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미사 ——— 이석충 신부

 

장례미사 ——— 이석충 신부




우리는 이렇게 장례미사를 지내게 되면, 그 때마다 우리가 사는 게 무엇이고, 죽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에, 대답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되니까, 돈이 내가 원하는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 제일 좋으니까, 나는 지금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 권력이 나와 제일 가깝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부지간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자식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에 임박해서 가장 가까운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그네들은 그네들이 좋아하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갑니다. 그럼 과연 우리에게 가까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죽음에 임박해서 비로소 깨닫는 신앙의 눈이요! 신앙의 눈이 있는 사람은 미리부터 알고 있는 천주님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두 번째 가깝다 하면은, 그것은 사람인데, 그 사람도 오늘 났으면, 내일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합니다마는, 그 말도 틀린 말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곧 바로 죽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났으면, 이미 죽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인에게 있어서, 더 없이 떨어질 수 없는 가장 가깝게 있고, 가깝게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났다! 죽는다! 이 세상에 나서 죽는 그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하지요! 어떤 사람은 인생을 노래하기를,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하고 ······· 모르니까 의문 부호만을 붙여 놓고 말았습니다. 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구나!”······ 죽음 다음에 살아 생전에, 자기가 이 세상에 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고, 어디서 오게 됐는지 모르고, 죽음 다음에 어디로 가는지 새까맣게 모르니까, 할 수 없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구나 하고, 그냥 인생무상만을 노래합니다.




과연 사람이 세상에 나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을 모르고, 이 노래와 마찬가지로 생활을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까운 것은 돈이요! 권력이요, 명예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바로 그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에 너무나도 허무합니다. 이것은 바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동양에서 또는 전 세계적으로 성현(Sapientes)이라고 일컬으면서, 존경할만하고, 존경해 마땅하고, 존경하는 분이 석가모니입니다. 또 공자님이 계십니다.


이 두분은, 우리가 마땅히 공경할만하고 공경하는 분입니다.




이 두분은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가르쳐 주었길래, 우리가 공경해야 합니까?


한 가정에 있어서나, 한 동네에 있어서, 또는 한 나라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을 때, 또는 한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었을 때에, 그 아버지나 그 동네에서 그 동네를 위하여 훌륭하게 일해 준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훌륭하다고 하고, 존경을 드리고, 공경을 드리게 됩니다.




석가모니와 공자도 똑 같습니다. 우리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았고, 그럼으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좀 더 좋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분네들은 우리들의 존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네들이 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직 해결을 주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분네들이 준 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간다는 것이었지,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서 죽어서 어디로 가는냐 하는 인생의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죽었다가 저 세상에 갔다 온 사람이 있어야 천당이 있는지? ······· 지옥이 있는지? ········· 알 수 있어야지! ······· 합니다.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도 죽어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저 세상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또 우리가 죽어설랑 땅 속에 들어가 뭍여서 그대로 썩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네들도 역시 죽어서는 아무 말이 없고, 지금은 그 뼈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한낱 그분네들, 석가모니와 공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증명해 준 것 뿐입니다. 사람으로서 좀 더 나은 사람의 도리를 더 명백하게 가르쳐 주었다는 바로 여기에서 존경받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네들은 위대하다고 존경을 받지마는, 실제에 있어서 그분네들을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해결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똑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었지요!




그리스도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살고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분만은 죽음 다음에, 그 후세가 어디에 있고, 무엇이라는 것을 똑바로 밝힐 수 있는 분이었고, 밝혀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분에게서 우리는 인생의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내가 이 세상에 났다. 누구나가 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죽음이 싫지만은, 죽는 그 날을 맞이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압니다. 그러나, 한평생 산다고 하는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 하는 것을 철저히 캐는 사람이면, 현자요! 캐다가 마는 사람이며는 우자에 속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래도 산 사람이면은,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과연 그렇게 삽니까?


참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가 다 올바른 조물주를 알고,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도 알고, 따라서 내가 사는데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고, 그렇게 살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결국은 내 조물주께로, 나를 보내주었던 그 조물주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하는 것을 명백히 압니다.




이 분이 바로, 이 세상에 산 사람이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 난 보람있게 살고 있는 사람인지? 이 문제만은, 그리스도께서 만이 우리에게 해결을 주셨고, 우리는 다행히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믿고, 바라고, 그가 명령하시는 것을 우리는 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해 드리는 (이 모니카)는 어려서부터 또는 사시는 동안에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러나 그 고통은 정말 어떻게 이겨나가고, 이 고통이 무엇이라는! 아무리 어렵지마는 끝끝내는 자기가 믿는 그 신앙의 토대를 밟아서, 끝끝내 이겨나간 바로 그러한 분입니다.


우리가 바로 연미사 때마다 생각을 한다면은, 바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느냐? 남이 보기에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훌륭하게 남이 보기에 부럽게 지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세상에서 살면서 인생의 목적을 얼마나 잘 달성했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누워있는 (모니카) 참으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정말로 신앙인답게 마음속 깊이 신앙인으로서 잘 살으신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엄위하신 천주 대전에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벌 받는 것이 있다면, 그 잠벌을 하루 속히 면해 주십시고, 우리는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 역시 정말로 참된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길을 걸어 가면서, 끝끝내 우리도 언젠가는 빠짐없이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 죽음을 당했을 때에, 우리도 아무 부끄러움 없고, 두려움 없고, 그 죽음을 주님 안에 잘 맞도록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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