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33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33주일

26. 김정진 신부(다)/46

27. 이원규 신부(다)/47                           28. 김영진 신부(다)/없음

29. 김신호 신부(다)/49                           30. 강길웅 신부(다)/50

31. 강영구 신부(다)/52                           32. 변희선 신부(다)/56

33. 박재만 신부(다)/없음                         34. 홍인식 신부(다)/없음

35. 서울주보(다)57                         36. 교회의 생명력(다)/58

37. 평신도의 혁신(다)/없음



27          연중 제33주일  루가 21,5-19 (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재난의 시작

                                                               –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의 멸망과 이에 관련시켜 세상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디가지나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세상 종말의 상징이며 전조로 말씀하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전이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모양에 대해 예수님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의 위풍당당한 벽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그 벽은 마치 자연석에서 뻗쳐 나온 바위처럼 보였으며 10여 년을 공들여 건축한 것이고 유대 고사에 의하면 그의 아름다운 돌 하나의 길이는 약 12미터 반, 높이 4미터, 폭 5미터라고 하였다니 제자들이 놀라 감탄한 것은 당연지사였고 더구나 성전의 예물만 하더라고 가장 유명한 것이 헤로데 대왕의 봉헌물인 황금의 포도나무인데 유대 고사에 의하면 그 포도의 금송이는 사람 하나와 같았다고 하니 누구나 큰 관심으로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감탄에 도취되어 있는 제자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지금 당신들이 바라보고 있는 저 성전은 완전히 무너져서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예언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으니 서기 70년에 로마 디도장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적에 신전만큼은 보존하려 하였지만 한 병사의 방화로 마침내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무참히도 파괴되고 소각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은 다 같이 예루살렘과 신전의 멸망은 세상 종말의 상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 종말이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서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하고 여쭈웠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한 그 대를 지적하기를 거절하시면서도 그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징조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고 재난도 일어날 것인데, 언제나 전쟁과 반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싸움, 민족과 민족의 싸움 등 역사적 재난 뿐 아니라 자연의 재난, 즉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로부터의 무서운 일들과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세상 종말을 생각할 적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불안과 공포에 사이기 쉽습니다만 우리 신자들은 성 바오로 사도와 같이(II 디모테오 4,8)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기쁨과 안심감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세말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세말은 전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완성을 이룩하는 데 큰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특히 「현대 세계 헌장」에서 전인류의 종말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는데 그 때가 오면 <새 하늘과 새 땅>(II베드로 3.13)에서 죄악, 오류, 고통, 죽음은 물론 없고 재난, 교통사고, 질병 같은 것도 있을 수가 없으며 그야말로 완전한 조화와 행복과 평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 때에는 또한 죄로 말미암아 추하게 된 세계의 양상은 일변되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삶과 거주가 마련되어 이제는 정의만이 지배하게 되고 행복은 인간의 마음에 평화로 가득 채워 줄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자 여러분! 세상의 종말을 묵상하는 마당에 명심해야 될 점은 세말이란 결코 세상 사물의 파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어디가지나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란 점입니다. 물론 세말은 파괴적인 것도 있고 죄악으로 추하게 된 온갖 형태는 변화되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과 그의 업적은 남는다>고 바티칸 공의회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상에서 닦은 사랑이나 사랑의 실천으로 쌓아 올린 갖가지 업적은 영원히 천국에서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우리 잣니 안에나 타인에게 쌓아 둔 가치, 가령 자유와 사랑과 일치 등은 죽음보다도 어떤 파괴보다도 강하게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이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건설하려는 노력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28        연중 제33주일  루가 21,5-19 (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재난의 시작

                                           – 이원규 신부





“그 신도들 중 키프로스와 키레네 출신 몇 사람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주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주께서 능력의 손길을 그들에게 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사도행전 11,20-21)



이 말씀은 초세기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했으며 풍부한 결실을 거두었는지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주교님들은 “현대의 정세는 오히려 보다 활발하고 보다 광범한 평신도 활동을 요청한다”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사제들의 수가 너무 적거나 대로는 사제들이 자유로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나라에 있어서는 평신도들의 활동이 없이는 교회의 현존의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나는 미사참례나 잘 하고 아침 저녁 기도나 열심히 하다가 천국에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안 계신지요. 이것은 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만 천국에 데려 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피흘려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I디모테오 2,4).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유언으로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마르코 16,15-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교를 권고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교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외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약 3천만의 인구 중에는 1백만의 천주교 신자가 있을 뿐입니다. 신자 1명에 외교인 30명의 비율입니다. 30명을 그대로 방치하고 혼자서 구원받겠다면 이는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의 구원에 무관심할 때 우리의 구원도 위태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만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I고린토 9,16)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전교하는 일을 신부나 수녀, 또는 전교사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예 노력도 안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교리 지식이 부족해서 곤란한 분도 있겠습니다만, 주일미사 인도, 교리반 인도, 교리책 소개 등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전교의 기회를 평범한 데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술좌석 휴게소 이웃집 마을 수없이 지나가는 이야기 속에 교회에 관한 대화를 곁들일 수 있고, 입교하겠다는 언질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신앙에로의 인도가 한두 번에 이루어지기는 어렵지만 제 1차 시도 제 2차 시도 제 3차 시도 ··· 등 회수를 거듭함으로써 결국 우리는 그 영혼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의 은총도 내리게 마련입니다.



전에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어느 학교에서는 외교인 직원이 10년이 넘도록 입교 권유를 듣지 못해 결국 “나도 교회를 믿어도 되느냐?”고 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교우촌에 수십년 간이나 묻혀 살면서도 입교하지도 않고 입교를  권하지도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분만 바라는 식의 전교를 한다면 “당신들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행정 1,8)라고 하신 주님의 뜻은 언제 이루어지겠습니까?



우리는 적극적으로 전교합시다. 1년에 적어도 1명은 곡 영세시킬 목표를 세우고 계속 접촉하며 대화합시다.

상인이 고객을 찾는 열성 못지 않게 우리가 외교인 친구를 사귀며 주님께로 인도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눈부시게 성장할 것입니다.

30            연중 제33주일   루가 21,5-19 (다) 하느님께로 돌아 오라

                                                    김신호 신부



인간을 파악하는 심리학 중에 심층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심층심리학은 프로이드라는 정신과 의사에 의해 시작된 심리학 분야로서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의식 세계뿐만이 아니고, 무의식 세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무의식 세계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학문으로 풀이될 수 있겠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두 가지 경향이 있다고 분석하였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다. 삶에 대한 본능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활력을 주고, 인간에게 생존에 대한 욕구를 갖게 하며, 종족번식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프로이드는 설명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죽음에 대한 본능은 인간에게 파괴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심하면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내면에는 두 가지 상반된 욕구의 경향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어느 경향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존재로도 될 수 있고, 반대로 파괴적이며 소멸시키는 기능을 이행하는 자로도 나타날 수 있게 된다.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이 사회성을 띠게 될 때에 평화와 전쟁이라는 집단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성전의 화려함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에게, 성전 파괴의 예언과 함께 재난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기원 후 66-70련 사이에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항거를 한 결과 70년에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한 사실을 루가 사가는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저술하고 있다.              



성전 파괴 ․종말 예언



 성전이 파괴되리라고 선언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중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도 예레미야 예언자가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을 했다가 재판에 회부되어 죽게 되었으나 아히캄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 사실이 있었다. (예레 26,11-24) 이러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에 이어, 예수남은 종말에 대한 예언을 하신다.

  

예수님이 예언한 종말에 대한 예언은, 요즈음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현상을 미리 말씀하신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든지, 전쟁에 대한 소문이라든지, 새로운 전염병의 출현이라든지, 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 현상 등은 예수님의 예언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종말이 가까워 온 것으로 생각하여 현세생활을 포기하는 이유로 삼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종말을 알리는 징표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종말의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예언 후에 루가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당한 참상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기술된 내용도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멸망을 예방하는 길



물론 직접적으로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인간의 선성(善性)과 정의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어려움을 예언하시면서 동시에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이 담긴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것도 잊지 않고 계신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종말이 다가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죽음에 대한 욕구의 경향을 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사회나 인간의 잘못은 인간에게 원인이 있으며, 이러한 잘못의 결집으로 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멸망을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삶의 본능에 속하는 선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돌아서는 완전한 회개를 의미한다.











31   연중 제 33 주일(평신도주일)   루가 21,5-19 (다) 종말, 그 위대한 만남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말라 3,19~20a (너희에게 승리의 태양이 비쳐 오리라) 

제2독서 Ⅱ데살 3,7~12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복 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멋대로 놀아난 사람은 검불처럼 타 버리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았던 자들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칠 것이다.\” 오늘 1독서에 나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이 말은 또 구약 성서 전체에서 대들보처럼 떠받치고 있는 하느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 수 있고 또 단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는 세상 끝날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승리의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제멋대로 설쳐대며 살았던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바로 그렇게 살았던 이유 때문에 지옥불에서 영원한 불행을 만날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우리를 속입니다. 속이고 또 속입니다. 따라서 세상 것에 우리가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0년경에 건축공사를 시작한 헤로데성전은 사방 수 미터가 넘는 큰 돌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성전 구내의 행랑은 그 높이가 10여 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들로써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갈릴래아의 촌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감탄에는 아랑곳하시지 않고 바로 그 웅장한 존재가 미구에 파괴되어 이 지상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 성전은 파괴되었고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화려했던 그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돌 위에 제대로 얹혀 있는 돌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은 지나갑니다. 무엇이고 다 끝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말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금 여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서 저 세상을 선택합니다. 이 세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저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잘먹고 잘살았다 해도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이 세상 때문에 저 세상을 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못먹고 못살았다 해도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그는 행복합니다. 이 세상 때문에 저 세상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우는 한이 있어도 내일 웃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말을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지금 여기\’에 너무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사실 종말이라는 말과 더불어 그 단어 자체가 기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의 가장 중요한 만남은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종말은 이를테면 가장 위대한 만남입니다.



그럼 그 종말이 언제 있느냐? 믿는 사람들은 종말이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2천 년 전에 제자들이 던졌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서는 종말이 이때다 저때다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 하느님만 아시고 아들 예수님도 모른다고 잡아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하며 누가 무슨 헛된 소리를 해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그분 가르침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가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차는 휴지조각처럼 망가졌다는데 사람은 경미한 부상만을 입었습니다. 이때 그 자매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삶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며 생명을 위협했던 사고가 그녀의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을 가끔 묵상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기 위한 것이고 귀를 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지금 여기의 삶에 파묻혀 있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를 못하고 있으며 옆에 무슨 소리가 있는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아름답고 영원한 것은 자주 감춰져 있습니다.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았던 자들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칠 것이다.\” 종말이라는 위대한 만남이 있기에 세상이 혹 우리를 속인다 해도 우리는 참고 이겨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진실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지혜의 길입니다.











32        연중 제33 주일 -평신도의 날   루가 21,5-19 (다)  세상의 빛과 소금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33 주일이자 25번째 맞이하는 평신도의 날입니다.

오늘 평신도의 날을 맞이해서, 교회의 가장 핵심 구성원인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도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크게 세 계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신분의 핀회 구성원들은 교회 안에서의 계급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서 자라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그 하는 역할이 고유하고 다를 뿐, 신분의 높낮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녀들이며, 서로 형제 자매들입니다. 친회 안에서 신분과 계급의 차별은 없습니다. 다만 각자가 맡은 고유한 직분과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직분들을 잘 수행하게 될 때, 교회는 영양분을 받아서 제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평신도인 여러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은 무엇입니까? 성직자나 수도자와는 달리 평신도인 여러분은 가정을 이루고 세속 안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한정된 울타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평신도인 여러분은 가정과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 곳곳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받은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남긴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평신도의 직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본래 현세적 일에 봉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 생활 조건들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 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빛나는 실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교회헌장 31항).

  

교회 헌장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평신도들의 고유함은 세속 속에 사는 것입니다. 세속 안에 살면서 세상을 거룩하게 하고,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면서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평신도들의 고유한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오 복음 5장 13절 이하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시장에서, 거리에서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받은 고유한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소금\’처럼 흑은 ’빛\’처럼 사는 것입니까? 물론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마르지 않는 생명와 은총을 받게 되고, 그 은총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이 바탕이 되어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느님의 힘과 권능에 의지해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가 얼마나 긴밀히 하나로 일치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5장 19절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토록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에 아들이 하는 일은 바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들이신 예수는 아버지로 충만하셨기에 이 땅에서 구세주로서 일을 하실 수 있었고, 그분이 하시는 일이 곧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특별히 세속 안에 살면서 이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고 거룩하게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평신도들이, 그 힘을 어디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부터 그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힘을 얻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된 가운데 인류 구원의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어야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의 썩음을 방지할 수 있는 소금이 될 수 있고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충실한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이 그렇게 되도록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으로 충만한 다음 우리는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정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고, 사회의 지도층에 있다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고,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가 온통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불신 풍조에 잠겨 있습니다. 거짓이 마치 진실처럼 통하는 그런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이 진실처럼 여겨지는 이 사회가 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주 깊이 병든 사회가 거짓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진실되게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진실되게 정직하게 살다가는 병신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엄청난 거짓과 작은 진실 중에 어떤 것이 더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대하고 엄청난 거짓도 작은 진실 하나로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거짓은 결코 진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요한 복음 8장 31-3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거짓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과 성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거짓스러운 사람들이 언제나 불성실하게 살면서 모든 것을 어물쩍 겉으로만 번드르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그렇습니다. 국민 소득이 얼마다, 경제 성장이 어떻다, 수출이 얼마다 하고 떠벌이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한심할 지경입니다. 마치 속 빈 강정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하나,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사회 속에서 구성원 개개인들이 성실하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그렇듯이, 성실함 역시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의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할 소명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삶이 진실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 주위의 병든 부분들은 조금씩 치유되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는 소명을 완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자녀로 서게 될 때에,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이 진실되고 성실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로서 여러분이 받은 소명은 실로 중대하고 큰 것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도무지 할 수 없는 부분을 여러분이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가장 기본적인 소명인 가정 생활이 그렇고, 직장 생활과 사회 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각오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틀림없이 이 병든 사회는 치유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평신도들마저 세태와 시류에 휩쓸려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지 못할 때, 우리 사회는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외적으로 아무리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모래성같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25번째 맞는 평신도의 날에,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두 가지만이라도 강조하여 말씀드림으로써 평신도로서 여러분의 소명을 다시 한 번 일깨워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에,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풍성히 내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33 연중 제33주일   루가 21,5-19 (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필요한 것은?

                                                           변희선 신부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구의 마지막 날을 그려보자. 서기 2030년 9월 26일 각종 언론 매체들은 안으로 약 24시간 후면 거대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임을 절망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인공위성으로 지상을 떠난 소수의 사람들과 각종 비행기를 예약한 힘있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제외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자포자기한 사람들, 술에 취한 사람들, 애인과 함께 밤을 지새는 사람들,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지하 광장으로 몸을 숨기는 사람들 등등으로 지구촌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이제 한가지 질문을 해보자. 지구의 종말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인류의 문화 유산들, 각종의 건축물들, 핵무기들, 금은 보석들, 보증 수표나 유가증권들, 음식과 술, 미녀들, 박사학위 증명서, 각종 보약들, 화장지, 향수. 노래방, 영화관, 은행, 컴퓨터, 핸드폰, 아름다운 경치들도 24시간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인류를 파멸에서 구해낼 수 있는 그 무엇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절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절망 자체일 뿐이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미래는 캄캄한 어두움일 뿐이다. 그러나 절망의 어두움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개미 한 마리가 감옥으로 들어와 자유로이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명과 자유를 발견한 그 신사는 편히 잠들을 수 있었다.


  오늘의 복음은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묵상해 볼 것을 초대한다.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상상하거나 묵상하자면, 절망감이나 두려움에 빠질 우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미리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한다면, 「혹시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겁내지 말고 오히려 나를 믿고, 자신 있고 당당하게 대처하라.」 그 어떠한 세력도 하느님의 권능을 이길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님의 신앙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온 세상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박해를 한다고 할지라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어떠한 세력이 내가 갈 길을 방해하고 막아선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면, 그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오늘도 내일도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날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분께 대한 신뢰감인 것처럼, 오늘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게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주님만이 주시는 신앙과 자신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실직하신 분들, 마음의 상처로 어두움에서 헤매시는 분들, 부도가 나서 고생하시는 분들, 원하는 일에 실패하신 분들, 남들로부터 미움과 손가락질을 받는 분들이여,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설령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로 오세요. 저도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34          연중 제33주일   루가 21,5-19 (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재난의 시작 

                                                  – 교구주보





오늘은 연중 33주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연중 끝 시기에 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서말씀은 야훼의 날, 세상의 종말, 공심판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죽음과 심판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오히려 여기서 더 큰 희망을 지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의 삶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마련입니다.



많은 경우 현실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으며 특히 현실에는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악을 일삼는 자들, 잔인한 폭압자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더 잘 되고,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면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특징이라고나 해야 할까, 어쨌든 세상을 이루는 불가분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실상과 좌절을 느낍니다. 모순과 부조리의 현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과 고통에서부터, 의인들의 억울한 읊조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온통 사회적, 정치적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사람들, 부당한 권력자들만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깊은 회의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바로 이를 증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옛날도 한가지였습니다. 또 내일도 한가지일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지닐 수 있고 또 마땅히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실의에 찬 사람들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분명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의인들에게는 정의의 태양이 꼭 비추어 오리라, 모든 것이 밝혀질 야훼의 날이 꼭 온다는 희망의 소식입니다.



오늘의 루가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최후의 심판을 함께 수록한 내용입니다. 종말의 표지는 다양합니다. 가(假) 그리스도의 출현, 위선자들의 난무, 전쟁과 싸움, 지진과 기근, 전염병과 죽음 등등입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의 것들입니다. 역사의 현상에는 늘 이러한 일들이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을 세상의 끝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해석하기  보다는 매순간, 우리의 삶의 현상에는 이미 종말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매순간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며 최후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교훈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일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을 최후로 알고 성의를 다하는 삶을 살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종말과 공심판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루가는 또다른 특징으로 크리스찬들의 박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잡히고, 매맞고, 재판받는 힘든 과정이 구원을 위한 필연적 과정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부로, 가족들까지도 박해의 장본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위로자, 대변자,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인내입니다. 끝까지 견디어 내면 분명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가 주어진다는 확신말입니다.

하느님, 고통의 시대에 실망하고 좌절한 이들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아멘.











35          연중 제33주일   루가 21,5-19 (다) 평신도는 교회의 생명력



  묵상 : 교회의 근본 사명은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 사명은 세상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평신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평신도야말로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비출 수 입고, 진리의 소금으로 부패를 막을 수 있다,



  누가 평신도인가?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한국교회는 1970년부터 연중 마지막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고 있다. 평신도 주일의 의의는 세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교회가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데 있다.



  그런데 ‘평신도\’는 누구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는 신품(神品)과 교회에서 인정하는 수도신분에 속하는 이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 신자를 말한다\”(교회헌장, 31항)고 그 신분을 규정하고 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면에서는 똑 같다. 다만 교회 안에서 그 맡은 바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로마 12, 4-5)라고 하셨다.



  사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맡은 바 고유한 사명을 다함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많은 평신도들은 ‘신부님 수녀님이 계신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합니까?‘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자세를 취하는 그 밑바탕에는, ‘평신도는 신앙심이 부족해서, 세속을 끊지 못하여 수도자도, 성직자도 못된 변변치 못한 신자\’라는 인식이 깥려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이런 태도는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평신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신도(病身徒)이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생각과 태도야말로 참으로 깨끗이 떨쳐버려야 할 낡은 것들이다.

 이런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한 스스로 평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고 무책임하게 살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에 참여하며,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자들을 말한다\”(교회헌장, 31항)고 평신도의 직분과 사명을 명시하였다.



  세속에 살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하는 평신도



  만일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다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은 누가 수행할 것인가? 수도자는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서원을 통해 현세적 가치들을 뛰어넘어, 하느님 안에 사는 삶을 증거한다.

그리고 성직자는 말씀의 선포와 성무집행을 통해 신앙의 씨를 뿌리며 신앙인들을 키우고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사이의 다리가 되어준다. 평신도들은 세속에 그 삶의 바탕을 두고 있는 이들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사람들이 바로 평신도인 것이다. 집을 짓는데 설계도 중요하고 기둥도 중요하지만, 벽돌로 모든 공간을 쌓아 막지 않으면 건물은 완성될 수 없다, 평신도는 바로 건물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수많은 벽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수도자가 평신도 가정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의 빛나는 전통



  한국교회는 참으로 평신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가꾸고 지켜온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두 분의 중국 사제가 잠시 활동했을 뿐, 50여년을 평신도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박해 중에 교회를 이끌고 가꾸었다.



  유요한과 이루갈다 동정부부 순교자의 생애는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을 준다.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어려운 사회여건 속에서도 맹렬한 활동을 한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5000리 북경 길을 아홉 차례나 왕래한 정하상(바오로)성인, 16세에 장원급제하여 임금과 뭇 사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하느님을 알고부터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쓰레기처럼 버린 황사영(알렉산데르) 등, 우리 선조 평신도들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교회가 조직이나 구조적으로 아무리 거대하다 하더라도 깨어 활동하는 평신도들이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내가 바로 교회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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