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 강론 모음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


1. 장익 주교(가)/                                    2. 최기산 주교(가)/2


3. 강길웅 신부(가)/4                                4. 김현준 신부(가)/5


5. 서경윤 신부(가)/7                                6. 김몽은 신부(가)/9


7. 심판은 사랑의 기준(가)/11                      8.최후심판(가)/12




그리스도왕 대축일




1. 장익 주교 / 2                   


1.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 성서주간을 맞이하여


                              “말씀으로 기쁨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위원장 장익 주교






<말씀으로 기쁨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은총의 대희년을 바로 앞두고 성서주간을 더욱 뜻있게 맞이하고자 세운 표어입니다. 교회 안팎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대희년 준비로 부산하지만 왠지 많은 교우들마저 그 기쁨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오늘 우리를 여러모로 얽매인 삶에서 진정 풀어주는 자유를 체험하게 할 무언가를 모두가 바라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오늘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참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인간의 처지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해인 희년을 맞는다는 것은 그러면 무엇을 뜻합니까.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때가 차자 당신 아드님을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어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갈라 4, 4-5), 주님의 저 은총의 해가(이사 61,2; 루가 4,19) 개벽한지 이천년이 되었음을 다 함께 크게 기뻐하고 깊이 감사함을 뜻합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인 아드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요한 1, 14) 선포하신 기쁜 소식을 세상은 들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려오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이 복음을 들은 우리로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된 기쁨과 고마움을 체험하겠습니까. 그 길은 성서를 통해 이중으로, 십자가 모양으로 나 있습니다.




첫째로는, 성서 전체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아버지 사랑의 말씀을 듣는 길입니다. 꾸준히 성서에 깊이 맛들이면서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그런 사랑을 받는 우리는 또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기도하면서, 넘치는 기쁨과 고마움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 삶을 돌이키는ꡐ상하ꡑ로 난 길입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에게서 드러내 보이신 아버지 사랑의 자비롭고 온유한 마음을 본받아 닮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시대는 저마다의 권리를 외치고 찾느라 자기 위주가 된 나머지 자칫 본분도 저버리고 늘 불만을 품고 살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모두에게 인간 존엄을 되찾아 주고 지키는 값진 일도 내 안으로부터 시작되어야 참 열매를 맺습니다. 남을 탓하면서 내 몫을 차지함으로써가 아니라, 나부터 회심하고 새로워져, 오히려 남에게 사랑과 기쁨을 줌으로써 나의 참 기쁨이 샘솟는다는 진리를 성서에서 깨닫고 실천하는ꡐ좌우ꡑ로 난 길이 그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몸소 보여 주신 이러한 진복의 삶이라야 아버지 사랑에 대한 참다운 고마움의 보답이 될 것입니다. 물론, 좋은 이웃이 되어 주며 자신을 내어 주는 삶에 어려움과 아픔과 슬픔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말합니다.ꡒ그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습니다.ꡓ(2고린 8,2). 그래서ꡒ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ꡓ(요한 16, 20.22).




어려운 때를 맞아도 이처럼 기쁨과 고마움으로 산다면 그러한 삶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실제로 입증하는 밝은 빛이 될 것입니다. 비단 성서주간 동안만이 아니라 언제나 성서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ꡒ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ꡓ(시편 119, 105)하며 기쁘고 고맙게 살아나가십시다. 그러면 ꡒ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된 우리ꡓ(1요한 3, 1)는 ꡒ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을 것ꡓ입니다.(요한 1,16)




ꡒ주님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ꡓ(필립 4, 4-5)


2        연중 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 31-40 (가) 그리스도 우리의 왕


최기산 주교




  가치혼돈의 시대




요즘은 참 가치가 거짓 가치에 의해서 밀려나고 있다. 물질이라는 가치는 어느새 인간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하느님도 신앙인의 마음 속에서 제2의 가치로 밀려나고 있다. 이제는 사랑과 진실, 자비의 고귀함도 제2의 가치로 여겨지는 암울한 시대가 되였다.




  약 200여년전 조선의 유교 학자들이 불교의 절과 암자에 모여 천주교의 진리를 연구하고, 그 진리대로 살 것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예사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명망가요, 학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의 그들은 오늘날 우리네 식자들이 그리도 귀하게 여기며 탐구의 열을 높이고, 목청을 높이며 배워야 한다는 불교와 유교의 교리와 사상을, 참 진리인 하느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제2의 가치로 여겼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천주교 교리에 매료되었었다. 그래서 교리를 배우는 동안 교리대로 살았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세수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흠숭하는 예를 드렸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으며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류에게 오직 왕은 하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는 나의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선조들의 신앙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승방을 찾아가서  진리를 탐구하겠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선을 하기도 하고, 하안거, 동안거를 하고 돌아왔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거기 가서 피정을 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세월이 많이 변했다.




  또 그곳에 가면 마음이 안정된다느니, 피정다운 피정을 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저승에 계신 우리 조상님들이 보시면 웃으실 일이다. 과거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우리보다 식견이 모자라서 천주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감사하며,․타인들에게 전했을까?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엔 구세주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였기에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우리의 주님, 나의 주님,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화, 토착화시대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신앙인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우리의 왕




  왕은 누구인가? 전권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전권을 가지신 분이고 나에게 전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말하신 분이시고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묵시 12, 5)이시다. 교회의달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은 그리스도 오직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함으로써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추슬러, 그리스도 좌에 무릎을 꿇는 날이다.




  아시아 주교회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메시아, 즉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다시 강조 발표하였다. 지난 10월22일에는 유럽주교회의에 참석한 시노드 교부들이 최종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유럽의 희망의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메시지에서 “오늘날 온갖 형태의 고통과 불안, 죽음으로 우리들의 희망이 약해지고 있다. 우리는 인류와 역사의 유일하고 참된 희망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선언했다.




  복음의 메시지




  그리스도,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시며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왕을 제쳐두고 다른 왕을 찾아 헤매는 것은 모반이다. 그분은 사랑의 왕이시다. 이 세상의 왕들은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지만, 그분은 사랑에 관한 심판만 하실 것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한 대로 심판 받을 것이다. 그분은 사랑의 자(尺)로 재실 터인데, 길이가 짧은 사람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하는 말씀이다.


인간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눈길을 한번 더 주고 잘해 주게 마련이다. 의인들은 연민의 눈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늘 생각하고 그들에게 잘해 주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잘해 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어떤 꿍꿍이속이 있었다면 모두 적어 놨을 것이다.




  사랑이란 자신의 이익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인간이기에,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에 무조건 베푸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 34 주일)   마태 25, 31-40(가) 누가 우리의 왕인가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34,11~12.15~17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 


제2독서 Ⅰ고린 15,20~26.28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 


복 음 마태 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아 그들을 서로 갈라놓으실 것이다)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실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오히려 봉사하는 왕,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왕으로서 가난하고도 비천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왕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요 세상 모두를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된 것은 기원 전 11세기경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에겐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왕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등장되는 왕들은 모두가 백성을 실망시키는 왕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다윗’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다윗’을 소망하는 백성들의 기대는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되며 언젠가는 다윗처럼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시켜 복된 나라로 이끌어 줄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런 왕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모진 박해 생활과 식민지 생활에서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등장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조국을 식민지에서 건지고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며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그분은 어쩌면 외면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성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분명히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왠지 속 시원히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병자들 치유요 그리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뭐 그런 소극적인 일뿐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으며 군중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는 아직도 안 왔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3차 중동 전쟁에서 다얀 국방상이 이스라엘을 6일 만에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얀을 일시 메시아로 보았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왕권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석 위에 자기 왕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가 주님보고 왕이 되어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천국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보통의 왕과는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왕이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으며 감옥에도 갇힌 병들고 비천한 인생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왕이며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만이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방향과 그 본질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왕’이라는 개념을 착각한다거나 어긋난 왕을 찾고 있다면 그는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언젠가 ‘꽃동네’에서 자신도 불구자이면서 다른 불구자를 도와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도움을 베풀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고 천국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그들 가운데 주님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왕궁’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교회 자체도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궁전’을 짓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바라보고 병든 자를 바라보십시오. 슬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죄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바로 그들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을 환영하여 당신 시민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4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31-46 (가) 지키고 사는 명령  


                                                         김현준 신부




11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교회 전례력으로도 일년의 마지막 주일인,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복음으로 듣는 주일이며, 내게도 ‘생활 속의 복음’을 쓰는 마지막 주일이기도한 오늘, 좋아하는 ‘옛날 먼 옛날에’라는 동화를 함께 듣고 싶다.


 


어느 날, 한 고관 나리가 어떤 곳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장한 병졸이 엄숙한 얼굴로 파수를 보고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처는 허허벌판일 뿐 중요하다고 생각될 만한 건물은커녕, 물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리는 파수병한테 물었다. “자네, 무엇을 지키고 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파수병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예, 저는 오로지 상관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고관나리는 상관을 찾아가 물었다. 그러나 그 상관 역시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했다. 나리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는 높은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오로지 빈 명령만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바뀌어 옛날 먼 옛날에 큰 성이 있었고, 그 성안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어 여러가지 화려한 꽃이 만발하였다. 어느 날 아침 꽃을 좋아하는 왕이 꽃밭 사이를 산책하다가 후미진 곳에 핀 아주 작은 낮선 꽃을 발견하였다. 왕은 이 가련한 꽃이 마음에 들어 혹시나 짓밟힐까 염려하여 파수병을 세워 이 꽃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다. 옛 성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꽃밭은 허허벌판이 되었다. 그런데 빈 명령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의 복음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의 총 결산인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의 ‘나’에게 지켜지는 가르침인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빈 명령’인가?


 


우리는 혹시 이 가르침을, 무엇을 지키는지 그 목적도 모르고 그냥 엄숙한 얼굴로서 있기만 하는 파수병처럼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의 실천적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신 “나에게서 떠나라, 그리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는 그리스도왕의 명령도 빈 명령일 수 없다,



그렇다. ‘사람의 아들’을 알아 뵙는 일과 ‘여기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이 있다. 즉 대신관계(對神關係)와 대인관계(對人關係)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과 상호작용이 있다. 인간의 근본은 하느님이며, 그 분과의 관계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은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최후의 심판 비유의 핵심은 바로 이 두 관계에서의 실천적인 행동이다. 세상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왕이 어떻게 사람들을 심판하실지, 그 심판의 척도는 실천적인 행동, 즉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행동이다. 우리 구원의 결정적 가치 기준이 어떻게 말했느냐,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했느냐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 역사를 들추어보면 수많은 왕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였고, 지금도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이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옷을 입은 양 착각하고, 보란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를 행차하면서 ’자기를 섬기라’는 크고  작은 임금님들이 많다. 순진한 어린이의 눈, 진실의 눈으로 불 때는 “야!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왕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말․생각이 아닌 행동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그리스도왕은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유다인의 왕(INRI)’이라는 억지 죄목의 명패를 달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기를 섬기라’가 아닌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잘하라’는, 다른 왕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명령을 주셨다.


이 명령을 뒤집어 보면, 그리스도왕은 우리의 이웃 안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명령이 ‘옛날 먼 옛날에’ 이야기에서처럼 빈 명령으로 되풀이되는 오늘의 현실이지만, 세월이 흘러 장면이 바뀌면, 바로 나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살아오면서 내가 상처 주고 소외시킨 사람들을 한사람씩 떠올리며, 또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마음으로 주의기도 한번씩 바치면 어떨까, 그럴 때 빈 명령이 아닌, 지키고 사는 명령이 되지 않을까.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왕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31-46 (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


                                                              서경윤 신부






「그래서 이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마태 25,46).


  겨울을 재촉하는 늦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이미 깊어버린 가을의 황량한 들판과 떨어져 비에 젖어 흐트러진 낙엽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허전하고 쓸쓸하게 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훌쩍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연히 틀어 놓은「섹스폰」곡 모음의 애절한 가락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구어 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교회의 전례주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지막 주일이지만 그 때마다 또한 반복해서 지난 1년을 후회하고 똑같은 결심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불경기라고들 합니다. 하기는 불경기란 어떤 분이든 언제든지 있어 왔고, 또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회사마다 무슨 기구 축소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TV는 30․40대 퇴직자들의 처절한 구직 현장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TV드라마도「가을 소나타」나「아내가 있는 풍경」등 40․50대의 명예 퇴직자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봉급 생활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도 언제 회사를 그만 두게 될 지 불안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꼭 불운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군인들이 계급 정년이나 연령 정년에 걸려서, 30대나 40대에 제대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군인들은 40․50대에 모두 예편을 합니다. 불안했던 마음이야 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대부분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약간은 느긋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지원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수험생들이 아직도 해방감에 젖어 들기는 이릅니다. 여전히 많은 학생들은 밤잠을 줄이고 독서실을 찾아야 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 불합격 판정을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심정은 누구나 경험해 봐서 다 잘 압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 현장은 환호와 좌절이 극명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학창생활의 전부도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마지막을 겪게 됩니다. 무엇이나 시작한 것은 마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역시 연중 마지막 주일도 지나고 나면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중에


도 이 생에서는 최후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다른 마지막은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이것만은 재도전의 기회가 없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의 시작을 믿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도 닥칠 마지막이건만 마치 나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양 살아갑니다. 직장을 떠나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회사원 같지도 않고, 대학에 지원해 놓은 학생들만큼 조마조마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분위기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면 약간 심란할 정도입니다.


 


창밖에는 계속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감나무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빠알간  감알만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비를 맞은 감은 더 진한 색깔을 드러내는 듯하고 땅에 떨어진 잎사귀는 우중충한 색깔이 되어 젖은 쓰레기처럼 되였습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면, 주인은 어지럽게 뒹구는 낙엽을 비로 쓸어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감알은 조심스레 따서 바구니에 담아 집안으로 들여갈 것입니다. 그 감은 먹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어 같은 생명을 누리며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세상을 함께 살고서도 악인과 의인이 갈라지듯이, 한 나무에 달렸던 감과 잎이 갈라지는 순간에 나는 감의 신분이 될지, 아니면 낙엽의 신세가 될지,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에는 침이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6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4, 15-35 (가) 최후심판


                                               – 김몽은 신부-




오늘은 교회력에서의 한 해를 닫는 마지막 주일로서, 그리스도 왕 축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세주인 동시에, 만민의 왕이시다. 그분은 이 세상 마칠 때에 왕으로 임하시어, 만민을 심판하실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의 심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을 들려준다.


이제까지 주님은 비유로써 말씀하셨지만, 오늘의 복음에서는 주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의 영원한 상벌을 명시적으로 전해준다. 주님이 재림하시어 만백성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시고 물론 죽은 자들도 부활하여 그 자리에 함께 모인다), 선인과 악인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양분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상을 받는 사람은, 불우한 형제에게 따뜻한 사랑의 정을 베푼 사람이다. 믿음은 중요한 것이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야고 2, 17)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하신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와 같은 선언을 받은 오른편에 선 착한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을 뵈옵고 주님께 그와 같이 해 드린 일을 기억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과분하신 칭찬에 몸둘 바를 몰라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그때에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말씀은 신비체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동시에, 전 인류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 안에 한 가족을 형성한다는 세계 인류 공동체를 명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 다음에는 왼쪽에 있는 악인들에게 주님의 심판이 내리신다. 그 심판은 선인들에 대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은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매년 한국의 인구만큼이나 되는 약 사천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궁핍한 이웃을 외면할 때 주님의 궁핍함을 보고 외면하는 것이 된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이 항변은 너무나도 이기주의적이며 신비체로서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변명은 되지 못한다. 주님은 선언하신다.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현세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병든 사람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들에게 사랑을 나눌 것을 갈망하신다.


눈이 어두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루가 24, 16) 주님은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데 우리의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앞을 향해 나아가려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다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고”(요한 9, 39)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지 못하는 크리스천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사랑과 믿음을 행동으로 잘 실천하는 크리스천은 자주 주님을 뵙고 주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자주 주님을 뵙고 대화할 수 있는 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7           연중 제34주일   마태오 25,31~46 (가) 심판의 기준은 사랑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결코 멈출 줄 모르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서 지나가고 사라진다.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있고 앞으로 살아 갈 날이 있다. 살아 온 날은 지나가서 사라진 시간이고, 살아 갈 날은 지나가서 사라질 시간이다. 살아 온 시간이든 살아 갈 시간이든, 지나가서 사라지는


것이 시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돌아 올 수 없는 과거로 사라지면서 끝난다. 이렇게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과거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시간의 한계 안에서는 무의미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영원을 위해서 존재한다. 영원 안에서만 비로소 시간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간의 끝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성찰하게 한다.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 그것도 두 번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인생을 산 결과가, 영원 속에서 얼마나 위대하고 심각한 결과로 끝없이 남게 되는 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묘사하시는 심판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는 우리 자신이 방관자가 아니라, 그 심판의 현장에서 심판 받는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하시는 분은「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심판받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창조 이래 최후의 심판 때까지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이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신 예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이 부활한 육체와 결합한 영혼을 가지고 모이게 된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의인들과 죄인들을 서로 갈라놓아, 각각 오른편과 왼편에 자리잡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정의가 원하는 데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신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은,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서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간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죄인들은,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라는 준엄한 단죄를 받으며,「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지나가는 모든 시간은 끝나고 영원만이 끝없이 계속된다.












8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4, 15-35 (가) 최후심판






Ⅰ. 죽음과 심판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비록 환상적인 교리로 여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실감하지는 않는 듯이 여겨집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사도 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라고 외웁니다.




그러나 정말로 믿습니까? 특별히 젊은이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은 거리가 먼 것 또는 맨 나중에야 마지못해 생각하는 체 하는 것임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 어찌나 굳게 뿌리박고 있는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사실이 이와 정반대인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육신과 영혼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 끝없는 완전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 중에 영원히 살거나 또는 끝없는 고통과 증오 중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의 선택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제 멋대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리고 영원히 항상 책임을 지는 자들입니다.




Ⅱ. 지난해의 반성




우리는 작년 대림절 때 “주 예수여, 오소서”하고 부르짖으면서 새해를 맞이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탄 때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서 그 영광을 보았고 주님의 공현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성령 강림 때에 우리 영혼과 성 교회의 생명인 천주성신을 받았습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결과를 아름답게 간추리고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암흑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구원과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이 한 해를 사시면서 우리에게 사는 방법을 보여 주셨고, 미사와 성사에서 이 교훈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할 힘을 주셨습니다.




Ⅲ. 양심의 성찰




연말은 양심을 성찰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우리 각자는 작년 이 때보다 죽음과 심판이라는 우리의 재판을 맞이하는데 한 발자국 더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존재를 좀더 정확히 살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남이 보기에 좀더 그리스도답게 보이고 있습니까? 남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태도, 그리스도의 인내,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작년보다 전교 정신이 좀더 강력합니까?




신자 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생각의 모든 면에 그리스도께서 점차로 침투하시는 것 따라서 점차로 그리스도답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소유하고 또 주님께 소유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슨 자선 사업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것이 우리 심판을 판가름하는 표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이에게 행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나에게 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죽음과 심판이 어느 순간에라도 닥쳐올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신문기사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보고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있는 일이니 구태여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잃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주께서 심판하러 오실 것을 대비하기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다면, 두려워하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그리워하며 주님을 사랑하여 심판에 대비하기를 주께서는 원하십니다.


모든 교우들의 본질적 소명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원하며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원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갈망과 우리가 희구하는 행복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완성을 부르짖는 끝없는 심연과 같습니다.




이 심연이 채워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무한한 심연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그분은 이 심연을 만드신 분 곧 우리 하느님 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심연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하등 두려운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모든 이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게 하시어, 세속 욕망에서 벗어나, 우리의 소망을 천상에 오르게 하소서”(청원기도)




Ⅳ. “평화를 주려 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전(全)구원 행위는 주의 일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아울러 세상 마칠 때의 재림도 포함합니다. 미사는 우리를 위해 이 전 구원 행위를 재현합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고통스런 인간 조건의 구렁속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나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으오니,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봉헌송).




미사때 우리는 우리에게 재현되는 구원을 맞이하여 서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구원의 현재 속에로 융합됩니다. 과거는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정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미래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 넘친 희망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 하느님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오는 것입니다. “나는 재앙을 내리려 하지 않고 평화를 주려 하노라. 나를 부르라. 너희 기구를 들어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도처에서 불러들이리라”(입당송) 주 예수여, 오소서. 지체치 말고 오소서.





연중 제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제 1 독서 : 에제 34, 11-12. 15-17


제 2 독서 : 1고린 15, 20-26. 28


복     음 : 마태 25, 31-46




제 1 독서 : 에제키엘서 33-39장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후의 예언으로서 복구와 희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목자로 나서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표현법으로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임금과 지도자들을 뜻한다. 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살진 놈을 잡아먹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에제 34, 2-10)은 백성에 대한 봉사를 하는 대신에 잘못된 정치로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왕들과 지도자들의 실정을 암시한다.


이제 주 하느님께서는 그릇된 목자들을 물리치고 몸소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구실을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이미 바빌론 유배의 끝을 내다보고 있다(34, 13 참조). 또한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주님은 양과 염소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여기서 양은 주님의 백성을 뜻하고 염소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뜻한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마지막 날과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고린토 신자들의 물음에 대답한다. 아직도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각시키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모두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이유를 논증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이 온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생명과 부활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부활의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증명되었다.




복     음 : 인류의 마지막을 묘사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묵시 문학적 이미지를 활용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최후의 심판 비유를 말씀하시며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놓는 임금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심판의 기준은 애덕의 법이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한 사람들을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서 중에서 주님과 고통받는 사람이 완전히 동일시되는 유일한 대목은 이 비유뿐이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다(마태 8, 17). 그러나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행동의 목록을 이 비유에서 뽑아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육체에 필요한 선행만 꼽게 되는 것이다. 비유의 결론은 서로 대칭되는 두 구절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40절).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45절).


애덕은 믿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애덕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전례를 지냄으로써 전례 주년이 끝나게 되는 날입니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엄숙히 선포하는 축일인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분임을 길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라는 양떼를 먹여 기르는 대신 그들의 젖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를 신랄하게 비난한 뒤 하느님께서 당신 양떼를 그들 손에서 빼내시어 당신 친히 참 목자의 열정으로 되돌려 보내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양떼를 쉬게 하리라.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자기들의 양떼의 괴로움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줄 착한 목자야말로 참된 왕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이 메시아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즉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을 뜻합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해 군림하는 세상의 왕들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법이나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감싸는 분이 바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 착한 목자도 최후에는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에제키엘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리라.”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판 기준은 오늘의 마태오 복음을 통해 명백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착한 목자로서 상처입은 이들을 싸매주고 길 잃은 이들을 찾아주고 괴로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었기에 당신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즉 형제애를 얼마나 실천하였느냐가 삶을 저울질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그들은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낯선 외국인들,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병든 이들입니다. 이들 안에 계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알리키퍼라는 시골에 케니 이스터니라는 열 살짜리 소년이 살고 있습니다. 케니는 태어날 때 다리에 이상이 있어 부득이하게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상반신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케니는 결코 자신의 보기 흉한 몸을 비관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티없는 밝은 표정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신나게 거리를 누비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케니가 다니는 뉴호라이존이라는 학교에는 신체나 정신에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매일 스쿨버스로 통학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케니는 활기찬 모습으로 착실하게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 케니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고무 다리를 부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케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선생님들이 케니에게 억지로 고무 다리를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무 다리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벗었다가 다시 붙이는 일은 몹시 힘들기 때문입니다. 케니가 불편한 고무 다리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면 언제나 친구 폴이 뒤따라옵니다. 케니보다 훨씬 증세가 심한 폴은 목과 손이 심하게 흔들일 뿐 아니라 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언제나 화장실 밖에서 케니를 기다렸다가 ‘케니, 괜찮니?’ 하고 간신히 한마디 묻고는 뒤에서 매달리듯 휠체어를 밀어줍니다. ‘나에게는 다리가 있지만 케니에겐 다리가 없으니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돼!’ 폴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친구 케니를 돕는 것입니다. 케니 역시 자신이 휠체어를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도움을 거절한다면 폴이 실망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비틀거리며 휠체어를 밀어주는 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폴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천히 교실로 되돌아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장애인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진정한 사랑이요 형제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왕권은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아낌없는 사랑일 것이며 이 사랑의 베품, 즉 자비는 죽음과 권세의 악신을 물리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통해서 입증되기에 죽음을 넘어서서 만물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우리도 이런 권능 아래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의 다스림을 통해 드러나지만 마침내는 사랑의 척도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의 왕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들도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여야겠습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