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0 주일






        1. 강길웅 신부(가)/ 2                2. 강아지도 주인의(가)/ 4


        3. 강아지도 주인의(가)/ 5           4. 강아지도 주인의(가)/ 6


        5. 강아지도 주인의(가)/ 7           


1.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만인에게 열려진 구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6,1.6~7 (이방의 아들들은 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리라) 


제2독서 로마 11,13~15.29~32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은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 


복 음 마태 15,21~28 (그대의 믿음이 크도다) 




아득한 옛날에 세상에는 여러 민족들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선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어 구원의 계획을 실천해 나가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천여 년 전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여느 민족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후손인 유대인들도 우리와는 근본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선 그들만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까지 부르면서 그들을 천시했습니다. 물론 지나친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이 꼭 유대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차적으로는 물론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유대인을 통해서 만인을 위한 구원이 하느님의 본래 계획이요 뜻이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어떤 종족이나 지역에 묶이고 한정된 신이었다면 그는 더 이상 ‘하느님’으로서의 존재 가치는 상실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서에서는 바로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의 은총 안에 포함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은 출신 성분이나 특정 민족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계명에 충실하면 어떤 이방인도 성전에 모일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기원전 520년경의 이야기인데 그때 이미 구원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전달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충실과 배신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을 포함해서 이방인에게까지도 확대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단적인 예가 됩니다.




‘띠로’와 ‘시돈’은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가파르나움에서 약 50km 떨어진 서북쪽 해안지방으로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곳은 특히 우상숭배가 심했던 곳인데 예수님께서 왜 그곳까지 가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치 않는 모순과는 달리 그곳에 사는 이방인 여자는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 뵙고 구원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면서 동시에 ‘개’라고까지 천시 받는 것을 개의치 않고 끈질기게 예수님께 매달리는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방인 여자를 무시하셨느냐 라는 내용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본래 이방인을 천시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방인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제자들 앞에 끌어내어 그들로 하여금 그 신앙과 용기를 배우고 또한 앞으로 전개될 제자들의 전도 활동에 있어서 이방인들이 주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구원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도 단지 천주교회 안에서 세례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도 안전한 길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답게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면 구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은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프리카 의 성자였던 슈바이처 박사나 중국의 고승 달마대사 같은 분들도 우 리 교회 밖에 있었다 해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정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왜냐 하면 구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폭넓게 열려 있는 것이며 또 자기 탓이 아닌 것으로, 천주교를 비록 몰랐다 해도 진리를 찾아 걸었던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길에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누렸던 특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여느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개신교 신자들과도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 모든 특권과 커다란 은총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많은 것을 암시해 줍니다. 아무리 무시당해도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는 신앙인, 가나안 여인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을 끝까지 낮출 수 있고 예수님을 신뢰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구원의 길은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늘 간직하도록 합시다.












2.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우리가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받는 첫인상은 강력하게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고 있던 여인의 딸을 낫게 해주겠다고 확언하시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믿음을 드높이고 있고 또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사업의 구심점으로 부삭시키고 있긴 하지만, 이야기 전체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는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을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교회의 사고와 활동 양식을 속박하는 듯한 매우 심각한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과연 복음선포는 그 당시 히브리인들을 지칭하였던 얼마 안되는 선민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유다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방인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또 복음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 끝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과정으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 보다 적절한 것인지 하는 등의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서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왹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사로잡힌 죄인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히브리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또 의로운 이들이건 죄인들이건 모두를 구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이것이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신다면, 우리처럼 예수님의 사랑에 젖은 사람들은 어쩌면 처음의 무관심한 단계에서 벌써 예수님께 실망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도 중에 예수께서 나에게 무관심하다고 느껴지거나, 일부 다른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신다고 느껴지거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 자신이 부적격하다고 생각되면 오늘의 가나안 여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의 말씀에서는 이 겸손하고 오래 참는 믿음도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3.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과 은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동 반경은 갈릴래아 지역을 넘어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넓혀집니다. 이 두 도시는 모두 이방인의 도시입니다. 예수는 이방인의 도시를 찾아가십니다. 여기서 예수는 가나안의 한 여인을 만납니다.




가나안 사람도 성서에서는 이방시하며 죄인시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을 예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냉정하고 예의에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일차적 소명은 길 잃은 이스라엘인들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 대답은 보편적 구원사상에 반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메시아가 왜 이렇게 배제적인 자세,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는지 우리에게는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이 대목의 공통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사랑에는 그 신원과 여러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 자녀, 부모, 가족, 이웃사랑 등등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편협한 사랑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실현에 있어서도 그 어떤 절차와 순위가 있음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그 시대, 그 현실, 그 문화전통을 일단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혈연보다 더 진하고 깊은 믿음의 차원을 역설하기 위한 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종교전통과 의식으로 보아 결코 이방인과 상대해서는 안되고 더구나 그들의 구원을 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믿음과 신앙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분 특유의 교육방법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믿음과 신뢰의 사람이었습니다. 냉정하고 무례한 예수의 대답에서조차도 마음 상하지 않고 더욱더 겸손되이 간청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를 믿었고 사랑했고 예수께서 꼭 치유해주시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인, 그는 하느님을 움직이고 기적을 가능케 하고 그리하여 그 사랑과 신뢰때문에 딸을 치유케 했습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면서 까지 예수의 은총을 간청했던 겸허한 이 여인의 믿음은 시공을 넘어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가장 의롭고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예수 친히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겸허했습니다. 자신을 끝까지 낮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과 신뢰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청이 꼭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었습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을 던진 사랑의 어머니이고, 끝까지 버틴 인내와 항구심의 모범자이기도 합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느님, 죄, 잘못, 약점 투성이인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비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우리 모두 은총의 새사람이 되소 하소서.  아멘.












4.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오늘 우리는 연중 제 20주일을 지내며 지난 주일의 주님의 말씀과는 대조적인 어느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의심을 품음으로 해서 물에 빠지게 되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면서도 그 믿음이 강하였기에 주님께서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자세나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자세를 비교해서 생각해 보고 우리들의 신앙의 자세가 어떤지 함께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한 사람은 예수님의 측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치없게 여기는 가나안 사람이란 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비교하고자 하는 이 성서상의 사건에서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더 컸습니다.




우리의 신앙 자세도 여기에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설마 그런 분들이야 없겠지만 혹 내가 너보다 영세받은 지가 오래됐으니 내가 신앙에 있어서는 네 선배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다니는 성당이 네가 다니는 성당보다 훨씬 크고 좋으니까, 내가 예수님과 더 가깝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외형의 것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로 향한 우리 믿음의 자세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가나안 여인에게서 우리는 바로 겸손되이 엎디어 간구하는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두 사람의 차이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포함해서 제자들 모두가 그토록 보고 모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먼 지방에서 단지 예수님을 소문으로 들었지만 그 믿음은 누구 못지 않게 열렬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여인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체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이웃을 통하여 그리고 대자연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그분을 바로 알아 뵙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오시는 그분을 바로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하고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척도를 외적인 것에 두는 수가 많습니다. 물론 외적인 신앙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해서 외적 경신 행위를 게을리 한다든가 하면 곤란하겠지요. 진정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을 바탕으로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교회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당을 열심히 나가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내적인 믿음이 부족해 혹 일상 생활에서 비신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랄 수 없으며 반대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사람이 성당을 다니는지 안다니는지 모르게 형식에 무관심하다면 그것 역시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둘째 독서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유다인이 화해를 했으며 그 결과 유다인들은 어떤 선물을 하느님께 얻었는지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제부터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 예수님에게 간구한다면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과 단단히 결합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5.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하느님 앞에서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사로잡힌” ‘죄인’ 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히브리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또 의로운 이들이건 죄인들이건 모두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이것이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마태오는 그 이야기를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고 있기 하지만 특히 대화의 내용을 풍부히 늘림으로써 예수께서 어떻게 해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배타주의’의 장벽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시고 비록 점진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주고 계시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끊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그 여자에게 덧붙여지고 있는 ‘가나안’ 이라는 호칭은 종족의 특성이 아니라 종교적 특성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즉 단순히 그녀가 이교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쫒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명백한 교훈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대화의 내용이 돋보이고 있는 이 이야기 전체의 내용을 통해 복음사가는 외형적으로는 대립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치되는 두 가지 태도를 명백히 밝히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는 그렇듯 간청하는 그 이교도 여인에 대해 멸시하는 태도는 아니지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봅니다. 그분은 처음에 ‘그녀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 불쌍한 여인들 도와주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폐쇄적인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당화시키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이 구절은 마르코 복음에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마르코 복음사가의 독자들 즉 이교도 출신의 독자들에게는 물의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선택된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던 유다 출신의 마태오 복음사가의 독자들에게는 물의를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호감을 살 수 있는 구절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그래도 그치지 않고 계속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더욱 가혹한 표현을 씁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암시적 표현은 분명히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점점 더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 보이는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자세에 양보하십니다. 이방인인 그녀가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그녀가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그리고 단호하기까지 한 예수의 말씀을 무색케 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 항변은 그녀의 깊은 믿음과 고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사도들과 특별히 사도 바울로는 이렇듯 언뜻 보이게 명백히 모순적인 예수의 태도에서 이교도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투신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보편적 가치 즉 ‘믿음’의 가치에다 구원의 최고 절정 능력을 부여합니다. 믿음의 가치는 보다 더 높은 가치 즉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신 ‘말씀’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말씀’을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널리 선포함으로써 21세기의 새 이방인들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분명 우리도 구원해주고자 하십니다. 아마도 오늘날처럼 구원이 절실히 요청된 것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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