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해송 선생 추모사 ———- 최민순 신부
마해송 선생 !
공부도, 재주도, 덕도 부족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뭇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아껴주신 여러분, 댁내 만복을 빕니다.
“고 프란치스코 마 해송 선생! 조촐히 피어 우리의 기쁨이 되신 이 ! 울며 나서 웃으며 돌아간 한국의 멋쟁이, 천국의 멋쟁이 ! 빌데 찾아 흐뭇하고, 돌아갈 곳 얻어 복되더니, 외롭고 허전한 것 우리 뿐 !”
여기 우리는 사세(死勢)의 말씀을 남기시고, 웃음져 가시는 프란치스코 마해송 선생님을 봅니다. 보내드리는 우리들 가슴마다 서려오는 감회도, 가지가지 입니다마는, 마지막으로 남기신 그 웃음과 뒤늦게나마 성스러운 그 모습, 그리고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선생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선생의 인생관조는 일찍부터 초연한 바가 있었습니다마는, 8년 전에 가톨릭으로 입신하신 후로는 한결 더 승화되어, 생사일여의 신앙에 투철하시었습니다.
선생의 본명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그의 태양의 노래에서, 죽음을 누이라 부르며 “내 주여,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이의 찬미 받으소서 ! 복되다. 당신의 짝 없이 거룩한 뜻을 쫓는 이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다”…… 이렇게 읊조린 것처럼, 선생의 죽음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프란치스코답게, “웃으며 죽겠다. !” 하시니, 과연 죽음을 맞이하시는 선생의 자세는 티끌 만한 엄살도, 무서움도 없이 오직 평화로운 웃음, 그것 뿐 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한 플라톤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웃으며 숨져 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사실이 아닙니까?
울면서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요, 꽃으로 피었다가 낙엽으로 지는 것이 또한 인생이거늘, 선생은 울면서 나시었다가 웃으며 돌아가시고, 조촐하게 피시어 우리의 기쁨이 되었다가 그 웃음 간직한 채 떠나가시더니, 실로 한국의 멋쟁이는 천국의 멋쟁이로 옮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죽음을 예비하라 하시면서 “너희가 생각지 않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하시었습니다만, 선생이 얼마나 이 말씀에 충실하시었는지는, 살기를 죽기같이 하시고, 죽기를 살기같이 하신 그 모범에서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미리부터 유서를 쓰시어 가족들에게는 신앙의 유산을 끼치시고, 우리에게는 “감사합니다, ! 빕니다!”하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헤아려 보면, 살아 계실 때 선생의 깊은 뜻을 몰라준 것이, 그 크신 뜻을 못 펴드린 것이 누구이길래, 도리어 감사를 하며, 무슨 좋은 일을 그리도 많이 해 드렸기에 우리의 복을 빌며 가시는 것이었습니까?
역군은 평풍 위에 십자가를 높이 펴시고, 그 아래에서 기거하시던 선생은 감사와 기도와 창작의 나날을 아름다운 역사로 바꾸며 나가시었습니다. 빌 데를 찾아서 흐뭇하고, 돌아갈 자리를 얻어서 복되다고 하시던 선생! 가톨릭이 된 후에 잃어버린 것이라고는 나쁜 것 밖에 없다하시던 선생! 선생은 영세할 때 잡으신 촛불을 꺼트리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십니다마는, 감사의 기도와 웃음이 아쉬운 이 세상에, 외롭고 허전한 것은 우리뿐입니다.
이제 가톨릭 공용어 위원회가 선생님과 함께 번역한 오늘 미사의 감사송을 외우며, 부활의 씨앗을 심으러 가시는 선생을 삼가 보내드립니다.
“주 성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의 의무요 구원이로소이다. 그리스도 안에 복된 부활의 희망이 우리에게 비쳤으니, 죽음의 운명이 분명하여 슬퍼하는 우리에게 후세 불멸의 약속은 위로가 되나이다.
주여, 과연 주를 믿는 이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이 세상에서 깃들이던 집이 흐너진 다음에는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함께 우리도 주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