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1주일
28. 소순형 신부(다)/32 29. 김정진 신부(다)/34
30. 강길웅 신부(다)/36 31.김신호 신부(다)/37
32. 자캐오처럼(다)/39
21 연중 제31주일 루가 19,1-10 (다) 세리 자케오의 구원
소순형 신부
키가 작은 사람이 예리고라는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는 세금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아마 자기 고장 사람들한테 돈을 부당히 많이 받아 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받고 천대를 받으면서 살았다고 복음서는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라는 분이 그 마을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그분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이 있기에 한 번 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를 한 번 볼려고 하는 이 마음은 예수께서 그의 집안에 머무르시는 영광으로 변했고 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고 큰 기쁨을 누렸다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와 이 세상이 또 인간 본성이 잘못에로 많이 끌어당깁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바쳐야 할 기도를 쉽게 걸르기도 하고, 거짓말도 가끔가다 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됩니다. 또 괜히 짜증이 나고 이웃 사람이 밉기도 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불평도 합니다.
이런 생활을 하루 이틀 하다 보면 이젠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 버립니다. 한 번 두 번 맞았던 마약이 습관성이 되어 버리듯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자연히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꼭 하느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잘못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하느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잘못한 학생들은 자꾸 선생님을 멀리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땐 가끔 큰 죄도 저지릅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또 잘못하다가는 죄는 사람을 완전히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기도 합니다. 유다스도 예수님을 팔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목을 매달아 죽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죄는 무겁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용기를 잃어서도 안됩니다. 마음 괴로워 할 필요도, 불안한 생활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서 너그러이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세상사람이 다 따돌림해도 따뜻이 반겨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잃은 사람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구원을 얻고 해방감을 맛보며 전에 전혀 누려보지 못했던 행복감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백의 성사는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루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 되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아들이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너무나 기뻐서 잔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모녀가 외딴 곳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너무나 외지여서 저녁 때만 되면 일찍 밥을 해먹고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딸이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가난이 너무 한스러워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뛰쳐나갔던 것입니다. 딸은 도시에서 몇 년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많은 해를 보낸 후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뛰쳐나온 것이 후회스러워 그 길로 옛날 집을 찾아서 달음질 쳤습니다. 그래도 어머니이기 때문에 보고싶은 마음에서 다리도 아픈 줄 몰랐습니다.
저녁 늦게서야 집 앞에 와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래 혹시나 누가 왔나 하고 마루를 보았더니 어머니 신발 한 켤레밖에 없었습니다.
딸은 ‘어머니’ 하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그동안의 용서를 빌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딸은 조용히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문을 열어놓고 불을 켜놓고 주무시냐?” 고 물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가, 나는 네가 집을 나간 후로 저녁이 되면 매일 대문을 열어놓고 불을 켜 놓고 잤단다. 왜냐하면 네가 언젠가는 돌아올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 때문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잠이 들 수 있었단다. 네가 혹시 밤에 집에 와서 문이 잠겨져 있고 방이 캄캄하면 정말 얼마나 쓸쓸하겠니. 그래서 매일 문을 열어놓고 불을 켜고 잤단다.”
이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어머니보다 더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오직 그분에게 나아가 본 사람만이 그분이 얼마나 너그러우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며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인 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매일 기쁘게 삽시다. 매일 행복하게 삽시다. 비록 경제적으로 가난하더라도 즐겁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만 산다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고,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바로 하느님을 떠난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잃은 사람들이란 바로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자케오는 예수를 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분이 자기 집에 머무는 영광을 얻었고 또 구원을 얻고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잘못을 저지르므로 하느님을 떠난 상태에서 다시 고백성사로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분을 내 집에, 내 마음에 모시기만 할려고 한다면, 자케오와 같이 구원을 보장받고 큰 기쁨을, 참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22 연중 제31주일 루가 19,1-10 (다)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는 마음
김정진 신부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점을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세금 받는 벼슬아치인 자케오라는 사람이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당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자케오, 어서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 집에 머물러야 하겠소> 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케오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에게 무엇이고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네 갑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하면서 자기의 과오를 후회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잘못을 다 용서해 주시고 그 가정의 구원과 축복을 빌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돈 많은 세관장이었던 자케오는 세리 출신이므로 그 당시에는 착취자로 간주되어 대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실상 자케오는 세리라는 직업상 그가 재산을 모으는 데도 깨끗하지 못하였고 식민지인으로서 세금을 징수하고서는 상전국인 로마제국에 상납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사업관계로 청부업자들을 통하여 백성들을 강압하고 징수하는 데도 무리가 많아 착취자 또는 동족 배신자라는 죄인으로 취급받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케오의 인물의 외면적인 점을 말한 것이고 내심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종교심이 마음 한 구석에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의 반을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자기가 남을 속였을 경우에는 그것을 네 배로 갚아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케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명과 자기의 외적 지위와 자기의 성공에 만족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케오의 심중은 허망한 기분을 깊이 느끼고 있었고 돈이란 주머니를 채울 뿐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케오는 이제 불혹의 나이에 이르렀고 영원에 대한 동경이 아련히 피어 오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케오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말하는 사람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 나오는 교만하고 거룩한 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족속들을 죄인으로 단언하시고 죄인으로 통하는 세리와 같은 인물이라도 겸손하고 회개하는 이들을 성덕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잠깐 동안 자케오와 이야기를 나누셨을 뿐인데 그의 진실된 개심의 정을 읽어 보시고 그의 집에 가셔서 밤을 보내는 영예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을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 오고 공허한 마음을 하느님의 부유로 채워 주시고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에게 은총을 아낌 없이 내려 주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순박하고 온순한 영혼은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에게로 이끌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자케오는 하느님을 모실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영혼이며 예수님은 이 마음의 준비만을 보시고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다시 확인케 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이에 관련된 다음 이야기를 안토니 블룸이란 대주교님의 글에서 소개합니다. 하루는 어떤 남자가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더랍니다. 주교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느님을 만나려면 그분과 무언가 같은 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복음서에서 특별히 감동되는 귀절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주교님은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 남자는 ꡔ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에 관한 귀절입니다ꡕ 라고 대답하니, 주교님은 또 묻기를 ꡔ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장면에서 당신은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적어도 그 여인이 뉘우치고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주고, 자비를 베풀어주는 편에 서 계십니까. 혹은 간음한 여인이십니까.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즉시 물러나간 노인들 중의 하나이십니까. 늦게까지 남아 있는 청년들 중의 하나이십니까ꡕ 하고 말씀하니, 그는 몇 분 동안 생각하고 나서, ꡔ아니오 저는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홀로 남아서 그 여인을 돌로 쳤을 것입니다.ꡕ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주교님은 ꡔ당신이 하느님을 만나 뵈려면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대단히 부족하고 하느님의 마음과는 극히 거리가 멉니다ꡕ 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과오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회개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여 하느님과 같은 생각, 같은 정,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고 겸손되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아멘.
23 연중 제31주일 루가 19,1-10 (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
어떤 죄든지 죄 그 자체는 무서운 악입니다. 이 악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악이 감히 하느님께 도전하여 맞먹으려고 합니다. 악은 분명히 하느님의 창조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근본은 알 수도 없는 것이 인간까지 충동질하며 하느님께 대항하도록 유혹합니다. 인간은 그래서 악의 세력에 자주 넘어집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명색이 하느님의 백성이요 자녀인데, 그 자녀가 악의 노예가 되어 자기 부모인 하느님께 대항한다는 것은 마치 자기 부모에게 칼질을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계속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하셔도 앙심을 품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 병든 백성을 건지기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그렇게 의로운 분이신데, 그래서 선한 이는 상주시고 악한 이는 벌하시는데 이상하게도 그 악한 이에게 벌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죄 때문에 죄를 딛고 일어서서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작업을 하시는데 이를테면 악에서 선을 뽑아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랬고 사도 바오로도 그랬으며 또한 성 아우구스띠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들은 악에 깊이 빠졌던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은 위대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 때문에 더 순수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더 큰 선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죄인을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그처럼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죄인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시며 죄인에게서 선을 끌어올리시기 위해 끊임없는 작업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바로 죄인 안에서 빛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 내용이 나옵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분명히 동족을 등쳐먹는 날강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법이 인정해 주는 도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로마에 충성하면서 자기 민족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창녀보다 더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창녀는 자기 한 몸을 팔았지만 세리는 자기 백성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세리는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죄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희망을 걸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천한 신분상 드러 내놓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키도 물론 작았지만 그래서 멀찍이 나무 위에서 그분을 몰래 지켜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자캐오를 부르십니다. 자비와 애정을 가지고 부르시며 그 자캐오의 집에서 당신이 머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죄인의 집에 머무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캐오를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며 인생 그 자체를 한 차원 끌어 올려 주신 것입니다. 이에 자캐오는 감격하여 사랑의 보답을 약속합니다.
ꡔ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렵니다. 혹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 주겠습니다.ꡕ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에게서 더 큰 선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ꡔ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ꡕ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선인에게보다도 죄인에게 구원의 문이 더 쉽게 열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뉘우칠 수 있고 뉘우치면 더 큰 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면 뉘우칠 수가 없고 더 큰 선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참된 의인이 있는가 하면 또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하는 진짜 죄인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성인들도 자기들은 누구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고백했지만 그러나 바리사이파 같은 위선자들은 자신들만이 의로운 자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혹 누가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은 자기 죄를 아는 데 있고 그 죄를 뉘우쳐서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도 회개의 표시를 하도록 합시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24 연중 제31주일 루가 19, 1-10 (다) 죄의 용서
김신호 신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여러 면에서 고찰될 수 있고, 이러한 고찰의 결과 인간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동물보다 발달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 인간은 동물보다는 행위로 하는 데 있어 지능을 이용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동물도 간단한 지능을 이용해 목적을 이루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정도나 복잡성에 있어서 많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증명된 사실에 속한다.
인간은 매 행위마다 목적의식에 입각한 결정과정을 통하여 행위를 선택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습관에 의한 행위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습관이란 매번 결정해야 되는 갈등적인 상태를
없애주고, 생활을 관행적으로 하게 함으로써, 생활을 쉽게 해나가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이러한 습관에 젖은 생활은 생활자체를 점점 쉬운 쪽으로만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결점도 가지고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습관에서 벗어난 일을 만나게 되거나 습관을 바꾸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다시 결정을 해야하는 갈등에 빠지게 되고,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게 된다. 이러한 조언은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이 갖는 목적의식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윤택한 삶을 영위하려는 목적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못한 공부를 자식에게 시킴으로써 사회에서 자식을 출세시키는 것에 목적을 둘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이고 뭐고 상관없이, 오로지 부부간에 행복한 생활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둘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모든 지나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완성에 삶의 목표를 놓을 수도 있다.
돈이 목적인 社會
이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목적의식도 사실은 크게 보면, 현세 지향적인 것과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희랍의 철학 사조 중에 스토이시즘과 헤도니즘이 있는데, 스토이시즘은 정신적이며 질적인 것에 가치 기준을 두는 것이고, 헤도니즘은 육체적이며 양적인 것에 가치 기준을 두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우리 사회 안에는 지금 두 사조 중에서, 헤도니즘적인 사조가 사회의 곳곳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현세 지향적인 삶에 가치를 두게 함으로써, 현세에서 모든 소망을 이루어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조류 속에서, 실상 예수님의 내세 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인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서 쉬고 가겠다는 의사표시를 통하여, 사람들의 습관적인 생각을 다시 시정하도록 촉구하고 계신다. 자캐오는 세관장으로서 남들의 질시와 원망을 받던 관원이었고, 이러한 세관장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는 사실은, 실상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예수님은, 결정적인 대답을 통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계신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원관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단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지, 현실적으로 볼 때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罪人
여기에서 구원의 기준 점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죄의 용서를 구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구원될 것이지만, 누구든지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죄인이면서도 의인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복된 자가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목적에 어긋나는 자는 복된 자에 속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25 연중 제31주일 루가 19, 1-10 (다) 나도 자캐오처럼 할 수 있을까?
자캐오에 대한 묵상
성서는 우리를 루가복음 19장 1-9절로 안내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준비 기도를 드린 후 마음을 가다듬고 이 부분을 한 두번 읽는다. 복음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리고에 가셨다. 예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23km 떨어져 있는 도시이며, 지중해 수면보다 250m나 낮은 저지대이다. 주님은 이곳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대였으므로 그의 직책이 어떠한지 짐작할만하다. 그는 평소에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분이 오셨다는 소문과 더불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자캐오는 군중들 틈에 끼어서 보았으나,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키가 작은 그는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
주님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
그리하여 그는 꾀를 냈다. 나무에 올라가면 그분이 지나가실 때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사람들을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그분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자캐오가 나무 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모르시겠는가? 더구나 당신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시겠는가?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겠노라.\”
그는 너무 기뻐 당장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집으로 안내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구원자이신 주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자 즉시 회개가 이루어졌다. 아니 오래 전부터 삶을 뉘우쳐왔는지도 모른다. 로마 식민지하의 세관장이라는 직책은 부정을 하는 자리였던가?\”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 주겠습니다\”고 하자, 주님은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셨다.
이런 내용을 깔고 이렇게 묵상을 해보자. 자캐오는 왜 주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했을까? 성서를 보면, 대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 사람들은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자캐오는 부자요, 탄탄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가 보더라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는 백부장처럼 주님께 사정하여 자기의 하인을 고쳐달라거나, 나병환자나 소경들처럼 병을 고쳐달라고 애걸복걸하지도 않았다.
그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주님을 만나야만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었다. 그리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주님은 “내려오너라, 내가 네 집에 머물겠노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자비 지극한 말씀인가? 그는 기뻐하며 내려왔다. 주님은 그의 마음의 집에 머무셨다,
주님을 집에 모실 수 있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과 뉘우치는 마음이다. 겸손과 뉘우침이 없으면 주님을 모시지 못한다.
세상의 욕망을 포기한 그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그는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다. 그의 회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남의 재산을 등쳐먹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주님께 약속한 그의 말은, 회개에 대한 보상이자 이를 넘어선 자선가의 행위가 아닌가?
자캐오는 이기심을 버리고 자선의 마음으로 돌아감으로써, 지상의 부유한 자는 천상에서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 영적으로 부유한 자가 되었다.
영적인 부자가 된 자캐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나눔은 축복을 가져온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축복을 받는다.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재산의 관리자에 불과하다. 재산 그 자체는 내 것이 아니다.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과 뉘우치는 마음, 그리고 자선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나 자신 안으로 들어가, 나도 자캐오처럼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무 위가 아니라 더 높은 곳에라도 올라갈 용기가 있는가? 나는 하루하루를 적당히 살아가는 신자는 아닌가? 재산이나 지위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부자였던 자캐오는 재산과 세관장이라는 지위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는 간절히 주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나도 자캐오처럼 주님을 만나 체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므로 주님께 청하자,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도 자캐오처럼 일어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이런 식으로 주님 안에 한참 동안 머문 후 감사기도를 드리고 묵상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