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성체와 성혈 대축일 주일 강론 모음

 

성체성혈 대축일





         1. 박석희 주교/2                      2. 최기산 신부(가)/4


         3. 김정진 신부(가)/6                  4. 김몽은 신부(가)/7


         5. 박승원 신부(가)/9                  6. 윤경철 신부(가)/12


         7. 강길웅 신부(가)/13          8. 허영업 신부(가)/15


         9. 변기영 신부(가)/17         10. 신비의 교리(가)/18


        11. 교구 주보(가)/21                  12. 최인호 작가(가)/22




1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에 담긴 사랑의 정신


박석희 주교




“성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자 정점입니다. 성체대회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이를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것을 다짐하는 거룩한


행사입니다.”


18일부터 로마에서 개최되는 제47차 세계성체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박석희(안동교구장)주교는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바로 이 자리에서 체현하는 것”이라면서 “자칫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기 쉬운 성체신심을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성체대회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밝혔다.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자 마련되는 이번 성체대회는 수많은 대희년 행사 가운데 절정입니다. 특히 이번 대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람이랄 수 있는 로마에서 개최되는 것 또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박 주교는 “교황청 세계성체대회 위원회가 발표한 제47차 세계성체대회 기조문이 성체성사와 이천대회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면서 이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첫번째 항목인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창조주 하느님과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 기억 상실증’에 걸린 현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박 주교는 두번째 항목; ‘이것을 받아먹어라’는, 인간이 육신을 위한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서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새 생명으로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했다.




세번째인 :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은, 성체성사야말로 사랑의 극치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체에 담긴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런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신자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박 주교는 마지막 항목인; ‘신앙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가 성체 안에 현존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그 현존을 깨달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89년 서울대회 이후 세계성체대회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박 주교는, 이번 대회기간 동안 한국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집전과 함께 각 요일별로 지정된 주제의 교리해설을 담당할 예정이다.




박 주교는 “한국 참가자들은 여행객의 기분이 아닌 순례자의 마음가짐으로 엄숙하게 참여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국내 신자들도 대회기간 동안 본당 또는 단체별로 성체조배 모임을 갖고, 성체대회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가 성체대회를 개최하는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체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어떤 활동도 이 핵심과 근본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체대회를 계기로 모든


신자들이 성체에 담긴 사랑의 정신을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남정률 기자)














2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가) <요한 6, 51―58> 신비의 교리인 성체성사


최기산 신부




5년전 뉴욕타임스에 가톨릭 신자들의 성체 이해에 대한 설문조사가 실렸었다. 50% 정도의 신자들이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나머지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신자들은 어떻게 답할까? 미사 중에 사제가 빵을 축성하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또 포도주와 물을 섞어서 축성하면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설문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믿기 힘들다고 응답하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자. 과연 성당의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확실히 현존하신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이에 대한 응답에도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신자이면서 이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헌장 제11항에 분명히ꡒ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그 절정이 성찬례다ꡓ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 안에 우리 신앙이 요약되고 집약되므로 이를 부정한다거나 의심한다는 것은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미사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여 영적 양식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의 미사참례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 많은 준비를 한 후 미사에 임할 것이 분명하다. 또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믿으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면 성당에 자주 오고 싶어할 것이고, 볼일이 있어서 성당에 왔을 때에는 우선 성전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 나가 무릎꿇고 기도할 것이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신비의 교리 미사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신자들에게 성체를 주기에 앞서 ꡒ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ꡓ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ꡒ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ꡓ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려고 나아간다. 비신자들이 이 광경을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성적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 빵이 몸으로 변했다고 믿고 그 빵을 받아먹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나가느냐고 빈정댈 것이다. 어떤 이들은 웃기는 얘기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분명히 신앙으로 믿고 모시러 나간다.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신비의 교리다.




이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신비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믿기 위해서는 신비한 방법이 요구된다 하겠다. 즉 성령께서 비추어주셔야만 이 신비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성체 찬미 기도에서 ꡒ두 가지 허울 안에 분명 숨어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 수록 전혀 알 길 없사옵기에 내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오이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만 믿음 든든하오니…ꡓ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ꡒ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ꡓ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알아듣기 힘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가 예수님을 떠나갔다. 심지어 우리더러 식인종이 되란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ꡒ너희도 떠나가겠느냐?ꡓ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ꡒ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ꡓ(요한 6, 67―68)라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 현존의 양면성 예수님께선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을까?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봉헌하신 사랑도 모자라 그 은혜를 계속 나누어주기를 바라셨다. 이젠 자신의 몸을 부수어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고자 자청하셨다. 그러므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흠앙해야 한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영혼에 양식으로 오신다. 또 감실 안에 계시면서 언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자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에 참례함은 물론 성체조배, 성체강복, 성시간에 자주 참석하여 주님을 찬양해야겠다. 그러나 다른 한 면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예수님은 성체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성체께 대한 정성을 드리는 만큼 그들에게도 그러한 정성을 드려 예수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의 세계는 물질 우선의 세계다. 옛날에는 신 중심의 신본주의 사회였다. 그러다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됐고 이젠 물질 중심의 세상이 되었다. 하느님도 뒷전이고, 인간도 경시되고 있다. 물질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혁명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흔히 역사상의 예수님만을 강조한다.




과거 2000년전의 예수님만을 공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오늘날의 예수님, 살아 계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 안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만나야만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감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들어보자. 성체 안에서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드릴 수 있다. 그분은 나의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김정진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귀한 성체와 성혈을 주신 것 즉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은 바로 수난 전날인 성 목요일인데, 이 날은 다음날에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표시를 충분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을 택하여, 즉 오늘과 같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대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에 관하여 감사 드리고, 그 심오한 현의를 생각하고,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시는 신비를 맛들이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첫째로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며 사랑의 성사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랑과 불길은 우리의 온갖 허물과 티와 죄악을 말끔히 불살라 버리고 미지근하고 냉랭한 이 마음에 선과 덕행에 대한 불꽃을 일으켜 줍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신들을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요한 14,18)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제자들과 이별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살과 피란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 28,20)라고 하시며 우리와 같이 언제나 계실 수 있는 놀랄 만한 방법을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




즉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성당의 감실에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며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어찌 이해를 못하겠습니까. 이 같은 사랑과 일치의 신비인 성체께 어찌 우리가 냉정하게 대하고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삽니다.>(요한 6,56)라고 하셨음과 같이 영성체 하는 이와는 일치의 생활을 도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영성체로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현존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신자 여러분! 둘째로 성체성사는 우리의 천상 양식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한 6,58)라고 예수님은 오늘 성경을 통하여 들려주십니다. 정말 성체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활한 빵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로는, 죽게 되었으나 이 천상 음식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기적의 빵입니다. 우리의 인생 항로는 고해(苦海)라고도 하는 힘들고 험준한 비탈길과도 같습니다. 자칫하면 힘없고 기운 빠지고 허기져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의 길이 사막의 길과도 같아서 메마르고 굶주리고 고독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천상의 생명의 빵을 주십니다. 때때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주십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신자 여러분!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고달픕니다. 너무나 지쳐 있습니다. 육신 생활보다 우리의 영신생활이나 신앙생활은 사방에서 도전을 받고 있고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관능주의, 안일과 오락 위주의 경향, 현실주의와 그리고 찰나주의 등은 우리의 신앙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으려고 덤벼듭니다.




겨자씨와 같은 우리 신앙의 등불은 풍전등화와 같이 가련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좌절감과 실의에 찰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힘과 위로와 도움을 주시는 분이 항상 우리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는 천상 양식으로 우리를 살찌게 하시고 어떠한 유혹에든지 승리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영혼으로 길러 주시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주실 뿐더러 항시 성당에 계시며 우리를 반가이 맞아들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나 신자들이나 만일이라도 성체와 성혈과 멀리 떨어져 산다면 그는 자기 생활에서 빛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날개 잃은 새요, 울 줄 모르는 카나리아나 종달새와 같이 자기 삶의 의의를 상실하고 존재의 가치를 잃은 자입니다.




오늘도, 아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누구나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입니다.>(요한 6,53)라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성체 성사를 가까이 하는 생활 습성을 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4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김몽은 신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초대 신자들 중에서까지도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걸려 넘어갔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사실 이것을 인간적인 지식으로써 알아들으려 한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요한 3,6)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2-63).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요한 6, 65).




그리스도의 진리는 원래가 초자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인 면으로만 볼려고 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육적인 면에서만 바라볼 때는 어리석게만 보일 것이다.


특히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은 인간적인 생각으로서는 해득할 수 없다. 우리는 성체 안에 감추어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영의 눈으로 바라본다. 지존하신 주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성체 안에 당신의 현존을 보존하신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 “살과 피”를 보존하신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신비로써 영속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항구히 그 믿는 자들의 영혼 안에 현존하시어, 함께 살아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게 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힘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기 위해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이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전해주고 있다.(마태 26,26-30 : 마르 14,22-26 : 루가 22,14-23 참조).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어떠한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임해야 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Ⅰ고린 11,23-26).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자.












5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서>


박승원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대축일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의 신비와 더불어서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그 중심이 되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 성체성사 안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최후의 만찬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미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바친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린 피”가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체성사가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준, 당신 교회에 남겨주신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최고의 선물이며 당신 사랑의 그 증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복음 말씀에서는 당신 자신이 살아 있는 빵으로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날의 부활을 위해서 당신의 몸인 성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말씀해 주신 이 생명의 빵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며, 그리고 이 빵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잠시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는데 은총과 진리가 가득 찬 분이시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즉 은총과 진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분의 살과 피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인 것입니다.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양식이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즉, 먹고 살기 위한 재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드는, 은총과 진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 자신과 당신으로부터 나온 진리와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우리가 모시는 이 그리스도의 몸은 한 잔의 포도주나 한 조각의 빵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명이 되는 살과 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빵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은총과 진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준행한다는 우리의 신앙적인 결단과 응답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영신적으로 살찌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적인 식사로써 우리의 영혼은 늘 재생하며,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 빵과 포도주를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의 체내에 흡수되어 육체에서 섭취하는 음식의 자양분이 우리의 몸 안에서 작용하여 점차 살과 피로 그 기능을 발휘하듯이 영혼의 양식도 또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영혼의 살과 피가 되어 우리의 영혼 생명을 유지하고, 나아가 쇠약했던 영혼의 기능을 회복시켜주고, 우리 덕행의 미흡했던 점과 악습을 고쳐주고 온갖 유혹에서 우리가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이 성체를 우리가 영(領)한다고 하는 것은 준주성범에 (나오는) 말처럼 “가난한 자가 천국의 왕에게로, 종이 그 주인에게로, 피조물이 그 조물주에게로, 그리고 아무런 위로가 없는 자가 그의 진실한 위로자에게로” 즉 사랑의 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신의 몸을 영할 때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처음으로 사람이 되사 동정녀의 복중에 내려 임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몸소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것처럼 아무런 부족함도 당신은 없으시면서도 당신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함께 살으시고자,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고자 당신의 몸을, 당신의 전실존을 연약하고 미천한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당신의 사랑이며 위대한 신비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그대로 받기만(보존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나의 살과 피가 되도록,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꼭꼭 씹어서 나의 살과 피가 되도록 먹어야 되겠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그대로 보고 듣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받아 모시기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어도 먹지 않은 소화되지 않은 빵과 포도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먹은 이 성체와 성혈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활력소가 되도록,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실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이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살과 피가 단순한 정신적인 양식으로서의 품목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손으로 집어들고, 눈으로 보기도 하고, 쪼개어 나누어 먹기도 할 수 있는 순수한 실체를 지닌 물질 즉 물리적인 현존인 것처럼 바로 성체가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으로서의 참여, 동참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우리는 영성체의 중요한 효과인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스도에로의 변형이 우리에게서 현실적으로 이루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그리고 강론 중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성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았는가에 대해서 잘 듣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겠다고 하는 원의를 갖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식이란 산자의 음식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산해진미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건강 상태가 나쁜 환자는 아무리 좋고 기름진 음식을 주어도 먹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그의 병을 악화시키거나 잘못하면 생명을 위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의 의사에게 가서 처방을 하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서 음식을 조절하고 병을 고칠 때까지 음식을 가립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영혼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데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영혼의 죽음을 뜻하는 대죄중의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의 영혼에 병을 고칠 때까지 영혼의 양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성혈을 모독하는 독성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기 위해서 먼저 영혼의 건강 상태를 진단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은총 지위를 잃고 영혼의 죽음상태인 대죄에 놓여 있다고 하면, 먼저 고백의 성사로서 우리 영혼의 병을 치유하고, 우리 영혼의 건강 상태인 은총 지위를 되찾은 후 성체를 받아 모실 바른 지향과 합당한 준비를 갖추고 모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체 전에 성체성사가 지닌 이러한 뜻을 생각하고 합당하게 우리가 성체를 배령할 수 있도록 영육간에 합당한 준비를 항상 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이 영광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대축일을 다같이 축하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 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사랑의 정표, 당신 몸을 정표로서 남겨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


윤경철 신부




우리는 많은 이별의 순간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군대에 가는 아들, 시집가는 딸, 돈을 벌기 위해 객지나 먼 나라에 가는 아빠나 친척…  작게는 일시적인 이별이 있는가 하면 크게는 사별이라는 이별이 있습니다.




영원히 함께 살 수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이별의 아픔이 있습니다. 이별의 순간엔 서로 어디에 가 있든지, 어디서 살든지 몸성히 잘 지내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마는 마음만은 항상 함께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다시 즐겁고 행복하게 서로가 만나기를 기약하며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며 살자는 뜻으로 정표를 주고 받습니다. 그것이 이별을 서러워하는 눈물로 얼룩진 손수건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거나 반질반질 닳은 새끼 반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서로 떠나야 하는 이별의 순간엔 정표를 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최후의 만찬은 주님께서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먼 나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아빠들처럼 하늘에 거처할 우리의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나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별의 자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이별하지 않으려 하고 항상 함께 있으려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우리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간직할 수 있도록 사랑의 정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정표는 무엇입니까? 전쟁터로 떠나 보내는 애인이 주는 것과 같은 한 줌의 머리카락이었습니까? 주님이 끼시던 반지, 주님의 옷, 주님의 얼굴이 주님의 얼굴이 담긴 그림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살과 피, 즉 몸이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어 계시지만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몸, 성체를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적어도 주일에 한번 모여 주님의 몸을 나누어 먹고 마시는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당신의 몸을 주시는 신비를 항상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체는 살아 계시는 자신의 몸을 우리가 먹고 마시도록 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성부께 대한 최대의 사랑과 순명을 나타내고 조건 없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성체를 먹고 성혈을 마시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에 영원히 살겠다는 인류의 종교적 염원을 성취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는 말씀과 같이 주님과의 일치요 만남입니다.    또한 이 세상 끝날 때 우리가 참여할 영원한 잔치의 예고이며, 보증이고, 또한 전야제입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의 정표를 받았지만 마음이 산란하고 미덥지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여 계신 살아 계신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없다는데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여 계신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얀 빵과 포도주가 보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써 볼 때 참으로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여 계신 주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굳건히 하여 주님을 볼 수 있게 아빠, 아버지께 항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기쁨과 희망과 약속을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우리 마음에 모셔도 주님을 체험할 수 없을 때 부족한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 주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에 엄히 책망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책망하여 경고하실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7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가해)  하느님을 먹는 사람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8,2~3.14b~16a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제2독서 고린 10,16~17 (빵은 하나이고, 우리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복 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 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 천주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서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치명자들이 나왔지만 그러나 교회는 마치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이때 우리 교회가 박해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어이없게도 신자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어린이들을 잡아먹는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살과 피를 인간의 음식으로 나눠주셨습니다. 당신의 살을 나눠주시는 방법 또한 실로 오묘하고 신비로웠습니다. 누가 지금까지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까. 막말로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잡아먹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당신은 그 몸을 떼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느님을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주시는 최고의 전례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살을 음식으로 나눠주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사이면서 동시에 천상의 식사로 불리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사랑입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혹은 매일 주님의 거룩한 성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감히 하느님을 먹기 위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먹는 우리는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살까지 먹는 우리가 이웃에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마치 도둑이나 강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갖도록 합시다.




오, 거룩한 신비여! 하느님의 사랑이여! 이를테면 별 해괴망측한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서 인륜을 거스르는 야만적인 집단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로마의 오해요 또한 탄압 구실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몸을 서로 나눠 먹기 위해서 함께 모였습니다. 이것은 또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루가 22,19. Ⅰ고린 11,23~25참조).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그분의 업적을 가슴에 새기고 또 그것을 실천했으며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서로 나눠 먹음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힘과 지혜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살과 피를 서로 나눠 먹는다는 내용이 와전되어 마치 천주교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이비 종교로 오해되고 조작되었던 것입니다. 오해는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셨을 때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 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아주 큰 불평과 거부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요한6,66). 생명의 양식인 성체는 인간이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먹을수록 죽어갑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병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들고 다니면서 먹고 마십니다. 들어갈 곳이 더 없을 것 같은데도 계속 먹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썩어 없어질 양식에 지나치게 묶여져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먹어댑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까지 우리에게 주셨는지 진지하게 묵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죽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살고자 한다면 무엄하게도 하느님 을 먹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먹는 방법 이외에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먹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며 생각만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대죄악입니다. 인간의 미래는 그래서 절망이었습니다. 아주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살과 피를 인간의 음식으로 나눠주셨습니다. 당신의 살을 나눠주시는 방법 또한 실로 오묘하고 신비로웠습니다. 누가 지금까지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까. 막말로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잡아먹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당신은 그 몸을 떼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느님을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주시는 최고의 전례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살을 음식으로 나눠주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사이면서 동시에 천상의 식사로 불리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사랑입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혹은 매일 주님의 거룩한 성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감히 하느님을 먹기 위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먹는 우리는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살까지 먹는 우리가 이웃에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마치 도둑이나 강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갖도록 합시다. 오, 거룩한 신비여! 하느님의 사랑이여!












8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 (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증거하자


허영업 신부




주님의 일을 하는 제자들




나환자들의 성자인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 수용소 몰로카이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욕설과 싸움이 그칠 줄 몰랐고, 비관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미안 신부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다미안 신부에게「하느님 사랑 좋아하시네! 하느님이 있다면 우리가 나병에 걸리게 내버려두고, 썩은 채로 죽어가게 하겠어? 만약 하느님이 있다해도 그런 하느님은 못믿겠어. 하느님이 사랑이다 뭐다 하는 것은, 건강한 당신 같은 사람이나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야‥‥」하며 빈정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미안 신부는「오 주여! 나로 하여금 문둥병 환자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열고 하느님 사랑을 깨우치게 하소서!」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결국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기도대로 나병에 걸려 손바닥이 썩어들어 갔다.


  그 때 그는 「나도 너희와 같은 나병환자다. 비록 육체는 썩어가지만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있다. 나를 따라 하느님을 믿어라」고 외쳤다.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했다. 드디어 지옥 같은 몰로카이 수용소는 믿음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갔다. 다미안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훌륭한 삶을 살다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세계는 다미안 신부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정신을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파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주신다. 제자들의 파견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결코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고, 무능하고 둔한 사람도 있었다. 세속적인 기준, 즉 좋은 학벌, 명석한 두뇌, 훌륭한 가문 등으로 제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신 기준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수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이들이었다. 마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중요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믿고 활동한다면. 그것은 자칫 자신을 내세우는 꼴이 되기 쉽다. 자신이 철저히 도구됨을 인정할 때,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제자들의 복음선포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의 선포와 같은 것이다. 「하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한 제자들도,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선포는 심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선포를 받아들이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이나 또한 뉘우침과 회개의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히 제자들의 기적행위는 복음선포의 징표와 증거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분명하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하고,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제자들을 판견하시면서 나누어주셨던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다.


우리가 겸손되이 청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9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나를 잊지 말아다오 – 알고 믿기 전에 사랑해야>


변기영 신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믿기 어려워 하지만 믿어야 할 교리 중의 하나는 바로 성체성사에 관한 것입니다.


또 7성사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거해되고 자주 받게 되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기적이면서도 흔히 큰 정성 없이 심지어는 흔히 무심한 태도로 참여하고 소홀히 받게 되기 쉬운 성사 중의 하나가 바로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성체성사를 알아들으려고만 하고 믿으려고만 하는 그 노력에 치중한 나머지 성체께 대한 사랑과 흠숭에는 크게 부족하거나 혹은 아예 거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근본 목적은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까? 성체를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이제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성체성사를 세우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성체성사의 그 신비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나 혹은 믿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계속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부터 신자들은 이 성체성사를 ‘사랑의 잔치’, ‘사랑의 식탁’ 등으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성체성사 건립의 근본 동기와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모든 신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들과 현세에서도 늘 영육으로 인성과 신성으로 함께 살고자 하셨고 이들을 사랑하고자 하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따를 모든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예를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은 바로 ‘나를 잊지 말아다오!’ 하는 말씀이요. 이는 다른 말로 ‘나를 사랑하여 달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은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거나 ‘신앙’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려고 해야만 할 성사인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이해와 신앙보다도 우리의 애정을 요구하는 성사이며 존경과 흠숭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사는 애정과 흠숭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합리주의자들은 흔히 주장하기를 ‘사랑’이란 ‘이해’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적지 않은 종교인들은 ‘신앙’이 ‘애정’에 반드시 선행해야만 하는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전에 신앙하기 전에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교가 그의 유명한 신애론(神愛論)에서 사랑의 선행성(先行性)을 말하고 있듯이 순진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영혼은 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해’와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진한 영혼의 진정한 사랑은 ‘이해’라는 조건을 귀찮게 여기며 ‘신앙’이라는 장애물을 짐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대한 참다운 사랑을 가진 자라면 ‘이해’와 ‘신앙’이라는 조건이 짐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이해하고 신앙하기 전에 사랑하고 흠숭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외교인들에게서나 요구되어야 하는 조건 즉 ‘이해’와 ‘신앙’을 넘는 ‘신앙인’이 아닌 ‘애인’의 태도가 아쉽습니다.


그러므로 ‘성체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흠숭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성체’를 알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입니다. ‘성체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될 것이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영원히 사랑과 흠숭을 받으소서!












10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 51-58>(가)   신비의 교리인 성체성사






5년전 뉴욕타임스에 가톨릭 신자들의 성체에 대해 이해에 관한 설문조사가 실렸었다. 50% 정도의 신자들이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나머지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신자들은 어떻게 답할까?




미사 중에 사제가 빵을 축성하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또 포도주와 물을 섞어서 축성하면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설문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믿기 힘들다고 응답하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자, 과연 성당의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예수님에서 확실히 현존하신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이에 대한 응답에도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신자이면서 이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헌장 제11항에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전체의 원천이요, 그 절정이 성찬례다”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 안에 우리 신앙이 요약되고 집약되므로 이를 부정한다거나 의심한다는 것은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미사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여 영적 양식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의 미사참례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 많은 준비를 한 후, 미사에 임할 것이 분명하다. 또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믿으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예를 돌면 성당에 자주 오고 싶어할 것이고, 볼일이 있어서 성당에 왔을 때에는 우선 성전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 나가 무릎꿇고 기도할 것이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신비의 교리




미사 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신자들에게 성체를 주기에 앞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려고 나아간다. 비신자들이 이 광경을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성적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 빵이 몸으로 변했다고 믿고, 그 빵을 받아 먹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나가느냐고 빈정댈 것이다. 어떤 이들은 웃기는 얘기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분명히 신앙으로 믿고 모시러 나간다.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신비의 교리다. 이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신비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믿기 위해서는 신비한 방법이 요구된다 하겠다. 즉 성령께서 비추어주셔야만 이 신비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성체 찬미 기도에서 “두가지 허울 안에 분명 숨어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사옵기에 ,내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오이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만 믿음 든든하오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현존의 양면성




예수님께선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을까?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봉헌하신 사랑도 모자라, 그 은혜를 계속 나누어주기를 바라셨다. 이젠 자신의 몸


을 부수어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고자 자청하셨다, 그러므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흠앙해야 한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영혼에 양식으로 오신다. 또 감실 안에 계시면서 언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자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에 참례함은 물론 성체조배, 성체강복, 성시간에 자주 참석하여 주님을 찬양해야겠다.




그러나 다른 한면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예수님은 성체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성체께 대한 정성을 드리는 만큼 그들에게도 그러한 정성을 드려 예수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의 세계는 물질 우선의 세계다. 옛날에는 神 중심의 신본주의 사회였다. 그러다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人間 중심부 세상이 왔고, 이젠 物質 중심의 세상이 되었다. 하느님도 뒷전이고, 인간도 경시되고 있다. 물질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혁명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흔히 역사상의 예수님만을 강조한다. 과거 2000년 전의 예수님만을 공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오늘날의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 안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만나야만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감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들어보자. 성체 안에서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드릴 수 있다. 그분은 나의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11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가) 내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며 음료


사무처 홍보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다. 이 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성만찬의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살아있는 빵(요한 6,51-52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유다인들이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며 대꾸했다. 예수께서 성체성사적으로 언급하신 ‘살’을 유다인들은 신체적인 ‘살’로 오해했던 것이다.


내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며 음료(6,51-52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 즉 인육(人肉)으로 곡해했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요한 복음서 작가는 “인자의 살과 피”로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각했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절)    성체와 성혈을 모시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의 음식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58절)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며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만나와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임을 강조하시고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뜻깊은 설교를 마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면서 성만찬 전례를 거행한다. 성만찬의 근본 의미는 오늘 제2독서인 고린토 전서(10,16-17)에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만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요 그리스도인 서로간의 친교의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이 성만찬을 “빵 나눔”(루가 24,35; 사도 2,42)이라고 부른 것이다. 최후 만찬 때 예수께서 “주는 몸”, “쏟는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성만찬의 핵심은 바로 나눔에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오늘 복음 말씀에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서로간의 일치를 위해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12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가)   생명의 빵


최인호 베드로/작가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은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생활도 했었고, 정치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어렸을 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한때 종교를 부정하기도 했던 그는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와 누이가 희생당하자 가톨릭에 복귀, 호교론(護敎論)의 열렬한 투사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란 책을 썼습니다.


이후 자연에의 동경, 연애지상주의적 정열, 허무주의적 번민 등을 화려한 필체로 묘사함으로써 낭만주의 문학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말년에는 방대한 자서전 「무덤 저편의 추억」을 집필하였는데 이 자서전에는 15살 때 첫영성체를 했던 자신의 기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활절 전주 수요일에 판공성사를 받으러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저의 첫영성체 전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했습니다. 성당에 도착하여 저는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완전히 도취된 채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마지막으로 올바르게 고해하고 거룩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온몸이 떨려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놀랄 정도의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제 영혼을 압박하던 어떤 부담감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커다란 기쁨이 제 마음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런 축복과 사랑이 언제나 저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참회의 눈물이었고 천국의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루 뒤인 성목요일에 샤토브리앙은 마침내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주님께 저 자신을 바쳤습니다. 성찬례 때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 것을 마치 어머니가 옆에 같이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을 벌려 성체를 받았을 때 저는 제 자신이 축복을 받는 상태로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격과 경외심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제 마음속에 불을 붙여주셨기 때문에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 마치 순교자처럼 기꺼이 제 생명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샤토브리앙은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을 첫영성체 함으로써 자신이 축복받은 상태로 변화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참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밀로 만든 떡을 먹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3             성체성혈 대축일 :  두려움 없이 성체를 모시자


신은근 신부




성체와 성혈은 직역하면 거룩한 몸과 거룩한 피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말한다. 역사 안에 살아 계셨던 예수님, 이제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정신과 얼을 말한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고 있다. 작은 빵을 먹음으로써 이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 정말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었던가.


첫 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게 산만하던 아이들이 너무나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 어린아이들이 온 몸으로 성체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서 하나의 답을 발견하게 된다. 선입견 없이 성체께 나아가는 자세다. 두려움 없이 성체께 다가서는 모습이다.




ꡒ영성체가 무엇이지요ꡓ 하고 물으면 ꡒ서슴없이 예수님을 모시는 겁니다ꡓ 하고 답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아무런 의심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이 정답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도 살아서 그들에게 오신다. 그들의 당당한 모습 안에는 분명 성체성사의 힘이 실려있다.


너무 자주 우리는 성체성사와 죄를 연결시킨다. 성체 앞에 완벽한 모습으로 나설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죄를 느낀다면 더욱 성체께 나아가야 한다. 성체는 일부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죄 없는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성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 앞에 나서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죄와 연관된 성체신심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를 먼저 생각하는 신심을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배우게 된다.




성체는 근본적으로 음식이다. 영적 힘을 주는 하늘의 음식이다. 어린이들이 거리낌없이 성체를 모시듯 우리도 두려움 없이 이 음식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또한 아무 주저함 없이 주님이 주시는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며 ꡒ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ꡓ 하고 말씀하신다. 최후 만찬의 모습이다. 우리도 미사 때마다 이 말씀을 되풀이해서 듣는다. ꡒ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ꡓ 무엇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인가.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건과 나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관계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아닌가.




사건이 빵이고 사람이 빵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빵이다. 받아먹어라 하고 주시는 빵이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분처럼 누군가에게 빵의 모습으로 가야 한다. 가는데 힘이 부친다면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만화영화에 뽀빠이라는 것이 있다. 악한들과 싸우다 힘이 빠지면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다시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악의 세력을 이긴다. 성체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영적 에너지를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지난날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셨다면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도록 하자.












34               성체성혈 대축일 <성체성사와 복음화>


변갑선 신부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며(교회헌장 11항),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사제직무 5항). 그처럼 중요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몇 까지 요점을 관찰하여 본다.




1. 자연(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제2위 성자께서 그 안에 강생하여 오시고, 세상 사물로써 성세와 견진과 성체와 같은 성사를 세우신 것으로 보아, 거룩하게 되고, 성사가 되었다. 성체성사의 경우, 밀과 포도 그리고 잔치(식사)가 거룩하게 된다. 즉 성체와 성탄이 된다.


사물은 성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물과 곡식과 같은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는가?


 


곡물이 먹는 데 가치가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사물엔 고유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 부가가치라고 할 수 있는 증표의 가치도 추가될 수도 있다. 후자의 가치를 정신적 가치라고 할 수 있으니, 이를 증표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주는 부인은, 자기남편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하는 물질적가치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으니, 이는 곧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표를 말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남편은 그 음식을 마련한 아내의 깊은 사랑의 증표를 볼 것이다. 성사에 사용되는 물질들은 그들의 고유한 가치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증표의 가치를 발효하는 것이다.


 


성체성사의 경우, 밀과 포도는 풍부한 의미를 깨우쳐 준다. 주님께서 당신을 하나의 밀알이라고 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 땅 속과 밀알이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그대로 있으면 새 것을 낼 수 없다고 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죽고 묻힘으로써 많은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


 


식사의 의미도 너무나 풍부하다. 한 가정의 식구들이 아빠가 땀을 흘려 벌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한 상의 주위에 앉아먹을 때, 화목과 일치의 감정도 또한 풍부한 것이다. 인간에게 먹히는 음식 또한, 자신이 완전히 부서지고 없어짐으로써, 보다 높은차원의 생명체로 승화되는 것도, 또한 신기한 자연 현상인 것이다.


떡과 술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신자들이 서로 일치한다는 뜻을, 곡식과 잔치상에서 깨우치고, 실제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굳게 믿고, 받아 영하는 성사를 성체성사라고 한다.




2. 참된 현존


  초기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사귐과 나눔을 강조하였으나, 중세기부터는 개혁자들이 성체의 현존을 반대하고, 제사적 성격을 부정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현존과 제사의 뜻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근자에 와서는 성체성사의 친교와 나눔에 대하여 다시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성체성사 안에 주님께서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뜻을 부정하는 측도 있다. 실체 변화에 의한 현존을 목적변화나 의미 변화로 바꾸어 설명하려 드는 것이다. 이는 큰 오류이다. 왜냐하면 목적이나 의미 변화는, 실제적 변화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 변화의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목적이나 의미 변화로 설명을 대행시킬 수는 없다. 다만 실체변화를 인정하는 조건하에 보충 설명조로, 목적과 의미 변화를 인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3. 형식(의식 전례)과 삶


   우리 교회의 예절과 의식과 전례를 형식이란 범주 안에 포괄하여 말할 때, 부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형식과 삶을 비교하여 관찰함으로써, 형식과 삶의 조화를 이루는 데 실효를 거두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이고 구약 시대와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한 신자들은, 형식을 통하여 주님을 대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위로를 받고, 신앙심을 고취시킨다. 반면에 진보적이고 신약 시대와 같은 새 시대의 신자들은 실천과 삶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위로를 받는다. 화려한 대성당과 성대한 대미사와 같은 전례 거행에서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기쁨을 나누는 것도 종교의 중요한 행위인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네어 주는 행위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천임은 확실하다.




성세와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성사들을 거행하는 장식과 꾸밈과 같은 형식면에 있어서는 과장이 있을 수 있으며, 실천면에까지 연결되지 않을 때 허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면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자주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서구의 대성당들과 장엄미사에 참여하는 것도 좋으나, 주님을 생활로써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인도의 마더 데레사를 찾아가거나 돕는 것은 얼마나 더 크리스천다운가? 쇄신적이고 진보적이며, 선진하는 교회는 초기 교회로 하루 빨리 되돌아가는 교회이다. 성령께서 하루 빨리 새로 강림하시어 쇄신의 불을 우리 마음 속에 놓아주셔야만 하겠다.




4. 무엇이 더 중요한가? (우선 순위의 문제)


  위에서 암시했거니와, 우리 생활 전체가 그러하거니와 신앙 생활과 성사배령에 있어서도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혼돈하거나, 첫째와 둘째의 서열을 어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체축성을 하여 아버지께 바치고, 신자들이 받아 영하는 성사를 미사라고 한다. 이 미사에서 우리는 불가견적인 신비를 바치고 모신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기쁨과 슬픔이, 다 볼 수 없는 제물이 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가견적인 것도 바친다. 면주와 여러 까지 장식과 헌금과 같은 행위가 이 요소에 해당된다. 가견적인 것, 즉 보이는 것들은 안 보이는 것들의 증표가 되며, 지참자가 된다. 성체 거행에서 우리는 감각으로 느껴야 할 것이 있고, 믿음으로 포용해야 할 신비가 있음을 식별할 수 있다. 믿음도 없고 감각도 없을 때, 미사는 허무한 것이 됨으로 “개”와 같은 짐승에게는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는 것 중에도 면주와 다른 장식에는 큰 차이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사랑의 실천과 다른 장식과 형식들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집고 넘어 가려고 한다.


이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교회의 미사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9장과 12장에서, 주님께서는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보다는 불우한 이웃들을 도와주는 자선을 몇 배 이상 좋아하신다고 역역히 말씀하셨다.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형식이나 전례로 이해하고, 봉헌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선이라고 한다면, 미사는 장식과 형식보다는 이웃들을 돕는 자선 미사로 쇄신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교회가 신자 자신들은 물론 이웃들에게 감화를 준 것은, 놀라운 일을 자주 보여준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란, 기적들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돕는 형제애였음이 확실하다. 그 시대의 신자들이 서로 도와준 결과, 어느 지역에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고 돕는 행위가 빵의 나눔, 즉 미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오늘의 시대의 징표는, 이기주의와 빈부의 격차에 대한 사명감이다. 정치인들이나 일반인들이 힘겨워 하는 과업을, 교회가 성체를 중심으로 차츰 차츰 해낸다면, 복음화가 이 땅에 이룩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은 날로 빛나게 될 것이다. 이기주의와 사리사욕에 휩쓸려 어두워만 가는 사회는, 확실히 밝은 내일을 갈망하고 있다. 이때에 하나의 밀알이 되고, 밥이 되고, 희생물이 되신 주님을 성체성사를 통하여 바라다보고, 마음 속에 모시자는 것이다. 자기 중심의 물결에 휩쓸리다보면, 교회도 나눔의 미사에서까지 나만 알고, 내 본당과 내 교구만 아는 이기적인 형식에 휩쓸려, 축복을 외면하는 행사만을 거듭하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사를 초기 교회와 같이, 주님의 뜻에 따라서 자선 미사로 봉헌할 때, 복음화가 생생하게 성취될 것이며, 미사는 내세를 약속하면서도 현세에서 평화롭고 다정다감한 인간 사회를 이룩하는 데, 머릿돌과 같은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몸과 피와 모두를 주시는 주님을 모시는 신자들이, 이웃들에게 가진 것을 주는 것을 적극적으로 할 때, 축복이 충만한 미사로 쇄신될 것이다.












35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성사와 교회 인과관계


정연혁 신부




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할 때 많은 학자들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교회는 성체성사를 이루고, 성체성사는 교회를 이룬다」 이런 표현은 인과론적으로 이 두 실제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많이 쓰이는 것으로「교회가 성체를 이루리라」는 말은,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는 존재로서 해야 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고, 「성체가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성체성사로 거룩하게 되는 하느님 백성의 수동적인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데, 그 성체성사의 의미는 용서의 구원, 화해의 d일치, 사랑과 나눔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화해의 이치를 제자들이 계속하도록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이 성체성사를 이룹니다. 즉, 희생제사인 성체를 제단에서 사제들이 이루고, 새로운 계약을 상기하며,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체를 받아 모신 이들이 교회에 머물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비를 실천하면서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체성사와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여서 다음에 무엇이 생겼다는 시간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영성의 차원에서 서로가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실제의 관계에는 하나의 또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체성사가 교회에 대해서 보다 원천적이고 근간이 되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즉, 성체성사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신비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체성사로 표현이 되었고,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의 표시와 상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면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런 이유로 완전히 하느님을 표현하는 신비입니다. 반면에 교회는 이 신비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기에, 성체성사가 갖는 의미는 교회가 공동체로 갖는 의미보다 더욱 심오한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교회에서 드러나고, 교회는 성체로 살아갑니다.












36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성사 신비는 신앙의 핵심






2000년 대희년, 새 천년의 첫 해를 여는 올해 첫 부활절을 앞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세계 사제들에게 보내는 성목요일 서한을 발표해, 사제직의 한가운데에 성체성사의 신비가 자리잡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신비는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스스로의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 다시금 부활해 인류 구원의 위업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매일매일 전세계에서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이 성사를 통해 우리 곁에 실제 현존하신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사제직에 있어서, 성체성사의 신비는 그 핵심이다. 교황은 서한에서 모든 사제들은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자신의 거룩한 고독을 이겨내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위안과 힘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제의 거룩한 삶과 성덕이 평신도들의 참된 믿음을 굳게 해주고, 성화를 돕는다는 것은 물론이다. 교황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성체성사의 빛 안에서 우리들의 사제직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매일 미사에서, 그리고 특히 주일미사에서 이 보화를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체의 신비스런 변화가 바로 희생제사로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의 거룩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겸손을 본받아, 자신을 끝없이 희생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자 하는 사제들의 성덕은 모든 신자들을 감화시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이끌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체성사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다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매일, 매주일 미사를 그저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참례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황은 서한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성체성사 안의 현존은 초월적입니다. 과거를 상징적으로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존이 이뤄집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상징이나 표징이 아니라 실제의 살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됨을 교회는 가르친다.


 


우리는 성체성사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고, 매번 참례하는 미사를 통해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신앙생활의 중심에 모시고자 하는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이다.












37        성체성혈 대축일 :   예수님의 몸인 성체야말로 진정한 양식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크나큰 물의를 빚고 있는 큼직한 사건들이 대개 재산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나 돈에서 시작된 것임을 보더라도, 물욕은 인간의 큰 본능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어느 변호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부님, 소송의 200%는 돈 문제입니다.” 그분은 소송의 대부분이 돈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인격형성과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하여 수행에 힘쓴 이들은, 과도한 재물의 위험성과 유혹을 경계해 왔다. 전도서의 저자는 재산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우환과 불행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재산 때문에 우환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불운이 닥쳐 재산이 달아나, 제 몸에서 난 아들에게도 물려줄 것 하나 없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처럼 알몸으로 돌아가더라”(5, 9-14). 동양의 성현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비숫한 가르침을 펴왔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잠언집으로 되돌아가서, 신앙심 깊은 그 사람은 부유하게 살면서 악한 생활을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살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선비와 같이 물질에 초연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원했다고나 할까? 잠언집의 그 부분을 현대판으로 바꾸어 “자비하신 주님,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자녀들 교육시킬 정도만 주십시오”라고 청하면,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교육비가 많이 드는 신자들의 생활을 볼 때 안쓰러워서 이런 생각을 해본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청원에는 육체의 삶을 지탱하는 청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의 해결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청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것은 우선 주 예수님의 몸인 성체다. 성체는 천사들의 음식이자 우리 영혼의 음식이다. 매일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은 은총 지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이다, 잘 준비하여 미사에 참례해 성체를 모시면 주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를 깨닫는 신자라면 결코 등한시할 수 없을 것이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려 할 것이다.


 


레오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서에서 활동하신 예수님, 권위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신 바로 그분이 교회의 성사 안에 그대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생활에서 드러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제는 전례의 신비 안에서 만나게 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세상의 구원자․생명의 빵․하느님의 어린 양․선한 목자 그리고 주님이시다. 우리는 미사중에 성사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현존해오는 구원적 행위를 신앙과 사랑으로 받아 누린다, 미사는 신앙의 큰 신비다. 바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사제가 신자들이 모인 자리, 특히 주일미사 때 설교 중에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복음의 내용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옛적에 하신 말씀과 행적으로서, 바로 오늘 이 제단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그분이, 성사적으로 오늘 이 자리에 현존하시어 영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행위를 그대로 재현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본성에 참여함




전례 중에 빵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온전히 내주시고,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받아 모심으로써 사랑이신 그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그분과 온전히 합일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미사의 정점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성화 은총의 선물로 하느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위격이 거하시는 장소 곧 성삼의 궁전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영성체는 수용자의 영혼에 성화 은총을 증가시켜 성령의 새로운 사명과 성삼의 내주(來住)를 더 풍부하게 한다, 그러므로 미사 중에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으면 미사에 완전히 참례했다고 볼 수 없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는 그분과 온전히 하나될 뿐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성찬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성찬이 거행되는 미사 전례에 더 충실히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세상 안에 투신하여 사람들에게 참다운 이웃 사랑을 전하며, 특별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변두리 인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들이 모두 그분처럼 살려고 노력할 때 될 것이다,












38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는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인간 사랑을 드러낸다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하는 겁니다.」 스스로 성체 신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라면 최근 공익광고에 나오는 이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성체 신심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께 다가가려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깊은 의미로 와 닿는다. 반대로 성체에 대한 공경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신비에 대한 묵상은 불가능해진다,




삼위일체대축일 바로 다음 주일에 지내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은 성체성사의 제정과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삼위일체대축일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라면, 성체성혈대축일은 가톨릭 교회의 존재 방식과 근거, 이유, 그리고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신자들은 성찬례를 통해 우리 몸 안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깊이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88년 전국의 신자들이 한마음이 되어 준비하고 성공적으로 치러낸 세계성체대회의, 그때 그 열성을 다시 한번 되살려본다.




◇ 인간적인 의문들




사실 빵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한다는 것을 이성으로 완전히 납득하고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과연 이 작은 빵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인가.” 최근에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러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신자들 중에서는 성체를 평가 절하하고 잘못 해석해,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성찬례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공동 식사로 바라보는 위험스런 시각도 있다, 이런 의문들은 오늘을 사는 신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1세기의 제렌가리우스(?~1088)는 성체 안에 예수가 실존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징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후에도 이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성체성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의문들은 중세로 넘어오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강하게 제기됐다. 


 


이런 논란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트리엔트 공의회에 와서 11개의 교리로 정립됐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상징 내지는 비유, 효력면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재적(實在的)으로 존재하며 ▲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1년에 적어도 부활절에는 성체를영해야 하며 ▲ 대죄중에 있는 자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교리를 발표했다. 이는 신앙고백으로 정리돼 교황 비오 4세에 의해 발표됐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 성체, 성체성사의 의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 서문에서 “영성체 때 영혼이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되고, 그분의 진리를 깊이 파악했기 때문에, 물고기가 바닷물 속에 있고, 바닷물이 물고기 속에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내 영혼 안에 있다”며 성체성사에서 오는 은총을 찬미했다.


 


성체 ․성혈의 사전적 의미는 빵과 포도주라는 외적인 형상 속에 실재로, 본질적으로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이 성체는 세상 끝 날까지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실재적인 현존이다. 그리고 미사성제(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계속됨으로써, 모든 인류는 구원된다.


또 이 성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몸이 현존하는 성체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하게 하고 성부께로 이르게 한다. 성체는 우리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 신앙인에 있어 성체에 대한 신심은 매우 중요하다.




◇ 실천적인 문제들




  이처럼 성체의 의미가 더없이 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신자들의 성체 신심은 미약한 것처럼 보인다. 주일미사를 통해 예수의 성체변화에 감동받지 못하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신자들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실재적으로 매일 미사 안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또 성체와 관련된 성시간, 성체강복 등의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성체조배는 진리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뜨거움을 맛보게 한다. 성체조배에 임하다 보면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참된 평화를 느낄 수있다.




◇ 공동체와 성체성사




   성체성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공동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를 수 있으며, 같은 잔치에 참여하는 형제들과도 일치를 이를 수 있다. 이처럼 성체성사는 성사 그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같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신자들은 한 공동체로서 서로 일치되어야한다. 사실 성체를 함께 모시는 신자들은 참된 공동체의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성체 안에는 한 그리스도가 있고, 함께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초자연적인 생명의 나눔, 생명의 빵을 나누는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는 단순히 하느님과 신자 개인과의 교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신자들은 공동체의 성장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 공동체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성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과 피를 직접 내주신 그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성체는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인간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평화를 오늘도 모 든 이와 나누려고 하신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우리는, 이러한 ‘평환 확산’의 최선봉에 서야 한다.












39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를 자주 모시면, 정신과 영혼에 건강




●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강해질 것입니다. 성체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영광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도록 깨끗한 양심을 밝혀줄 것입니다. (성 예루살렘의 치릴로)




●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신다면 여러분 안에 생명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몸을 먹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생명을 간직한다면 역시 그분과 한몸이  됩니다. 이 성사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어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 그리스도는 두가지 방식, 즉 피(음료)와 살(음식)로 우리에게 온전하고 완전하게 존재하십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곁에 머무르며, 그분을 깨어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게 완전하게 가집니다, 한번 받아 모시든 수천번 받아 모시든 간에 항상 매 한가지로 오시며, 언제나 그분은 그대로 계십니다. (성 아퀴노의 토마스)




● 영성체는 내적, 외적 두가지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가지 모두 거룩한 성실과 헌신적인 갈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열렬한 갈망은 영성체를 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영혼이 은총생활을 누리기 위해 먹는 거룩한 음식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지녀야 합니다.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




● 영성체 후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의 스승께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에 감사의 표시로 입맞추고, 우리에게서 떠나시지 않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 세속적인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자주 영성체를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불완전함을 정화하고, 곤궁에서 벗어나고, 근심에서 위안을 찾고, 나약함에서 원조를 얻기 때문이라고 하십시오. 영성체를 자주하는 사람은 악에 더럽혀질 수 없을 정도로 생명과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이 생명을 주는 살을 먹으면 죽음을 가져오는 성향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 내가 방황하지 않을 때는 영성체를 한 후뿐입니다. 그때 내 주님께서 당신이 가장 힘있고 완전하며 완성된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여기에 인간을 사랑랬고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자신을 내어 주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태운 가슴이 있다.(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 영성체 없이는 현세에서 참된 행복도 없고, 삶은 견딜 수 없게될 것이다. 우리는 영성체로 기쁨과행복을 얻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성사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려고 했고 당신만이 채울수 있는 크고 널은 가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은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자주 방문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에게 은총을 조금만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가끔 방문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성체 안에 계신 구세주를 방문하는 것은, 악마를 이기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성체성사 없이는 즉 청소년들을 제단과 감실과 영성체대로 인도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성공리으로 할 수 없습니다.(성 요한보스코)












40                 미사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며 감사


구약시대 일곱 절기 그리스도 구속과 영광의 예표


김 상옥 수녀




오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정기적인 제사와 제물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그 중요성을 말해준다. 정한 때에 바치는 공식 제물의 양과 내용에 대하여는 목록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에제키엘 예언서 45, 18~46, 15절 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설명된 제사의 가르침은 시나이산에서 이미 받은 것이다( 출애. 23, 14~19). 레위기 23장 전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축절에 대하여 이미 상세히 나열한 바 있어서 민수기 28~29장은 이 레위기 23장을 더욱 확실하게 보안한 해석으로 보인다. 제사의 예물의 이름에 대해서는 레위기 1~7장; 민수기 15, 1~12 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의 규정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제사의 중요성과 그 실천에 있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게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참 제사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하느님께 서원한 규정을 잘 지킬 것을 바라는 뜻에서 다시 한번 제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제사의 목적은 ‘불에 살라 향내를 피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곡물을 삼가 정한 때에 어김없이 바치는데 있다’ (28, 2~3). 여기서 야훼께 드리는 제사는 8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날마다 바치는 번제,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 매월 초하루에 드리는 제사, 무교절에 드리는 제사, 추수절에 드리는 제사, 신년제에 드리는 제사,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 초막절에 드리는 제사 이다.




날마다 바치는 번제물 (28, 3~8)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9장 38절~46절에 더욱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유다 종교행사의 중심이 되었다. 오직 유배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 당하고 성소의 터까지 파헤쳐 졌으며, 날마다 드리는 제단 위에 부정한 것을 올려놓았다는 환상을 다니엘이 보았다(다니엘 8, 11~12 ). 같은 다니엘 11장 31절과 12장 11절에서는 정기 제사의 파괴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을 보여준다.




불살라 향내를 피우는 제사는 번제라고 하는데 번제단은 우리 죄를 전가 받은 짐승 (제물)이 희생되는 곳이다. 죄인이 제물을 가지고 왔을 때 제사장은 그 제물에 대하여 흠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한다. 하느님 앞에 드려질 제물은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한 제물이어야 한다.




그 제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도 티도 없는 온전한 제물로 우리 죄인을 위하여 희생되셨다. 여기에 대하여 제1대 교황이신 사도 베드로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1, 18~19).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받아서 제물에 안수하여 죄인의 죄를 전가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값은 죽음 밖에 없다. 그 죄인은 죽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번제단에 속죄하는 길을 만드신 것이다. 죄를 뒤집어쓴 양은 희생시켜 피를 쏟게 하여 죽게 한다.




그리고 그 피는 제단 뿔에 바르고, 제물은 태워서 하느님께 드린다. 제단의 뿔은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고 구원의 상징 이기도 하다. 열왕기 1장 25절에 아도니야가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의 뿔을 잡았다고 했다. 죽을 죄인이라도 성전에 와서 제단의 뿔을 잡으면 용서를 받았다. 이 제단의 뿔은 죽을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신비에 비유 할 수도 있다. 뿔은 능력과 구원을 상징한다.




구약시대의 많은 절기들이 신약시대에 와서 ‘단 하나’ 로 모아졌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구약시대의 일곱 절기 모두는 그리스도를 가르쳤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영광의 예표였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만찬’ (미사) 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요, 그 분의 다시 오심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미사는 구약의 모든 절기의 제사들의 통합이다!’ 무엇 보담 미사는 가장 완전한 감사( Eucaristo)이고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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