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강좌 – 신앙은 가능한가? – 십자가의 절규에서 탄생한 우리의 믿음

 

신앙은 가능한가?  


                    십자가의 절규에서 탄생한 우리의 믿음


                                              서인석 신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뒤안길에만 버려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권태와 부조리가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욥과 전도서에서처럼 모순되게,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신앙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불안한 내일이 조용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우리는 전도서의 말씀과 더불어 “만상이 헛되도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이나, 시편 51의 저자와 같이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잿더미 위에서 회개함으로써, 실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덕(德)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활동을 믿고,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에 참다운 생명을 주시는 것을 믿는 일은, 희망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새 계약의 속죄자이신 예수께서 가지고 오실 하느님의 왕국을 믿고, 바라고, 갈망해야 합니다.




시인 뻬기는 말하기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덕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또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과 희망은 형제지간입니다. 그러나 어둡고 침울한 생활에 부대끼다 보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잊기가 쉽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세상에는 왜? 고통이 범람하고,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 지나간 월남 전쟁, 우리 조국을 초토화시킨 6.25전쟁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전쟁은 죄 없는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까지 무턱대고 학살합니다. “상대방 적군의 전의를 꺾자는 데 있다!”는 이유로, 초라한 변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역사상 무수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태어났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선의의 숱한 사람들이 부조리와 악덕에 의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아름답고 숭고하게 창조된 인간은, 왜 이토록 부조리하고 무자비한 고통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까? 인간이 성숙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왜, 이러한 참경을 묵인하고 계시다고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이러한 비극을 허락하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고통의 신비를 알아듣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다 하겠습니다.


월남 전쟁에서 어느 조종사가 적진으로 오판하여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그곳에 있던 고아들만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경우, 하느님은 무자비한 분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은 결코 계시지도 않는다고도 외칠 것입니다.




그럼으로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걸고 있는 우리들까지도 의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부조리한 고통 앞에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로 인류의 역사는, 투쟁과 증오와 살상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참되게 이해하려면, 그 뒤에 숨은 ‘고통의 역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부자나, 빈자나, 지식층이나, 무식층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비극은 지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부셔버립니다. 이와 같은 고통과 불의에 항거하지 않고, 죄 때문이라고 안이하게 회피해버린다면, 그 신앙은 인간적인 신앙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라면, 참된 희망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이나, 공산주의에 빠져버린다면, 그것도 해결이 아니라 도피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그 아무도 인간 자체 내의 부조리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의 말과 같이, “사람은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무력한 존재입니다”(시편 146,3-4). 아담의 아들이 무슨 재주로, 그 고통의 신비를 해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항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넘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 과연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전통 유신론은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지으신 것이며, 피조물은 하느님을 반영시키는 거울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 속의 하느님은, 우리 생활 구석구석까지 개입하지 않고, 칠층 고도의 높은 하늘에 홀로 앉아, 정적에 뭍혀 계신 하느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울인 이 세상에, 인간이 자유를 무시한 어떤 악이 들어와 산산조각을 내고 있다고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만족할 수 없으며, 단순환 우연을 믿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무신론은, 윗 질문의 바탕이 되시는 하느님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있습니다. — 스땅달이나 니체와 같이, “신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답변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창조주가 자기사업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신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제거하고, 스스로 운명을 해결한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를 인간이 차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을 역사의 장에서 추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는 인간은, 고독의 심연 속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전체 그리스도교 역사를 볼 때, 수난과 고통을 받으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약하고 병들고, 억울한 이들의 충실한 벗이 되어 오셨습니다.


억울한 고통, 불의한 고통, 무고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공의하심을 이해할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무도 멀리 계셔서,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듯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이 세상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의 고통을 머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참여, 아니 짊어지고 계십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주님의 외침은, 우리 중의 어느 누구의 애소보다 더 짙은 절규입니다. 이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하느님이십니까? 이 얼마나 사랑에 찬 하느님이십니까?




예수께서는 마태 25장에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고통이 있을찌라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신앙이 낳은 결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을 통해 신앙이 탄생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던 예수님의 외침과 더불어, 헛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조리한 고통 속에서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은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 그 고통의 가시를 극복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앙을 얻게 된 것입니다.





                           < Ⅱ >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죽으셨다고 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를 보고, 감히 하느님과 동등한 지로 자처한다고 여겨, 예수를 죽음에 붙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께서 ‘로마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여겨, 십자가형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33년 동안 말과 행동으로,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에, 신앙의 고통의 문제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당하고 멋지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통과 번뇌 속에,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시편 22의 첫 구절 :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마르 15,34절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절규를 담은 시편 22를 생각하는 것도, 고통과 신앙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편 22는, 억압받던 한 시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억울한 고통에 잠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노래였습니다.


히틀러의 가스실로 끌려가던 600만의 유대인들이 읊은 최후의 노래로도 유명합니다. 이 아름답고 처절한 노래는, 인류 고통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꾸밈이 없고 사실적이며, 고통 당하는 인류의 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표출해 줍니다.




이 시편은, 시상과 이미지가 예레미아 예언자의 고백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기원전 586년 유대인이, 원수나라 바빌론으로 압송되어 가기 전, 어느 시기에 작성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가난한 시인은, 살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당한 후, 그래도 하느님의 구원을 감사하기 위해 제사를 바칠 즈음에, 이 시를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는 자기가 당했던 고통과 절망을 2-27절 사이에, 있는 그대로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그리스도를 닮은 예언자 예레미아의 고백록을 방불케 합니다.(예 15,16-20/ 12,1-5/ 8,18-23/ 17,14-18/ 18,18-23/ 20,7-9/ 20,14-18).




시인은 고통과 실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실망을 번갈아 가며 노래하였고, 때때로 고통에 대한 그의 노래는 대신비가의 독백처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복음이 “행복하여라!”라고 축복한, 그러한 가난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제도와 역사의 오만 때문에 버림받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소연 할 곳이라고는, 하느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가난한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수난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마치도 엎질러진 물과도 같이, 내 모든 뼈들은 무더났나이다. 밀초같이 되어버린 이 내 마음은, 스스로 내 속에서 녹아버리나이다. 기왓장처럼 내 목은 칼칼하고, 내 혀는 입천장에 들어붙어, 죽음의 재 가운데 이 몸은 누워있나이다”(시편 22,15-16)




성서가 병든 한 시인의 모습을 처절하게 이토록 묘사한 일은 없습니다.


그의 뼈는 으스러지고(시 50,1), 상처마다 피가 솟았습니다(시 51,16).


그러나 이 시인은, 무엇 때문에 처절한 고통과 병고에 시달려야만 했습니까?


성 예로니모는, 17절에 대한 주석에서 말하기를, 긴 세월의 옥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난한 시인의 옥중생활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숱한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무리 이 몸을 에워쌌나이다.


그들은 내 손과 발을 묶어, 죽음의 재 가운데 이 몸 뉘었나이다.


내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어도, 그들은 익히 보며, 좋아라 나를 보며, 저희끼리 내 겉옷을 나눠 가지고, 제비뽑나이다”(16절-19절).




이 시인은, 감옥에 같였던 예레미아와 같이(예레37-38), 옥중생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벗한 사람이라고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간수들과 비웃는 무리밖엔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도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꺼리, 사람마다 나를 업신여기고, 머리를 끄덕대며 비쭉거리나이다(7-8)”라고 외쳤습니다.


정신적 고통 또한,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이 시인을 괴롭혔습니다.


고독과 소외와 좌절 —- 이 엄청난 고통은, 어디서 왜 생긴 것이겠습니까?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에 사직당국과 불의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온갖 욕설을 다 뱉았습니다.


시인은 무자비하게 고문하던 원수들을 보고, “들소의 외뿔, 사자의 부리, 개의 발톱”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시인에게는 실망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으나, 외면당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고 빌건만, 멀리 계시나이다! 진종일 외쳐봐도 들은 체 않으시고, 밤새껏 불러봐도 알은 체 아니 하나이다”(2-3절).


애끓는 이 시인의 절규는, 여기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마음을 처절하게 했던 것은, 고문도, 간수도, 시직 당국도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갈망했던 것은, 이러한 불행의 종식이라기 보다,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왜, 하느님은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하느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왜, 무고한 이가 잿더미 위에서 울부짖도록 버려주시는가?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가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그러한 가난한 이 시인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하느님의 현존을 철저하게 믿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친구와 친구, 아내와 남편이 서로 마주보며 사랑의 대화를 나누듯이, 이 시인도 하느님의 현존을 피부로 느끼듯 하였습니다.


“모태로부터 이 몸 나게 하시고, 내 어미 젖가슴에 포근하게 해 주셨기에, 날 때부터 이 몸 당신께 바쳐진 몸, 모태에서부터 당신은 내 주님이시오니이다. 멀리 하지 마옵소서. 이 몸은 괴롭삽나이다. 가까이 하소서, 도울 이 없삽나이다.”




이 시인이, 가장 괴로워한 것은, 과거에 반겨주던 하느님이, 지금은 자기를 버렸다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자기의 고뇌를 탁월한 영적인 차원, 아니 신앙의 차원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결코 하느님께서는, 인류역사 전체의 고통을 대변한, 이 가련한 시인의 절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 53장의 “수난 받는 종!”을 보십시오! —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그 종의 모습을 그대로 취하셨고, ‘구더기, 천더기, 조롱꺼리’(시 22,7)가 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은, 십자가 위에 달린 나자렛의 예수님을 보고 빈정댔습니다. —-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지?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구하여라! 남을 살리면서, 자기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구나. 저분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어 드리겠는데. 저분은 하느님을 믿고,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이제 그를 살려 보시라지!”(마태 27,38-44) —- 이 말은,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 퍼부은, 모욕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아버지신 하느님을 철저히 믿고, 신뢰한 신앙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십자가상에서 —-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2편의 저자가 토로한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의 고통을 짊어지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셨습니다.




                           < Ⅲ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2의 가난하고 억울한 시인의 절규를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던, 시인의 그 울부짖음을,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외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업신여기며, 삐쭉거리던 시인의 호소를,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라!”(마르 15,29/ 마태 27,39/ 루가 23,35).




주위 사람들은, 시편 22의 저자를 보고, —- “주께 의탁했으니, 구하시렸다. 그를 사랑하시니 빼내주시렸다!”(시 22,9)라고 놀렸습니다.


대제관이나 율법학자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어디 한번 살려보시라지!”(마태 27,43)라고 놀렸습니다.


시편 22의 저자는, — “기왓장처럼 목이 칼칼하고,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라고 했                         습니다.(시편 22,16)




예수께서도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22에서와 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나눠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았습니다(요한 19,24/ 마태 27,35/ 마르 15,24/ 루가 23,34).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번뇌와 불의를 대변한 시편 저자의 외침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통의 극치인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끝내 부활하셨습니다.


성자께 대한 성부의 지극한 사랑이, 그 부활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한 성자의 수난과 고통이, 성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난은, 인류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요 극치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또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시편 22는, 인류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 수난에의 신비에 참여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할 때마다, 이 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가난한 시인의 절규는, 성부의 버림을 받고 죽기까지 하셨던 그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그 가난한 신앙인의 호소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의 고통 앞에서 침묵을 지키시는 하느님께 의아심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생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은 오직 십자가상의 절규와 수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느끼는 곤혹(困惑)은, 멀리 계시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 때문이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神의 죽음 운운하는 ‘세속의 도시’의 사람들에게, 신의 죽음을 말한다면, 니체의 말과 같이 “신은 영원히 죽어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은, 죽음의 세계로 내려갔지만, 그 세계를 처 이기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때로는 버림을 받은 듯한 허무감에 휩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새벽녘의 어두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결코 외롭거나 고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도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천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에 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서는 죽음이 설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꼭 같이,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더불어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고린 4,8-14).




성금요일에 우리가 묵상하는 기도인 시편 22는, 그리스도의 기도이기 때문에 더욱 중대합니다. 이 시는, 교회가 고통 당하고, 경멸 당하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숨져 가신 것은, 나와 우리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고통을 당하시고 버림을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고통과 버림받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나아가 부활은 인류에 대한 관심이며, 인류에게 대한 지극한 사랑의 결실입니다. 이 사실은 요한 사도가 누구보다도 더 잘 피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한 3,16)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이 고통과 경멸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신뢰를 잃습니다. 교회는 스승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또한 스승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고, 억울하고, 헐벗은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시편 22의 가난한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편 22,27의 노래와 같이, “가난한 이들, 배부르게 먹으리이다! 주를 찾는 사람들이 당신을 기리며, ‘너희 마음 길이 살라!’ 말하리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22는, 하느님 백성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체험하는 신앙인이라면, 홀로의 구원에만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백성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시편 22의 노래도, 투쟁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류전체의 신앙과 소망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한 희망은, 바오로의 말과 같이 세세대대에 ‘신음하는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할 때, 다른 모든 지체도 아파하지 않습니까?”(1고린 12,26)라고 한, 바오로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한 개인이 아파해도 함께 아파하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다. “당신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33).




신앙은 가능합니다. 신앙은 주 예수와 더불어 가능합니다.


신앙은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투쟁합니다.


신앙은 또 항구합니다. 신앙은 결코 평온한 대양 위를 노니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박이 거센 파도를 만나도 굴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자세가, 바로 우리 신앙의 자세입니다.


고요한 항구로의 피신을 꺼려하고,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용맹이 바로, 예수께서 요구하신 신앙의 태도입니다.


신앙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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