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1주일
10.김기곤 신부(나)/16
11. 김신호 신부(나)/없음 12. 김몽은 신부(나)/17
13. 김영남 신부(나)/19 14. 윤민구 신부(나)/21
22. 김정진 신부(나)/23 23.강길웅 신부(나)/25
24. 신은근 신부(나)/27 25박용조 신부(나)/28
26. 교구주보(나)/22 27. 박금옥 (나)/30
10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나)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
김기곤 신부
ꡒ스승ꡓ이란 자기를 ꡐ가르쳐ꡑ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가르쳐 이끌어 주기 위해 스승은 알아야 한다. 알아야 가르칠 수 있으며 이끌어 줄 수가 있다. 안다는 것은 스승에게 있어서 선결요소요, 알지 못하면 스승일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요소다.
우리 주위에는 스승이 많다. 가정에서부터 학교, 직장,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이 전개되는 도처에 많은 스승이 있으며, 그곳에서 더 나은 삶에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스승들을 만난다. 그들은 분명 여러 분야에서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아는 자로 우리를 끌어주는 스승들이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서 우리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인생이란 어떤 존재이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자 인지, 무엇이 행복이며 내가 가야할 참된 길인지, 무엇이 진리이며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나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쳐 주는 스승을 만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을 가르쳐 줄 스승은 우선 내 존재의 근원과 목적을 진짜 아는 자이어야 하며, 인생의 참된 길을 실제로 길었던 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분을 만난 자들이다.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의 참 스승으로 만난 자들이요 그분을 우리의 진짜 스승(주님)으로 믿는 자들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인생을 근원적으로 아시는 분이며(요한 16, 28),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진짜로 아시는 분(요한 8, 31~) 이시다. 적당히 아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히 아시며, 희미하게 아시는 분이 아니라 선명하고 분명하게 아시는 분이시다(요한 8, 12, 14). 그리고 그분은 모범으로 사신 분이시다(요한 13, 12~15).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 인간의 참 스승이요, 우리 인생의 진짜 선생이시다(사도 4, 12). 이분에 비해 우리가 보통으로 만나는 세상의 스승이란 스승이라 불리기에 너무 미흡한 자들이다. 모범된 삶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앎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새롭게 되새겨진다.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2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김몽은 신부
우리 주위에 가장 버림받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1944년 겨울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할 때 독일의 어느 산속 오두막집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전쟁터로 나가고 어머니와 12세정도의 어린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로 문을 열고 보니 두명의 미군병사가 한 병사를 부축하고 서 있었습니다. 두 모녀는 적군을 앞에 놓고 공포와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했지만, 간청의 눈으로 조용히 서 있는 그들을 보고 다소 안정을 찾고 그들을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침대에 눕히고 간호해 주면서 한편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잠시 후에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 밖에는 독일병사 4명이 서 있었습니다. 순간 두 모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적군을 보호한다는 것은 반역죄로 총살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대답하고서, 그날 밤을 그 집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엄숙한 음성으로 “이 집에는 또 다른 손님, 당신들의 적군인 미군들이 쉬고 있습니다. 오늘밤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니 총질은 절대로 안됩니다”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그들이 멍청히 서 있자, 어머니는 그들의 총들을 장작더미에 놓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군들의 무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조그만 방에서 함께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마치자, 독일 병사 하나가 부상 중인 미군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차츰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 병사가 자기의 배낭에서 포도주 한 병을 내 놓아 그것을 함께 마시면서 성탄절을 노래했습니다. 모두들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독일군들은 미군들에게 지도를 펴내어 부대 위치를 친절히 알려주면서 서로 악수도 나누며 헤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무려 613조목이나 되는 구약의 율법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마디로 요약하심으로써, 사랑이 모든 계명의 으뜸이면서 전체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은 먼저 하느님의 창조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창조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창조야말로 사랑을 그 본질로 삼고 있기 때문에 무(無)로부터의 존재는 곧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 있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사랑 하는데 대한 대답입니다. 즉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니 이스라엘도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요구가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를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끝나지 않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발전시켜 말씀하심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요한Ⅰ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웃을 수단으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각자 인간성과 개성을 가진 한 인격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독일병사들과 미군병사들의 믿어지지 않는 사랑은 바로 그들이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비록 적군이라도 그 날 밤에는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피조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도우며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나가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보다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해타산적인 도움이 사랑의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내가 도움을 주어야 갚을 길이 없는 사람, 나와는 인간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격체, 내 형제 자매들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적군들끼리일지라도 오두막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성탄을 노래할 수 있을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을 주어도 우리는 아깝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때문에 들어가는 수만원은 당연한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몸같은 나의 문신이기 때문이고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과 같은 기분으로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굶주린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이러한 가장 버림받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때,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아멘.
13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나) 가장 중요한 계명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라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우물쭈물하시지 않으시고,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자가 묻지도 않은「둘째 계명」에 관해서도 말씀하신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과「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이 점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율법학자의 다음 말에도 잘 드러난다.“「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낫다”. 이 말은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랑(자애심)이다”라는 호세 6,6을 연상시키는 말씀이다.(마태 9,13과 12,7 참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율법학자의 반응과 율법학자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에서 보여지듯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핵심 가르침을 재 천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이 첫째 계명으로 인용하신 “들어라, 이스라엘아”(히브리어로 ‘셔마 이스라엘’)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명 6,4-5의 말씀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에 기도로 바쳤던 신앙고백적 계명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기도가 차지라는 중요성처럼, 유다인들에게 있어서「셔마-기도」는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의 여정을 동반하는 기도였다. 히브리어로 쓰여 있는 성서를 보면, 신명 6,4의 처음과 끝 글자가 대문자로 인쇄되어 있을 정도로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
경건한 유다인들의 삶 속에서 이 신명기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얽어매는「계명」(율법)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위로의「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말씀은 계명이기 전에 우선 그들에게 베푸셨던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를 회고시켜주는「사랑의 말씀」이였고, 괴로운 처지에 있던 그들에게 「힘」이 되었던 말씀이었다.
사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위의「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을 말하기 전에, 먼저 과거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길게 상기시키고 있다.
즉 성서에서는「하느님께 대해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하기 전에,「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하여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한결같은 사랑으로 응답할 요청을 받고 있다.
이 요청은 진정한 사랑이 요구하는「의무」요,「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이 사랑의 요청과 의무는 이미「이웃에 대한 사랑」의 요청과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베푸시는「약하고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성전(성소)에서 거행되는 예식 시간 동안에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성전 밖에서의 일상 삶에서는「하느님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이 산다면, 그는「목숨을 다해」하느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이웃사랑」의 계명은「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은 경신예배만 강조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레위기에도 잘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레위기의 말씀(레위 17,18)이다. (참조: 레위 25장의 희년법, 루가복음서에 나오는「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약성서에 이미 계시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 가장 중요한「하느님의 뜻」은 그 큰 줄거리에서 보면 너무나 분명한 것 같다. 그것은「사랑하는 것」이다.「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참조: 갈라 5,15: 로마 13,8-10; 1고린 13장: 1요한 4,7.16).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분명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친절하고」,「사랑스럽게」대하는 것조차 어렵다. 매일 매일 삶을 같이 나누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착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조차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보아서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인내심 깊고, 도량이 넓으며, 너그러운 사랑으로 넓혀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기만 하지 않고, 당신의 온 삶으로써 그 가르침을 사셨다. 과연 그분은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셨다!」
14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나) 하느님 사랑 – 이웃 사랑
윤인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율법학자와 예수님과의 논담(論談)을 들었습니다. 율법학자가 예수께 묻기를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어느 것입니까?”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당신 법률이 너무 많았다는 것과 당대의 율법학자들이 잡다한 법률의 통일 원리를 모색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는 질문입니다.
기원 후 2세기에 계산한 바에 의하면 사회-종교생활을 규제하는 법률이 무려 613조항이나 되었습니다. 잡다한 법률은 ‘무거운 짐’ (마태 23,4)이었고, 유대인들은 법률의 중압 아래에서 ‘지치고 짓눌려’ (마태 11,28)버렸습니다. 그 많은 율법을 다 알기도 어렵거니와 다 지키기는 더욱 어려웠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를 전후하여 유대교 학자들은 잡다한 율법을 통일하는 원리를 찾고자 애썼습니다.
이즘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바와 같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어 가장 큰 계명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애주 애인-경천애인)의 성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랑의 이중 계명은 ‘법’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외적행동을 규제하는 법과는 달리 사랑의 이중 계명은 ‘마음’(실존심층)을 요구하십니다.
둘째, 사랑의 이중 계명은 유대교 ‘율법’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율법을 지키는 근본 동기는 공로를 쌓아 영생을 얻으려는 것(공리사상. 마르10,17 참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의도는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사은심)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먼저 하느님 아빠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을 받은 감사의 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루가 6,36=마태 5,48; 루가 15장; 19,1-10; 마태 18,28).
셋째, 이제 ‘하느님 사랑’없는 ‘이웃 사랑’이나, ‘이웃 사랑’없는 ‘하느님 사랑’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컨데, ‘하느님 사랑’을 빙자하여 ‘이웃 사랑’을 거역하거나 인간의 가치나 현세적 가치를 없이 여기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반대로 인간해방이다 사회짐이다 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구세대 유물로 여기거나 매사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넷째, 두 가지 사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첫째로 ‘하느님 사랑’을 정열적으로 강조하시고 둘째로 ‘이웃 사랑’을 꼽으신 점에 유의해야겠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제1독서(신명 6,4-5)에 나오는 유대교 ‘셔마’ 신앙고백문을 빌려 ‘하느님 사랑’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그 주님은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즉 유일무이하신 하느님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지극히 사랑하라는 명령이십니다. 이 명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 즉 권력, 금력, 학력, 체력, 정력 등을 하느님보다 더 낫게 떠받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외에는 어떤 것도 최고 윗자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하여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 유대교에서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였습니다. 흔히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이웃’이라 하였고 (레위 19,18.34) 기타 이방인들을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친한 사람을 ‘이웃’이라 하였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을 ‘원수’로 여겼습니다(마태 5,43-44=루가 6,27-28).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구분을 철폐하시어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이라 하셨고 (루가 10,30-37), 호감가지 않는 개별적 ‘원수’에게도 사랑을 베풀도록 명하셨습니다(마태 6,43-48).
–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가로 놓인 장벽을 철폐하여 만인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명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때에, 함께 살았고, 살고, 그리고 살게 될 가까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법을 익혀야만 그 사랑은 공허하지 않고 진실한 것이 됩니다. 가까운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자애)을 죄악시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계명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네 자신 처럼’), 자신을 학대한다면 그것은 인간애를 거역하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하느님께서 아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서에서 자기부정, 자기거부에 대한 요구가 있지만 그것은 우선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하는 까닭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요한 1서에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는 길이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Ⅰ요한 4,7이하)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나의 이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모상)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 안에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을 발견하고 사랑하도록 하느님께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Ⅰ요한 4,20이하). 그래서 이웃을 배척하고는 절대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느냐 안하고 있느냐를 아는 길은 네가 과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안하고 있는가를 따져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여정은 다름 아닌 자기 초월의 과정이며 구원의 진행과정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당신 가르침의 절정이며 핵심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현세 생활을 하는 우리의 지상과제 이며 구원의 관건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15 연중 제 31주일 마르 2,28-34 (나)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미사 독서에서나 복음 말씀에서 사랑의 계명에 관하여 들으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반성하며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일은 한 마디로 사랑의 주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계명이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교회의 최고의 명령이며 황금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랑의 교훈과 실천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생명을 바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실천하는 이는 이미 하늘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자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첫째가는 계명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구약 「신명기」의 내용을 인용하시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묶어 가장 큰 계명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사에서나 유대사상계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예수님은 말하자면 처음으로 애주애인의 사상을 한데 묶어 율법의 최고의 규율을 선포하신 셈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여러분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원한을 품고 있는 어떤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그에게 가서 먼저 화해하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예물을 드리시오>(마태 5:23).
이와같이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이나,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말도 안되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하느님 사랑을 빙자하여 이웃 사랑을 거역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거짓된 행위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Ⅰ요한 20:21). <나는 당신들에게 새 계명을 하나 주겠습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요한 13:34).
이어서 나오는 결론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섬기는 가장 좋은 길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 우리의 가까운 사람이나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보다도 우리와 관계가 없는 사람,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 우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끝으로 우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행위야말로 참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이라 하겠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같은 행위는 예수님의 정신과 발자취를 철저히 따르는 영웅적인 행동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루가 23:34)하시며 원수들을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모범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좋은 표양을 문자 그대로 잘 따른 예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림과 같은 어느 풍치 좋은 마을에 한 크리스천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분에게는 아주 소중한 외아들이 있었는데 생후 열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이 부인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생활에는 아무 불안이 없이 외아들을 길러 대학까지 졸업시켰습니다. 그 아들은 이름 있는 모 방직회사에 입사한지 일년만에 전쟁에 나갔다가 겨우 귀환했는가 하면, 폐결핵으로 요양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겨우 완쾌하여 기쁜 마음으로 퇴원하려는 전날 밤에 역시 요양하던 친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인은 아무리 범인을 용서하려고 해도 되지 않아 몇 해 동안이나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대담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부인은 범인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고 써 보내고 그 후 형무소로 그를 방문하여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범인은 십삼 년의 형을 팔년 만에 마치고 나와서 그 후 삼년이 지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날을 참으로 영광된 날로 여기고 그에게 달려가서 ꡔ축하합니다. 오늘을 축하합니다ꡕ 하며 그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이리하여 그 후로부터는 외동 자식을 살해당한 어머니와 외동아들을 죽인 범인과의 사이는 친 모자같이 지내며 크리스천으로서 모든 이의 거울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 복음의 계명을 가장 충실히 따른 드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과 믿음의 힘이 이렇게 강한 줄 미처 몰랐음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16 연중 제 31 주일 마르 2,28-34(나) 첫째 가는 계명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6,2~6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마음을 다 기울여 주님을 사랑하여라)
제2독서 히브 7,23~28 (그분의 사제직은 영구한 것입니다)
복 음 마르 12,28ac~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오늘 1독서에서 신명기 6장의 4절과 5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대목을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는 ‘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 6,4~5).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꼭 이것을 외웁니다. 이것은 그들의 기도이며 또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쉐마\’를 적어서 손에 매달고 다니기도 하며 이마에 붙이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법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율법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613조목이며 이 중에 무엇을 ‘하라\’는 명령 248조목,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령이 365조목입니다. 율법이 이처럼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도 잘 몰랐습니다. 소위 율법학자라는 사람들도 율법의 핵심을 몰랐습니다. 율법의 모순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율법학자가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께 와서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솔직한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학자들이 그 당시에 많이 있었지만 말만 서로 요란했지 핵심은 몰랐습니다. 그저 껍데기만 가지고 왈가왈부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큰 모순에 빠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명쾌합니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라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 가는 계명 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율법의 613조목을 짜고 또 짜서 소쿠리로 걸러 낸다면 바로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 세상의 신앙인들에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앞면은 하느님 사랑이요 뒷면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개의 얼굴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근원은 하나며 또한 내용도 결국은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자체가 사랑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떠나서는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사랑 밖에서는 무엇을 행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사랑으로 오셨다가 사랑으로 사셨으며 그리고 사랑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차원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지 이해타산이 결부된 사랑, 조건이 물린 사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교인이나 심지어는 강아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때 그는 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로 하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또 나에게 도움을 준 이를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요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그 사랑은 더 뜨겁게 합니다. 그러나 못난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부자요 아무리 큰 학식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사랑을 못하고 있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받는 것도 기쁘지만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은 더 기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나 누구를 미워할 때나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하느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이것이 사랑받는 길이요 또 하느님을 만나는 비결입니다.
17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나) 첫째가는 계명
신은근 신부
계명은 규칙이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어떤 것이 첫번째에 해당될까. 율법학자 한사람?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규칙에 무슨 우열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질문이라며 꾸중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예수님은 소박하게 답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며 다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을 동일시하였다.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그대로 하느님을 충실히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계명은 곧 율법이다. 그러니 율법 준수는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척도가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율법에 집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 준수는 하느님 사랑의 부분적 표현이지 전부가 아님을 지적하신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척도가 될 수 있다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율법 준수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본질에 가깝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렇게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이웃인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배우자일 수 있고 부모님일 수 있고 형제나 친구일 수 있다. 그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함께 하고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이런 일은 마음먹고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일생을 노력해도 될까말까 하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삶의 방향을 그렇게 설정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그래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길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웃이 싫어지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고 이웃이 나를 싫어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이웃사랑을 통한 하느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다.
한편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생각과 힘을 다한다는 것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두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의 위치에 둔 것이 무엇이었든 이제는 그것을 제2의 위치, 두 번째 자리에 두고 첫 자리엔 하느님을 모시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의 시작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느님은 받아주신다. 질문하는 율법학자를 받아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은총으로 함께 하신다. 그러니 제일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일들을 이제는 주님 다음으로 여겨야 한다.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소중한 것이 되고 주님께서 주셔야 내 것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도 이제는 주님 다음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남과 인연 역시도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분이 맡겨주신 일과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기억하자. 사람은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했다. 이해와 수용의 자세로 사랑의 길을 걸어간다면 주님께서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복음말씀은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18 연중 제31주일 마르 2,28-34 (나) 예수와 21세기 - 공자 맹자와 사랑 이야기
박용조․프란치스코 신부
좋은 학교 좋은 학과 좋은 취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요즘 사회적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모 선생의 동양학 강좌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물론 그의 해박한 학문적인 해석도 해석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요즘 사람들이 동양적인 것,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가장 큰 변화는 「비(非)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타 민족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개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복음을 동양적인 차원에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성서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감성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라고 한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첫째 계명이라고 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 둘째 계명이라고 하여 인간의 삶은 바로 이런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곧 인간의 근본은 하느님이며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는 한 줌의 흙으로서의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바로 자기의 뿌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뿌리로부터 얻는 생명력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쳐 왔던 유가(儒家)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유가에서는 우리의 사랑과 같은 개념으로ꡐ어질 인(仁)ꡑ을 말하는데 공자는 이 인을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의 본질이라고 했다(天命之謂性). 마치 소금을 소금이도록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소금의 본질인 짠맛 때문이듯, 인간 역시 인간이도록 하는 본질을 하늘로부터 받아 태어나는데 그것을 곧 인이라고 했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늘로부터 우리 마음에 심겨진 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인을 맹자는 ꡐ측은한 마음, 불쌍한 마음ꡑ의 발로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공자는 그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그에게 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내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한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다. 오늘날 발생되는 비인간적이고 비사회적인 현상들은 바로 자기 뿌리인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다. 이른바 인간이 인간으로서 그 구실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무시된 까닭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바로 그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 삶의 근본이다.
19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
교구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으뜸 계명에 관하여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율사가 나눈 대담입니다. 율사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어느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첫째는 이렇습니다 …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렇습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달리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율사가 예수께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한 분이시고 그밖에 다른 주님은 없습니다. 온 마음으로, 온 슬기로, 온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제사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당신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유다교의 계명은 무려 613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이고 365조항은 금령입니다. 유다교의 계명 안에도 사랑의 계명이 있지만 유다교는 그 사랑의 계명을 첫 번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시키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신명기(6,4-5)와 레위기(19,18)를 인용하시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오는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마태 22,40). 여기서 ‘달려 있다’를 직역하면 못에 걸려 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랑의 이중계명이라는 못이 빠지게 되면 다른 모든 가치들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해도 하느님은 여전히 현상적(現象的)으로는 부재(不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못지 않게 어려운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타나 있는 여섯 가지 대립명제입니다(마태 5,21-48). 여기서의 이웃은 지금 현재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구체적인 이웃을 말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내 가족, 내 이웃 그리고 교회에서 함께 하는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까운 이웃은 미워하면서 멀리 있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기만일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것이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제사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20 연중 제31주일 마르 12,28-34 (나)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
박금옥 벨틸라
“엄마! 보고 싶은 사람 없어요? 다음에 같이 올께요” 하면, 엄마는 “아니. 아무도 없어. 보고 싶은 사람 없어!” 하십니다. “엄마! 잡수시고 싶은 것 없어요? 다음 번에 올 때에 가지고 올께요” 다시 물어도 엄마는 “아니!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왜 보고 싶은 사람이 없을까? 왜 잡수시고 싶은 것이 없을까?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몇 년 전부터 죽음 준비를 하신다며 주위를 정리하더니, 묵주 주머니 하나만 가지고 노인전문 병원에 입원하신지 다섯 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끼던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을 보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하느님 자비의 사도였던 파우스티나 성녀는 그 일기에서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어느 날 하느님 심판 대전에 불려 나가 혼자 서 있었는데, 예수께서 수난 당하실 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곧 옆구리와 손과 발의 다섯 상처만 남겨놓고 다른 상처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 중에 저는 갑자기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내 안에 하느님께서 싫어하는 것들을 모두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끔찍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누구냐?’ ‘주님,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너는 연옥에 하루 동안 있어야 하겠다’ 그래서 저는 즉시 연옥으로 제 몸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를 붙잡으시며 ‘지금 연옥에서 하루 동안 고통을 받으려느냐? 아니면, 세상에서 얼마동안 고통을 받으려느냐? 어느 쪽을 택하려느냐?’ 두 가지를 다 원한다고 말씀드리자 ‘하나로 넉넉하다. 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며 내가 당신의 종, 당신 자비의 사도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를 사랑하셔서, 그녀가 흠 없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저희 엄마도 지극히 사랑하셔서, 더욱 깨끗하고 완전하게 하시려는 모양입니다. 버나드 로너간 신부님은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자신을 온전히, 마음과 몸을 모두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희 엄마는 아들과 딸들, 손자와 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마음과 몸을 전부 하느님께 드리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미리 하느님은 저희 엄마의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해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이, 당신의 자유의지로는 못하시던 것을 이제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여, 완전히 무능하게 된 상태에서 하는 것 같습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고마운 진리인지!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죽음을 기다리는 분들을 보면서, 같이 죽어 줄 사람이 생길 때까지 죽지 못하는 벌을 받았던 ‘방황하는 화란인 선장’의 이야기가 새삼 가슴을 찌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