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3,35-43 말씀연구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왕 대축일

1. 말씀읽기: 루카 23,35-43

2. 말씀연구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에 연중 마지막 시기를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날은 온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따라 새롭게 되도록 온 힘을 기울이며, 그분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온 천하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고 그분께 ‘찬미’의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시는 임금이 아니시라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시며 떠받들어 주시는 임금이십니다.

내가 모신 왕은 바로 이런 왕이십니다. 이것을 잘 깨달아 왕의 참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완전한 승리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백성의 지도자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고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도 유다인들을 위해, 특히 백성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의 편협한 어리석음과 무지는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어 놓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일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서서히 고통속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을 합니다. 이제 그들은 남을 위해 했던 기적을 스스로를 위해 해 보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롱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유다인들이 생각하고 기다리던 그런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마지막 순간에라도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실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지도자들의 말 속에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즉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행하는 잘못들이 있습니다. 내 모습 안에서도…,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군인들도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신 포도주는 로마 군인의 음료였다고 합니다. 한 병사가 십자가에 달려 몹시 괴로워하시는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었으나 이 행실도 역시 조롱의 행위였습니다.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병사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비웃습니다. 만일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 군인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참된 왕으로서 당신의 백성(세상 모든 이)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비록 조롱자들은 예수님을 비웃기 위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이라고 적어 놓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유다인의 왕이셨습니다. 아니 온 세상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왕이십니다.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진실하고도 위대한 왕권은 드러납니다. 즉 사랑을 하고,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베풀어주며, 회개하는 살인자에게 예기치 않은 은총으로 구원을 베풀고, 사람들의 불의 앞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며, 죽음 앞에서조차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왕권의 모습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보든 보지 못하든,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안하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왕 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특히 사도 바오로께서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1,12-20)에 풍부히 나타나고 있다. 첫 세 구절은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고 옮겨 주시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나게 해주심”(1,13-14)에 대해 천주 성부께 감사드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흑암의 권세’(13절) 즉 사탄의 나라와 정반대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다. 사탄의 나라는 사람들을 굴복시켜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얻는다.

나머지 구절들은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 찬가는 바오로 이전에 구성된 것 같고, 여기서는 분석을 하지 않지만 많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우주적’ 중심성에다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한다. 세상 만물이 그분을 통해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창조된 만물의 창작자이시며 또한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말라 버리는 풀 한 포기조차 인간과 광대무변한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놀라운 계획안에서 존재이유를 갖는다. 그분이 성부의 완전한 ‘형상’이시듯이 세상 만물은 어떤 모양으로든 그분의 ‘형상’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은 사실을 결코 신학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운문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15-17절).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실 뿐만 아니라 끝이시기도 하다. 사실 그분은 만물을 존속케 하시며 모든 창조물의 마지막 목적지이신 당신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신다. 이것이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는 16절의 의미다. 모든 창조물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 창조된 만물은 분명히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또한 부추겨진다. 그러므로 이미 그리스도의 날인을 받음으로써 원천이신 그분께로 되돌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짊어져야 할 무한한 역할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절대통치권’은 영신적인 내면세계에 그칠 수 없고 모든 만물을 ‘흑암의 권세’(13절 참조)에서 건져내신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고 계시는 교회라는 특권이 부여된 ‘공간’을 바로 지금부터 갖고 계시다 :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18-20절)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형상은,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실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분의 통일된 생명력을 뜻한다. 즉 그분의 모든 풍부한 생명력이 그분 자신의 ‘연장’인 교회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 교회의 머리로서의 형상 – 또한 그분의 ‘절대통치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머리’는 ‘몸’의 모든 생명적 활동을 통합 조정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극단적으로 하게 되면 위험하다. 여기서 자문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 일반 신자들로부터 사목자들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구성원 전체가 항상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또 임금이신 그분의 ‘통치’에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있는지!

그리고 문맥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권리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만물의 으뜸’(18절)이 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20절) 이룩하신 ‘만물’과의 ‘화해’가 교회를 통해 널리 퍼져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 과연 교회가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끔 할 수 있는 그런 확장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 전체와 온 세상이 단지 기본논리상으로만 수긍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생활로써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 옆에는 두 명의 죄수가 함께 달려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가 봅니다. 극단적인 상황에 닥치면 자신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 죄수는 마지막 발악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살아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괴로워서 그의 본성은 그렇게 예수님께 모독을 퍼 붓고 있는 것 같습니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죄는 죄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죄인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죄인을 향하여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꾸짖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나를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모독하는 그 죄인과는 달리 이 사람은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왕으로서의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눈이 열려 비록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래서 함께 죽어가고 있지만 그 모습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여줄 수 있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보낸 사람 아니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혹시 신앙인 아니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죽어가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이 넘치고 부러울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나 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죽어갈 것인가?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면서, 믿음을 고백하면서 죽어갈 것인가? 오늘의 나의 모습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글라라 성녀가 고백한 것처럼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하면서 죽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시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주님, 제가 깨어날 때 주님 모습으로 흡족 하리이다.”(시편 17,15) 라고 고백하면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닫혀 있던 하늘나라의 문을 연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죄인의 구원을 통해서 내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 믿음을 드린다면 나 비록 죄인이지만 그분의 자비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왕, 임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2.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나는 왕을 잘 섬기는 백성입니까? 왕이신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내가 왕께 해 드릴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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