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랑
– 거룩하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
서인석 신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바라고 신뢰한다면,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그 애틋한 사랑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가슴 뭉클한 감격을 체험할 때, ‘내일’이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미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지 위에, 하느님의 사랑이 움틀 희망의 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이 가져올 부활의 때이며, 영원한 생명의 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3, 16)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붙이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짧은 기간 살다가 죽더라도 그 죽음에 관심을 표하시며, 우리의 괴롭고 억울한 사정 하나 하나를 흘려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시어, 우리에게 대한 미래의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상징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사랑은 지극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주기도 힘들고, 받기도 힘든다는 것이, 요즈음 심리학의 정설입니다. 따라서 소외와 좌절 속에 자라온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이 믿기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러한 사랑이 가능할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멜로드라마 속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사랑의 얘기들, 이 통속적 사랑의 눈은, 하느님의 순전(純全)한 사랑의 얘기들, 얼마나 흐릿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멜로드라마 속의 사랑이란, 오로지 상대를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기의 성취감을 맛보자는, 이해득실 일변도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배제한 육체의 무덤 속에서는 순수하고 그윽한 사랑의 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들만이 하느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이고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에 공명할 수 있고, 예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 오빠입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형님이시오 오빠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성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들, 어린이가 된 우리들에게는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가 눈물겹도록 감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여야만, 그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하느님은 우리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요한은 묵시록 (3, 20)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요구를 이렇게 들려 줍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으며 다정하게 마주앉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다정하게 식사를 나눌 정도로 친한 벗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친하다 못해 사랑하는 벗까지 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우리의 벗이 되길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정입니다. 이 우정은 사랑을 전제로한 우정입니다. 참된 우정이라면 사소한 이해관계는 아예 초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성(理性)이나 합리(合理)가 들어 와 좌지우지할 입장도 못됩니다. 이 우정 속에는 서로 위하고, 서로 마주보려는 마음만 가득합니다. 또한 이러한 우정 속에는 짙은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대화는 조용한 저녁의 식탁에서와 같이 다정하고 풍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입니다. 따라서 산천을 호령하는 대자연의 창조주와 나누는 듯한 경외와 공포 속의 대화가 아닙니다.
그 대화는 엄부(嚴父) 앞에 꿇어 앉은 자녀의 자세도 아닙니다. 그 대화는 우리 마음 속속들이 털어놓을 수 있는 다정한 벗끼리의 대화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여러분들을 내 종들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은 내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 모든 비밀을 말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5, 15이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우정 속에 사는 신앙인에게는 이 세상의 고통과 번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항거할 수 없을 강한 힘으로, 우리를 당기십니다. 모든 성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좇는 성실한 신앙인이라면, 이미 하느님과의 우정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기뻐하시는 것만 바라며,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배척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다정한 대화 속에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우정이란 앞서 묵시록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가족끼리 식탁에 오여 앉아 친밀한 대화와 친밀한 시선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다정한 친구입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바로 이 우정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고 우리의 잘못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느님과의 이 우정만은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쳐다 보시는 그 사랑의 시선은 절친한 친구의 시선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 속에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려는 간절한 소망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 속에는 우리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 어떤 요청이라도 들어주시리라는 신뢰가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참된 벗으로 삼는 생활은 새로운 생활의 출발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다정한 벗으로 우리의 식탁, 우리의 마음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홀로 오신 것이 아니라 전 인류와 더불어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은 내 좁은 마음을 크게 넓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 마음 속에, 그 나가 들어와도 좁다고 불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날이면 인류가 모두 나의 친구가 됩니다. 하느님이 벗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해 주실 대, 그 사랑은 반드시 형제애를 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과 우정을 맺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서의 줄기찬 사상의 흐름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인(戀人)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대변자인 예언자들을 통해 이와같이 요구하셨습니다. 사뭇 그리워하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사랑보다 더 짙은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 각자 각자에게 연인과도 같은 열렬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사랑은 비현실적 사랑도 아니요, 애수에 잠긴 꿈 많은 소녀의 감상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요원의 불길과도 같은 정렬을 안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염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 서서 너희를 기다리며, 한 남자가 여인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듯이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호소하시는 사랑은 어느 한 설교자의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란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란 하느님이 주신 사랑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성서에 따라 전달할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는 하나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드라마는 봄철의 꽃처럼 화사하게 피었다가 비참한 비극으로 끝난 드라마입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에제키엘 16장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에서 인간을 빚어내신 날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던 날 세상에 그 누구도 피투성이의 알몸으로 태어난 너를 목욕시켜 주고 보살펴 주기 위해 너를 들여다본 사람 없었다. 너는 마치도 아무도 원치 않았던 갓난 아기처럼 추운 겨울날의 다리 밑에 강보에 싸인 채 버려져 있었다. 그 날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 너를 보았다. 너는 피투성이의 강보에 싸여 하늘을 향해 울고 있었다. 나는 상처와 유혈이 낭자한 너를 치료하였다. 너는 점차 튼튼하게 자랐으며 몸이 제 꼴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상한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어린아이였을 대에 진정 너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나는 너를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불러 내었고, 너에게 걸음마을 가르쳐 주었고 내 품속에 꼭 껴안아 주었다. 나는 인간이 가진 모든 애정을 다하여, 젖먹이가 귀여워 안아들 듯이 너의 두 볼을 비벼대었다. 나는 왼종일 너에게 애정에 찬 시선을 던지고 먹을 것을 너의 입에 넣어 주었다”(호세 11, 1․3-4).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을 빌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날 너는 여전히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고, 가난하고 비참한 한 피조물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나는 네 앞으로 다가가서 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헐벗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날은 너희 인간과 하느님인 내가 갖던 사랑의 계절이었다. 그 계절은 우리 애정의 계절, 우리 결혼의 계절이었다(이런 용어는 하느님이 직접 쓰신 용어임). 나는 네 위에 나의 사모관대를 입혔으며, 나는 너에게 맹서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한 부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자세를 보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에게다 갖다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산입니다. 위의 말씀은 성서가 묘사한 그대로이며, 하느님의 사랑이란 완전 헌사적이고 사랑 자체인 분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인류에게 온갖 선물을 다 주었다. 금실로 수놓은 비단옷을 고급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명주 두루마기를 주었다.” 이러한 선물은 한 남자가 사랑하던 여인에게 주던 선물입니다. “나는 너를 칠보단장으로 꾸몄으며, 너의 팔목에는 팔찌를, 너의 목에는 목걸이를, 너의 머리 위에는 화려한 금관을, 선물로 주었다. 진정 너는 여왕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것은 인류의 영혼이 받은 하느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에제키엘을 통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금은 보석으로 장식되었으며, 너는 가장 기름진 땅의 소출로 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다. 너는 지상의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너는 진정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 너는 내가 입혀준 영광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땅이 우리에게 소출로 내주는 부와 재산, 다시 말해 쌀, 보리, 석탄, 석유, 우라늄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시편 8의 노래에서와 같이 인간은 연인인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님은 우리를 천사들 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비극적인 드라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토록 사랑을 받던 인류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너는 오만한 여인이 되었으니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네 미모에 도취되었다. 드디어 너는 네 미모에 사로잡힌 나머지 거리에 나서서 매음부가 되었다.” 창녀가 된 인류, 이것은 성서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권력과 지배와 황금과 우상의 노예, 그리고 간음녀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거부하거나 하느님을 자기 생활 속에 살리지 못하는 삶은 바로 “매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저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게 되면 별 수 없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 우상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좋고 금력도 권력도 좋습니다. 다시말해 하느님이 들어서실 자리에 먹을 빵이나 성(性)이나 인간 스스로가 우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먼저 주신 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준 선물로 우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우상들은 아무 것에서도 너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였다. 오! 너희 마음은 우상들의 유혹에 얼마나 약한가!” 하느님께서는 우상을 찾아 광분하는 시간을 두고 암캐를 찾아 헤매는 수캐에 비교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이 이성과 수치심을 잃고 암캐 뒤를 좇는 짐승에 비유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자기를 외면하면 창녀보다 더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창녀들은 몸값을 요구한다. 그러나 너희 인류는 품위를 짐승보다도 못하게 타락시키는 그녀들에게 돈을 물쓰듯 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석탄과 석유와 원자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살생과 정복의 도구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원자 무기의 경쟁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없다’고 하고 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이 언어와 혀를 속이고 헐뜯는 데에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 분노는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목격한 분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충격을 받을 만큼 우리의 연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언사는 거칠어지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간음죄를 번함 자와 같은 형벌을 내리겠다. 그 형벌은 살인자에게 내리는 벌과도 같을 것이다. 너는 네 젊은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으며, 내가 너희에게 쏟은 사랑을 기억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내 분노를 터뜨리게 하기 위하여 모든 행동을 삼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 네 행실의 결과가 네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할 것이며, 네 마음 속에 품었던 나에 대한 증오가 네 위에 떨어지게 할 것이며, 네 정신 속에 품었던 분열과 이간질을 네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혹독한 선언은 인간이 하느님을 망각했기 때문에 자초한 운명입니다. 번갈아 가며 하느님의 사랑과 미움을 사는 인간의 운명은 은총을 거절할 수 있는 인간 자유의 비극적 드라마입니다. 이 비극은 또한 오늘날 일뉴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밀물과도 같이 밀려오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젼의 물결 속에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 사랑하는 부모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릴 때, 우리가 하느님 아닌 우상에 송두리째 마음을 앗길 때 그것은 예언자의 말대로 하느님 대전의 간음입니다. “네 마음을 둔 그곳에 네 보물이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간음죄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이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우상에 고집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순되게도 우리의 끈질긴 고집을 보고도 마음의 어름을 스스로 녹이십니다. 하느님의 어조는 다시 인자한 아버지, 다정한 어머니의 애정담긴 모습으로 바뀝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랑에 굶주린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고집불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의 길을 찾으십니다. 호세아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나는 내 분노의 불길에 따라 보복하지 않으리라, 나는 너를 파괴하기 위해 되돌아 오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이지 결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거룩한 분이다”(호세 11, 9).
이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인류의 끈질긴 고집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너는 제발 일어나라. 포로가 된 너, 인류야 일어나라. 노예의 포승을 끊고 일어나라” “온 일이 폐허가 된 한 버림받은 여인처럼 된 너에게 나는 호소하니 회개하여라.” “ 아 어떻게 내 청춘시절의 아내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잠시동안 내가 너를 저버렸으나 무한한 연인의 정에 사롭잡혀 너를 기억하엿으니, 이제 다시 네가 나에게 되돌아 오기를 바란다. 내 잠시 분노하여 내 얼굴을 숨겼으나, 내 영원한 사랑과 무한함 때문에 너를 다시 기억하였도다”(이사 54). 이 사순절,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되돌아 간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내와도 같은 인류가 우상인 바알과 밀회를 즐기러 나갈 때 방해를 하십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녀의 길에 가시덤불을 놓아 가로막을 것이며, 거기에 울타리를 쳐서 자기 애인의 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 애인을 뒤쫓아갈 것이나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는 내 첫 남편에게로 되돌아 가리라. 그때가 나에겐 지금보다 더 행복하였기 때문이다’하고 말하게 할 것이다”(호세 2, 8-9).
질투하는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상과 놀아나는 아내의 속임수보다 더한 책략을 꾸미십니다. “보라 나는 그 녀을 유혹하겠다. 그녀를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그녀의 마음에 사랑을 속삭이겠다. 그녀가 사막에서는 젊은 시절의 날들처럼, 그녀가 이집트에서 올라오던 그날처럼 내 사랑에 응답할 것이다”(호세 2, 1-17).
이와같이 호세아 예언자는 인간이 사막에 놓인 날에야 하느님께 응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겨우 물도 음식도 없는 황량한 사막 위에 놓여서야 하느님을 찾을 것입니다. 이 목마른 사막의 길이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막은 바로 인류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소생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막에서 인류를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 당신 아들의 십자가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날, 십자가는 그 사랑의 드라마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하느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의 희망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 상황 안에서도 참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막의 사순절, 그리고 예수 십자가의 메시지는 우리의 고통과 불안과 번민과 죄를 비쳐주고 또 답해 줍니다. 십자가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우리 인간을 도와주고, 또 고독과 암흑과 죄에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사막에서 성취된 하느님 사랑의 정복은 옛 예언자들에게서 시작하여 유일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기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베풀고 화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 이 해방의 목적은 우리를 생명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이상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최초 봄의 꽃잎처럼 희망 속에 부풀었다가 결혼시절의 기쁨처럼 화사하게 번지지만, 끝내 유혈이 낭자한 십자가의 어두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 피흘림은 밀알 하나가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성실하게 추구할 대,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 악의 새력이 범람해도 우리는 은총과 사랑의 힘으로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이 깊은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을 망각하지 말고,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님의 철저한 모습을 그려보는 사순절! 우리는 그 사랑의 숨결 어느 한 줄기도 잃지 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무던히도 부모님의 사랑을 피해 속썩이던 우리, 지난날 잘못을 아파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참되게 따를 수만 있다면 그 어느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지셨던 그 사랑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는데 거져 주시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두고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역경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박해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굶주림과 헐벗음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혹 위험이나 칼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로마 8, 31-39)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남편 형님 오빠로 번갈아 가며 사랑을 호소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이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신 희생된 ‘천주의 어린양’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인이 갖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바탕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여기에 응답하는 사람들이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