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31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 31주일

        1. 강길웅 신부(가)/2                     2. 김현준 신부(가)/3

        3. 조정오 신부(가)/5                     4. 김몽은 신부(가)/7

        5. 전주원 신부(가)/8                     6.최인호 작가(가)/9

        7. 낮은자가 높은자(가)/10               8. 자신을 알면(가)/12

        9. 자기를 낮추면(가)/14          







1          연중 제 31 주일   마태 23,1-12(가) 지도자부터 옳게 살아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말라 1,14b~2,2b.8~10 (법을 가르친다면서 도리어 많은 사람을 넘어뜨렸다) 

제2독서 Ⅰ데살 2,7b~9.13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복 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교회의 사제들과 또는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부터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회의 가장 튼튼한 발판은 종교인데 종교의 지도자가 옳지 못하고 썩어 있다면 그 세상은 볼장 다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BC587~B.C538)을 할 때 그들은 신앙의 깊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멀리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나게 되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로소 율법을 발굴해 내기 시작했으며 오늘 우리가 말하는 유다이즘, 즉 유대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너무 어렵고 까다로워 그것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보전하며 해석하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이 요청됩니다. 율법학자들이 등장한 것은 대체로 유배 이후인 기원전 450년 경으로 봅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대단한 권위가 있었고 또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부터는 그 본질이 변하게 됩니다.




우선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에 일일이 법 적용을 하다 보니 필요 없는 법들이 많이 늘어나서 백성들의 삶을 오히려 지나치게 억압하게 되었으며 그러자니 율법은 형식주의에 빠져 버렸고 율법학자들은 율법 위에 군림하는 모순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백성들만 괴롭혔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170년 경으로 봅니다. 세월이 갈수록 율법이 많아지다 보니 어느 한 사람도 일상생활에서 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율법만을 지키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바리사이\’라는 말 자체가 일반 백성과는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좋게 말하면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축별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신앙인\’이란 탈만 썼지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전통을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파괴했고 없거나 무식한 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으며 좁은 안목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한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실로 ‘회칠한 무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모순조차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정말 옳게 살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썩으면 다 썩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 앞에 모범이 되어야 하며 선생은 학생 앞에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다 떳떳하고 올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 중에 그 도덕성과 깨끗함이 가장 요청되는 지도자가 바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자체가 사회를 정화시키고 구원시키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데 종교 지도자가 썩었다면 그 사회는 볼장 다 본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예언자가 당시의 썩어빠진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유배 이후에 그들은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니 다시 또 기강이 흔들리게 됩니다. 사제들이란 자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돈만 알고 음탕한 짓만 일삼으니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꾸짖고 개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도 함께 성찰해 봐야 합니다.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학장 신부님께서는 ‘오늘의 시대에서 신부들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란 꼭 성직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자들도 있고 평신도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의 신분으로서 나라의 중책을 맡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여받고 있는 ‘왕직\’은 남을 누르고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처럼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겸손하게 봉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말씀 안에서 실천할 때 남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구원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2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가) 낙엽 닮기  

                                                 김현준 신부 




11월, 낙엽의 계절을 맞이한다. 떨어진 낙엽을 쓸어모으며, 낙엽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리며, 타고 남은 재를 땅에 묻으며, 우리는 11월을 맞이한다. 그래서 ‘낙엽은 제뿌리로 돌아간다(落葉歸根)\’고 한다.

  우리는 11월 첫째 날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다 하늘로 올라 하느님의 사람이 된 성인들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로 지낸다. 11월 둘째 날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 땅에 묻힌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로 지낸다. 그래서 11월은 사랑의 제 뿌리, 제 자리를 생각하게 하는 때이다.




오늘 연중 제31주일의 복음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예수에서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지적하는 전반부와,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후반부로 살펴 볼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 자신들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다. 다만 남에게 ‘열심\’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행동하였다, 예를 들면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녔다. 원래 ’성구 넣는 갑\’은 율법 구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몇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넣는 작은 상자인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 야훼 하느님이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기억하며, 이를 기념하는 표지로 이마나 팔에 매달고 다렸다.(신명 6, 1-9)




그런데 이것을 ‘크게 만들어\’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는(신명 11,18) 표지보다는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특별한 결속 관계를 드러내는 표지로 삼았다. 또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기억하는 외적 표지로 옷자락에 술을 달았던 관습(민수 15,37-41)은 다만 박수와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율법학자들의 이런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격한 차이를 보이라고 하신다. ‘스승\’일 수도, ’지도자\’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있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는 아주 현격한 차이를 보이라고 가르치신다.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2)는, 사람은 제 뿌리를 찾고 제 자리를 찾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위선




그렇다. 술이라는 낱말을 써 붙이고 다닌다고, 술을 머리로 알아들었다고 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써서 머리에 이고 다닌다고 말씀이 머리에 새겨지고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라도 지킬 때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낙엽귀근, 낙엽은 제 뿌리로 돌아간다는 11월에 “낙엽 한번 밟고 커피 한잔 어때요?\”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교육원으로 명을 받아온 지 두달, 모든 것이 낮설지만 낙엽과 친해지고 있다, 교육원 마당에는 빨리 단풍들고 낙엽되는 큰 느티나무 5그루, 튤립나무(Tulip tree, 목백합) 5그루, 은행나무 2그루, 둘레가 2m40cm나 되고, 높이도 20m나 되는 마로니에(Marronier, 너도 밤나무과)가 하늘을 덮고 있어 저 동해안 낙산사의 낙엽 쌓인 오솔길을 걷는 겉 못지 않다.

  

교육원 입구에 “낙엽 한번 밟고 커피 한잔 2백원! 어때요?\”라고 써 붙이면 어떨까. 자판기 커피라서 좀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게 그렇게 드나들다 보면 교육원과 친해지는 사람이 늘지 않을까.

  그렇게 커피 한잔 들고 낙엽을 밟으니 동화 한편이 생각난다. 어느 늦은 가을이었어요, 잎이 모두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나무에 유난히도 작은 잎 하나만이 아직 그냥 매달려 있었어? 나무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작은 잎을 타일렀어? “나뭇잎은 때가 되면 떨어져야 한단다.\”               




거룩한 나뭇잎의 삶            




겨울이 다가오면서 작은 잎은 하루 종일 온몸을 떨었어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작은 잎을 돌보던 나무는 말했어? “지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니? 다른 잎들과 섞이는 게 싫으니? 땅속에 들어가 썩는 게 두려우니? 땅에 떨어진다고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게 아니란다.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 작은 나무를 자라게 하고 예쁜 꽃을 피워준단다. 늙은 나무의 뿌리를 따뜻하게 덮어주기도 하고 마구간에 사는 동물의 포근한 잠자리가 되기도 하지. 또 너처럼 예쁜 나뭇잎은 어느 조그만 아이에게 발견되어 그 아이의 보물이 될 수도 있단다.\” 마침 바람이 획 불어오자 작은 잎은 그 바람을 타고 땅으로 내려갔다. 

  

낙엽을 주워 ‘보물\’ 상자에 넣은 어떤 사람은 이런 글을 적어 함께 넣었다, ’단풍든 낙엽,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나뭇잎. 삶의 완성이 죽음인 것처럼 나뭇잎의 완성도 용기있게 나무에서 떨어져 낙엽되는 것, 나뭇잎을 다 떨구지 못한 나무는 이듬해 새순을 틔울 수 없다, 나뭇잎이 살았던 그 자리에 새순이 돋아날 눈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새로 나고 새로 죽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나뭇잎의 삶, 참으로 거룩한 죽음과 부활의 삶이고 섬기고 낮아지는 모습이다.



섬김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길이요, 낮춤은 하느님의 크기 안에 들어가는 길이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12)













3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가) 얼굴 없는 신앙인

                                                         조정오 신부




가식적인 신앙생활의 탈을 벗겨 진실된 삶을 갖게하기 위함.




오늘 주일 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자칫 잘못하면 쉽게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위선과 교만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그들의 태도를 심하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꾸려서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닌지 곰곰 생각하며 같이 묵상해 보십시다.




위선과 교만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의 말씀은 복음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가 18, 11 에서의 기도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은 그 한 예입니다.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거나 하지 않으며 또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전능하신 분의 제단 앞에 서서 서슴치 않고 교만에 넘친 고백을 하는 것을 봅니다.




또 루가 10, 25 이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위선에 가득찬 사람의 몰인정을 볼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칼에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옆에 쓰러져 있는 데도 거룩한 제관은 피를 묻히면 부정을 탄다고 그냥 지나쳤으며, 가장 성자연한 체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친 레위인도 막상 자기가 가르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기회에서는 그 고통 중의 형제를 외면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를 회칠한 무덤 같다고도 하셨으며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질책하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나,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아닌지요?

우리는 간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니까, 사랑을 실천해야 될 기회를 외면해도 괜찮겠습니까?




지난 여름 어느 날 신문 사회면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던 신파조의 유행가 가사와도 같은 「고아 울린 고아원」 이라는 보도를 기억하시지요? 이는 현대의 위선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기사였습니다. 서울 영등포 「천애 고아원」 과 「천애 재활원」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하늘도 사랑하는 고아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고아원을 운영한답시고 정부 보조금과 사회 자선단체 성금을 빼돌렸으며, 고아 수를 실제보다 늘려 보고함으로써 생계비와 쌀을 횡령하고, 고아들에게 형편없는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어린 고아들을 영양실조의 고통에 몰아 넣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어린 고아들을 취직시켜 밥값을 받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 이런 이야기가 한 두 가지겠습니까마는 남들에게는 사회사업이네, 자선사업이네 하는 허울 좋은 간판을 앞에 내걸고, 뒷구멍으로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부정을 일삼는 그들의 이야기는 지나쳐 버릴, 한낱 남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이에도 크든 작든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혼자 거룩한 체, 혼자 열심한 체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범죄를 떡 먹듯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와 다른 점이 있어서, 우리는 남보다 잘났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았다는 이 위험한 이기심은 가장 위험한 위선입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선물에 의해 간택된 우리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우쭐거리는 교만 위에 우리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신심과 기도를 이용하여 견고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비는 마음으로 제단에 예물을 바치나 분심으로 가득한 마음은 예배하는 척 하면서 머리를 숙일 뿐입니다. 남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체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많은 교무금을 바치는 신자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윤리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심한 척 예배를 드리고, 묵주를 굴리나 마음 속에는 이기주의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비판을 일삼는 현대판 바리사이가 돼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기도하고 영적생활을 한답시고 소화가 안될 정도까지 먹으면서 우리의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을 모른척하고 있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질책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무 심하다고 여기십니까? 나는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야 할 꾸지람을 내가 대신 듣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게 생각되신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위선에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틀리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동정할 눈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눈물도 말라버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기적 타산에는 눈이 벌겋지만 옆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가 고통받고 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가면을 쓴 이중생활은 전지하신 하느님 앞에는 부질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중 앞에 나의 이름이 부려지고, 나에게 영광이 주어지는 찬사를 듣기 좋아하는 그는 이미 받을 영광을 현세에서 다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이마에 성호를 긋고 있지만, 그는 십자가상의 어리석음을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겸손한 종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지 않은 사람입니다.




체면에 사는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의지하는 그리스도께서 구차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을 창피해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봉사하기보다 봉사 받기를 더 좋아하는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묵묵히 털을 깎이는 순한 양처럼 하느님 앞에 교만했던 과오를 고백하고, 체면과 위선에서 빚은 갖가지 잘못을 뉘우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봉헌하도록 노력하십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아멘.




4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가) 진정한 행복

                                                               김몽은 신부




교형 자매 여러분, 봉사의 본질에 관해서 몇 차례에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남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실상 따지고 보면 그것은 곧 내게로 돌아오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며, 악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거둘 것이니 아무도 가시덤불에서 무화과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지혜도 역시 여기에 대해 잘 말하고 있습니다. 화는 악행을 쌓은 곳에 인연한다는 말이요 복은 선을 행함으로써 오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봉사했을 때, 그것이 곧 내게로 돌아온다는 이것은 얼핏 생각하면 하나의 이기주의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인간은 누구나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생각은 결코 이기주의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욕망을 어떻게 실천에 옮기느냐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의 차이인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밑바닥에도 역시 행복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리석기 때문에 악을 행함으로써 행복이 손쉽게 얻어질 것이라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 즉 남에게 봉사하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가장 슬기로운 사람으로서 그는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얻어지는 이득흔 없을지라도 남에게 봉사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첫째로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평안함과 희열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게 그 사람에게로 유리하게 돌아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외부로부터의 보수보다도 스스로의 인격을 높여가며 인간 완성이라는 내부로부터 최대의 보수를 받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이득이 있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평생 그는 성숙된 인간이 되지 못하고 마는 불행한 사람으로 끝납니다.

그는 끝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맙니다. 그가 생각했던 행복이라는 것은 실은 하나의 가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은 끝까지 그를 괴롭히는 요물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갑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한 행복을 손에 넣었는데도, 그는 끝내 행복해지지 못하고 일생을 마칩니다.




인간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봉사의 본질은 진정한 행복을 밝혀 주는 등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봉사를 받으러 오지 않고 봉사하러 왔노라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봉사하는 마음도 사랑이 없을 때 그것은 하나의 허영이요,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진정으로 봉사하는 마음에는  사랑이 불타 올라야 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 그는 진정한 인격자가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5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가)

                                                              전주원 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백성입니다. 그 중에서도 회당의 서기관들과 바리세이는 목숨을 내 걸고 율법을 수호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것이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넘겼고 여호수아는 유대의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이것을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세이들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세이들은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의 대원칙을 가르치는 한,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대 원칙이란 하느님 공경과 인간에게 대한 존경입니다. 하느님과 그 분의 이름을 공경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공경하고 부모를 하느님같이 공경하고 타인의 생명을, 재산을, 생활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세이들은 수 천 가지의 규례를 만들어 내어 민중들에게 종교를 하나의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해 버렸습니다.




종교가 인간을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메고 간다면 이건 참된 종교의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바리세이들은 가장 사소한 여유도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란 마음이야 어떻게 되었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겉치레와 규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문을 적어 넣은 가죽 주머니를 이마와 손목에 매달고 다녔습니다. 이것을 ‘테필린’(Tephillin)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지크’(zizith) 라고 하여 옷술을 크게 달아서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과시했습니다. 회당이나 연회석에선 회중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자기의 경건함을 과시하려 노력하고 높은 칭호를 듣기 좋아했습니다. 이런 것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목적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도 자랑삼아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선행을 보고 타인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 위해서 행해야 합니다. 대구서 사업하는 어떤 사장은 대통령과 악수하기 위해 1억을 내놓았지만 자기 본당에는 아마 자기 손으로 5,000원 짜리 한 장 안 내놨을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한 두 명이겠습니까? 무엇을 위한 선행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6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가) <큰 바위 얼굴>

최인호 작가

호손(Hawthorne, 1804-1864)은 미국의 소설가로 매사추세츠 주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7세기 이래로 미국에서 살았던 청교도를 조상으로 모신 가정이었으므로 청교도의 사상, 생활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가 남긴 짧은 소설 중에 ‘큰바위얼굴’이란 주옥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어린 아들 어니스트가 사는 곳의 골짜기에는 큰바위얼굴이라고 불리는 장엄하고도 숭고한 형상의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바위와 같은 모습을 가진 거룩한 사람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어니스트는 그 바위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바위와 같은 얼굴을 지닌 사람이 찾아올 것을 믿으며 평생을 보냅니다. 소년 어니스트는 거부(巨富)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에언의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거부가 왔을 때 마을사람들은 그 부자가 큰바위얼굴과 닮았다고 환호하지만 소년은 실망합니다. 그 이후, 위대한 장군, 정치가가 찾아오지만 어니스트는 실망합니다. 그러는 동안 어니스트는 노인이 되었고, 어느 날 저명한 시인이 옵니다. 그도 어니스트가 그토록 기다리던 큰바위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실망한 어니스트가 울고 있을 때 시인은 문득 겸손하고 온화하고 사려깊은 어니스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바위얼굴과 똑같습니다.”』




주님은 대접받기를 원하고 스스로 존경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의 ‘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이고 또 하나는 ‘내 속에 들어있는 나’입니다. 불교에서는 ‘내 속에 들어있는 나’를 진짜의 나, 즉 진아(眞我)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진짜의 나’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큰바위얼굴’에 나오듯 돈을 모으고 권력을 얻고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허상(虛像)이며 허명(虛名)일 뿐입니다.




호손의 ‘큰바위얼굴’은 어떤 사람이 예언 속의  인물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보입니다. 어니스트는 자신이 큰바위얼굴을 닮은 사람인 것을 전혀 모르고 기다렸으며, 끊임없이 큰바위얼굴의 겸손과 침묵, 그 거룩한 인내와 순종을 닮으려 노력하며 한평생을 보냄으로써 자연의 풍상이 큰바위를 거룩한 얼굴로 조각한 것처럼 그 마음속에 깃든 인격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큰바위얼굴로 조각해 나갔던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권력을 얻고 명예를 얻어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존재의 최고 가치는 살아있는 큰바위얼굴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릿돌(마태 21,42)이자 큰바위얼굴입니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큰바위얼굴과 닮고 싶은 것뿐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7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가)  낮은 자가 높은 자




   율벌학자의 권위




  율법학자들에게 퍼붓는 예수님의 질책은 어마어마하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엔 율법학자들이 대단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랍비(선생님)라 는 칭호를 받았다. 또 율법을 잘 알았기에 민중들의 잘잘못을 율법에 의거하여 판결해 주는 재판관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신주 모시듯이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율법대로 살라고 을러댔다. 그러나 민중은 너무나 많고 복잡한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 앞에 서기만 하면 죄인처럼 늘 고개를 숙이고 작아졌다. 더구나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민중들로부터 아버지, 아빠로 불리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낳아 준 부모는 육신만 키워주면 되지만, 율법학자는 오랜 세월, 아니 죽는 날까지 민중에게 영적인 교육을 해야 하므로 부모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는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근사한 옷을 입고 다녔다. 이마와 왼쪽 팔 위에 매달고 다니는 ‘성구 넣는 갑\’과 검은 옷 아래 끝단 네 곳에 달고 다니는 ‘기다란 술\’은 자신들이 대단한 인물임을 드러내는 표징이었다. 성구 넣는 갑 속엔 성구(출애 13,1-16; 신명 6,4-9,11,13-21)를 종이에 싸서 돌돌 말아 넣고 다녔다. 보통 유다인 남자들이 달고 다니는 성구갑 보다 그들은 더 큰 것을 달고 다녔다.




  정말 이렇게 구역질날 정도로 난척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갈고리로 후비는 듯한 모욕적인 발언을 하셨다. “그 인간들은 어디에서나 윗자리를 탐하고, 길거리에선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존경받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남들에게서 스승,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기를 원하나, 진정 아버지는 하느님뿐이다. 스승은 한 분뿐이니 너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낮추는 사람이 돼야 한다\”(마태 23, 6-11).




  또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 같은 족속들이라고 하시며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 23,33)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나셨던가 보다. 독사의 족속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온화한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권위에서의 해방




  결국 율법학자들은 신주 모시듯이 하던 율법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단순한 계명으로 압축시키신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하다가 사형장으로 몰고 갔다. 권위적인 대통령, 권위적인 공무원, 권위적인 사제, 권위적인 수도자 등등의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신자가 이사 가서 성당을 찾아갔다. 주일이 되기 전에 우선 성당을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갔는데, 성당 앞에는 작은 화단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서 누군가 작업복 차림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반갑게 맞았다. 신자가 사정 이야기를 하니 “네, 그렇습니까? 제가 본당신부입니다. 잘 오셨습니다\”하고 반가이 인사하며 사제관으로 안내하여 차를 대접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신자가 사제관을 나올 때까지 신부는 따라나오며 다정히, 그리고 친절히 인사하며 떠나보냈다. 신부에게는 권위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 신자는 정말 이곳으로 이사오기를 잘했다고 몇 번이나 되뇌며 집으로 향했다.




  그 사제가 신자에게 해준 것은 친절함뿐이었다. 격의 없는 대화, 겸손을 보여 준 것뿐이다. 대통령과 공무원이 겸손하여 고개를 숙이면 나라가 잘된다. 선거철만 되면 납작 엎드려 설설기면서도, 일단 당선되고 나면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 복음은 사제들을 겨냥하고 있다.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예수님은 누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앙화로다, 앙화로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자신들은 실행치 않는 그대들은 앙화로다.\” 그리고 민중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은 잘 실천하되 그들의 행위, 그들의 위선은 본받지 말라\”고 다그치신다.




  인간의 욕망 중에 나이를 먹어도 점점 거세어만 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예욕이다. 명예욕에 빠진 사람은 자기 과시를 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 자기 과시를 위해서는 거짓을 일삼고,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들 앞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과시가 성취되면, 하느님 앞에서마저 자신을 과시하려고 덤벼든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승진했다고 누가 말하면,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느님이 승진시키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보았다.




  원죄도 자기 과시의 결과요, 바벨탑도 자기 과시의 결과이련만,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모른다. 이것이 인생의 비극이며, 인생의 승패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조건 머리를 90도 아니 180도라도 바짝 낮추어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깊이 새겨들을 말씀이다. 나는 위선자, 그런가? 아닌가? 율법학자들처럼 남들에겐 명예, 과시욕을 버리라고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탐하는 위선자여서는 안될 것이다.













8           연중 제31주일   마태 23,1-12 (가) 자신을 알면 겸손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완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생각과 의지가 바르면 현재의 자기 모습에 불만을 느끼고, 더 완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더 완전한 형태로 완성시켜 가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완성된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켜가야 하는 생명을 주셨다. 사람의 자기 완성은, 각자의 자유에 맡겨진 과업이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원하는 데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의 일생은 우리 스스로 우리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더 높고 완전한 형태의 생명으로 완성시킬 수도 있고, 더 낮고 무가치한 생명으로 추락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바르게 살면 살수록 우리의 생명은 고귀해 진다. 그런데 바르게살기 위한 전제 조건은, 바르게 아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바르면 우리의 행동도 바르게 된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게 알아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사람이 잘못 살게되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고, 자신을 모르면 모를수록 교만해진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만큼 얻기 어려운 지혜도 없다. 그 것은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뿌리깊은 교만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만만큼 해롭고, 발견하기 어렵고, 제거하기 힘든 결점도 다시없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한 지성만으로는 접근 할 수 없는 무한한 신비의 세계를 직면하고 있다. 이 신비의 세계는, 무한한 지혜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 주셔야만, 인간이 볼 수 있는 세계이다.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자신에게 온전히 알려질 수 없는 신비이다.




  인간이 무엇이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지혜로 비추어져야만 비로소 드러난다. 그런데 교만은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의 마음을 비출 수 없게 차단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겸손하고 단순한 영혼들만을 비추어 준다. 교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부풀어오르면 자기 자신을 실제 보다 훨씬 더 탁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자기 우월감을 만족시키러 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교만을 키우게 되어 자신을 타락시키게 된다.




1.1.1.1.1.1.1.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에겐 은총을 거두신다.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마저도 교만을 키우는 데 이용하는 데, 하느님께서 사람이 자신을 타락시키는 것을 도우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 5,5)




  교만은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는 하느님의 빛을 차단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한다. 그러면 이 어둠 속에서는 모든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된다. 교만으로 치명적인 병을 갖게된 사람의 정신은 상반되는 이중의 잣대로 자신과 남을 바라보게 된다.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자기의 교만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만 정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서는 장점만을 보고 남에게서는 허물만을 본다. 모든 공은 자기에게 돌리고 모든 탓은 남에게 돌린다.




  나는 언제나 나를 위로 끌어올리고, 남은 언제나 내 밑으로 끌어내린다. 자기의 태산같이 큰 결점은 티끌같이 보고 남의 티끌 같은 결점은 태산 같이 본다.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고 악행은 감추면서, 남의 악행을 드러내고 선행은 감춘다.




  교만은 이렇게 사람의 정신을 눈멀게 만듦으로써 진실을 볼 수 없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1요한 1.8)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볼 줄 아는 진짜 성인들과 자기가 죄인이라는 진실을 볼 줄 모르는 진짜 죄인들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빛이 사람의 마음을 더 밝게 비출수록 사람은 자기의 허물과 결점을 더 잘 보게되고, 그럼으로써 자기는 누구보다도 못한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성덕이 높아질수록 모든 사람 아래로 더 깊이 자신을 낮추게 된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을 참으로 알게되면, 자신이 무지하고, 약하고,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은 칭찬 받을 자격도 존경받을 자격도 없고, 남보다 우월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아무도 지배하지 않고 아무 위에도 군림하지 않으며, 모두의 종이 되어서, 모두를 섬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커지고.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높아지며,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더 고귀해 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9              연중 제31주일   (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교구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23,1-12)에서 예수께서는 유다교의 열성파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잘못된 처신을 들추어 단죄하신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는 겸손과 봉사를 촉구하신다.




1. 위선을 꾸짖으심(마태 23,1-7)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에 율사들이 가르치는 말은 받아들이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율사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4절). 여기서 “무거운 짐들”은 유다교의 잡다한 율법 규정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다교의 613가지나 되는 잡다한 율법을 사랑의 이중계명(마태 22,34-40)으로 환원시키셨다. 또한 유다인들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달고 다니면서 신심을 과시한다(5절). 율사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드러내 보이려고 이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율사들은 어디 가든지 환대받기를 좋아한다(6-7절).




2. 겸손과 봉사를 촉구하심(마태 23,8-12)

유다교 율사들은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즐겼다. 또한 그들은 유다교 신도들에게 아버지와 지도자로 군림했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일깨운다. 즉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랍비’라고 불려서는 안된다고 한다(8절). 랍비는 그리스도 한 분이시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계에선 ‘아버지’란 호칭도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9절). 아버지는 하느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계에선 ‘스승’이라는 호칭도 쓰지 말라고 하신다(10절). 스승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11-12절).




3. 우리의 이해

  율법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율법의 내용, 곧 율법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우들에게 교리적 부담, 윤리적 부담, 경제적 부담을 지우기보다는 그들에게서 짐을 덜어주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허례허식과 권위주의에 빠지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하고 교우들을 섬기는 봉사정신을 지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철저히 남을 섬기는 삶이었고 그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기꺼이 대신 속죄하는 대속행위(代贖行爲)였다.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지도자들이 겸손과 봉사의 삶을 산다면 교회야말로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구원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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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31주일 주일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 31 주일


    울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제 1 독서 : 말라 1,14b; 2,2b. 8-10


    제 2 독서 : 1데살 2,7b-9.13


    복 음 : 마태 23,1-12


      성서의 모든 말씀은 믿는 이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이 힘들고 불편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힘들고 불편스럽다. 따라서 아무도 그 말씀을 형제들에게 사용할 권리가 없다. 그런데 사실상 성서의 말씀 중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말씀들이 있다. 그 경우에 성서의 메시지는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그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사람들이 ‘충실히’ 들어서, 그들이 심각하게 처해 있거나 연루되어 있는 잘못들 또 그 잘못들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 내지는 안이하게 넘겨버리거나 묵인하는 태도를 고치기를 요구한다.

      오늘 독서들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남을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입장이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보다 오히려 더 불성실, 자만심, 겉치레 그리고 특히 위선적인 태도의 유혹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상의 ‘드높은’ 일들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그것들을 권위로써 선포하긴 하면서도 항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의 내용은 똑같은 유혹을 당하고 있는 다른 하느님의 백성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특히 ‘말씀의 선포자들’이 자기들의 사고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린다면 자기들이 처하고 있는 불편한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오히려, 현재 자기들이 선포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형제들에게 자기들이 말씀의 선포자뿐만 아니라 ‘말씀의 실천자’(야고 1,22 참조)가 될 수 있도록 기도와 생활의 일치로써 도와달라고 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너희는 바른 길을 떠났다.

    법을 가르친다면서 도리어 많은 사람을 넘어뜨렸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내용은 아마도 구약의 예언자들 가운데 맨 마지막(그리스도 강생 전 5세기) 예언자라고 생각되는 말라기 예언자가 특히 그 당시의 사제들이 탐욕의 정신을 가지고 야훼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데 대해 신랄하게 비난을 가하고 있는 제 1 독서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다:“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남의 짐승을 훔쳐다가 바치고,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친다. 그러는데 그 제물을 달갑게 받을 것 같으냐?”(말라 1,13).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이것만이 아니다. 더 큰 잘못이 있다! 히브리 사제들은 율법을 해석해야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가르치는’ 책임도 맡았고 결과적으로는 백성들의 스승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시며 하시는 말씀처럼 “눈먼 인도자들”(마태 23,16.24.26)이 되어서 모세 율법의 메시지 자체를 왜곡하고 사람들에게 편파적으로 사용하였다:“너희는 바른 길을 떠났다. 법을 가르친다면서 도리어 많은 사람을 넘어뜨렸다. 레위와 맺은 나의 계약을 깨뜨렸다…그래서 나도 너희를 동족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다. 나에게서 배운 길을 지키지 않았고 법을 다룰 때 인간 차별을 한 탓이다”(말라 2,8-9). 이러한 편파적인 태도는 우리 모두가 오직 한 분 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하느님을 유일한 창조주로 모시고 있다(10절)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비롯한다.

      보다시피 야훼의 말씀은 강력하다. 그러나 결코 사제의 직무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그것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라기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당시의 사제들에게 회개하기를 촉구한다. 아직 시간이 있다! “나는 위대한 왕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뭇 민족이 나의 이름을 두려워하리라. 너희 사제들에게, 나 이제 이 분부를 내린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기릴 생각이 없으니, 너희에게 내릴 것은 재앙뿐이다. 축복 대신 저주를 내릴 수밖에 없다”(말라 1,14-2,2).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당시의 사제, 수도자, 주교, 추기경, 교황 등에게 보낸 일부 편지들의 내용을 상기해 보라:그녀는 그들에게 어째서 예언자들이 하느님이 필요로 하신 제도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제도들을 존중하지 않고 부당하게 사용하는 데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지를 깨달으라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거슬러 하시는 논쟁의 내용은 훨씬 더 날카롭고 냉혹하다. 특히 여기서는 소개되고 있지 않은 이 대화의 후반부 즉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해주는 그 유명한 일곱 가지 ‘재앙’ 또는 ‘저주’가 담겨 있는 대목에서는 더 그렇다:“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들어가게 한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 23,13.33).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논쟁이 거의 미미하게 다루어진다(12,38-40). 반면에 루가복음에서는 마태오복음과 동일한 출전에 따른 내용이 여기저기 흩어져 전해지지만(루가 11,39-52; 13,34-35; 20,45-47 참조) 마태오복음에서처럼 격하고 분노에 차 있지는 않다.

      어째서 그럴까? 아마도 마태오가 속해 있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적지 않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여전히 바리사이파적 관습을 따르고 있거나 또는 율법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복음의 실천적 생활에 있어서도 위선적 경향이 짙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마태오복음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즉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행위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허영된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전반부(마태 23,2-7)와 그 말씀들과 대립적인 내용의 말씀들을 당신 제자들에게 하면서 그 실현을 바라시는 후반부(8-12절)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이 담화가 “군중과 제자들”(1절)을 대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이같은 사실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특별히 염두해 두고 있긴 하지만 또한 공동체 자체도 그러한 위선적 태도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아울러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위선적 태도는 모든 진실된 종교적 의미를 항상 거짓되게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반대자들의 거짓된 행위에 대해 냉엄한 공격을 가하신다:“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어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길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23,2-7).

      ‘모세의 자리’는 가르치는 직무를 뜻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시사했듯이 반드시 회당이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교도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Mishnà(유다인들의 경전)의 Abôt장(주로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경구들을 모아놓은 장:역자주) 첫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인들은 모세가 받은 계시가 그에게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 장로들, 예언자들 그리고 원로원의 원로들을 거쳐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생각했다(사도 15,21 참조).

      여하튼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충실한 율법 해석가들이긴 하지만 그 율법의 충실한 ‘실행자들’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위선자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위선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증언하신다:“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3절).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어떤 규범들을 해석할 때 그들이 취하는 ‘엄격주의적’ 태도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사실상 그러한 태도는 종교적 실천을 촉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불가능하게 한다:그들은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는 구실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으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4절). 이같은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나중에 바울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표현하고 있듯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갈라 1,14)에 있어서 아주 열심한 사람들로 자신들을 충분히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시는 예수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시다;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의 ‘열심’을 특히 외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놀랄 만한 어떤 행위들이나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기들의 “성구 넣는 갑”(5절)―자의적으로 ‘보호, 수호’를 뜻하는―을 “크게 만들었다.” 이 “성구 넣는 갑”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율법 구절 가운데서 몇 구절을 히브리어로 새겨 넣은 조그만 양피지를 넣은 작은 상자를 말한다(출애 13,1-10. 11-16;신명 6,4-9;11,13-21 참조).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 기도 때 그 상자들을 가져가서 모세의 명령을 글자를 따라 해석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겼다(신명 6,8;11,18);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특별한 결속관계를 드러내는 표지로써 그것들을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유다인들의 또 다른 종교적 관습 즉 성서의 지시에 따라(미수 15,37-41; 신명 22,12 참조) 야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한다는 외적 표지로 옷자락 네 귀퉁이에 술을 달아매었던 관습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와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일 뿐이다(6-7절)!

      위선은 항상 허영과 겉치레와 결속되어 있다:선한 것, 참된 것, 진실된 것, 일치성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면서 내면에 들어 있는 거짓된 것, 비열한 것, 허영된 것 등을 가리기 위한 외적 장신과 애매함, 신비스러움 등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위선적인 태도는 전혀 무근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추하긴 하지만 항상 어떤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향한 깊은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다;그들 역시 위선적 태도와 특히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심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상되는 장래의 상황 외에도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일부 지도자들이 휘말리기 시작한 출세주의와 거짓된 위세적 삶의 태도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시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어떻게 당신 제자들에게 훈계하고 계시는지 보자:“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는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8-10절).

      유다 사회에서는 율법 해석가들을 높이 지칭하는 데 많은 명칭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 중 세가지가 등장한다:‘랍비’라는 히브리식 명칭은 ‘나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흔히 히브리 학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기록상으로는 별로 많이 나타나 있지 않고, 그 의미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아라메아어의 ‘압바’라는 말과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으며 아주 가까운 관계를 뜻한다. ‘지도자’(희랍어로는 katheghétes이며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여기서만 사용되고 있다)에 내포되어 있는 보다 적절한 의미는 ‘안내’이다. 여러 주석가들은 이 말에 꿈란 공동체의 그 유명한 ‘정의의 지도자’를 거슬러 하는 논쟁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명칭들은 교회와 같은 “형제들”(8절)의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유일한 ‘지도자’는 그리스도시며 유일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성부뿐이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행히도 교회 안에서 줄곧 사치스럽게 번져왔고 또 현재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명칭들’의 허례허식적 허구성에 대한 반박에 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적 차원에서 상위에 있는 척하며 그들을 지배하려는 겉꾸미는 태도에 대한 반박에 있다. 이 점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사실, 마태오는 우리를 다같이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지도자’의 제자들이 되게 하는 ‘평등’의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분명히 교회 안에 있는 권위의 원칙을 부정하려고는 하지 않는다;그는 이에 대해 다른 곳에서 명백히 언급한다(16,18-19;18,18 참조). 단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권위가 봉사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즉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11-12절).

      그러므로 문제는 그리스도의 지배권하에 온전히 속해 있는 교회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권위와 더 나아가 교도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권위가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형제들―그들은 다른 한편에서 볼 때 즉 삶의 수많은 다른 분야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지도자들보다 몇 배나 훨씬 더 큰 권위를 가질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다―에게 사랑과 밝은 지혜의 봉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을 시작하는 날(1978년 10월 22일) 그리스도께 바친 기도는 참으로 귀감이 된다:“오, 그리스도여! 제가 당신의 유일한 권한의 봉사자가 될 수 있게 하시며 또한 봉사자이게 하소서! 당신의 온유한 권한의 봉사자, 기울어질 줄 모르는 당신 권한의 봉사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종이 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당신 종들 중에 종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신다:“여러분들은 제가 여러분들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이 점에 관해 더 분명하고 감동적인 표현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행한 사도직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복음 외에 그들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다고 한다. ‘종’의 역할보다 ‘어머니’의 역할은 더 위대하지 않는가!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1데살 2,7b-9).

      물론 사도 바울로의 이렇듯 큰 사랑의 분위기 속에는 신자들 편에서의 폭넓은 일치도 들어 있었다:“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13절).

      이 대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구나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 그러나 특히 오늘날 ‘말씀의 선포자들’ ‘사목자들’ ‘사도들’은 특별한 모습으로 그 말씀을 받고 있다. 바로 이들을 위해 오늘 묵상과 기도를 바치자.

      “주여, 말씀의 종들을 위해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소서. 그들의 수고에 축복하소서. 그들이 그 수고를 통하여 자기 자신들을 당신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가려는 열성 때문에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소서. 주여, 당신께서 이끌어주신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나이다. 그들이 마치 자기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당신께로 인도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자신들을 빈약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소서. 비록 당신은 사람들을 당신께로 오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든 다 사용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들을 도구로 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당신뿐이시기 때문입니다”(S. 키르케고르).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31주일


    제 1 독서 : 말라 1, 14ㄴ-2, 2ㄴ.8-10

    제 2 독서 : 1데살 2, 7ㄴ-9. 13

    복     음 : 마태 23, 1-12


    제 1 독서 : 말라기서는 느헤미야의 등장(기원전 445년)보다 약 한 세대 정도 앞서서 기록되었다. 이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제 2성전)이 재건된 후였으나 백성은 하느님께 대한 예배에 무관심했었다. 그래서 말라기는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과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했다. 말라기는 3장 1절에 언급된 특사, 파견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라기는 주님의 특사로서 잘못된 예배와 불충실에 대하여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주님께로부터 파견된 사람이었다.

    제1독서는 사제들에게 내리는 경고이다. 사제들이 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율법 규정(레위 1-5장의 각종 제사에 관한 규정 참조)에 어긋나는 병들고 절뚝거리는 짐승을 바쳤고 하느님의 법도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2 독서 :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다(사도 18, 3). 이 직업으로 사도 바오로는 자기의 빵을 스스로 벌었다.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저 얻어먹지 않겠다는 것이 바오로의 소신이었고 이런 소신은 복음을 전한다고 변하지 않았다. 즉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노동을 했다(1데살 2, 9).

    제2독서는 데살로니카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 공동체를 세웠는가를 말하는 내용인데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수고와 노동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2데살 3, 10)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런 수고와 모범 덕분에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바오로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복     음 : 마태오 복음사가는 초대 교회가 그 당시 유대교의 회당과 논쟁을 할 때 필요한 예수의 말을 23장에 모아놓았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허구성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자리를 잇는 율법학자들의 공식적인 권위를 인정하시지만 과장된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단체나 개인이나 스스로 나팔을 불고 자만에 빠지면 독선과 위선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배운다.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삶을 배워야 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 본능이다. 보여주고 싶어하고 받고 싶어하는 것, 비단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불평불만도 여기서 연유되는 게 아닐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불평,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보여줄 것이 없다는 불만, 아무리 일해도 빛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 하느님만 아시면 족하다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리라. 참으로 깊은 삶, 영적인 삶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제발 스스로 나팔 불지 않고, 냄새 피우지 말고, 허영을 만족시키는 자랑을 끊어버리자. 흔적을 남겨 세상을 어지럽히거나 오염시키지 말자. 매년 숱한 과일을 내고도 묵묵히 서있는 우리 사제관 앞의 감나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스승이나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은 가르치는 직분을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와 하느님께만 속하는 권위와 영역을 남용하거나 넘보지 말라는 뜻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에게 주님은 제1독서에서 재앙을 선포하였다. “너희 사제들에게, 나 이제 분부를 내린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기릴 생각이 없으니, 너희에게 내릴 것은 재앙뿐이다”(말라 2, 1-2). ‘——님’자, ‘——정’자가 붙는 존칭에는 마력이 있어서 겸손을 말려버린다. 때로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가려버리고 마치 스스로 그리스도인 듯 행세하게 하고 군림하게 하고 지배하게 한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스스로 울타리가 되어 사람들을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 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될 것이다. 우리의 울타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요, 길은 스승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순례하는 형제들이요, 도반(道伴)들일 뿐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 말씀은 말씀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특히 지도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 말라기서는 레위지파 사제들의 그릇된 행동을 꾸짖으면서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말라기 예언자 시대(B.C. 515년)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재건되었는데 거기에서 거행되던 예식은 하느님을 참으로 흠숭하는 공경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제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충성스럽게 이행하지 못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전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법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함으로써 고통을 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성실한 태도는 신뢰의 벽을 무너뜨리게 하였고 사제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모든 삶의 근본이 될진대 그들은 입으로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분 실제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삶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하느님의 축복 대신 저주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러한 사제들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사도 바오로는 말씀과 행동이 일치된 주님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데살로니카 전서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인간의 말로 듣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신이 신도들을 대했으며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한 목자로서의 사도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던 그였기에 신도들은 그의 말을 유순하게 따랐으며 그의 말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 마음속에 아로새겨 살아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사람들에게 결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빙자하여 빈둥빈둥 놀고먹은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하면서도 그 바쁜 와중에 복음을 전한 그의 선교적 열정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대규모 고아원과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학교를 세운 요한 보스코라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알바라는 도시를 방문했다가 그만 토리노로 가는 막차를 놓쳐 기차역에서 가까운 사제관을 찾아갔습니다. 한 신부가 문을 열자 보스코 신부는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무뚝뚝하게 먹을 것이라고는 빵과 치즈뿐이고 남은 침대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보스코 신부는 ‘의자’ 두 개 정도면 잘 수 있다고 말하여 겨우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말라빠진 치즈와 딱딱한 빵 한 조각을 주며 신부가 물었습니다. “토리노에서 오셨다구요. 혹시 요한 보스코 신부님을 아십니까? 아이 하나를 보스코 신부님의 고아원에 보내려고 하는데 받아주실까 걱정입니다.” 보스코 신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친절히 대해 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해드리고 말고요.” 그제서야 신부는 그가 성자라고 소문난 요한 보스코 신부임을 알고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저런,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점심 때 남은 음식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었군요.” 신부는 서둘러 깨끗한 식탁보를 깔고 생선과 스프, 햄, 계란말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보스코 신부를 푹신한 침대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보스코 신부는 작별 인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사과의 말을 늘어놓는 신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가진 것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조금 가졌을 때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내놓아야지 이기적인 이유에서 내놓아서는 안됩니다.”

    이 신부는 자신의 위선적인 태도로 인해 요한 보스코 신부로부터 한 대 얻어맞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학자들에게 같은 꾸짖음을 하시면서 그들의 위선과 가면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으면서 남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려 하고 윗사람 대접, 스승이나 지도자 대접을 받으려는 잘못된 태도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지도자나 스승은 남이 알아주어야지 자기가 스스로 잘난 체한다면 그것보다 꼴사나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낮은 자 되어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일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덕을 알아주는 것이고 그런 사람만이 착한 목자인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학자들에게 가해졌던 비난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뽐내는 세상, 스승이 너무 많아서 누가 스승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고 보면 오늘의 모든 지도자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며 겸허한 자가 될 때 이 세상은 밝아질 것이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낮은 자의 자세로 ‘내 탓이오’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지니면서 아래의 사항을 실천해 봅시다.

    “참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는 친절한 마음,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유순한 마음,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봉사의 마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감사의 마음,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반성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해의 마음,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신뢰의 마음, 자신에게 말하는 인내의 마음, 하느님 앞에서의 진실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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