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 축일(2사무 5,1-3; 골로 1,12-20; 루카 23,35-43)
= 예수는 나의 왕인가?
묵상길잡이 : ‘왕’이라는 말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요즘 귀에 거슬리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분은 참으로 당신을 우리 죄인들을 위한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왕이 시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왕인가?
오늘은 전례적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 왕 주일이다. ‘왕’이란 단어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요즘 전제군주적인 냄새가 많이 나기에 거부감을 갖게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왕’이란 요즘의 ‘대통령’처럼 우리가 뽑아서 일꾼으로 삼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왕’은 나라의 주인이요, 백성도, 땅도, 산천(山川)도 심지어 들짐승과 산짐승까지도 ‘나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이란 바로 ‘주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왕’,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왕권을 확립하셨는가?
2.예수님은 악(惡)과 죽음을 이긴 왕이시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명(罪名)은 ‘유대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력에 뜻을 둔 적이 결코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범으로 몰려 죽으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가장 비인간화시키는 죄(罪)와, 인간을 짓누르는 제일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진정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아무도 건널 수 없었던 죽음의 심연을 뛰어넘어 ‘부활하는’ 결정적 승리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분의 생애를 보자.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8-49) 아들은 모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은 예수님이 12세 때부터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알고 있었음을 내 비치는 말이다. 예수님은 세례 때부터 ‘고통 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소명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으셔야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12,27)하셨다. 수난을 목전에 둔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제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22,42)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가셔야 할 그 길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기에 인간적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고통의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항상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빌며 그 길을 묵묵히 가셨다.
끝내 예수님은 큰 쇠못이 당신의 손발을 뚫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보라지!”(루카23,35).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23,37)하며 야유를 퍼부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도 못하고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이 순간은, 완전한 패배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일생동안 따라다니던 끈질긴 유혹을 끝내 물리치고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킨 진정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십자가와 떨어질 수 없게 된 이 순간은,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고 죄인들을 위한 숭고한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사랑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 ‘다 이루어졌다’ 하셨고,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19,30)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아담의) 불순종이 엮어 낸 모든 죄업(罪業)을 말끔히 씻으셨다. 이로써 인간성과 인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골로1,14)하고 고백한다. 드디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우주의 왕’이 되셨던 것이다.
3. 예수는 내 안에서 ‘왕 노릇’하시는가?
나는 나를 얼마나 다스릴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자신을 얼마나 이겼는가에 달려있다.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명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 놓는 사랑으로 된 것이었다. 참된 해방,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있음을 깨닫자. 이 깨달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은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가? 나의 모든 삶이 예수 중심의 삶이 되어 예수님이 나에게 왕 노릇 할 때, 그 때 나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그리고 내가 사랑과 봉사로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의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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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의 중요성 : 설교자들이 어떻게 살며, 설교를 통해 어떤 그리스도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교회는 세상 구원에 ‘희망의 불기둥’이 될 수도,‘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설교자의 고뇌 : ▷“신(神)은 죽었다”고 외치는 이런 시대에, 또 그렇게 믿고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영원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가? 여기에 설교자의 고뇌가 있다.
▷ 모든 사목자들이 하나같이 느끼는 딜렘마는 쉴 새 없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진리를 설교하면서도 말하는 바를 그대로 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등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강론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설교자의 자세 ;▷사제생활에 있어 말씀의 선포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사제에게 있어 강론 준비를 위해 바치는 시간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사제에게 있어서 강론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보다 더 큰 직무유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 “ 미국의 어떤 잡지에서 한 기고가는 “현대 자유 문명국에 사는 인류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매주일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