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2 주일






        1. 김정진 신부(가)/ 2             2. 김몽은 신부(가)/ 3


        3. 양병묵 신부(가)/ 5             4. 최기산 신부(가)/ 7


        5. 강길웅 신부(가)/ 9             6. 교구 주보(가)/ 11


        7. 최인호 작가(가)/ 12            8. 주님의 길은(가)/ 13




1.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십자가와 사랑의 길


                                                        김정진 신부




우리가 얼핏 느끼는 점은 십자가의 길이라 하면 어딘가 무겁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사랑의 길이라 하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을 갖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고 불가분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근한 예로서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버이들은 항시 자식들이 혹시나 병들지 않을까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놓지 않는 그런 경우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마음의 고통은 심한 것이며 사랑과 고통은 정비례가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당신의 제자가 되는 유일무이한 길이란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하시려고 오신 것도 사랑에서이며 인류 구원이란 대사업도 십자가상의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성부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천주 성부의 준엄하신 정의와 공의하심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주 성부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조금도 대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성부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발로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천주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붙이심으로써 정말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합니다 (요한 3:16). 성부께서 예수님을 지상에 파견하실 적에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바라시고 또 명하신 것은 여하한 것과도 타협하지 말고 오직 사랑의 길을 최후까지 거닐어라, 또한 사랑의 힘으로 죄악의 권세에 승리하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신자 여러분! 죄악이 팽창한 사회에서 타협할 줄 모르는 예수님의 사랑이 죄로 마비된 당신의 인간들과 충돌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어두워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활동은 자기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코 예수님을 살해하여 세상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 일체의 이기주의를 떠나 자신을 방어할 권력을 포기한 사람은 온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여 천사들의 정예부대에 원조를 청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몸을 숨시기려고도, 당신의 교훈을 철회하시려고도, 당신의 태도를 고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의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재판관 아 에 대령하게 되셨고 십자가상에 매달리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가벼운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말씀 한 마디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최고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십자가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성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리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만이 십자가를 통하여, 즉 수고 수난과 죽음이란 형극의 길을 걸었을 뿐더러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직제자들 즉 사도들도 이런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가령 성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교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어려움과 고통과 단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명시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신 말씀이 오늘처럼 실감 있게 들려오는 때가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도 우리에게 좋은 존재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입에는 쓴 약이 병에는 좋다는 격이겠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십자가를 대신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처럼 우리를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즉 고통의 길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인간을 구원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멘.












2.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끊어버리라


                                                                김몽은 신부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말리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바라고 원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기를 꺼려하는 수가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에 빠질 수 있는 우리를 깨우쳐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바로 이 세상을 구하러 온 메시아로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수제자인 베드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의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탄에게 자신을 허락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뵈옵는데 장애물이 된다. 예수님께서 인간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갈 길을 가리키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처지를 살펴보건데, 인간은 유한한 육체를 갖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악과 죄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천국으로 초대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무한한 사랑과 영광에 감사하면서,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하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거룩하고 진리의 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자유 의지를 받은 인간은 인격적으로 인간성을 완성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구원의 길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계속적인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해 가는 것은 원칙으로 삼는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희생의 짐을 진다는 말이다. 그 이웃을 섬김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시간, 노력, 안일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께 온전히 복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의 생활에 새겨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라는 말씀은, 사람의 갈 길은 어떤 길을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되어있다.




즉 그 하나는 이기적인 길로서 하느님의 길보다 자기 길을 택하는 것이며, 또 다른 길은 자기보다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우리 자유 의지에 속한다. 선택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 선택에는 우리에게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연적 진리에 속한다. 한 알의 씨가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경건한 충고나 권고가 아니라, 생명의 원칙이요 태초부터의 하느님의 뜻이 그러한 것이다.



삶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참 삶은 영혼의 평화와 마음의 기쁨을 누리며 가치있는 세상을 사는 것으로서, 이는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의 즐거움을 모르면 그 삶 자체가 무가치하고 마침내는 영원한 삶을 잃게 된다. 그의 삶은 온전히 땅에서 썩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3.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사탄아 물러가라!


                                                   양병묵 신부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장 큰 권한을 맡기시고 사랑하시던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이해가 안 가는 말씀입니다. “시몬 바르요나 당신은 베드로(반석)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또 나는 당신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당신이 땅에서 매어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인 채로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어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린 채로 있을 것입니다”(마태오 16,17-19).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 당신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합니까?”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지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시오”하고 이르셨다. 이와 같이 “내 양들을 잘 돌보시오”(요한 21,15-17)하시기를 세 번씩이나 당부하시어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까지도 돌보라고 하실 만큼 사랑하시던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교회를 통치할 권한과 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해 주셨지만 인간 베드로로서는 약점과 잘못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고 잘못을 했을 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예로써 예수께서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잡혀 십자가 형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알려 주셨을 때 베드로는 비록 예수님과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을 때 예수께서는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배반하리라는 것을 예고하셨고 베드로는 참으로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닫고 절치 통곡했음을 성서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성서에서도 예수께서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그들의 손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만 믿고 그 분을 항상 같이 따라다니면서 그 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아서 이제는 이 분만 꼭 붙들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겁날 것이 없을뿐더러 한 자리 톡톡히 하리라고 생각하였던 베드로로서는 당연히 안된다고 뛸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강생하신 목적,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수고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무고하신 계획에 반대하는 베드로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가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같이 대하고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서 때때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장애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신자로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주일 미사에 참여하려는 우리를 더 달콤한 하루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등신, 낚시, 야유회, 운동 혹은 다방, 술집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경우, 또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신자들에게 재물의 탐욕을 일으켜서 같이 불의의 손을 대도록 유인하는 경우 우리는 과연 오늘 예수님과 같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가장 사랑하고 믿던 제자였지만 당신의 뜻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방해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까지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신앙생활을 올바로 지켜 나가기 위해서 장애되는 것을 용감히 끊어버리고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오늘 성서에서 말씀하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마태오 16,24-26)하신 말씀을 잘 묵상합시다.












4.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십자가, 싫어요” 


최기산 신부




ꡒ너희 집에서 뿔 달린 시커먼 마귀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하는 걸 봤어ꡓ라고 누가 내게 말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ꡒ네 얼굴에 사탄의 그림자가 보여ꡓ라고 말하면 가만히 있을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미친놈이라고 쏘아붙이든지 입술이 터지라고 주먹을 날릴 것이다. 어떤 신자가 내게 말했다. ꡒ신부님, 저희 집에 오셔서 기도 좀 해주세요. 아파트에 새로 입주했는데 불안해서 죽겠어요.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저희 집 옆으로 시커먼 것이 스쳐 지나가는 걸 봤대요.ꡓ 사람은 약하다. 특히 사탄의 그림자가 지나갔다고 하면 심장이 떨리는 것이다. 하물며 사탄이라니!




사탄아 물러가라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즉 성유로 축성된 임금으로 고백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임금님이 힘없이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받다가 죽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가 이해한 임금은 백전백승의 승전보를 계속 들려주는 그런 임금이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꾸짖는다. ꡒ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난받고 죽다니요.ꡓ 메시아는 승자이지 패자일 수 없다고 꾸짖고 있다. 예수님은 ꡒ사탄아 물러가라ꡓ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받으실 때 사탄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ꡒ고약한 놈 같으니라고!ꡓ라는 말보다 ꡒ사탄아 물러가라ꡓ는 말이 더 심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ꡒ이 못난 인간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뜻을 먼저 생각하다니!ꡓ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ꡒ사탄 같은 놈!ꡓ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탄이라고 쏘아 붙이셨다.




십자가를 지고 죽게 된다는 예수님 말씀 앞에 사색이 됐던 베드로처럼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멈칫하게 된다. 십자가는 생각도 하기 싫어한다.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알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과는 다른 때가 많다. ꡒ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같지 않다.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다ꡓ(이사 55, 8 참조).




예수님은 ꡒ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영생을 얻는다ꡓ고 말씀하셨다.




십자가 없이는 살 수 없어




인간은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산다. 종로 네거리를 막고 서서 물어 보라. 십자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경제․가족․건강․사랑․친구․회사 문제 등등. 바오로 사도도 항시 가시로 찔리는 것 같은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그 고난이 힘겨워 기도도 했었지만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런 십자가가 없으면 자신이 너무 교만해질까봐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었다는 것이다.(Ⅱ 고린 12, 7―10) 그는 ꡒ주님의 십자가 이외에 자기에겐 자랑할 것이 없다ꡓ(갈라 6, 14)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ꡒ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ꡓ(필립 3, 10)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를 채택했다. 명문으로 된 이 메시지는 고통받는 많은 이에게 우리는 육체적 건강을 도모해 주거나 아픔을 감소시켜줄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하지만 보다 깊고 보다 고귀한 그 무엇을 줄 수 있으니,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만이 참 위로를 줄 것이며, 그분은 고통을 없애지도 않으셨고 그 신비를 밝히지도 않으셨으며 다만 몸소 그 고통을 당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해답이라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소외되거나 버림받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부름받은 자이고, 그대들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나의 십자가, 그것은 내게 맞는 십자가다. 주님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소경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이라고 설명하지 않으셨는가!




복음의 메시지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세상에서 승자가 되라고 주장한다. 고통받고 십자가 지고 죽는 패자가 웬말이냐는 것이다. 원수들을 다 물리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승리 즉 죽음과 악마를 쳐부수시어 진정한 승리를 하고자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설명하신다. 세상의 승리보다 그것은 더 영광스러운 승리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승리에 대한 사고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 세상에서의 승리, 즉 병고도 고난도 없고 그저 육적인 만족만 있는 그런 승리, 나만을 살찌우고, 나만이 승리하는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갈망하며 예수님께 당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세야 있건 말건 지금 이 세상에서 나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런 승리, 사탄의 지배 아래 살건 말건 여기에서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사고는 없는가? 우리는 영적인 승리를 더욱 값지게 여겨야 할 것이다. 영적인 승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승리고 사탄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승리다.




미래를 위해서 어떤 왕들은 피라미드를 세우고 병마총을 만들고 지하 궁궐을 짓기도 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죽어서 입을 옷을 예쁜 모시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것이 영생을 위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린 자기의 십자가를 매일 기쁘게 지고 진정한 인생의 승리의 길을 향해서 그리스도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특히 이웃을 위해 지는 십자가는 주님을 대신하여 지는 십자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5.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사탄아 물러가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20,7~9 (주의 말씀을 전하고 그 덕에 욕을 먹었습니다) 


제2독서 로마 12,1~2 (여러분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복 음 마태 16,21~27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려야 한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 길이 고생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사랑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울어보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길이 편안하고 즐거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셨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던 대단히 불우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자기는 하느님의 꾐에 빠져 신세만 망쳤다고 했습니다.




신앙 안에 위대한 인생은 이처럼 세상에서는 모순처럼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결코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특히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걸어가는 길이 대단히 험난합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성모님도 그랬으며 모든 성인 성녀들이 한결같이 그 피눈물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전생에 죄가 많은 탓이라고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 걷는 위대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하늘같이 믿었던 예수님이 바보같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도 받은 가장 신임받은 제자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약간은 우쭐거렸던 그였기에 주님께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시자 마치 자기가 예수님을 구해 드리거나 할 것처럼 나서서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두번째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반대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게 하려는 세력, 하느님을 등에 업는 인간의 빗나간 야망 등이 바로 사탄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의외로 주님의 가까운 측근에서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옛날 루치펠도 하느님의 가장 가까운 천사였지만 결국 하느님께 반기를 드는 사탄의 두목이 되었고 베드로도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지만 결국 사탄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열심하게 사는 자들은 그래서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본당에 사목회장까지 지낸 열심한 형제가 있었는데 후임 사목회장이 일을 적극적으로 열심히 추진하자 본당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게 됩니다.




마침 성당에 교육관이 필요해서 교육관 건립을 추진 중이었는데 사방으로 신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건립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장 시켰습니다. 그러나 교육관은 결국 훌륭하게 건립되었고 또한 모든 신자들이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자 이에 처신이 어렵게 된 그 사람은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반대자는 가까운 곳에서 쉽게 나옵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것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자들이 결국 배신을 합니다. 6.25때도 구호물자로 재미를 본 자들은 많이 냉담했으며 그때 혜택도 못받은 자들이 결국 본당을 지키고 성장시켰던 일은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일입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고통’이라는 진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피해야 하고 고난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주 악에서 선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며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 다가오기를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은 모르고 편안함 안에 담겨진 인간의 뜻만 고집하는 어리석은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많고 시련이 많으며 억울한 사연이 많은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청신호가 됩니다. 받을 사랑이 크기 때문에 골고타로 올라가길 원하시며 얻을 은총이 크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팔자가 사납다고 한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아픈 현실이 하느님의 사랑의 크신 증거입니다.












6.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너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교구 주보




1. 주님을 따르려면




오늘 복음(마태 16,21-27)에서 예수님은 머지않아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층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신다. 조금전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수난 예고를 듣고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말린다.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하며 꾸짖으신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24-25절)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고난의 길을 걷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와 인간적인 정 때문에 고난의 길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잘 대비되어 드러난 장면이다.




2. 요구되는 두 조건




우리는 주님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없는 부활과 죽음 없는 영생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자아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 그것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참된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일상 가운데서 당하는 여러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십자가란 억울함을 말없이 당하며 남을 위해 수난당한 형틀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때로는 나의 진의(眞意)가 오해당하고 남들로부터 버림받을 각오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3. 신앙생활이란



모두에게서 인정받고 이해받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인지도 모른다. 신앙생활이란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어도”(예레 20,8)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역설적인 생활이다. 진정 값지고 소중한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갖은 희생을 통하여 주어진다. 이러한 마음과 열정 없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자칫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활로 흐를 수 있다. 다시금 우리의 모습이 과연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로마 12,1 참조)를 정직하게 물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7.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주님을 위로할 수 있는 단 한마디 말


최인호 베드로/작가




< 복음서의 대화>


예수- 제자들아, 나는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베드로-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 오늘날의 대화 >


예수- 제자들아, 나는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주님, 슬프지만 그것은 주님의 운명입니다. 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주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고, 구원하는 방법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반드시 살아나십시오. 주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부활하셔야만 우리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예수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 23,33) 너희는 또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구나.


그리스도인 주님, 저희가 무엇을 잘못하였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만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아닙니까.


예수-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언제까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한단 말이냐. 나는 2천 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고 있단다. 이젠 정말 십자가라면 신물이 난다. 난 이제 십자가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주님께서 길 잃은 어린 양들을 버리시고, 스스로 그리스도이기를 포기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예수- 너희들의 말은 정답이다. 그러나 그 정답을 가르쳐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살고있는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임을 너희들은 어찌 모르느냐. 이제 난 지쳤다. 이제야말로 나 대신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할 때인 것이다. 이젠 더이상 나더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란 말은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듣고 싶은 단 한마디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 너희들이 알면 그 말을 해주겠느냐?


그리스도인- 물론입니다.


예수- 제발 말해다오. 그러면 내가 위로받을 것이다. 베드로처럼 ‘주님, 십자가에 못박혀서는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이다.         












8.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주님의 길은 자기 봉헌과 십자가의 길




  세례를 받은 지 일년 남짓 지난 한 신자분이 피정모임의 생활나눔 시간 중에 다음의 이야기를 했다. “저는 처음에는 세례성사를 받고 신자가 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없어지지 않더라도 가벼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의 고통과 수난을 덜어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때로는 그전보다 내 삶을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의식도 못하고 지나가는 것들이, 심한 죄책감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행동도 더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즉 제가 느끼는 만큼 죄를 조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왜, 신앙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과 생명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신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며, 주님이 그런 일을 당해선 안 된다며 만류한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심한 꾸지람을 하신다.「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왜 항의했을까? 베드로도 당시 유대인이나 제자들처럼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베드로의 인간적 생각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을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늘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참다운 삶은 순간적이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우리 삶의 결과는 너무나 분명해 진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또한 지혜와 분별력도 요구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고 은총을 구할 때 말이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이고, 그것을 기꺼이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이어서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 결단이며, 적극적인 삶의 실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물론 인간적인 판단이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길이었다. (이사 55,8)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침도 덧붙이신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16,2).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되면 세상 속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욕심만을 쫓아가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가르침이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신앙인이 가야하는 정도(正道),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통 세상에서 죄와 악의 유혹을 받고 있다. 아직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냐, 혹은 세속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늘 서있게 된다.




  때로는 세속 안에 나 자신이 포함된다. 사실 마지막의 선택은 항상 하느님과 나 자신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세속 안에서 쉽지 않고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 결과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참다운 행복의 삶이 되려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 길의 결과는 주님께서 이미 증거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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