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아내

 

빌라도의 아내


                                                                     송기호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에는 ‘케사르’ 혹은 ‘시이저’라고도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로서 오늘날 우리들이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이룩했습니다. 이처럼 로마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였었지만, 역설적으로 몇몇 사람들은 로마를 위해서 그를 없애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이 너무나 탁월했으므로 당시 일종의 민주주의 형식의 지배체제를 갖고 있던 로마가 일인의 권력에 편중되는 독재로의  체제로 변화할 가망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케사르를 암살하였습니다.




이같은 일에 있어 케사르의 아내였던 칼프르니아의  꿈 이야기가 일화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꿈에서 케사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케사르가 암살당했던  3월 15일에 “절대로 외출하지 말아달라고” 애원을 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빌라도의 아내에게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왔습니다.”(마태 27:19)  그러나 빌라도나 케사르나 아내의 꿈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좀더 이야기하기 전에 빌라도와 그의 아내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빌라도에 대해서는 몇몇 사실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귀족계급 출신이었다고도 하고, 몇몇 학자들은 빌라도의 이름이 해방된 노예 비레아스에서 나왔다고 하여 노예계급 출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대단한 야심가로 기원 26년, 유대의 총독을 맡아 10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크로우디아 플로클라라는 이름으로 빌라도는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상류계급에 혈연이 생겼다고 합니다. 




크로우디아는 자기 뜻을 다 받아 주는 환경에서 커 왔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나서도 소녀와 같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같은 그녀이기에 총독으로서 매우 일이 많았던 빌라도의 소홀함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잡히시던 날 밤, 그날은 빌라도가 모처럼 정무를 일찍 끝내고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지냈습니다.  새벽이 되어 동트기 전에 사람들이  빌라도를 찾자 빌라도는 자신의 관저로 가게 되었고, 크로우디아는 잠깐 잠 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날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고, 모든 행복한 여자처럼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일,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잠 속에 잠겨있을 때, 그녀는 꿈 속에서 피 흘리는 남자의 모습과 더불어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잠을 깨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밖에서 예수의 재판으로 떠들썩한 소리와 더불어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크로우디아는 이 소리를 듣고 이제야 비로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인을 불러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저렇게 떠들썩 한가를 물었습니다.  하인은 그녀에게 예수에 대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의 일 밖에 몰랐었지만, 아직 소녀와 같은 순진 무구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녀는 지금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꿈 속에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하는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득 꿈…! 이라는 것에 케사르의 아내였던 칼프르니아 꿈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빌라도와 그의 아내가 살던 시대와 케사르가 암살 당한 시기는 별로 시간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 깊은 인상이 남아 있던 시대였습니다.  갑자기 그녀는 마음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얼른 하인을 불러 빌라도에게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림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왔습니다.”(마태 27:19)  하는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전갈에 빌라도의 마음속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도 케사르의 암살과 관련된 칼프르니아의 꿈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재판이 유다 지배자들의 질투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던 그는 예수를 풀어주기 위한 구실 찾고자 하였습니다.  과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관례를 이용하려고도 하였고,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마태 27:23) 하고 반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에 빌라도가 그의 아내가 전한 전갈대로 처음부터 이 재판을  시작하지도 맡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지만 빌라도는 유다의 총독으로서 이것을  피할 수 없었고,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말한 “나에게는 너를 놓아 줄 수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을 모르느냐?”(요한 19:10) 라는 말처럼 자신의 권력과 힘을 믿고서 재판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같은 점에 있어서 빌라도는 혼자 잘난 체 하는 고치 속에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의 시대와 그의 야심 그리고 그 자신의 이같은 조건들이 예수를 석방시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수 주변의 폭동이 점점 거세어지자 빌라도는 포기했고, 예수는 곧  십자가를 향해 떠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수많은  일들을 만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의 일면입니다. 이런 일 가운데는 쉽고 즐겁고 기쁜 일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어렵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쉽고 즐겁고  기쁜 일은 우리 자신들에게  그다지 큰 문제를 던져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은 우리 자신들에게 큰 문제를 던져줍니다.




이런 문제가 다가올 때, 우리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닌 능력과 힘에 의지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과 하느님의 능력과 힘에 의지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이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첫 번째로 시도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안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하느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에서 대하게 된 예수에게 온 비극은 빌라도가 그의 아내의 충고에 유의했다면 피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같이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빌라도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빌라도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곧,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서, 그것도 10년 동안이나 총독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자신의 힘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서  그의 아내 크로우디아의 꿈이 케사르의 사건을 그의 마음 안에 생각나게 했다했을지라도 케사르처럼 힘없는 한 여인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같은 빌라도의 행동은  하느님의 뜻에 더  깊은 통찰력을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떤 큰 일과 사건에서 드러나기보다는 언제나 우리의 작은 일상 삶에서 드러납니다.  성서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는 느낌은 이스라엘의 역사서를 보고 있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상의 작은 삶의 기록입니다.  하느님은 이 역사를 통해서 당신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보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생활들, 곧 우리의 역사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고 계십니다.




빌라도의 아내인 크로우디아의 전갈은 일상 삶 가운데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말씀의 전달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성은 작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우리 보다 낮은 사람, 못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잘난 자신의 껍질 안에 단단히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면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가 들어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크로우디아의 전언은 빌라도로 하여금 몇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하느님이 여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크로우디아의 전언에 따라 누가 뭐라고  하든 무죄한 사람의 일에 아무런 상관도 안 하는 것, 그가 무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무죄한 사람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는 것, 그렇지 않으면 무죄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빌라도처럼 주변 환경에 이끌려 죄를 지우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삶의 십자가 속에서 우리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십자가는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선택으로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라는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분열적인 상황이 빌라도로 하여금 한 여인의  외침을 듣지 않게 하였습니다.  한 여인의 힘이 이 같은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악에  대항해서 발언하는, 적어도 발언하려고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흠모해야 하고, 우리  자신도 신앙의 힘으로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 같은 외침이 빌라도의 아내처럼 작은 외침이 되겠지만 그같은 작은 외침이 모이다 보면 큰 외침을 이루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 오늘날 온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던져준 큰 사건으로 변화된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지극히 작은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행하는 작은 선의 행동이 우리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 출발점이 됩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그 결과를 볼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작은 삶 가운데서 그같은 첫  출발을 시작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자신의 일밖에는 몰랐지만, 예수에 대한 일이  옳지 않다고 느꼈을 때 곧바로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전언을 빌라도에게 보내어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 크로우디아처럼 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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