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1. 조순창 신부(가)/2 2. 강길웅 신부(가)/3
3. 김태규 신부(가)/5 4. 김현준 신부(가)/8
5. 박선용 신부(가)/9 6. 최인호 작가(가)/11
7. 나는 길․진리․생명(가)/12 8. 진리의 말씀과(가)/14
9. 불타와 그리스도(가)/15
1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 (가)하느님의 뜻대로 진실과 사랑을 심어 가자
조순창 신부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떠나실 것을 알고, 불안과 초조에 싸인 제자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가끔 여러 가지 걱정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믿음이 약한 증거일 것입니다. 또,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 무사 태평이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신뢰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그로써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길에서 바른 길을 모르고 방황하던 인류에게 나아갈 ‘길’이시며, 불신과 의심 많은 인간에게 ‘진리’이시며, 죄의 결과로 죽어야 하는 인생에서 재생과 중생의 ‘생명’이십니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길을 찾고 다니기를 원한다면 거기 길이 생기듯이, 구원의 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고,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함으로써 참다운 인생의 시작이 되듯이, 모든 진리의 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참 진리를 찾도록 하고, ‘모든 사람의 평생의 노력이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한 노력’이라 한다면 생명이 소중하듯이 더 값진 삶이 되고, 하느님의 생명 안에 재생하여 영원한 행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 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장차 교회를 이끌며 이룩할 위대한 업적을 예고하신 희망의 말씀입니다. 진정 어처구니없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출범한 교회가 로마에서 초창기의 무서운 박해 때 전 세계로 전파되었고, 한국에서도 200년 전 몇몇 학자들의 교리 공부에서 출발하여, 피 흘리는 순교의 역사에서 오늘에 이르렀고, 교회가 진리의 교회요, 인생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며, 희망과 부활의 기쁨을 나누어주는 참 교회이기에, 이런 피나는 역경에서도 빛나는 교회 발전을 가져온 것이며,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하였기에,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개인의 신앙도 희생을 무릅쓰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할 때에 감화되어 가족과 이웃이 교회에 나오게 되며, 개인의 신심도 희생과 기도와 사랑의 대가로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마술이나 미신 같이 기도를 생각하고,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오랜 기간 남모르게 노력한 결실을 단숨에 얻어 보려는 도박 같은 허황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으나, 하느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자연의 진리, 인생의 진리, 구원의 진리를 벗어나기 않고, 순리대로 차근히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노력과 하느님 뜻대로 진실과 사랑을 심어 갈 때에 거기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듯한 놀라운 기적 같은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5주일에 즈음하여, 고뇌와 불안과 회의 속에 사는 인생이로되, 하느님을 믿어 걱정하지 말고, 착실히 본분을 다하는 것이 신자의 가는 길임을 명심하고, 예수님을 ‘주님이시다’고 믿고 고백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인, 희망을 갖는 신자인 우리는, 바로 이미 바른 길을 찾은 하느님 백성이요, 진리를 터득한 행복한 무리이며, 십자가의 피로 죄를 씻어 새로 태어난 희망의 백성이니, 믿는 이답게 살아갑시다.
하느님을 믿고 헌신하는 것이 위대한 삶입니다
2 부활 제5주일 (가해) “걱정하지 말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6,1~7 (신도들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제2독서 Ⅰ베드 2,4~9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입니다)
복 음 요한 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철부지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스승의 뜻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몰랐고 또한 구원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천덕꾸러기들이었습니다. 그저 세속적인 야심만 가지고 눈치만 보는 소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믿으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미래를 내다볼 때 주님은 사실 걱정스러웠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떠나셨을 때 그 못난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뻔했습니다. 더구나 박해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최후만찬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면서 특히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걱정할 것 이 없고 세상의 어떤 세력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길이 많아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뿐이고, 세상에 진리가 많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는 예수님뿐이며, 세상에 생명이 많아도 썩지 않는 생명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제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분만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최고의 삶의 지혜이며 또한 걱정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어떤 자매가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 참으로 많습니다. 남편도 성실하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괜한 걱정 속에 눌려서 삽니다. 묵주를 들고 매일 미사에 나오면서도 걱정으로 자기를 묶어 놓고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루는 평일 미사가 끝난 뒤에 조용히 저를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죽으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얻을 것이며 그러면 그 여자가 재산을 빼돌리게 될 것이라며 한숨을 길게 쉬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랬습니다. 자매님은 건강하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젊으시고 더구나 남편이 굉장히 사랑해 주시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기쁘게 사시라고 해도 그 자매님은, 신부님은 모르는 소리 말라면서 사람의 인생이 어찌될지 누가 아느냐고 했습니다. 걱정도 팔자였습니다!
물론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미래가 활짝 열려져 있지만 그 속내용은 캄캄하게 닫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겁도 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빠와 함께 있는데 미래의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분 뜻만 따르면 세상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가 믿는 것은 실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살얼음판을 걷게 됩니다. 믿으면 안전한 것을 맨땅을 까치발로 걷고 있으니 보는 사람도 불안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2독서에서 좋은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시면서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6,18참조).
베드로는 실로 우리의 반석입니다. 우리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만이 진정한 반석이라고 증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아니시라면 자기는 달걀 껍질보다 더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의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변덕이 심하고 충동적이었으며 학식이나 인품도 없었고 그 잘난 신앙도 들쭉날쭉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패해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머무르려 했고 또한 그분의 길을 가려 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와 베드로와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걱정이 많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석인 줄을 모르니 두려워하며 또한 진리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헛된 진리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불안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모순이요 아픔입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이 바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며 또한 살아 있는 반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우리 또한 반석이 됩니다. 괜한 걱정 속에 인생을 썩히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3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 (가)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김태규 신부
세상에는 길이 수 없이 많습니다. 대문을 열고 나서면 골목길이 있고, 좀 더 나아가면 신작로가 있습니다. 산에 가면 산길이 있고, 들에 가면 들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면, 또한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없는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에는 뱃길이, 하늘에는 비행기 길이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에게도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고 봅니다. 즉 보이는 육체의 길과 보이지 않는 영혼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유행가 가사에서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나그네 길” 또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외로운 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사람들이 자기들의 배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육체의 길만을 사람들이 걸어가게 될 때 무척이나 불행하며 외롭기 짝이 없는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길이란 우리 모두는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왔으며,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며,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시작이신 하느님 안에서, 끝이신 하느님 안에서, 만사에 능하신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정하신 목적을 위하고, 당신의 택하신 방법을 따라, 하느님 안에 있어야만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목표이기도 한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만들어진 길을 걸어가기에는 쉽고, 또 보아서 곧 알 수 있기에 최소한 익숙해 지기는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나 배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기술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도 길을 모르기에 더욱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사람들은 육체의 길을 걸어가기는 어려움 중에서 그래도 쉬울 것이며, 또 세월에 밀리다 보면, 익숙해지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길은 어려움 중에서도 더 어려움을 느낄 것이며, 또한 자기의 뜻과 의지, 수고와 노력이 없으면 미숙해지기만 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떠한 길을 통해서 우리의 진정한 목표인 아버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Jn 14,6)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도달하고자 하는 우리의 뼈아픈 열망이 성취되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길을 가야하겠습니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는 비록 구식처럼 느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은, 우리의 인격을 통한 순명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완덕의 모범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 볼 때, 천주님의 말씀이 강생 하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고, 도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명에 일관하여 흐르는 한줄기 근본정신이 있으니, 그것은 인격적인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인격적인 순명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또한 그것은 인간 예수님께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마음이 죽도록 괴롭습니다.”(MK 14,34)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MK 14,36)라고 까지 기도하셨지만 즉시 “제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 주십시오”하는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최후 순간 “마쳤도다.” 하시면서 순명으로 일생을 살아 오셨음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또 아버지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을 날마다 그 나름대로 당하는 십자가를 예수님과 같은 정신에서, 체험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끊어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겨울이라는 죽음을 치루어야 하며, 또 땅에 떨어진 밀씨가 결실을 내기 위해서 한번은 썩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셨듯이, 십자가 없는 영광을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도 시련의 압착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뒤따라 아버지 하느님께 이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왕에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라면, 질질 끌고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어깨에 메고, 기쁘게 따라감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아버지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은,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맙시다. 율법 학자들이 “꼭 지켜야만 할 제일 큰 계명이 어떤 것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도,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바로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길은 참으로 쉬운 듯 하면서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즈음 홍수처럼 쏟아지는 “사랑합니다.” “사랑해요”라는 말만의 사랑은 참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사랑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은 어려움에 부닥치고 또 가끔은 어려움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주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다 위를 걸어 다니고 하늘을 오르라는 식의 영웅적 행위가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우리의 완덕도 선행이나 덕행의 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우리가 선과 덕을 실천할 때 얼마나 진실된 사랑에서 했느냐가 문제될 뿐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심판 기사에서도 잘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미지막 날을 당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아갔을 때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은 재를 얼마나 많이 지켰느냐? 성사를 얼마나 자주 받았는가? 기도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얼마나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사랑했느냐? 하는 질문 일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히 여기시는 것이며 당신의 마지막 간곡한 유언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계명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계명을 아무리 지킨다하더라도 모두가 허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는 이가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하느님 아버지를 뵙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 것은 오늘 날 우리의 답답한 심정을 대신 말씀드려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뵈옵기가 소원이십니까? 그렇다면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십니다. 인격적인 순명과 체험적인 십자가의 고통으로 다져진 사랑의 길을 굳건히 걸어 나갈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펴시고 다가 오실 것입니다. Amen.
4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 (가) 한잔의 술을 들고
김현준 신부
한 3년 전부터 주일이면 교중 미사 후에 신자들과 성당 마당에서 족구를 하곤 한다. 족구 후 한잔의 맥주를 마시며, 가끔은 식사를 같이 하며 소주잔을 부딪치며 건배한다. “주일 족구를 위하여” 또는 “운동해서 남주나! 주일마다 족구하자”를 외치면서, 참, 건배하면서 술잔을 부딪치는 이유를 아시는지요? 그것은 귀를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술은 보면서 눈이 먼저 맛을 보고, 술잔을 들면서 손이 맛을 보고, 술을 마시면서 코가 맛을 보고, 입이 맛을 본다. 그런데 오관 중에서 청각의 귀만 술맛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위하여’ 건배하면서 술잔을 부딪치는 그 소리로 귀가 술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부활 제5주일인 오늘의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과 이별식을 가지면서 들려주신 이른바 ‘고별사'(요한 13,31-17,16)의 일부이다.
예수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는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또 그 죽음의 길목에서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며(요한13, 21-28), 매우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신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시작이다. “너희는 걱정하지마라”고 위로하며,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지 않느냐”하고 안심시킨다. 이런 까닭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중대한 자기 선언을 하신다.
하느님, 사람을 위하여
그러나 토마스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길’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 실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토마스는 ’길’의 의미를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따라가야 할 어떤 공간 정도로 오해하여, 엉뚱하게 묻는다. “주님 가시는 곳이 어디신지 그것도 모르는 데, 가시는 길인들 어찌 알겠습니까?”
토마스는 그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다른 무슨 수단과 방도가 있고, 예수님은 그것을 손으로 가리켜줄 수 있는 분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길은 ‘하느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는’것이었다,
언제나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위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언제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다는 것과,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여러가지 비유로 알려주셨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위하며 살기를 바랐고, 아버지의 사랑에 감싸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든, 그 삶의 의미를 못 찾을 이유가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끝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 생명을 스스로 바치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의 염두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또 하나는 ‘형제’ 또는 ’이웃’이라고 부른 ‘너희’, ’사람’이었다.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자녀로 생명을 받아 삶을 시작할 뿐 아니라, 한분 뿐이신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살고 있기에, 모두 형제라고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서로 용서하고, 돕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위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중심이동’을 하여 33년을 동고동락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여 그 짧은 생애를 충일하게 살았고, 그 ‘위하여’의 충일이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위해서”의 삶을 살자
교부들은 십자가에 달려 펼치신 예수의 양팔을 ‘위하여’와 삶으로 표현하였다, 즉 사람을 위함과, 하느님을 위함을 표출하는 현양과 형제애의 합치로 보았다. 그렇게 양팔 벌린 모습은,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아낌없이 전적인 헌신을 표출하는 포옹의 몸짓으로, 또한 그 아낌없는 형제애의 몸짓이기에, 바로 하느님을 현양하는 몸짓으로 보았다,
그의 길, 즉 크리스천의 본질적 자세 역시 예수님을 향해 가는 ‘중심이동’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존재에서 서로를 위한 존재로 ’넘어감(Pascha)’의 몸짓에 있다.
오늘 한잔의 술을 들면서도, 십자가 위에서 양팔 벌려 하느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는,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하는 생명과 진리의 길을 보여주신 그분을 생각하며, 술잔을 부딪치고 ‘위하여’를 외쳐봄은 어떨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그 ‘위하여’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나만을 위함’에서 ‘서로를 위해서’의 삶으로 넘어가 보자.
5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
박선용 신부
예수께서는 천지창조 전부터 이미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요한 1,2)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으나(필립 2,6)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분(요한 1,11 참조)이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 곧 진리이고 생명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실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또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고별강론’을 하셨다(13,31-17,26). 오늘 복음은 고별강론의 일부인데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면서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로 시작된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촉구하신다(14,1-12).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뜻을 가르쳐주시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주님께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여쭙는다. 토마스의 질문을 받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그대들이 나를 알았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라고 말씀하신다. 필립보 역시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필립보는 구약의 성조들처럼 자기들도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 요구에 대해서 예수께 서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고나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믿는 사람은 당신이 하신 일들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당신의 제자들(교회)이 장차 지역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더 많은 효과(구원)를 낼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지난 주 복음에서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분만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뜻이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분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계시하시며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과 같은 분이어서 돌봐야 할 사람들을 확실히 아시며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법’을 완전하게 깨닫고 수행하신 분이다. 하느님 사랑의 화신인 까닭에 자신있게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양떼의 구성원인 성직자나 수도자들 역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요 문이신 주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알리는 안내자요 소리일 따름이다.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게 될 것이다.
6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가) 의심 많은 사람과 의문이 많은 사람
최인호 베드로/작가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토마스는 매우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쌍둥이라고 불렸으며 별명은 ‘의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은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 소”라고 말하자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서 토마스에게 직접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한 후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토마스는 그 유명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토마스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란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의심을 갖고 있는 현대인의 특성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고집스런 의심이야말로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도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주었을 뿐 아니라 주님으로 하여금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시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토마스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의문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느닷없이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오직 토마스만이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던 것은 그가 의문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해줍니다. 그의 이런 질문이야말로 주님으로 하여금 복음의 핵심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는 진리를 말씀하시도록 했던 것입니다.
토마스는 이런 의문 속에서 마침내 불굴의 신앙인으로 부활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서 유다 로 돌아가려 하셨을 때 제자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고 걱정 하자 토마스만이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요한 11,16) 하고 용기를 보였 습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인도로 가라는 명령을 받자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한 후 목수 로서 인도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는 인도에서 “인생은 비참한 것으로 각자의 운명에 맡겨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붙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인생은 언제나 움직이며 도망가버리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 하느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고 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은 정신의 눈을 비추는 안약(眼藥)이며, 둘째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의지를 육체적 욕망에서 정화시키는 탕약(湯藥)이며, 셋째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죄의 상처를 낫게 해주는 고약(膏藥)이며, 넷째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을 먹게 해주는 훌륭한 음식입니다.” 토마스는 마침내 인도에서 온몸이 창에 찔려 순교함으로써 주님과 생사를 같이하자는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토마스의 별명은 ‘의심이 많은 사람’에서 ‘의문이 많은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참다운 우리의 기도는 주님께 향한 요구가 아니라 주님께 향한 질문인 것입니다.
7. 부활 제5주일 (요한 14, 1-12)(가) “나는 길․진리․생명이다”
넓고 푸른 하늘에도 길이 있다니 이상하다. 비행기가 그 길을 이탈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끝이 안 보이는 바다에도 길이 있다니 그 또한 이상하게 들린다. 얼마 전엔 남한의 배와 북한의 배가 넓고 넓은 바다에서 박치기를 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길
길이 없으면 땅값도 헐값이다. 길이 없는 땅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다. 농사를 지으려해도 경운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남의 땅으로 경운기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길이 있어야 기차도 다니고 버스도 다닌다. 길이 있어야 택시도 다니고, 마차도 다니고, 사람도 다닐 수 있다.
나는 20여년 전에 지리산엘 간 적이 있다. 정상에 오르려니 진땀이 나고 숨이 턱까지 찼다. 등짐을 졌으니 오를수록 고통은 더해만 갔다. 나는 잔꾀를 부려보기로 했다. 샛길로 가면 힘이 덜 들것으로 믿고 샛길로 들어섰다. 내심 나는 잘났다고 생각하며 10여미터를 걸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땅벌들이 달려들었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노란 벌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뒤 돌아서서 달렸다. 그러나 어느새 두 마리가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 들어와 왕침을 꽂았다. 다른 벌은 내 n뒷덜미에 침을 꽂았다. 아마 그때만큼 잘 달린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날 저승길에 들어섰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 가서 강의할 일이 있으면 자주 농담으로 그때 벌한테 쏘여서 대머리가 됐다고 말한다. 길이 아닌 곳을 갔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길이 아닌 곳을 가면 그렇게 혼쭐이 나는 것이다.
길 잃은 사람들
세상에는 길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길이 아닌 곳을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가야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벗어나서 매일 게임방으로, 만화방으로 나다니고, 담배와 술에 매혹되어 살아가면, 그는 길 잃은 학생이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가야하는 길이 있다. 국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일부 정치인은 자기 주머니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나라는 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경제인은 어떠한가? 일부 경제인은 정치인과 결탁하여 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돈을 해외로 빼돌려 개인만 살찌우고 있다. 이로 인해서 국민은 혈세를 물어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바쁘다.
천문학적 국민의 돈, 나라의 돈을 쓰고도 책임지는 정치인․경제인은 별로 없는 듯하다. 지체 높은 분이 수백억원을 가로챘다고 신문에서 떠들어대는데도 버젓이 폼잡고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한다.
이래서야 어찌 나라의 기강이 서겠는가? 정의는 어디 가서 잠을 자고 있냐는 한탄이 나올만도 하다. 공무원은 어떠한가? 길 잃은 공무원들이 있기에 비리와 부정이 매일 폭로되다시피 한다. 청탁과 이권개입, 업자와의 밀착으로 부실덩어리의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종교인은 어떠한가? 길 잃은 종교인들도 있다. 물질, 명예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파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말이 곧 닥쳐온다고 겁을 주며 재산을 걷어가, 가정을 파탄내는 종교도 있다. 길 잃은 종교인들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에 평화가 아닌 분노가 쌓이고, 희망보다는 절망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한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말씀하셨다. 인생 길의 정도는 예수님뿐이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 이 말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데 무슨 얘기냐며, 반기를 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대답한다. 결국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종교만을 위하여 오신 것은 아니다.
그 분은 전 인류에게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아니 그 길이 되어주셨다. 다른 종교인들이 믿든 안 믿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헤맨다. 현세에서의 행복뿐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갈구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길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l+l=2는 수학적인 진리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것도 진리다. 그러나 도덕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시다. 그 분은 하느님이셨다. 그래서 그분을 낳으신 분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분은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진리라고 믿고 있다.
세기말적 현상이라고들 하는데, 요즘은 자칭 구세주라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공공연히 자신을 구세주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몇십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린 속을 수 없다. 속아서도 안된다. 우리의 구세주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 분은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시다. 그 분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의 끝은 아름답게 장식될 수 있다. 그 분은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 그 분은 지금도 새로운 모습으로 성체 안에 계신다. 그 분을 기도 안에서 만나고 고통 당하는 이웃들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분을 매일 만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겠다.
8 부활 제5주일<요한 14,1-12> (가) 진리의 말씀과 제자들의 몰이해
장자(莊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황하의 신인 하백(河佰)이 처음으로 바다에 나와 동해를 바라보며 놀라서, 북해의 신인 약(若)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이 황하인 줄 알았는데, 지금 바다를 보니 더 넓은 것이 있는 것을 깨달았소.” 그러자 북해의 신인 약(若)은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늘 좁은 장소에 살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겨울의 일들은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거나, 식견이 좁은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라 믿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은 우물 속에 갇힌 개구리의 모습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제자들의 몰이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자들이 자주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하시면서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하고 말한다. 그것은 몰이해와 불신의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시면서「너희는 이미 아버지를 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말이냐」라고 꾸짖으신다.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의 몰이해에 예수님은 무척 마음이 아프고 상심하셨을 것이다. 사실 가장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 이해를 못하고 불신하고 오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이고 고통인가.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또는 친구들간에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교류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예수님 곁에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늘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기적의 현장을 체험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왜 제자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도 혹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잘못 이해하고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의 삶 속에 종종 발생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욕심에 사로잡혀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 충족에 이용하려는 잘못도 범할 수 있다.
대화에서 어렵다는 것과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올바른 이해와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지혜로만 자의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을 때,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는 단순히 자의적이 아닌 상징적으로, 또한 물질적이 아닌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믿음 속에서만 예수님 말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믿지 않는다면 알 수도, 느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가장 큰 은총이다.
우리는 성서 말씀을 읽을 때, 우선 믿음 안에서 기도하고 영적인 지혜를 청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깨달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9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 (가) 불타와 그리스도
우리나라 산의 70%가 부처님의 안식처인양 절에 안가 본 사람이 거의 없다. 6.25 동란 때 따발총에 얻어맞은 부처님 상이 반쯤 나뒹구러져 있고 절은 타 없어졌으나 그 상처 입은 청동의 불상은 석양의 바랜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북 분단의 쓰라린 비운과 폐허를 소리 없이 말해주듯 그 청동의 불상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소리 없이 말해주듯 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을 전쟁의 시달림에서도 그 불상은 사람들에게 똑 같이 대오(大悟) 인도하는 사명(使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없이 따발총 세례의 아픔은 고사하고 청동의 불상은 반쯤 스러진 채 무엇을 깨우치고 말해 주는 듯하다.
태어나는 것은 멸하고 지상의 존재는 일체(一切) 고(苦)라면 새로운 고의 원인이 되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바보스런 짓이 아닌가? 오히려 생명의욕(生命意慾)을 단절하는 편이 낫다. 불타(佛陀)는 인간 존재의 고뇌를 알고 있다. 전쟁이 휩쓸고 간 그 청동의 불상에서 체념의 초속(超俗)적 정적(靜寂)은 깊은 통찰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우주경쟁과 핵 공포의 전쟁도 서울의 대도시도 인간의 생활도 삼라만상도 모두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이치에 의(依)해서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종전 후 우리는 부처님께 무엇을 갈구하는 것인가? 참으로 불상을 보고 새로운 힘과 희망이 용솟음치고 있는가? 가혹한 운명의 쓰라린 시련을 받은 인간은 장차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는가? 물질적 곤궁을 딛고 정신적 타격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국민은 과연 재건의 기력을 어디서 양육하여야 하는가? 불타는 새로운 희망의 불을 점화할 수가 있겠는가? 그보다 불타는 의연히 일상생활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체념을 설파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우리 한국은 종교를 받아들이려는 소리가 매우 강하다. 유물론(唯物論)도 적지 않게 그 세력을 떨치더니 많은 이들의 정신적․종교적 갈증을 풀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한국인의 대다수는 그 종교적 욕구를 한국의 전통과 오랜 세월 우리 심성에 맺은 불교에 향하지 않고 종교의 백화점이라는 한국인의 종교수용성에 비추어 불교, 도교, 유교 등 샤머니즘(무속신앙)적 기복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닐까!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이조 초기부터 일관된 척불정책에 밀려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일부 아녀자들의 기복종교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였다. 불교의 도에 조국재건(祖國再建)의 지도력과 조력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석가탄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절에 몰려 제등의 차별에서 기복적 신앙을 얻으려는 심성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러한 부정적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 것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승려의 인간적 약점이라든가, 새로운 과학시대에의 적응이 잘 안된다든가, 사회론이 없다든가 -이러한 이유는 불교도 측에서도 지적되어 그 결함의 개선책이 토의 되곤했다. 그것은 어찌되었든 불교의 본질을 검토코자하는 것이다. 한 용운 같은 불교유신론에서 불교의 본질과 상충되는 것은 본 장에서 다루지 않겠다. 오직 불교의 본질이 무엇이냐?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파헤침으로써 참 종교를 말해 보고자 한다.
불교는 그 본질상 인류의 궁극적 문제에 해답을 주고자 하는 세계 4대종교의 하나가 아니겠느냐? 더구나 불교는 구원의 종교로서 현대인은 이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교도 또한 본질적으로 구원의 종교다. 그러나 종교간의 기분적 상이(氣分的 相異)는 도저히 동질로 할 수 없을 만큼 그 괴리가 크다. 그 근본은 구원의 해석이 틀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지닌 구원이란 불타가 제자들에게 설파한 해탈의 길과는 전연 별개의 것이다.
인간은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인간 운명에 대하여 숙고하는 현인은 모두 일치하고 있다. 세계는 어딘가 파괴되고 있으면 이 지상은 어딘가 부조화인 것이다. 인간자신도 분열하고 있다. 인류는 지리멸렬(支離滅裂)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어 버렸는가?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악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무엇에서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괴로움에서’라고 불타는 답한다. ‘죄에서’라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친다. 이와 같이 출발점에서부터 피차 상이하다. 이 상위(相違)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그 결과도 막심한 것이다.
괴로움에서 구원된다는 것, 이는 먼저 당연한 대답과 같이 생각된다. 우리들은 매일 짓눌려 고생하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우리 모두는 괴로움을 이탈하기만 하면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와 같이 답하는 것은 불충분하며 아주 위험한 것이다.
괴로움에서 어떻게든지 해방되고자 생각하는 인간은, 대체로 극단으로 도피하기 쉽다. 쾌락주의, 염세주의로 떨어지기가 일쑤이며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괴로움에서 시달리기보다 될 수 있으면 이 세상에서 즐겁게 더구나 관능적, 육체적 즐거움을 얻고자 할 때에는 야합(野合)적 쾌락주의에 빠지는 것은 명확하며 그것은 언제나 권태와 구토로 급변한다. 자살자의 일부가 이러한 쾌락주의의 쓰디쓴 결과의 경우로 지금이나 예나 변함이 없다.
인간의 품위를 갖추고 성실한 윤리를 깨우치는 불교가 쾌락주의와는 아주 거리가 멀지만 그것만으로는 오히려 더 격하고 빨리 염세관으로 기울어지는데 틀림없는 것이다. 사진체(四眞諦)의 제일명제, 즉 모든 것은, 삼계육취(三界六趣)는 개고(皆苦)라는 고체(苦諦)의 명제에서부터 틀린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갖가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랴! 그러나 모든 것은 괴로움이 아니다. 참으로 차원 높은 순수한 즐거움이 인생에게는 있으며, 자연에도 사회생활에도, 문화 창조에도, 예술감사에도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종교에서,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이란 얼마나 깨끗하고 청정지복(淸淨至福)한 것이랴!! 그러나 일체개고라는 명제는 불교에 있어서는 단지 우울한 인생관의 표백(表白)일 뿐 아니라 그것은 형이상적으로 파악된 것으로 생성과 무상으로 맡겨진 인간의 실존 그 자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구원은 실존에서의 구원이라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자살에 의한 것은 아니다. 불교는 윤리적 혼미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더욱 인간은 그 욕망, 번뇌, 생의 갈망 그것들을 죽여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인간은 열반(涅槃)에 들어,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러 적멸(寂滅)하는 것이다.
소승불교의 경전에서 읽혀지는 바와 같이 “묵은 연료가 타 버려 새로운 연료가 가연되지 않기 때문에, 등화(燈火)는 영양(榮養)을 잃어버려 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Samytta Nik. Ⅱ,86) 초기불교에서 열반은 괴로움에서의 해방의 상태를 의미했다. 정토극락(淨土極樂)이라는 아미타(阿弥陀)의 교설은 후대에 된 사상으로서 본래의 생각을 공상 속에 인간화한 것이다. 성불(成佛)의 사상은 일원론적, 범신론적 철학의 산물인 것이다. 불교가 최초부터 설파한 것은 괴로움에서의 구원 그 자체였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죄에서의 구원을 준다. 그렇다면 죄의 가르침은 불교의 개고의 설과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어두운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염세적으로 생각을 풀어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 교의 가르침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착하게 창조했다고 하는 낙관적 확신이 포함되고 있다. 인간이 창조주인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에서 만들어진 그대로의 상태는 참으로 아주 선한 것으로 훌륭하고도 놀랄만한 힘을 받아,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자유의지였었다. 무질서는 결코 처음부터 근본무명(根本無名)한 것과 같이 불가해한 것도 아니다. 무질서는 나중에 세계에 들어와 더구나 인간 측에 의한 자유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이다. 자유란 식별과 선택을 뜻하며 선악의 선택을 말한다. 자유의지를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가 있고 하느님의 뜻으로 정해진 질서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질서를 교란시킬 수 도 있다. 인간은 시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감사와 복종의 뜻을 지니고 인간은 전능한 창조주인 신권(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신을 거역하여 신의 의지에 항거한다면 이야말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정말, 인간은 죄를 범하였다. 또한 인간의 얄궂은 현재상태는 그 범한 죄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창세기 3장에 있는 원죄에 대한 기사를 보면 안다. 여기서 인간의 죄는 그 본질상 뚜렷이 오만과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하느님처럼(창세기 3,5)된다는 악마의 유혹에 원조는 넘어갔다. 원조(元祖)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느님께 순종하여 행복한 신상을 기뻐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 자력으로 행복해지려는 엉뚱한 오만심을 일으켰다. 그들은 자율을 찾아 스스로를 하느님의 지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죄 중에 포함되어 죄의 본질을 만든 것이다.
죄를 범한 인간은 그의 <장소> 즉 원조가 그의 본성 상 우주 속에 어울리게 놓여 있는 지위를 잃어 버렸다. 먼저 인간이 신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부조화가 보였다. 신에의 반항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을 떠나 신과의 가까움이 신과의 멀어짐으로 변하여 신과의 친교는 신과의 소원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인간은 신의 은총과 친교를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 스스로 지녔던 질서도 꺼져 버렸다.
영육간, 정신력 사이에 있는 본래의 조화를 벌써 잃어 버렸다. 인간의 마음에는 악육이 머리 들기 시작했다. “내 속에는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로마 7,18-19 ; 22-23) 성 바오로는 인간의 마음의 모순을 이렇게 갈파하였다. 이와 같은 육체 분열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또한 개개인간에 관하 것은 전 인류에게도 들어맞아 전 인류는 여러 가지 점에서 각종각양의 부조화로 고민하고 있다. 죄야말로 지상에 있어서 모든 평화, 일체무질서의 원인인 것이다.
죄가 무질서와 신과의 소원을 뜻하는 것이라면 죄에서의 구원은 인간에게 질서의 회복과 신과의 화해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인간의 자력으로써는 될 수 없는 것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비로소 실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또 한가지 근본적 상위가 있다. 불교의 본래의 교설은 자력에 의한 해탈인 것이다. 불타는 정각(正覺)의 길을 걸은 최초의 사람이며 자력에 의한 해탈을 얻어 열반(涅槃 ; Nirvana)에 들어간 것이다.
또한 그의 제자들은 누구든지 똑 같이 자력으로써 이 길을 걸어, 그 가르침에 따르며 열반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입멸직전에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깨우치고 있다. “…그렇다면 아 -난다여, 세계에서 너희 자신 안에서 등화(燈火)와 체소(遞所)<경지(境地의 장소)>를 구하라. 다른 어디에서도 없다. 따라서 법안에 등화의 체소를 구하라. 다른 아무 데에서도 없다.…”(Dîghnikâya, ⅩⅤⅠ, 2,25,26) 과연 인간 바루타가 설파하는 것과 같이 자신 안에서 구원의 지혜를 발견할 수가 있을까?
자기 자신 안에서 해탈로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불교를 받드는 후대의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 의심을 품고 있다. 이와 같은 극단적 노력은 불과 몇 안 되는 선택된 자만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반대중에게 더욱 쉬운 길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거기서 보살과 자비 깊은 아미타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겨난 것이다. 민중신앙은 이 방면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불교철학은 의연하게 자력해탈의 대담한 신념을 고수하여 일원론적 범신론을 세워 인간을 절대자와 동일시해 버린 것이다.
자력해탈, 은총에 의한 구원, 이 대립에서 우리는 불타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본래의 아주 깊은 차이로의 거치른 노력을 설파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적 노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노력도 불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대하여 질서를 파괴하여 인간과 신을 결합시킬 가교(架橋)를 부숴 버렸다. 그러나 그 다리를 고쳐 세워 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위에서의 조력(助力)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진리를 발견한 자가 아니고 <진리> 자체이며 최초의 사람으로서 길[道]을 걸어간 것이 아니고 길[道] 자체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이치를 깨달은 자가 아니라 “생명”(요한 14,6) 자체인 자 바로 그분 그리스도가 거기에 있다. 불타는 우리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세상의 그 많은 철인, 성자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에게서 받은 자기사명을 의식하고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4) 그리스도의 일[業]은 하느님의 일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