악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부활절 계명을 지킴으로써, 즉 판공성사를 열심히 봄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도록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신생활의 쇄신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가 죄악으로 말미암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이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2.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김광식 신부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적은 없으십니까? 인간은 누구나 죽은 사람 앞에서는 으레 너그럽고 관대합니다. 아마도 죽은 자는 이 이상 우리를 못살게 굴거나 손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사이가 나빴을지라도 비록 악인이었을지라도 죽은 다음에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해 줄 것을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이나마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어 있음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우리와 친분이 두터웠다거나 평소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사람이라면 그 슬픔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고 머지않아 내 차례가 온다는 것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한편 인간은 죽음에 대해 조금씩은 공포를 갖고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지금 당장 죽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두렵고 어떻게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한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사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영생에로의 첫 발을 디뎌 놓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생에로의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영벌을 받는 시작이 될까 두려워서 입니다. 신념 없는 삶이, 신앙 없는 삶이 바로 죽음을 무섭게 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 저는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사회적으로도 저명한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주의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을 너무 믿었던 탓인지 신앙 갖기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도 비참하여 아직도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그는 죽는 순간 평상시에 갖고 있던 그의 고상하고 덕망 있는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안 죽어! 내가 왜 죽어!” 하며 눈을 크게 뜨고 큰 소리로 괴롭게 울부짖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념 없는 삶의, 신앙 없는 삶의 최후라고 생각됩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저는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 중인 어는 사형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신문지상을 통하여 공개된 포악 무도한 살인자였으므로 누구 하나 그와 접촉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서 성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부터는 그의 생활은 놀랄 만큼 변화되어 갔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언제 죽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자기 죄의 대가를 달게 받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몇 번이나 거듭해서 저는 받았습니다.




또한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도를 알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고 하며 비록 교도소에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결국 교수대위에 서게 되었고 죽는 순간에도 영생을 얻는다는 확신의 미소를 띠며 성가를 크게 불러 주님을 찬양하면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교도소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사회에서 버림받은 죄인이었지만 참된 신앙을 가짐으로써 죽음을 통해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앞에서 말한 저명인사의 죽음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죄인인 사형수의 죽음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죄에서 해방시켰음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바로 성세성사로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된 우리들이 죄에서 부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부활하기 위해서는 마르타와 같은 신앙고백 즉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요구됩니다.




라자로가 죽은 후 그녀의 오빠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으라고 마르타에게 요청하신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자는 결코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덕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만일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한 마르타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와 언제나 함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혹시 하느님을 선택함으로써 그 외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세속의 재물․명예․권력에만 온갖 신경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하느님보다는 세속 사물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죄악 속에 죽게 될 것  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시 죄악 속에 죽어 간다면 사랑하는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듯이 하느님의 아들딸들인 우리의 죽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생활해야겠습니까? 구원의 시기,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인 요즈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겠습니까? 같은 형제들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세속 사물에만 신경을 써야되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성세성사를 받을 때 말한 신앙고백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특히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인 만큼 극기와 보속으로 우리의 죽음을 잘 예비하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희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여 다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누리도록 합시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3.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죽은 자여, 일어나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37,12b-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리라)


제2독서 로마 8,8-11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복 음 요한 11,1-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죽은 라자로에게 외치신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무덤 속에서 주님의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실 믿고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도 바로 끝 날에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으며 희망이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에 실려 나갈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 앞에 가셔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분에게만이 참된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허무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많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 가져 보는 공통된 두려움입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문을 통해서 인간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흙으로 가는가. 흙으로 가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인가. 이처럼 인류는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앞에 영원히 혼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걷혔습니다. ‘죽음’에 외치신 예수님의 목소리 앞에 허무는 사라졌으며 죽음 그 자체도 세력을 잃었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삶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죽어서도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심은, 당신이 장차 보여 주실 그 엄청난 사건인 부활을 암시해 줍니다. 썩어서 냄새가 났던 라자로가 다시 살아났듯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죽었다가 그처럼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인류를 죽음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뜻깊게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얼마나 큰 감격스런 외침입니까. 살아 생전의 모든 감격적인 사건을 합쳐 봐도 부활의 감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에서의 부활은 전 생애를 보상해 주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구약의 경우에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게 되리라는 믿음은 크게 발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실만이 중요했으며, ‘지금, 여기서’ 잘먹고 잘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이나 시련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고통은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를 일시에 전도시키셨습니다.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직접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잘사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못 먹고 못사는 사람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럼 누가 과연 잘사는 것이냐. 부활의 새벽을 차지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우리는 그래서 살아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영광을 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보았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죽은 오빠가 살아나는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뭘 믿느냐.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길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믿으면서도 술에 묶여진 사람이 있고 화투에 갇힌 사람이 있으며 춤바람에 탈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탐욕과 쾌락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사치나 허영, 오만함과 불친절이라는 흙 속에 묻힌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육신의 두 눈은 멀쩡하게 떠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죄중에 빠진 우리 자신이 무덤 밖으로 뛰어 나와야 합니다. 얽어매고 있는 끈을 용기있게 풀고 나와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금년 사순절에 어떤 자매가 저를 찾아와서는 “뭘 주저하고 있느냐. 빨리 나오너라.”하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이 자매 는 몇 달 동안 주일 미사에도 나오지 않고 신앙을 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고해성사를 보고 나더니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앙이 죽은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을 준비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백번 부활하신다 해도 우리 자신이 부활의 새벽을 승리로 맞이하지 못 한다면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잘살았다는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사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4.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아버지의 눈물


변희선 신부




내가 눈물의 의미를 깊게 배운 것은 아버님의 눈물을 통해서다. 나에게 중요했었던 사건들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적어도 네번의 큰 눈물을 흘리셨다. 물론 아버지의 나를 위한 눈물은 더 많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첫번째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말기에 왼손을 크게 다쳤을 때였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다친 나의 손을 본 아버지는 며칠 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아버지도 아주 어릴 때, 당신의 오른손을 심하게 다치셨기 때문에, 특별히 나에게 더욱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대하여 요사이에야 깊게 동감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초등학교를 마친 내가 서울의 혜화동에 있는 성신중학교(소신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했을 때였다. 시험을 치르기 전날 예비소집 때에 방학동안이 아니면 부모님도 못보고, 새벽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해야한다는 교장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차라리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나로서는, 입학시험의 낙방이 아주 슬픈 일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이러한 묘한 마음을 잘 모르시는 아버지는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 석자가 안보이자 끝내 펑펑 우셨다. 그러니 철부지였던 내가 아버지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근처의 식당에서 우족탕을 드시면서도 나의 낙방을 아쉬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새겨져있다.




세 번째는, 오랫동안 여러모로 번민하고 망설이던 내가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던 날이었다.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자, 『한번 집을 떠나서 출가했으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말아라』 하셨다. 그 순간 아버지의 두 눈은 눈물로 가득하였다. 나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서 얼른 집을 나섰다.


 


마지막은, 아버지의 임종 때였다. 하루 종일 우리 가족들을 쳐다보시던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과장된 표현으로)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 결국 아버지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서 형님이 그분의 눈을 편하게 해드렸다




요즈음 나는 위에서 말한 아버지의 눈물들이 모두 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오래된 대중가요에서 「사랑은․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하고 있음도 동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눈물은 인간의 마음(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오늘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도 눈물을 흘리신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우선 그분이 죄 이외에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연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사랑과 감정의 소유자임을 입증해준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다쳐서 고통받고 있을 때에, 내가 시험에 낙방했을 때에, 내가 집을 떠나 어려운 수도생활로 들어갈 때에, 그리고 지상의 삶에서 서로 헤어질 때에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도 당신의 친구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 역시 우셨다. 그리고 얼마 후면 당신 스스로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예감하시고 슬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께서 우리 인간들의 고뇌와 아픔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히 인간적 감정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눈물은, 당신을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요한 11,25) 하느님 구원의 메시지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땀은 우리 인간 구원을 위한 당신의 한없는 사랑의 처절한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오늘도 우리의 죄와 고통과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사랑하올 주님! 비천하고 미약한 저희 죄인들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5.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김현준 신부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세가지 일을 해야 참 사람이다. 아들을 낳아야 하고, 책을 내야하고 나무를 심어야 사람으로 할 일을 한 것이다.”


  이 격언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이 세상에서 무얼 남긴다는 데에 기준을 둔, 그래서 사람으로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격언인 듯싶다. 아들, 책, 나무 이 세 가지가 연결되는 공통점은 오래 남는다는 것, 따라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이며 ‘죽음과 부활’이 그 주제이다, 예수님과 라자로와의 관계는 오늘복음 안에서 매우 ‘돈독한’ 우정의 관계로 나타난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라는 마르타의 전갈을 받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돌에 맞을 위험을(요한 11, 8) 무릅쓰고, 라자로와의 우정으로 그를 찾아가신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 친구 라자로”라고 부르고, 그의 죽음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과 비통한 마음을 라자로에 대한 우정뿐 아니라 당신의 죽음도 눈앞에 두셨고, 또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대치시켜야 할 바로 그 죽음과 맞부딪치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그 죽음을 눈앞에 두신 처지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체험을 한두 번씩 갖고 있다. 나도 지난해와 올해 토, 6개월 동안에 3번이나 거푸, ‘돈독한’ 관계에 있던 사람의 죽음을 체험했다.


  나와 함께 살던 이 베드로보좌 신부의 갑작스런 교통사고에 따른 죽음, 나의 전임자셨고 옆 본당에 계셨던, 선교사로 42년 간 이 땅에서 봉사하시다 아침녘에 갑자기 돌아가신 임 요한 신부님, 같은 본당에서 같은 해에 나는 소신학교로, 당신은 대신학교로 입학하여, 같은 교구에서 사제생활을 하다, 과로로 쓰러진 황 요한 신부님의 죽음이 그러했다. 앞의 두 분은 내 손으로 염하고 입관했다, 특히 이 베드로 보좌 신부의 죽음 때에는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아, 하늘아!”, “하늘도 무심하지”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동터오는 새벽녘에 몸을 씻기고 닦고, 수단과 제의를 입히고 돌아와, 주일 새벽 미사를 드리러 제단으로 나올 때, “너는 제의를 입고 잠들었고, 나는 제의를 입고 너를 위한 미사를 드리고 있다니․..” 이 기막힌 현실에 죄인으로 면목 없고, 순서가 잘못된 생각만 들었다.


 


왜 하필 이 신부였을까? 이제 갓 서품 받고 일년밖에 안된, 첫 일터를 마지막 일터로 하고 떠나게 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레위기는 내게 이런 답을 주었다. 하느님께 바칠 제물의 조건은 ‘흠이 없는'(레위 22,21), ‘살아 있는'(레위 23,11), ‘일년 안된'(레위 9,3), 그리고 ‘쓸모 있는'(말라 1,14) 수송아지여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제물의 조건에 가장 적합한 제물이 이 베드로 신부가 아니었을까, 라자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듯. 사랑하는 오빠 라쟈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간청한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 이것을 믿느냐?” 하시며 라자로를 부활시키신다. “주께서 구원을 내리셨다”는 그의 이름 라자로(LAzARUS)에 걸맞는 부활의 은총을 베푸신다.




부활은 확신에 찬 믿음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활이란 단순히 죽을 생명이 언젠가 되살아나는 생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찬 우리의 믿음이며,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우리의 봉헌이며, 하느님만이 가능하다는 우리의 희망이며, 그래서 죽음을 넘어 내게 다가오는 현재이며, 또한 영원한 미래이다. 그러하기에 부활은 매일매일 잠자리에 드는 것이 죽음이고, 아침이 오면 다시 일어나 햇빛을 보고 감사하며, 밥상에 앉은 가족을 선물로 받고, 일터로 나감을 은총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봄이 온다. 4월이 온다. 4월은 산천 어디를 둘러봐도 만물이 살아 숨쉬는 생명의 달이며, 또한 부활이 함께 하는 달이다. 나와 함께. 생명과 부활의 신비를 살아가는 나무 한 그루쯤 심는, 잊지 못할 사람을 생각하며 책 한 권 낼 수 있는 부활을 춘비하면 좋겠다. 












6.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신성과 인성의 감미로운 결합


도현우 신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 바탕을 둔 고백이 아니라 성서에 근원을 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몹시 앓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서도 곧장 가지 않으시고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 11,4)라는 말씀만 하시고는 이틀동안 지체하셨습니다. 신성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아셨을 터인데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셨나 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유있어 보이는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엎드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울부짖을 때 예수님께서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던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도 장례식장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이별을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이 높아질 것을 알고는 계셨지만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고통을 어찌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시고 곧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어서 드러나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빨리 바꾸어주고 싶었던 바람이 이 외침 속에 간절히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인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기에 이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때 그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이 과제 앞에서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죽음의 세력과의 처절한 투쟁이 못내 안타까워 우셨던 예수님은 사람이셨던 하느님이십니다.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게 될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의 아픔을 아시기에 더욱 비통해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그분은 우리를 보며 그저 안타까워만 하시는 ‘높으신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용감하게 먼저 가셨으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가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벗’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본성, 곧 하느님으로서 누리시던 그 모든 것을 우리들도 누릴 수 있게 하시려고 당신을 낮추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방법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알려주시고 증거하셨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따스하고 강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7.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귀한 진주


권혁시 부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이다” 하시며 당신을 충실히 따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여 영원한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영광의 날도 두 주일이 남은 사순절의 종반에 접어들었습니다.




해마다 지내는 사순절은 교회 전례상의 형식적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그분에 대해 미지근하고 게으른 나의 신앙생활에서 탈피하여 광명의 빛을 맞을 준비를 하고 그분의 고통을 묵상하고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희망이 없다면 우리 신앙의 노력은 헛된 것이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우리의 목적이요 목표이기에 모든 신앙은 부활과 영생에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을 더욱 거룩하게 복음의 정신에 입각하여 내 마음속에 하느님의 주도권을 확립하여 고난의 길로 나아가시는 주님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날 대왕이 감옥소의 수인을 찾아가서 너무나 여윈 청년을 보고 “너는 어찌하여 삼 개월 동안에 이렇게도 얼굴이 못쓰게 되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대왕이여! 삼 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죽는 날을 기다리기란 정말 너무나 괴롭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왕은 살 방법을 하나 가르쳐 주겠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신하를 시켜 기름을 그릇에 넘치도록 가득 담아오게 한 후 기름을 조금도 쏟지 않고 도성 내의 모든 시가를 돌아 왕궁까지 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마지막 길이니 만치 받아들고 경관의 감시 하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날은 그 도성의 장날로 사람들이 우굴거려 극히 곤란함에도 조금도 축내지 않고 잘 돌아왔습니다. 이때 왕은 청년에게 “오늘은 장날인데 어떤 것이 많더냐? 어느 거리에 큰 상점이 많더냐? 어떤 사람들이 시장에 모였더냐?” 하며 여러 가지의 물음을 연발했으나 청년은 매 번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매 왕은 노발대발하며 “온 시가지를 돌았다는 말은 거짓말이구나! 온 시가지를 다 돌았다면서 아무 것도 모를 법이 어디 있느냐!” 하며 고함을 쳤습니다.




청년은 빌면서 “저는 목숨을 살릴 길이 이 기름 그릇에 있기 때문에 전심전력을 다해 이 기름만 보면서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대왕은 “오냐, 네 말이 옳다. 이제는 죽지 않고 살리라. 생명은 그렇듯 귀하니라” 고 했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이야기가 좀 길었습니다만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청년은 결국에는 죽어 없어질 잠시 지나가는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그런 어려운 일을 하는데 있어 그는 자기 생명이 곧 기름 그릇에 달려 있다는 생각 외에는 좌우도 돌아 볼 겨를이 없이 오로지 기름만 내려다보면서 걸었습니다. 대왕의 말대로 생명은 과연 귀중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동요하지 않고 주님께만 향하는 종점을 맞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현세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안식처가 아니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대왕이 청년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길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 길만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현세의 배금주의, 관료주의, 쾌락주의 등은 우리를 질식케 합니다. 청년이 시장에서 여러 가지의 유혹을 받았던 거처럼 우리도 세상의 온갖 것들에 유혹을 받으나 우리의 마음은 요지부동하게 하느님께만 향해야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지를 송두리째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는 각자의 권리까지 포함됩니다. 권능을 누리는 자도 세상을 수인(囚人)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감옥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생활은 달라질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느님을 위해 가정이나 사회나 정계에서 이웃 형제에게 봉사하면서 얼마나 자주 무엇을 포기해야됩니까!




이 포기는 “어느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성서에서도 말하듯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숨은 보배가 묻힌 밭을, 귀한 진주”를 차지해야 합니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처럼 수고, 수난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의 영광은 산꼭대기에 있기에 거기를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또 성실하게 그분을 따르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현세의 생활에서 오는 모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8.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우리는 빠스카의 정점인 부활에로 향한 사순절 여정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습니다. 심연의 고통과 삶의 고뇌, 그리고 아픔과 비극을 가져온 아담의 원죄에 대하여 우리는 사순 첫 주일에 묵상했습니다. 고독한 유배의 땅에 사는 인간은, 그러나 하느님께 새로운 소명을 받으며 미래의 땅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하며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제2주일의 묵상 내용입니다.




노예살이에 시달렸던 유다인들이 그것을 박차고 갈대 바다를 건넜지만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울부짖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바위를 쳐 갈증을 푸는 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제3주일의 1독서 내용입니다.




그리고 지난 4주일에는 다윗의 선발과 함께 빛의 의미를 묵상했고, 그 빛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우리가 체험했습니다. 죄, 믿음, 물, 빛, 이 모든 주제들은 구원사의 핵심을 일깨워주는 표현들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을 멀리 떠난 인간이, 스스로 개척하며 되찾아가야 할 힘든 여정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땅히 거쳐야 할 당위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순 제5주일의 주제는 생명의 회복, 곧 부활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물리적 또는 자연적 삶을 넘어선 그 어떤 영원성을 암시한 하느님과의 일치,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구원이란 바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가는 행위일 뿐 아니라 보속과 속죄를 통해 처음의 상태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창출해내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구원은 곧 새로운 창조입니다.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바빌론의 침공(기원전 609년-587년)에 의해 멸망되고, 성전이 무너지며 왕과 제관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멸망과 폐허, 이 암담한 현실이 바로 에제키엘 예언자가 살던 시대입니다. 예언자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하고 성전에서 행했던 경신례의 장엄성, 그것이 하느님 영광의 반영일진대 그것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엄연한 현실, 바빌론에서의 수모, 실망, 좌절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포로와 유배의 삶은 곧 죽음입니다. 뼈가죽만 남은 상태에서 예언자는 그 어떤 꿈을 보고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 그리고 부활입니다. 예언자는 엄위하신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앙상한 마른 뼈들이 생기를 찾고 살아 움직인다는 소식입니다. 노예가 자유를 꿈꿀 수 있고, 나라를 빼앗긴 유다가 해방을 그릴 수 있고 무덤에 묻힌 뼈들이 생명에의 회귀를 바랄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희망의 이 메시지는 바로 부활의 메시지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결정적 구원을 앞당겨 체험케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통과 죽음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하느님께서 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케 할 힘을 꼭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그 때문에 자유와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선언했습니다. 죽음과 유배 중에 부활과 해방을 선포한 예언자의 정신은 바로 짜증스럽고 한심한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와 힘을 줍니다.




여․야 정치인들이 인간의 가치를 혼동하고 허튼 일을 하고 있을 때 숱한 젊은이들이 감옥에서, 수사 밀실에서, 학교에서, 광장에서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민주화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념과 다짐만이 우리에게 기쁜 내일을 보장해 줍니다. 예언자는 어두운 현실을 이길 힘을 예고한 사람이며, 하느님은 그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육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적 진리를 기초로 한 삶의 원리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영원한 삶을 선언하셨으며 이것을 예수를 통해 실현하셨습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이 힘을 성령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세례를 통해 의화(義化)시키며, 희망을 통해 부활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며 십자가 구원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상태에서 “아직 아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 그 중간에서 신앙인은 기쁨을 확인하면서도 긴장 가운데에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삶을 통해 교훈을 얻고, 미래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체험함으로써 희망과 긍지를 지니는 것,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나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며 순간 순간이나마 하늘의 기쁨을 체득케 하는 그분이 바로 성령임을 우리는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은 라자로를 부활케 하신 예수의 기적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복음 서두에서 요한은 창조를 연상케 하여 그리스도가 바로 새로운 창조주, 구원자임을 암시하며 구원의 역사가 바로 빛과 어두움, 영육의 투쟁임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특히 창조의 일곱 단계를 연상하면서, 예수의 일정과 행적을 일곱으로 요약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표징, 곧 일곱 가지의 기적(① 가나 기적(2,1-12) ② 고관의 아들 치유(4,43-54) ③ 베짜타못의 중풍 병자치유(5,1-9) ④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6,1-15) ⑤ 물위를 걸으신 기적(6,16-21) ⑥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9,1-34) ⑦ 라자로의 부활(11,1-45)) 을 통하여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그것은 단계적인 것으로 생명을 주는, 라자로의 부활로 장엄하게 끝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룩할 승리의 부활을 앞당겨 체험케 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미래를 보증한 확인조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생명에로의 단순한 회귀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과 죽음을 너머 영원한 미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며 그분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며 이를 통해 가능해진 그 어떤 비약을 뜻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초월적 삶에로의 접합이며, 전이입니다.




사랑의 체험, 세례를 통한 체험, 믿음을 통한 비약, 순교를 가능케 하는 결단, 이 모든 것이 바로 성령의 힘과 영원한 가치를 확인해 주는 요소들입니다.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불안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씨앗,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성령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는 삶의 양식을 우리 모두 깨닫게 하시며 또한 그 삶의 증거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9.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리게 하고 마음을 가장 모질게 도려내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요, 그이와의 갈림이다. 라자로를 무척 사랑하신 까닭에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그지없는 눈물을 자아내고 비통에 잠기게 하였다. 이 고통은 아마 십자가의 고통과 버금갔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애써 지은 것,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 작품이 망가지거나 허사가 되었을 때, 예컨대 부모나 자식을 잃었을 때,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전지와 전능으로 빚은 영혼이 죽으면 정말 달랠 길 없는 고통에 젖어 드신다. 때문에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은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약속하신 하느님의 영광도 죽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 한다. 살자면 그야말로 사나 죽으나 그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 때문에 태생(胎生)소경도 세상을 보고 죽은 라자로도 죽음에서 되살아났다. 이 믿음 하나로 이루어진 기적의 이야기는 복음서에 숱하다. 믿는 조건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이 가능했다면, 믿음이 없을 때 그 전능은 묶이고 사장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수난이요 죽음이다. 이래도 우리는 무관심할 것인가? 엄마에게 전적으로 내 맡겨진 아기 같은 조건 없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주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듯이 우리도 함께 살게 하실 것이다.












10.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야, 나오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의 죽음은 그 슬픔이 더 크고 오래 지속된다,




언젠가 뉴욕 외곽에 있는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다. 다양한 묘비들이 있었다. 그 중 나의 시선을 끈 것은 1년을 살다간 아기의 묘비였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가야, 잘 가거라. 천국에서 만나자.” 너무나 인상적인 묘비였다.


젊은 부부가 그 아이를 묻고 얼마나 울었을까?




사람은 죽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서서히 썩어간다. 진시왕의 무덤이든, 이름 모를 어느 병사의 초라한 무덤이든 그 안에 들어있는 시신은 똑같이 썩어 흙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나마 공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님의 친구 라자로


라자로는 예수님의 친구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3k쯤 떨어진 베다니아라는 곳에서 두 누이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던가 보다.


예수님은 자주 그곳에 들러 쉬어 가시곤 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베다니아의 라자로의 집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자주 오시어 편히 쉬어 가실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전도를 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이 왔다. 예수님께서 며칠이 지난 뒤 베다니아로 가보니 이미 라자로는 죽어있었다.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




한국은 사람이 죽으면 3일장이나 5일장을 지내지만 중동지역은 하루만에 묻어버린다.


왜냐하면 너무 더워서 빨리 부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장례문화가 더 좋은지, 그들의 장례문화가 더 나은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단 한가지 한국도 여름엔 시신이 쉽게 썩기 때문에 냄새가 진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데도 문상객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3일장이나 5일장을 지내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시신을 냉동실에 보존한다면 예외지만 말이다.




어쩠거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누이동생들은 너무 슬퍼서 울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성서는 전한다. 그 분은 정이 많으신,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시다. 지금도 우리의 눈물 앞에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장례를 치른 지 나흘이나 지난 무덤 앞에서 명령하셨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 중의 기적이다. 죽었던 사람이 얼굴은 수건으로 감기고 손밭은 베로 묶인 채 무덤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복음의 메시지


라자로는 잠을 자고 있던 사람처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무덤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 것은 아니다. 또 죽어서 묻혔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를 잠시 살려주셨다.


그가 영원히 사는 것은 공심판 때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믿는 사람들도 모두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부활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해답을 주셨다. 사람이 죽더라도 주님을 믿은 사람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고, 즉 인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죽어도 아주 죽은 것이 아니다. 마치 겨울나무, 겨울풀 같다고나 할까?


 


겨울에 북풍 한설이 몰아치면 대부분의 나무들과 풀들은 죽은 것 같다. 잔디밭에도 죽음이 넘치는 듯하다. 그러나 생명은 살아있다. 언젠가 봄볕이 따사로워지면 생명은 움튼다. 어떤 나무는 수백년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굳게 믿어야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히브 11,6) 그렇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고 우리도 고백해야한다.




죽어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사람의 무덤 앞에서 살아나을 것이라며 믿으라고 했을 때,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상식의 차원이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상식을 넘는 것이고 신비로운 것이다.












11.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베드로의 눈물


최인호 베드로/작가




엘 그레코(El Greco)는 스페인이 낳은 화가입니다. 원래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일찍부터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로마에서 수학한 후 나중에는 톨레도에 정착하면서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교화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고 색채와 명암의 교묘한 대비로 인해 모든 화면에는 엘 그레코 특유의 황홀한 흥분 상태가 감도는 독특한 그림입니다. 수많은 빼어난 종교화를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베드로의 눈물’(1605~1610년 제작)이란 작품은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왼쪽 팔목에는 주님으로부터 약속받은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건 채 두 손을 꼭 마주잡고 허공을 우러러보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은 엘 그레코 특유의 길쭉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흰 머리칼과 얼굴 가득한 턱수염, 완강한 근육을 가진 어부 출신의 베드로는 알 수 없는 허공의 한 점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매일 새벽 첫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하고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항상 수건 한 장을 가슴에 넣고 다니며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뉘우쳐져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울었으므로 베드로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서 항상 짓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엘 그레코가 그린 ‘베드로의 눈물’이란 작품이 걸작으로 손꼽힌 것도 알 수 없는 허공을 우러러보며 울고 있는 베드로의 비통한 표정이 초자연적인 영성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던 것은 새벽닭이 운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주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으므로”(루가 22,61) 비로소 주님의 눈과 마주친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베드로의 눈물에 앞서 또 한 사람의 눈물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눈물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사랑하시던 마리아 자매와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신 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물. 우리는 울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우리는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나는 라자로처럼 비참하고 절망적일 때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흐느껴 웁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문밖에서 울고 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이제 그만 나오너라.”


베드로가 주님의 으뜸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눈물을 엘 그레코의 그림처럼 ‘베드로의 눈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 눈에도 주님처럼 눈물이 넘쳐흐르게 하소서.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베드로처럼 흐느껴 울도록 하소서. 눈물로 우리는 영혼을 정화시키어 하느님의 영광 속에 죽음의 동굴을 벗어나게 하소서.












12             사순절 제 5주일   요한 11,1-45 (가)  무덤을 열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살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나,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어떻게 흔히들 믿고 있느냐 하면, 이렇게 살아난다는 것은 세상 끝날 때에나 가능하다고 믿고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이에 대하여 좋은 묵상 주제가 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라자로의 부활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무덤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내어 고국에 돌아가게 한다는 야훼의 말씀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에 그런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제 2독서의 사도 바울로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도 같은 내용입니다.


우선 복음을 보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마지막날 부활 때가 아니라 잠시 후에 살아났습니다.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서도 같은 내용입니다. 에제키엘은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데, “나 이제”라는 말을 씁니다. 이 이야기는 에제키엘이 공동묘지에 서서 한 것이 아니라, 마른 뼈들이 널린 계곡 속에서 환시를 보고 난 체험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죽음은 생명이 중단되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중단되면 숨이 없어지고, 움직임이 정지되며,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희망이 없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화냄도 사라지며, 절망과 암흑과 좌절과 포기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차거워 지고, 곁국 메말러 지다가 스러져 버립니다.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혼은 죽어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봅니다. 동물처럼 먹고 자고 꿈틀거리지만, 혼과 숨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딩도 솟고, 자가용도 늘었고, 번들번들한 옷들로 차려입고, 바쁘게 움직이나 그 안에는 건전한 얼이 사라졌고, 도의나, 도덕도 땅속에 묻혔고 인정과 우정도 메말랐으며, 살벌한 탐욕의 번쩍이는 눈과 ,약자를 괴롭히는 무쇠주먹과, 가난한 이들을 등치는 불의만이 있다면 그 사회는 죽은 무덤입니다. 이 무덤은 조용하며, 아무도 반대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올바른 진리의 빛은 꺼지고, 의로운 분노도 사그라진 침묵과 어둠과 고요 함 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이 소리는 무덤을 여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입니다. 죽어 썩은 냄새가 나는 무덤에 대고 질러대는 노도와 같은 소리입니다. 그 어둠에서, 그 침묵에서, 고요함에서 떨쳐 나오라는 생명의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묶인 손발과 수건으로 감긴 얼굴을 풀어주어 가게하는 해방과 치유의 소리입니다.




바로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인들에게 혼을 불어넣고, 무덤을 열어 해방의 소식을 전하는 에제키엘서의 말씀도 같은 소리입니다.




무덤을 열고, 생명을 살리고, 어둠을 물리치고, 묶인 것을 풀어주고, 진실의 입을 열게하는 것은 무덤과 죽음과 어둠과 억압과 거짓의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단순한 살리심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야 할 일이 당장 일어났기에, 단순한 일이 아니었으며, 라자로라는 사람의 부활도 단순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라자로란 말은 “어쩔 수 없는,” “희망 없는” 그렇기에 “하느님이 도우신”이란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즉시 관계기관 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마련합니다. 대책회의의 결론은 이렇게 났습니다. 예수를 그대로 두면,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을 짓밟으리라는 예견을 하고, 대사제 가이파는 이렇게 결정을 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시 수배령이 내려져 예수는 더 이상 유다 지방에서 드러나지 않게 다니시고, 광야 근처로 숨으시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라자로의 부활에 이어서 45절부터 57절까지 이 내용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신비를 보게됩니다. 무덤을 열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 이제 무덤의 죽음을 이기기 위하여 무덤으로 가시는 신비입니다. 즉 스스로 자원하신 죽음은 강요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순절의 정점에 도달하여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같이 참여하는 성주간이 되겠으며, 새로운 주간의 시작인 그 다음 주일에는 부활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에서 부활하시는 부활축일을 체험하시게 됩니다. 사순절 시작과 함께 당부하였던 가난한 이들과 가진 바를 나누는 헌금봉헌은 다음 주에 있겠습니다. 준비하여 봉헌토록 하십시요.


 


이번 주간의 묵상주제는 “우리는 어떻게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 부활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를 죽음의 그늘에서 나오시게 하시고, 묶인 것을 풀고,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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