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부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성소주일

 

부활 제 4주일






        1. 정진석 대주교(가)/ 2              2. 강길웅 신부(가)/3


        3. 이규철 신부(가)/5                  4. 김정진 신부(가)/6


        5. 최인호(가)/8                 6. 착한 목자이신(가)/9


        7. 나는 양의 문(가)/11         


1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사제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정진석 대주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제직과 봉헌생활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사제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부르심으로서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나누어 수행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늘 깨어 있으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여 성소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시야를 넓혀서 믿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우선적인 선택을 하도록 불림받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적 가치를 따라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살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간성의 상실을 포함하여 그 외의 많은 가치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신들 스스로 하느님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오늘날 전반적인 가치관의 부재(不在)와 정신적 방황 속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껏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내적으로도 영적(靈的)인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간혹 이 세상의 현세적인 목표만을 최우선시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제들은 자주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제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생활 속에서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있으며, 얼마나 성실히 사제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에게서 사제직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사제상은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하는 사제, 여러 성사의 집전을 통하여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치유하는 사제, 다른 사람들의 성화(聖化)와 구원를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사제, 가난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을 간직한 사제”입니다.


지난날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이제는 하느님의 품에 안긴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영육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여 이 시대에 교회와 겨레를 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성소는 빛나는 은총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4a.36~41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2독서 Ⅰ베드 2,20b~25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자이신 그분에게 돌아 왔습니다) 


복 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모든 부르심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비록 신부나 수녀가 되는 부르심이 아니라 해도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사람을 아무렇게나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을 적절하게 부르십니다. 예를 들어 누구는 바보로 태어나고 누구는 불구자로 태어납니다. 혹은 일찍 과부가 되기도 하고 또는 박해와 시련 속에 인생을 고달프게 걸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부르심도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존재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바로 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받는다 해도 참고 이겨나가는 데에 불리움을 받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이 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집안 일이 바쁠 때 부모는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힘들고 어려우니까 함께 거들라고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밥도 제 때에 못 먹고 잠도 제 때에 못 자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의 바로 그 희생이 부모에게는 큰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부름은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자녀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바로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는 자신의 세속적인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성소의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가난과 순명과 정결 속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길을 역행하는 고난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길이 저주받은 불행한 길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목자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고생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들에서 자주 밤을 새워야 하며 찬 비에 몸을 떨기도 하고 잃어버린 양이 있으면 며칠이고 밤낮으로 고생하며 찾아야 합니다. 늑대나 도적과도 싸워야 하며 병든 양을 찾아 치료도 해야 합니다. 목자는 실로 고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생이 많을수록 착한 목자가 되며 나쁜 목자는 고생을 안 합니다. 자기만 편하게 지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진정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흘리는 참된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소는 특히 빛나는 은총이며 하느님이 믿고 기대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떤 본당에서 레지오 단장까지 하는 열심한 자매가 있었는데 당신의 큰 딸이 수녀원에 간다고 하니까 딸을 집에 감금시켜 놓고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협박을 하며 말렸습니다. 본당 수녀님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니까 나중엔 성당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딸이 가고자 하는 수녀원에 찾아가서 대판 싸우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합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세속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찾아서 행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못먹고 못살아도 아버지의 말씀과 그 뜻 안에서 살려고 할 때 거기에 참 보람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지나갑니다.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만은 영원히 살아서 기쁨의 꽃을 피우고 보람의 열매를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신부나 수녀 되는 것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보다야 세속적으로 덜 재미가 있겠지만 그러나 하느님만이 주시는 참 기쁨과 행복은 더 크게 누리게 됩니다.




성소는 사실 별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별것도 아니면서 아주 위대하며, 아주 빛나는 은총이면서 또한 별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그랬습니다. 누구나 다 걸어갈 수 있는 길이면서 또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말이 이상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가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학벌도 없고 인품이나 인격도 없었으며 오히려 성미가 급하고 충동적이라 진득하니 뭘 성사시킬 수 있는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무식하고 거칠었으며 겁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모든 약점을 더 깊이 사랑하셔서 당신의 대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은총이 인간의 약함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간절하게 부르십니다. 당신의 목장에서 잠도 설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수고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부르십니다. 왜 부르십니까?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믿고 기대하시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Ⅰ베드 2,20).












3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나는 양의 문


이규철 신부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끊일 줄 모르고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파릇파릇 싱그럼을 되찾는 봄이 되면, 솔솔 불어예는 솔바람소리는 부푼 소녀의 꿈을 달래며,  산과 들의 아지랑이는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을 부르고 있으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에서는 산업전선의 역군이 될 젊은이들을 부릅니다. 농촌에서는 흑과 더불어 새 마음, 새 마을 정신의 소유자인 젊은 상록수의 역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일치를 이루고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광과 찬미로써 감사와 청원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어버이의 부르심이 가장 믿음직하여 의지하고 싶었으나 나이가 들자 학창시절의 젊은이들에겐 학교 은사님들의 부르심이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험준한 세파에 첫 발을 내딛게 되는 젊은이들에게 순간적이요, 일시적인 쾌락과 행복만이, 젊은 연인들에겐 사랑의 속삭임만이 귓가에 울릴 뿐… 이 모두는 인생의 허무함만을 더욱 느끼게 할 것입니다.




해산물이 풍부하여 평화스런 나날을 보내는 G섬 3, 000명 주민들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호화찬란한 서울의 문화혜택을 마다하고 한 젊은 의사는 자기 아내요 간호원인 부인과 함께 섬에 들어와 조그마한 병원을 차리고 주민들을 위해 희생과 봉사로써 지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아야 했으니 이는 30여 년 공부한 후, 그것도 서울에서 태어나 모진 고생 끝에 의사가 된 사람이 무엇하러 이 험악한 섬으로 왔느냐 하는 주민들의 비웃음은 나날이 더해 갔었습니다.



솔솔 불던 봄바람이 변하여 칠월 한낮의 무더운 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콜레라라는 전염병이 섬을 휩쓸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십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젊은 의사와 간호원인 아내는 온 정성을 다하여 약을 나누어주며 치료하는 데 별지장이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환자가 늘게 되어 텅텅 비던 병원이 모자라 천막을 친다 하며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의 나날이었습니다. 50명, 60명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수는 열흘도 못 되어 1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이겠습니까? 밤을 세워가며 온 정성을 다하여 환자를 돌보던 그 젊은 의사는 사랑하는 아내와 죽어가는 환자를 외면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해산물로써 많은 이익을 남기고 경제적으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후손들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여러분 중의 자녀를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 젊디젊은 의사의 유언 아닌 유언을 되씹어 보았지만 눈물과 통곡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을 겪어야 하는 운명에 자신의 가슴을 치며 통곡할 뿐이었습니다.



갈매기 강 건너간 다음 목을 놓아 울어봐도, 땅을 치며 통곡해 보아도 시원치 않은 가슴 안고 뒤늦게야 서둘러 보았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다”(루가 10, 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 듣고 실행에 옮겨야 하겠습니까? 오늘은 성소주일,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는 것보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 성업(聖業)을 잇는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길을 일컬어 말하며 여러분에게 교회의 이름으로 호소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는 날입니다.



성소라 함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의 길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할 때, 좀더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희생과 봉사의 길을 택한 성직자, 수도자의 길을 특수 성소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직자, 수도자의 숫자상의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애태우던 섬 사람들과 같이 불난 집 불구경하듯 무디어진 생각은 없으셨겠지요?


강론이란 이 시간을 통하여 시간의 제약과 부족한 언변으로 어찌 드리고픈 말씀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제약이란 이름 아래 막연한 말씀입니다만 부연하여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소 계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둘째: 맡은 바 성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성직자, 수도자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칩시다….












4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0 (가) 나는 양의 문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을 오래 전부터 착한 목자의 주일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또한 이 날을 성소(聖召)주일로 지내기 시작한지 12돌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당신을 <목자(牧者)> 혹은 <문(門)>에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나 희랍어에서는 국민의 지배자인 국왕을 종종 목자라고 칭하여 왔고 국민을 양의 무리라고 비유되어 국민의 행복을 위협하는 원수를 사랑이나 도둑이나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 11) 또는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요한 10, 7) 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목자이십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기 본분에 충실한 참다운 자격을 지닌 전형적인 목자라면 필요하다면 자기 생명마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는 결심, 즉 헌신적인 애덕이란 것은 착한 목자의 특징입니다. 이상적인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헌신적인 사랑의 위력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현저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의 직제자인 사도들은 양들을 위하여 모두 목숨을 기꺼이 바쳤고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경우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939년 을해년 박해시 범주교님과 나신부님 그리고 정신부님이 관헌에게 체포되어 끌려가실 적에 그들은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겨놓았습니다. 한편, 함경도 덕원에 계시던 신주교님은 공산당에게 끌려가실 적에 역시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겨 놓으고 떠났습니다. 6.25동란 때에도 많은 목자들이 생명을 바쳤고 현재에도 수 많은 목자들이 양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시오>(마태 4, 19)하시며 12사도를 하나 하나 모았듯이 오늘도 영일 없이 나를 따르라고 우리에게 절규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시기 때문에 양들인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며 양들을 일일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신자들은 사랑과 신앙의 정신으로 주님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양들은 착한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순명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계명과 가르치심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주일을 주님의 날답게 거룩히 지내며 주일 미사에 나와서 감사 드리고 기도하며 속죄하며 축복을 비는 행위는 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 되겠습니다. 교회의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며 독실한 신자생활을 영위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화해와 순진한 정신으로 일관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실한 양이 되는 것이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이 말씀한 <도둑>들이 많습니다. 그 <도둑>들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가는 데 또한 신앙생활하는 데 방해를 놓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마음 속으로 침입하여 우리의 신앙을 뺴앗아 가려고 합니다. 원수들은 양들을 흩어지게 만들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그리고 잡지에서 무책임한 기사들을 많이 보고 읽게 됩니다. 오늘날은 홍보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보의 기관이 주는 나쁜 영향은 대단합니다. 텔레비젼의 프로가 어린 동심에 즉시 반영되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 좋은


첫쨰 방법은, 한평생을 예수님께 봉헌하여 하느님의 사업에 종사하며 인류 구원이란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에 협력해 드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 대신 일해 줄 젊은이들을 간곡히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에 응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젊고 씩씩하고 관대하고 용감한 젊은이들이여! 예수님의 이 간절한 부르심에 선뜻 나와서 <예> 하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학교에서나 수도원 수녀원에서는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좋은


둘째 방법은, 부모님들이 자녀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신자 가정은 제1의 신학교라 합니다. 어린이게게 기도와 좋은 표양으로 신앙과 진리 속에서 싹트고 자라게하여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여! 당신 교회 안에 있는 양들을 지켜 주시고 원수들의 공격을 막아 주소서. 모든 양들이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 일치하고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5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정말 잘 들어두어라


최인호 베드로/작가




부처의 말을 기록한 초기 경전은 대부분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뜻으로, 2대 제자인 아난(阿難)이 부처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기록할 때에 그 첫머리에 붙였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4복음도 아난이  보고 들은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처럼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자면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요한 21,25)이라면서, “이 책을 쓴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사가들도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를 믿음으로써 참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요한처럼 책을 썼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행동과 하신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의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강조하신 부분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요한은 주님께서 강조하실 때면 “정말 잘 들어두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쓰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주님께서 그 말을 20번 이상 사용하셨음이 나옵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강조하실 때면 “나는 분명히 말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음을 기록하고, 자신이 쓴 복음 속에 이 말을 20번 이상 사용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 주님께서 사용하시던 말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님께서는 특별히 강조하실 때마다 독특한 어법을 사용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가 하늘이 열려있는 것 과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로 시작하여 “물 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 이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등으로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고 특별히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은 착한 목자이며 우리들을 양이라고 비유하시는 말씀에서 그 특유의 말투를 두 번이나 쓰신 것은 이례적입니다.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목자와 양’의 말씀이 또다른 가르침의 핵심임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하심으로써 여전히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의 비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진리의 문입니다. “이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참조).












6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음성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는 2차대전 중인 1941년 2월,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꼴베 신부가 있던 감방에서 탈출자가 생겼다. 독일군을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명을 뽑아 굶어죽이는 형벌을 당하게 했다. 그 때 뽑힌 유대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때 꼴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그 행동은 독일군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꼴베 신부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었다. 꼴베 신부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쳐 희생과 사랑의 재물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착한 목자의 이야기이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은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또한 도둑과 강도를 예로 들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신다.




착한 목자는 어떠한 분이신가? 목자는 문으로 정당하게 들어가지만 도둑이나 강도는 담을 넘어 몰래 들어간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정당하고 순리적이며,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도둑과 강도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속임수와 거짓, 그리고 불신의 관계인 것이다.


양과 목자가 만나는 방법에서도 관계의 정당성이 드러난다. 또한 목자와 양은 서로 말소리를 알아듣는다. 음성을 안다는 것은 지난 체험과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만을 듣고 편안해 하는 것과 같다.




음성을 안다는 것은 믿음과 존경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도 주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만남을 이루어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을까?



문자로 기록된 성경 말씀에서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 사실 부족한 인간의 지혜로 주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그분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건하고 믿음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마을의 귀를 열어야한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 기도와 묵상을 필요로 한다.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믿음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게 되고, 그 음성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따라간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이끄는대로 따라간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자세이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한다. 위험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즉 목자의 희생과 순교자적 삶이 오늘 복음에서 강조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더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다.




일반적으로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면서 양을 쳤다.


일정한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풀을 따라 이동하다간 밤이 되면 들판에 모아놓고 밤을 지낸다.


따라서 목자는 밤중에는 맹수들이 양을 덮치지 않을까 밤을 새며 지킨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가 없기 때문에 목자 자신이 우리의 문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므로, 그분을 통해 들어가고 나올 수 있고, 생명을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양을 사랑하고 보호해주시며 생명을 지켜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만이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 생명이 보장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때로는 이웃과 일상의 사건을 통해, 때로는 자연과 우리의 양심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7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0 (가)  나는 양의 문




우리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상 속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을 나설 때나 들어갈 때 하루에도 수없이 문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은 대문, 창문, 성문, 자동차문, 버스문 등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이러한 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그 문은 악의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처럼 제약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개선문처럼 환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서는 문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문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선민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통로가 됩니다. 이 성문 덕분에 이스라엘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고 또 그 문을 통해서 모든 시민이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구해주신 그 일을 한껏 기뻐하며 아끼시는 이 수도 성문에서 끝없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9, 14) 하고 노래하는 시편 저자처럼 한마디로 성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의 성문을 튼튼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47, 13)




아담과 하와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배반하고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쫓겨난 이래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느님과 직접적인 친밀한 교제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래로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뵘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경신례를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하느님의 영역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그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 조건은 바로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시편 118, 19-20) 즉 “이것이 야훼의 문,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다” 하신 시편 118장의 말씀과 같이 의인들만이 하느님과 친교를 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의인들만이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성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인들만이 튼튼한 성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죄많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죄의 속죄를 위해 당신자신을 속죄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ㄷ그분은 우리 사람들을 하느님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하늘의 문이 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요한 10, 9)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하늘로 인간을 인도하시는 문이시고 하느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바로 그분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신 요한 복음 10, 1 의 말씀처럼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 즉 생명과 구원에로의 문을 통과하는 조건은 회개와 신앙입니다. 그 문은 좁은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바로 극기와 희생과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희망,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가 13,24)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좁은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태오 복음의 혼인 잔치에서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은 처녀들처럼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그 닫혀진 문은 다시 열리지 않게 됩니다.(마태오 25,10; 루가 13,25)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하늘나라에 이르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좁은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같이 일상에서 회개하는 삶, 바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희망하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목고리를 진정으로 듣고 문을 여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그 사람과 함께 먹고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3,2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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