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키세덱 이야기 (창세 14,17-24)
도현우
우리는 전쟁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이 이교도인 멜키세덱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교적인 성직자에 대한 아브라함의 경의는 구약성서적 야훼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멜키세덱은 귀환하는 승리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흠숭하는 신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이때 그는 직감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신”을 아브라함을 승리로 이끄시는 분으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그의 축복에 고개를 숙이고, 소유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의미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을 강조해서 본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장차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차지할 자리를 소지한 자 앞에 아브라함이 머리를 숙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멜키세덱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찾아 볼 수 있겠는데, 먼저 거시적 하느님 백성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엔 보다 현실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데, 그 때는 왕궁과 성전의 도시인 예루살렘과 족장 전통적 신앙을 가진 지방 주민들 사이에 간격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오랫동안 지방 주민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려 하지 않았었습니다. 한편 지방 주민들은 족장 시대적 지파제도를 하느님이 주신 질서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은 비록 외국인에게 세금 낼 것을 약속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멜키세덱에게 고개를 숙이고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에게 멜키세덱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제사장인 동시에 정의의 왕이며 평화의 왕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아 멜키세덱은 이미 후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과 매우 가까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에게만 존경을 표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느님 백성의 개념이 넓혀지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의로운 정치권력적 측면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후대에 보면, 다윗은 영토를 모두 정복한 다음에 예루살렘(살렘)을 다스리던 사제 왕조와 동맹을 맺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백성의 정치적 내지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지만, 종교적 역할과 임무를 계속 수행한 자들은 사독 사제들의 후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독 사제들이라고 하면 멜키세덱(사독=정의로운 분: 멜키세덱=나의 왕은 정의로운 분이시다)의 이름을 상기시키는 데, 아브라함과 소돔과의 합의는 백성을 억압하고 부를 쌓는데 관심이 없는 정치권력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 역시 자기 동료들에게 속한 부분만을 받아들임으로써, 각 사람은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차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의를 실천하는 모범 역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가치관,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더 정의로운 사람들은 볼 수 있다. 그들이 단지 종교인이 아니라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오만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인이지만 일주일에 단 하루, 주일에 성당에서만 가장 선량한 척하고 정의로운 척하다가 나머지 여섯 날은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보다는 일주일에 칠일 모두를 정의롭게 주변 사람들을 돌봐가며 사는 타종교인들이나 비종교인들이 오늘날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오늘날의 멜키세덱이 아닐까한다.
따라서 신앙인인 우리 역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개방적 안목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느님의 사람, 그 분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널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즉 교회 울타리 밖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을 때 세상에 대한 복음화 역시 구체화되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