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강론

 

 성가정 대축일



1.         성가정 축일 (나) 루가 2,22-40

              ꡔ감사하며 기도하고, 진실 되고, 사랑과 희생으로 좋은 가정 이룩하자ꡕ

                                                                조순창 신부



예수 성탄절의 축제 기간 중 그 첫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세분으로 이루신 나자렛의 거룩한 가정을 우러러 기리며, 이 성가정에 비추어, 우리 가정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도리를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서로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서 사람이 되시어, 피조물인 인간을 부모로 모시고 이 세상에 오신 아들 예수님, 다윗 가문의 요셉, 그른 마리아와 약혼했으나 혼인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아, 구세주의 양부가 되신 의인이신 아버지 요셉 성인입니다. 동정 모친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 주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함께 인류구원의 속죄 고통을 나누신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그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었고, 우리 모든 가정의 모범이십니다. 아버지는 요셉 성인처럼 신의를 지키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처럼 사랑이 깊고, 아들은 예수님처럼 효성스러워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갈 때에 그 가정은 우리를 구하고 행복하게 하며, 날로 새롭고 성장케 하는 작은 교회요, 지상의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남편은 고달픕니다. 어머니인 아내도 끝없는 분주한 일에 지치게 마련입니다. 자녀도 공부와 부모의 기대와 앞날의 걱정으로 희망보다 부담이 더 큰 그늘 속에, 허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남편은 직장이나 사업에 시달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가정보다 밖에서 억지로 피로를 풀고, 가족 앞에 폭군의 횡포를 부리기 쉽고, 어머니와 아내는 자리 한 나는 살림 일에 찌들기보다 늙기 전에 시샘의 갖가지 모임에 더 분주하기 쉽고, 자녀들은 수나 많으면 몰라도, 고작 하나 둘에 어린 마음의 하소연을 이해하고 들어주지 않아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학비나 용돈을 타내는 말밖에는 더 이상의 대화는 않는 가운데서, 서로의 담을 높게 두텁게 쌓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자녀의 도리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효자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장수할 것이며, 죄를 지어도 부모 섬긴 공으로 죄는 용서받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며, 어버이는 ‘자녀들을 못 살게 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성전에서 율법대로 바친 것과 같이, 정성스런 감사 예물과 함께, 우리 가정과 온 가족을 하느님께 봉헌합시다.

여러분의 부모는 훌륭하십니까? 아니라고 하여도 부모는 부모이심은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좋은 아내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은 믿음직한 남편입니까?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감사하십시오, 부부란 두개의 반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임을 명심하시고, 유쾌한 동반자를 만듭시다. 여러분들의 자녀는 희망이 있습니까? 아쉬우면 부모님 스스로를 마음의 거울에 비춰 보시고, 더 훌륭한 부모가 되기로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고 진실 되고 사랑하며, 희생하고 감사로써 좋은 가정을 이룹시다.



우리 본당은 은혜 넘치고, 말씀 풍성하고, 이웃과 기쁨 가득하고, 영세 가족이 날로 늘어나고, 새 성전의 꿈을 실현하는 한 해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1014명 새 영세자에 축복합니다. 새 성당의 기본 설계 투시도도 완성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봉사와 헌금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본당 공동체로서 온갖 활동에 동참하시고 참여하시는 신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2.               성가정 축일 (나) 루가 2,22-40 크리스챤의 가정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은 우리 신자들의 가정의 표본이요, 거울이요, 등대이며 귀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가정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에서 예수님은 건강히 자라시면서 지혜가 가득 찼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 가정에서도 성가정을 본받아 부부간의 사랑과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 속에서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 가정은 말하자면 작은 교회입니다.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각 가정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즉 가족이 모여 하느님께 다같이 기도하고 감사 드리고 용서도 빌고 속죄도 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각 가정에서 흘러 나와야 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은 각별한 교훈과 각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신지 얼마 안 된 예수 아기는 마리아와 요셉의 품에 안겨 성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모세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성모 마리아는 정결 예식을 행하였고 또한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주님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예수 아기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는 전연 없었고 또한 마리아께서도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심으로 정결예식을 받을 필요가 하등 없었으나 겸손한 마음과 하느님의 계명을 잘 준수하는 모범을 주시기 위하여 끝까지 잘 따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율법정신을 알았습니다. 성가정이 우리 가정에게 주는 교훈과 모범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과 열렬한 사랑은 하느님의 계명을 알뜰히 준수하는 데 있다고 성 요한은 말씀하였습니다.



가정은 자녀가 부모한테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는 곳입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가운데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가정, 신앙과 기쁨이 깃든 가정, 함께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화목 하는 가정은 천국을 약속 받은 하느님의 가정이요, 천상 가정입니다.

주일이면 으레 온 가족이 성당에 나와서 나란히 앉아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적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깃든 가정이며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축복 받은 가정입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성당에 발걸음을 끊고 신앙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로 나온다면 어찌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받는 가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미 도끼를 나무뿌리에 대셨다(마태오 3,10)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종말은 비참해질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그가 주는 영향은 막대합니다. 요즈음 십대 소년 소녀들의 탈선 행위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방에서, 카바레에서, 유흥가에서 그들의 행동은 뜻 있는 이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 외에 살인, 강도, 사기, 불륜, 도덕의 타락, 갖가지의 부정 부패 및 사고 등은 이 사회와 이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합니다. 또한 암영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세계의 저명한 인사들의 말에 의하며 이러한 모든 퇴폐적인 풍조는 가정 교육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며 그리고 모든 범죄와 폭력과 현대인의 부정적인 기질은 모두가 종교의 후퇴 내지는 소극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 인격은 생 후 5, 6세까지의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정평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인격 형성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며 가정 교육에 좌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은 참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 속담에 <사랑은 집안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랑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소박한 곳에서 싹이 트게 됩니다. 가정에서 사랑이 싹트게 되어 가족 사이에 사랑과 평화가 오고 가고 하면 저절로 집밖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다라서 사회도 국가도 밝고 명랑해지게 마련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버이들이 자녀들과 늘 대화를 통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때로는 친구도 되고 때로는 지도자도 될 수 있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밖에서는 이웃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 애정이 깃든 미소, 마음의 위안, 그리고 정신적 원조를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전통적인 가정과, 가정의 건전성과 가치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가정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율법과 부모의 권위에 대한 존경심은 성가정 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듣는 거와 같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후히 상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은 모두 성가정을 본받아 모두 하느님께 축복받는 가정, 사랑과 평화 속에 단란하고 행복한 제 2의 성가정을 꾸며 나가도록 굳게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3.               「성가정」주일 <루가 2,41-52>  하느님의 자리

                                                         홍금표 신부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성가정」축일을 지내며, 우리 삶의 보금자리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기본 요소인 가정의 중요성을 뒤돌아보며, 가정의 성화를 위해 기도한다. 특히 오늘과 같이 가정이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에서, 우리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모든 가정의 모범인「성가정」의 교훈을 되새긴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성가정」하면 뭔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나마 거룩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가득한 무지개 빛 가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본받는다라고 기도 할 때, 우리 마음의 한 부분은 우리가 가지지 못했지만 「성가정」이 지녔을 법한 행복이, 우리 가정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반적인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가정」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가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상이한 가정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가정」은 우리가 기대했던 행복과 평화가 넘치는 무지개 빛의 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정, 우리 가정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불행의 요소를 두루 갖춘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가정이었다. 요셉의 직업은 장인이었는데, 이 말은 막일을 하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오늘날 인건비가 비싼 한국 땅에서도 일일 노동자들의 삶이 고단하다면, 2000년 전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의 작은 도시 나자렛에서 막노동으로 삶을 살아갔을「성가정」의 경제적 모습은 쉽게 상상이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이 가정은, 부부간의 불신과 오해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처녀가 정혼을 한 다음에도 동거생활을 하지 않고 약 1년간 친정에서 살게 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된 시기는 바로 이 1년간의 친정에서의 생활 중 즉,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사이에 아기를 갖게 된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는 많은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요셉은 남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될 정도로 이 「성가정」에도 극복해야 할, 오늘날 우리 가정이 가지고 있는 불신과 갈등의 요소를 똑같이 가지고 있던 가정이었다.

  

세 번째로, 이 가정은 자식의 불효가 있는 가정이었다. 오늘 복음에도 그 한 면을 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열 두살 되던 해 과월절 때,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모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게 된다. 때문에 부모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렵게 성전에서 그 아들을 되찾게 된다. 그 때 부모의 애타는 마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란 황당 무계하기 까지 하고,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이라면 한 대 두드려 맞았을 소리. 그리고 더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술주정뱅이요, 악령 들린 사람, 죄인들하고 어울리는 상놈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걱정되어 찾아간 어머니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라는, 너무나 매몰차고 어미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한 말씀.

  

네 번째로, 이 가정은 고통이 있는 가정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은, 서양인들에게는 배우자의 죽음이고,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자식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성가정」은 이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겪은 가정임. 남편을 일찍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외아들마저도 자신의 눈앞에서 처절히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만 했던 가정이, 바로 이 가정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던 가정이 바로「성가정」이었다. 그러면 무엇일까? 성가정의 이런한 모습이, 분명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진면목은 아닐진데,「성가정」을통해 우리가 본받아야말 할 교훈과 모범은 무엇이란 말인가 ? 그것은 아마도「성가정」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자리(활동공간) 때문이리라.

  분명 「성가정」은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가정」은「하느님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 중요한 선택과 결단의 순간「하느님의 뜻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와 여백」이라는, 참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두고두고 생각해야만 할 소중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었던 가정이었다는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아들의 행동과 불효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임신으로 이혼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 가정을 이끌어 간 것은 인간적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그 가정을 이끌어 가는 중심축이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이 활동할 수 있는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 드렸다는 것이「성가정」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4.               성 가정 축일

                                  가정 성화는 부모의 표양으로부터



서울 명일동에 사는 이 아무개(45 스테파노)씨는 며칠 전, 고2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 깜짝 놀랐다. “대학에 진학하면 무엇을 전공하고 싶냐\”고 묻자 아들이 대뜸 “돈을 많이 벌려면 어떤 학과에 가야 하는 거예요?\”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잖아요. 저는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운동장같이 넓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제일 좋은 승용차 타고 다닐 거예요‥‥‥‥ 이씨는 그 날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부족한 것 없이 길렀고,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다닌 아들인데, 벌써부터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화가 사라진 현대의 가정

“부모의 책임이 크지요. 그동안 아들의 몸\’만 키워줬지 \’마음\’을 키워주지 못했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 교육을 소홀히 한 겁니다.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아들의 가치관을 바꿔 놓을런지 걱정이에요,\”

  

이씨의 뒤늦은 자각과 고민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상당수의 부모들은 지금 자녀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고, 느끼며 가치관을 형성해가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 자녀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학교성적일 뿐, 그들에게서 어쩌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적 행태가 나타나면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하는 말로 넘겨버리기 일수다. 일상사에 지친 부모와 부모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공존하고 대화가 사라진 곳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현주소다.

  

가정은 인격과 태도가 일차적으로 형성되어, 한층 더 풍요로운 인간성을 길러내는 최초의 학교(사목헌장 52항)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가정에서 인성교육이나 가치관 교육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자녀들은 입시경정 위주의 학교, 황금만능주의가 범람하는 사회, 감각적이고 홍미 위주인 대중매체 등을 통해 ‘위험스런\’ 가치관을 습득해가고 있다.

  

청소년의 ‘삶의 가치에 대한 평가체계\’, 즉 가치관은 가정․사회․학교환경 등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정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가정은 다른 환경보다 청소년의 인격 및 가치관 형성에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어린이들의) 가정경험은, 어른이 되어 지녀야 할 태도를 강하게 좌우합니다. 따라서 가정은 어린이가 세상과 맨 처음으로 접하는 장소이기에, 첫 번째 평화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96년 평화의 날 담화)\”라며, 가정을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학교라고 강조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자녀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는 효과적인 방법은 대화라고 말한다.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는, 특히 부모와 자녀간의 애정 어린 대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청소년의 건전한 가치의식은 주변환경과 의 진지한 대환 속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자유스럽고 진지한 대화는, 서로 신뢰하고 아껴주는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대화는 학교나 사회보다 애정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가정에서 가능하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와 사회로부터 얻게되는 스트레스와 갈등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부모들이 먼저 모범 보여야

그는 이어 부모와 자녀간에 진지한 대화가 생각보다 없지 않은 것에 대해 “훈련을 필요로 하며, 습관화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엄마가 저녁에 가족과 둘러앉아 하루 중에 일어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등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부모보다 친구에게 먼저 고민을 털어놓는 이유는, 가정 안에 이 같은 대 화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또 부모의 모범은 자녀들의 가치관 습득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축적에 혈안이 되어있는 부모, 낭비와 사치를 일삼지만 주위의 불우이웃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부모의 밑에서, 건전한 경제적 가치관이나 박애정신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가치관 형성의 방법적 측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녀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하는가이다. 대다수 부모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와 배금주의가 넘쳐나고, 이로 인해 온갖 사회악이 발생하는 이 혼탁한 사회 속에서, 자녀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의식구조 속에 ‘정직하면 손해본다’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는다\’‘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가치관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적어도 신자라면, 종교에서 그 ‘알맹이\’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통합하고, 조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종교적 교육이념을 강조한 교육학자 포스터조차도 “종교적 갈망만이 이기주의를 억제시키면서, 보다 인간다운 성격을 형성시켜 주고, 도덕률에 순응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종교에 기초한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님의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편 36,9)\’하는 말씀처럼,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입니다(98년 청소년주일 담화)\”라며 자녀에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 사물을 바라보도록 가르칠 것을 당부했다.

  자녀들이 무엇을 얼마만큼 가졌느냐보다 ‘어떤 인간이냐\’를 중시하고, 참된 정의감과 사랑, 그리고 공동체 정신 등을 습득하기 원하면, 그에 관한 교육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종교 교육 도움 받아야 성과 

교육학자인 대전성모병원장 윤주병 신부는 “종교교육은 청소년 인격교육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교육은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랑과 정의, 책임감과 협동심, 자제력과 순명 등을 배우게 하여, 참다운 인간화와 형제애를 도모하는 인격을 형성한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성 교육도, 종교교육의 도움을 받아야 효율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청주 양업고 교장 윤병훈 신부는 “부모가 신앙생활을 통해 얻은 가치, 교회가 복음에 바탕을 둔 가치를 청소년들에게 알려줘, 그 가르침을 ‘양심의 길잡이\’로 삼게 하는 일은, 그 어떤 사명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모의 신앙적 모범과 교회의 적극적인 종교교육, 그리고 사회의 건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수원교구 청소년국장 박종만 신부는 이를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 등 청소년을 둘러싼 주변환경의 ‘공동책임\’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청소년들의 가치관은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의 모습을 왕성하게 빨아들이면서 굳어져 가고 있다, 이들의 가치관은 새천년기 복음화와 21세기 한국사회의 ‘미래모습\’이다.













5.              성 가정 주일        가정의 정체성이 흔들리면/

                                               왜곡된 가치에 청소년 오염

                                                              윤병훈 신부

          

가정은 작은 교회라 일컫는다. 기초교회가 건강해야 모든 공동체가 밝아진다,

가정의 기초는 부부이며, 중심은 믿음과 사랑이며, 목표는 따뜻한 부부생활과 올바른 자녀교육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기초와 중심, 목표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가정의 정체성이 흔들려 걱정이다. 

  

또 하나 걱정은 가정 사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본당에서, 가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은 놀랍도록 변화하며,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데도, 교회공동체는 사회와의 접촉과 대화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있다.

  

이미 세상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너무도 많이 변해있는 세상을 직시하자. 각 본당은 가정사목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라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원론적인 것을 정립하고 시작해야 한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가정이 부부와 부모 자식간에 따사로운 관계와 서로에 한 욕구충족의 자리로 바로서야 한다. 가정은 따뜻함과 욕구충족의 역할을 잃어감으로, 상호가치간의 혼란스러움을 초래하며, 서로에게 깊은 상처의 장이 되고있다.

  

둘째로, 질적 가치 기준이 분명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가족들 각자는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들을 지니는데, 요즘 가족들은 서로간의 만남 없이, 모두 바람처럼 스쳐 지나므로, 마냥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생명가치가 살아날 리 없으며, 속사정을 읽을 수나 있겠는가?

  

가정에서, 어른의 전통적 가치와 신세대 가치 사이는 너무도 상이해, 억지로 눈높이를 맞추려 하지만, 부모와 집 떠난 자녀들과의 사이에는 불협화음만 높아졌다. 그러기에 가족 구성원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왜곡된 가치, 올바른 가치 등 다양한 가치들이 각자 나름대로 질적인 세계에 남아있는데, 서로간의 갈등만 심화되고 있다.



이제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최근에 절대적인 가치가 상대화되고, 상대적인 가치가 절대화되는 마당에,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통하여 생명가치, 공동선을 만들고 협력하는, 더불어 사는 삶과 사랑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정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소중한 가치들이 분명하게 구성원들 머리 속에 입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가정과 본당 구성원들이 성사적인 삶으로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성사는 보여 줌이다. 그리고 하느님으로의 일으켜 세움이다. 삶 안에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는 역할을 다 해야한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가치를 어른들이 보여 줄 때,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이 떠오를 것이다. 가정의 목표는 부부가 성사적 여정을 계속함으로써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사목자들은 구체적으로 가정과 연계하여, 삶 속에서 양질의 체험들을 신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공허

한 신자들의 마음에 충만함을 주는 것이다. 만일 가정이나 본당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지 않으면, 왜곡된 가치에 오염되어 따사로운 터전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6.                성 가정주일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한상호 신부



        머리말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계의 장래는 가정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작은 교회인 가정 공동체가, 바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첫번 공동체이며, 미래의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할 중요한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계시다.

  

이러한 교황님의 말씀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곧 병들어 가는 가정에서부터 나온 부산물이며 결과이기 때문에, 복음적 가르침에 기초한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로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지적하고 계시다.

  특히 오늘의 한국 사회는 급격히 밀려온 산업화와 외국문화의 영향으로 감당해 내기 어려운 변화의 물결 속에, 많은 혼란과 진통을 겪고있다. 생산위주의 경쟁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극도로 팽배해 있는 개인주의와 향락주의는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가족제도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가정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노력을 들여 찾고 재정비 해야할 크리스천 가정의 참 모습이 무엇이며, 주님께로부터 받은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1. 현대 가정의 위기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발표에 의하면, 88년 한해동안40만 9천명이 결혼하였는데, 그 중에 10.7%에 해당하는 4만 4천 쌍이 이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숫자는 해방 직후인 1946년의 47%에 비하면 배 이상 늘어난 것이며,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이혼율이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법정이혼 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시적이고 장기적인 별거까지 계산한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숫자의 부부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정의 파탄으로 부부 당사자들 뿐 만 아니라, 그들이 돌보던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노부모들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탈선과 범죄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사회 환경적인 여러 까지 요인들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을 품어주고, 이끌고 나갈 삶의 뿌리인, 그들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거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고갈된 가정, 대화나 이해어린 타협보다는, 우격다짐이나 폭력이 판을 치는 가정,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보다는, 세상을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요령을 가르치는 가정,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남을 이겨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바보나 패배자로 낙인을 찍는 가정, 삶의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심어주기 보다는, 사치스러운 옷까지나 물건으로 때우려는 가정, 이런 가정에서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후손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노부모님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 옛날보다 오래 사시는 노인들을 위해,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의 미덕인 효를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부부중심, 자녀중심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소외된 채 불안하고 고독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이 있다.

  

서로 모시지 못하겠다고 다투는 두 아들을 위해,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 부천의 어느 할머니

사건이나, 제주도에 효도관광 시켜드린다고 모시고 갔다가 내버리고 달아나는 어떤 아들과 며느리의 이야기는, 요즈음의 세태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른을 존경하고 모실 줄 모르는 가정에서 어떻게 효성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래의 가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 역시, 현대가정을 위기로 몰아 넣는 위험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자녀는 하느님의 가장 귀중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실수 때문에 생긴 두통거리로 여기는 부부들이 많이 있다. 한 해 동안에 무려 2백만이 넘는 어린 영혼들이 세상구경을 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있다. 자기 자신들의 안락과 평안을 위해, 그렇게 쉽게 처리해 버려도 된단 말인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이 접하고 있는 위기상황은 무엇이며, 그러한 문제들을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마음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는지 생각해 보자.



        2. 현대생활과 우리 가정



  사람은 누구나 가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보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바람과 노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산과 경쟁위주의 산업사회로부터 많은 영향과 도전을 받고 있다. 교황님 말씀대로 오늘의 가정은 “다양한 세력들\”에 의하여 파괴와 변태의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산업화, 도시화, 전문화의 물결은 우리 고유의 가족 형태와 기능에 많은 변화를 초래했으며, 외래문화의 유입과 함께 성윤리를 비롯한 우리 고유의 가치체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로, 급격한 가족형태와 기능의 변화는 우리 가정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가부장권이 약화되었고, 지역적, 사회적 이동이 빈번해 지면서 개인 위주, 부부 중심의 핵가족을 지향하게 되었고, 가족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사고방식과 함께 종래의 가정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가정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전통적 가정은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하는 집단생활이었고, 자녀들의 교육과 양육을 위하여 가장 영향력이 큰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소비생활만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가족이 흩어짐으로써 가정의 대화가 줄어들게 되었고, 교육방법도 점점 제도화되고 전문화됨으로써, 교육의 책임이 정규 교육기관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부모와 자녀간의 정서적 유대가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가정이 늘어나게 되었고, 부모와 자녀간의 유대가 인간적 사랑으로 강화되기보다는, 경제적 합리성이나 이해타산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면서, 가족관계가 비인간화되는 위험을 보이고 있다.

  

종교적이며 오락적인 가정의 기능 면에서도 딸은 변화를 볼 수 있다. 출세위주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현대사회의 분위기에서, 가정은 신앙이나 종교적 가치를 심어주기 보다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요령과 힘을 제공하기에 바쁘고, 상업적이고 전문적인 오락기구들로 인해서 가족 간의 친교와 결속을 다지는 여가를 이용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핵가족화, 가족 기능의 변화와 역할분담의 혼동 등은 현대가족에게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족의 불안정 문제와 노인 문제, 청소년 문제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두번째로, 우리 가정에 위협을 주는 요소로는 생산위주의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적인 사회 분 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물질위주의 현대사회 속에서 남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더 많은 부를 누리며 살기 위하여 우리 가정들은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일과 직장을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현대인들은, 가정생활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부부가 함께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조차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자녀들 역시 입시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있다.

  

이러한 생존경쟁에서 오는 불안과 긴장, 그리고 과로한 업무는 원만한 가정생활에 많은 장애를 일으키고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불건전한 향락문화에 젖어드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바라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세번째로, 오늘날의 자유스러워진 성윤리와 결혼관이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고 있다. 동아일보 70주년 사회조사에 의하면, 젊은 세대일수록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와 함께, 어려운 결혼생활은 일찍 청산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부로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과거의 결혼제도 보다는, 살기 어려우면 빨리 해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에 구속을 받기보다는, 혼자 자유롭게 독신으로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많은 가정은 신성한 두 인격체의 영원한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속적인 투신과 나눔이라는 결혼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망각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가정들은 오염된 한강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참된 가정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면 현재 우리 가정에 위협을 주고있는 요소들은 무엇이고, 나는 그리고 나의 배우자와 가족들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극복하려고 노력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3.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가정



  첫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일치와 통하는 것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영원히 사랑으로 일치하시는 것처럼, 부부는 일생동안 서로 사랑 안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며, 서로 깊이 믿는 가운데 신의를 지키며, 새 생명의 출산과 양육에 협력함으로써, 하나로 일치된 작은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참다운 가정 공동체는, 우선 한 몸이 된 부부의 사랑으로 시작된다. 어버이를 떠나 한 몸이 된 아담 내외! 서로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영원한 동반자 아담과 하와(창세기 2,24)야말로, 일치의 극을 이루는 부부 모습의 원형이다. 일생 서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부부, 과연 현대의 부부들은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 몸으로 결합되어 살고 있는가?

  

한 몸과 알몸은 아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아무것도 가리거나 감출 필요가 없는, 손해를 보거나 끼칠 여지가 없는, 서로 믿고 못 믿고 할 처지가 아닌, 서로 이기고 지고를 따질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완전히 서로에게 개방된 두 알몸의 결합이 아니라면, 부부가 진정으로 한 몸을 이루리라고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사랑 안에 진정으로 한 몸 됨의 기쁨과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많은 부부들의 공통된 체험이며, 거기서부터 초래되는 많은 현상들로부터 심한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다.

  

지난 해 이혼한 사람들 중의 60% 이상이, 성격이 맞지 않거나 불만스러워서라고 이혼 사유를 밝히고 있지만, 사실은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함께 살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신, 나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 “함께 있기 때문에 살맛을 느끼고, 활력을 얻게되는 절대적인 존재\”, 그래서 “어떠한 일들이 닥치더라도 부등켜안고, 함께 울고 웃으며 계속 살아가고 싶은 존재\”라는 느낌을 배우자로부터 받지 못할 때, 결혼생활은 활력을 잃게되고 만다.

  가정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부부사랑의 흘러 넘치는 힘은 자녀사랑, 부모사랑, 친척사랑을 포함한 전체적인 이웃사랑의 핵심이 된다. 부부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자녀사랑이나 이웃사랑은, 가정 공동체의 균형을 마비시킬 위험성마저 내포하는 경우가 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전폭적인 자기 증여, 끊임없는 희생과 화해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전폭적인 자기증여라 함은 바로 조건 없이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저 줌\”을 의미한다. 서로간에 “거저 줌\”의 사랑이 없는 가정은 인간적 일치를 이를 수 없다.

결혼서약 중에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며 존경하겠다.\”는 배우자의 약속은 이를 잘 반영해 주고있다. 또한 여기에는 죽을 때까지 신의를 지키겠다는 확실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일시적인 동거나 계약결혼 같은 것은, 결혼의 깊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겠다.

연약한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많은 어려움을 갖게 마련이다. 현 교황은 “부부들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을 교회에 계속 상기시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부부 서로가 결혼생활을 통하여, 고통을 함께 나누고 희생으로 사랑함으로써,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현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다.\” “이젠 매력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등의 이유로,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결혼생활은 즉석에서 단숨에 배를 태우는 인스턴트 음식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서 오래 끓이고, 뜸을 들여야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는 음식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가정생활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간에 이루어지는 이해와 관용, 그리고 용서와 화해이다. 서로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용서를 청하며,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해주는 가정이야말로 성숙된 그리스도인 가정이다.

  

성숙된 가정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보겠다는 가족들의 열망과 의지 속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대화(對話)\”이다. 아무리 가까운 인간관계라도 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언어를 통한 대화뿐만 아니라, 마음의 표현이 잔뜩 어린 ‘무언의 대화\'(無言의 對話)를 포함한다. 오고가는 말이 없는 가정, 아무 느낌도 나타내 보이지 않는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가정에서, 어떻게 생명력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대화는 자기 주장만을 애써 나타내려는 소란스러운 의견교환이 아니라, 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진실 된 마음으로 주고받는 것이다.



가족들간에 오고가는 칭찬, 격려, 인정과 사랑의 표현은 살맛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남의 이야기를 관심 있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대화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요즘은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 가정은 믿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키우는 공동체요, 믿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신자부부는 전 생애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하여, 날로 더욱 자기완성과 상호성화에 전진함으로써, 공동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사목헌장 48항).

  오늘날 믿음을 가진 부부로서 복음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많은 유혹과 시련을 극복하며, 세상을 비추는 빛과 소금으로 살기 위해 신앙은 가정의 핵심이 된다. 신앙 안에서만 우리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정 공동체의 성화(聖化)를 위해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활중심에 놓고,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화와 형제애를 지향하면서, 가정을 신앙의 분위기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인간의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것을 부부의 고유한 사명으로 알아야 하며(사목헌장 50항), 부부는 이 의무수행을 위하여 하느님의 창조의사에 따르는 인간교육을 시켜야 할 권리와 의무를 하느님께 위탁받고 있음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가정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첫 신학교(primum seminarium)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풍요로운 인간성장에 기본이 되는 신앙교육보다는 입신출세주의적, 진학위주의 지적교육에만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신앙교육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청소년 시기에 공부만을 해야 한다고, 종교생활이나 교육활동을 중지시키는 부모도 적지 않은 듯 하다.

  이러한 생활환경 안에서, 자녀의 신앙교육은 기대하기 힘들다. 신앙교육이란 교리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생활의 증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신앙교육의 첫 교육자로서 말과 행동과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자녀교육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통하여 자녀들을 성장시켜야 한다.

  

우리의 가정은 성사생활(聖事生活)과 기도생활(祈禱)을 통하여 신앙 공동체로 성숙할 수 있다. 가정의 성사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맺으신 사랑의 계약이 기념되고 새로워지며, 또한 성체성사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들 스스로 맺은 혼인의 계약을 위한 힘을 발견하고, 이를 키워나갈 수 있다고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같은 빵을 나누는 사랑의 성찬을 통하여, 한 솥의 밥을 나누어 먹는 가정 공동체의 심오한 신비가 드러나기도 한다.

  

가정 안에서의 공동기도는 일치와 화목을 통한 가정 공동체의 성숙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 다. 가족이 공동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가정은 교회의 “가정지성소\”(家庭至聖所 Sanctuarium domestium)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할 수 있는 공동기도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바쁜 생활 중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하루를 봉헌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평화스럽고 반성과 화해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치는 아침, 저녁기도와 삼종기도 그리고 묵주의 기도를 통하여 신앙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게되며, 작은 교회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한 자녀들에게 축복이나 기도를 해준다는 것은, 말보다 훨씬 큰 기쁨과 용기를 북돋아줄 것이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부모의 기도와 축복을 받는 어린이의 순진한 모습에서, 오히려 부모들도 기도가 무엇이며, 기도의 힘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부활이나 성탄과 같은 전례시기를 따라 적절한 장식이나 행사를 베풀어줌으로써, 자녀들의 신앙심을 더욱 효과적으로 길러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소명을 갖는다. 그러므로 많은 현대인들을 혼돈으로 몰아넣는 그릇된 가치관이나 윤리질서에 대항해서 투쟁해야 하며, 정의롭고 올바른 사회건설을 위해서, 혼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

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함은 물론이며, 실천적인 사랑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열망과 함께, 특별히 우리 주위에서 가난과 병고,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실천적인 배려를 베푸는 것이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정 사도직으로서 “버림받은 어린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일, 나그네를 친절히 접대하는 일, 학교운영을 도와주는 일, 약혼자들이 결혼을 더 잘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일, 교리공부를 거들어 주는 일, 경제적 내지 윤리적 위기에 처한 부부와 가정을 도와주는 일,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뿐 아니라, 경제발전의 혜택을 노인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게 하는 일\”(평신도교령 11항)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결국 부부사랑과 일치에서 나오는 힘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 공동체가 평화의 사도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7.               가정성화특강              \’대희년과 가정\’-      

                                                             임병헌신부  



        가정은 하느님 사랑이 숨쉬는 장소


현대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탈산업사회는 대표적으로 세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기존 질서의 파괴이다. 기존의  상징과 관념, 질서, 전통적  사고방식은 인정받지 못한다. 또 관계 단절로 인한 소외현상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개인주의화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 관계로  이뤄진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도 위협을 받고 있다. 또 이러한 탈산업사회로 들어서면 점차 하느님의  부재를 주장하게 된다. 사람들이 점차 종교와 신앙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희년은  무엇인가? 단순히 교회가  정한 해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 날이 아니다. 대희년은 구원 선포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누려야 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죄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희년은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하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실존을 체험하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희년의 첫째 의미는 하느님은 살아  계시며 다른 누군가로부터 소외당하고 외면당해도 항상 내 곁에 계신다는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희년의 기쁨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가정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숨쉬는  장소이다. 즉, 가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까지 내포하는 곳이다. 



또 가정은 사랑이 충만하도록 노력해 나가는 장소이다. 가정은  이미 이루어진 완성형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아울러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시화되는 장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어떤 도구를 사용해 인간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낼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혈연으로 이뤄진 가정 공동체이다. 가정은 하느님이 사랑을 전하는 도구이며 그러한 사랑을 가장 크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탈산업사회의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정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가정을 이루고 가꿔 나가는 구성원 공동의 노력 속에서 대희년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가족간의 사랑, 하느님과의 사랑이 가정에 충만하도록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부터 갖자.




8.            성가정 축일 마태오 2,13-15;19-23        성가정의 의의



가정이란 한 지붕 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나자렛> 예수의 가정도 이렇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를 특히 <성가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천주시요 거룩하신 예수께서 친히 살으신 까닭이다. 우리 나라에만도 경복궁이나 창덕궁, 남대문까지 국보로서 소중히 또 길이 보존하며 감상하게 하는데 하물며 예수께서 살으시던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하는데는 아무런 이의(異意)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이유는, 가정이 천상적 또는 영적 결연(結緣)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性)으로써 맺어진 가족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중성도 있지만 여기에는 불성(不性)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승화되어 천국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장가도 시집도 안가고 다만 하늘의 천사와 같아서 결혼이 다시없다.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무성(無性)이다. 성(聖)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성(性)과는 직결되지 않는 것 같다. 성가정의 구성원들은 알로이시오 성인께서 하신 말씀대로 <육체 없는 인간> 이거나 <육체 있는 천사>들인 것이다. 영적 혈연(血緣)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셋째는, 둘째 이유와 좀 비슷하지만 좀더 적극성을 띤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예수께는 해당이 안될지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는 역시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국을 위해 즉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인간은 어차피 가족의 유대를 풀어버릴 뿐만 아니라 증오로써 이를 거부해야 한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마태오 10,35-36).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코 10,29-30).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버린 것까지 되찾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안배에는 지상가족으로써 천상대가족을 이룬다는 계획이 들어 있다. 기껏해야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더러 예수님의 당신 성부를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 이시다”(마태오 23,9)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대가족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잘 들어라.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마태오 8,11)라고 예언하시고, 당신 나라에서 당신과 마찬가지로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루가 22,30)하셨으니, 이렇게 되면 성 바울로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소 2,19). 이 하느님의 대가족에 한 몫 끼인 가족이라면 이미 성가정이 아닌가? 이런 가정이 현재 예수님의 가정밖에 없다. 이것이 넷째 이유다.



다섯째 이유는 교회와 관련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배필이요, 마리아는 이 교회의 어머니도 되고 요셉은 그 보호자다. 이처럼 가족이 총동원해서 <교회-가정>을 만들어 <나자렛> 성가정의 연장(延長)이 되게 하고, 이 <교회-가정>을 통해서 여기에 속한 모든 가정을 성화 시키려고 한다. 천상 대가족 이전에 지상 대성가족이 되게 한다.

이런 임무를 다하는 가정이라면 성가정이 아닐까?



끝으로 윤리적 이유 때문에 <나자렛> 가정은 성가정이 된다.

즉 가정의 각 성원이 자기 신분의 할 일을 완전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비의 임무는 가족의 의식주를 보장하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즐겨 배우게 기르는 것이다. 어미는 자기 남편의 권리를 의식하고 한 남자만 알며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남편과 함께 계획하며 자기 집을 명예롭게 하고 자녀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교시해 주는 것이 임무다. 자녀들의 임무는 부모 한에서 주께서 친히 위임하신 권위를 인식하고 그들을 하느님을 상징하는 대표자로 알아 예수처럼 순종하며 연로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다.



<나자렛> 가정이 그랬다는 증언을 레오 13세 교황에게서 들어보자. 그는 요셉을 가장의 모범, 마리아를 주부의 표본, 그리고 예수를 자녀의 본보기라 하며 “요셉 자신도 자기 식구들의 끼니를 벌어야 했고, 예수께서도 손수 한 직업을 맡아 일을 하셔야 했다. 그 때문에 지혜가 가득 차고, 없는 것이 없을 이 분들이 빈한함을 택하려고 그런 부귀를 내던지고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사시고자 하신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라고 하였다.



3년을 <나자렛>에서 살고 30년을 전도하셔야 했을 예수가 이와 반대로 하신 것은 확실히 성가정 육성과 완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제 일차적인 것인가를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이의 본보기가 되시려는, 또 천상 대가족을 이룩하시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9.             성가정 축일  마태오 2,13-15;19-23 주님을 모신 성가정

                                                            조창래 신부



신자들로 하여금 성가정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고 온 가족이 함께 성가정 건설에 힘쓰게 한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 될 때까지 평범한 한 가정에서 평범한 한 사회인으로 자라셨습니다. 전세기의 우리 선배 크리스쳔들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있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평화와 순종과 사랑의 모범에 감동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892년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고 우리들의 가장생활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흠숭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가정은 처음으로 미소가 발견되는 곳입니다. 아기는 어머니를 알아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이것은 동물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기의 인간적 의식은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누군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가정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접하는 사회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조부모 등 모두가 가정을 바탕으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야말로 다른 분, 즉 하느님에게로 향한 우리의 생활이 시작하는 곳도 바로 이 가정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한 인격의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이미 형성된다고 합니다. 최초의 교육인 초등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성격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가정생활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정을 보다 거룩하게 축복하시고자 성사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쳔에게 있어서 사랑 속에 하나가 된 성가정은 분명히 천국의 모습을 앞당겨 실현시키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인간이라도 이 사랑의 보금자리를 생각하고는 감동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갓 결혼한 새 부모도 미구에 생길 자녀와 함께 가정을 설계합니다. 따라서 순전히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의 배타적인 가정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의 사랑을 통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송두리째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쳔 신앙의 요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정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것만큼 주고 준 것만큼 받아내야 한다는 우리 인간의 타산으로 가정을 이끌어 갈 수는 없습니다. 부부간의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마치도 그리스도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가정은 그 가운데 그리스도를 두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과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성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녀들이 참된 사랑을 깨닫게 하고 또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가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방금 들은 제2독서는 남편과 아내, 또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핵심적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서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혼인성사는 여기에 다른 제 3자가 절대로 개입할 수 없고 또 부부 중 누구도 제3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근본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배우자를 인정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만한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성공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부부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허영의 도구가 아닙니다. 가기 싫어하는 학교에 강제로 집어넣고 급기야는 성적이 떨어지니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는 부모, 죽어라 싫어하는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우라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들볶는 부모, 그리고 자기들이 골라준 배우자 외에는 어느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다고 횡포를 부리는 부모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의견과 적성을 잘 보살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야 될 가장 큰 임무는 생활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애틋한 사랑은 자녀들이 올바르고 순수하게 자라게 합니다. 악표양은 절대 금물입니다. 부모의 모범은 자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생명을 부모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택한 생명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순종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효도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물론 갈등과 알력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모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 자신의 성숙에 도움이 되도록 하느냐에 있습니다. 연수약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무가 조용히 섰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아니하고,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순명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 부모에게 자주 자신의 마음을 열고 함께 얘기를 나눔으로 부모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순명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늦기 전에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기쁨도 또 슬픔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가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부의 애틋한 사랑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은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만남 없이는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가장 이상적으로 키우는 것은 기도할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자녀가 불효할 수 없고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부모를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역시 기도입니다. 자녀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축복 받은 우리 크리스쳔의 가정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은 가정입니다. 기도하며 일하는 가정, 웃음을 나누는 흐뭇한 가정, 순간보다는 영원을 향해 갖가지 십자가를 함께 지고 부활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가정은 진정 행복한 성가정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신 성가정을 이룩합시다.









                    

 10.                   성가정 축일 (가) 마태 2, 13-15;19-23

                                                             조승균 신부



성탄 후 첫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교회에서 제정한지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왜 성가정 축일을 제정했는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사랑의 보금자리이기에 하느님의 뜻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2,000년 전의 성가정과 오늘의 가정들을 비교해볼 때 성가정은 오늘의 우리 가정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녀에 대한 걱정, 시대의 불안정에서 오는 불안과 긴장감들을 성가정도 똑같이 겪었다는 사실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기 전까지 박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긴장이 항상 성가정에 도사렸고, 에집트의 이민 생활에서 겪는 서러움과 멸시 속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간 소시민적인 가정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가정은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보아 결코, 유복한 가정이라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가정을 교회에서는 세상의 모든 가정의 모범으로 삼아 따르게 하는 데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바로 가장인 요셉이 권위로써 가정을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가정을 이끌어 갔고, 마리아 역시 남편과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예수는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셉의 가정은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느님이 주신 가정 안에서의 각자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문경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촌에 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한 소녀가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소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동료학생들이 미감아 라는 사실을 알고는 같은 좌석에 앉기를 거부할 뿐 만 아니라, 점심 식사 때는 자기 혼자 쓸쓸히 식사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체육시간에는 나병균이 바람에 날려 전염된다고 멀리 떨어져서 운동하던 동료들의 멸시와 소외감을 맛보면서 학교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 소녀는 이런 학교 분위기에서 공부하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살할 결심을 굳혀 가고 있던 어느 날 그 소녀는 자신을 위해 뭉그러진 손으로 노동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밤마다 자기를 위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 소녀는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던 것이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부터는 자신을 미워하고 소외시키는 학교 동료들에게 쏟을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친절과 관심을 갖고 대한지 1학기가 지나자 서서히 자기를 이해하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생기더니, 이제는 많은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만일 이 소녀의 부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삶을 덧없이 살아갔더라면, 이 소녀의 장래는 어떻게 됐을지 여러분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녀의 부모는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가운데서 묵묵히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쏟았기에 그 소녀는 부모를 통해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이라는 작은 교회 안에서 부모나 자녀간에 사랑이 교류될 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존경심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만일 한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나 자식, 형제와 자매가 자기들의 고유한 의무인 사랑의 교류를 소홀히 했을 때에 가정 안에서의 복음화는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서로가 아껴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와 성실성이 필요합니다. 부부는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결합되어야 하며, 부모는 사랑과 이해로써 자녀를 보살피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명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정 안에 항상 머물도록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1.              성가정 축일 (나) 루가 2,22-40 그리스도적 가정이 되자!

                                                         이정운 신부



성가정 축일입니다. 해마다 주님의 성탄절을 지낸 다음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기로 정한 교회의 전례와 복음적 권고를 교회의 지향을 따라 신자가정이 절감해야 하는 날입니다. 크리스쳔 가정이 예수 마리아 요셉 세 식구가 살던 태고적 향수를 느껴 그것을 현실로 생활화하라는 현대 교회 안에서의 교회의 힘찬 가르침입니다. 가정의 시원과 하느님의 안배하심에 대한 교의적 해석은 고사하고,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적 가정의 의미와 그 실현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교회는 왜 전례력을 따라서 주님의 성탄 하신 축일 다음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정하였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 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당신이 설정하신 가정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이 인간의 가정 안에 머무시면서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하심을 우리 스스로가 알고 그 뜻의 기쁨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요셉 마리아 예수께서 사시던 가정의 가난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평화와 사랑과 기쁨이 깃들었던 가정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속담 속에 ‘가난이 싸움’이라는 속담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물적 여건만이 행복의 기본이 된다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까? 하루에 목수일 품값으로 세 식구가 살아야 했고, 그나마도 일거리가 없을 때엔 쉬어야 했던 안타까움 속에 지녔던 가장 요셉의 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길쌈과 바느질로 가장을 도우며 하느님의 아들을 보살펴야 했던 마리아의 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루의 일을 마친 후엔 흔들리는 등불 밑에서 성조들의 이야기와 성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궁구하며 기도하는 세 식구의 영상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나는 어린 그리스도의 맑고 총명한 얼굴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집안에 가구라고는 요새 흔히 우리들이 집안을 꾸미는 가구나 식기구 또한 편한 침구들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생각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이 가정이 우리의 모범이 된다고 가르치고 축일을 정하여 기리고 있습니까?



예수 마리아 요셉 이분들이 살던 가정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요셉은 가장으로 항상 일터에 나갈 때나 일을 하면서나 가정과 자신과 또한 하느님의 능하신 섭리와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였다고 나는 믿습니다. 마리아는 부족한 생활 환경 안에서도 어린 그리스도를 돌보며 ‘구원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주’라는 찬미의 노래가 그칠 새 없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양친의 가호와 사랑 안에서 자신이 구원의 성업을 세상에 이루기 위한 단련을 하며 부모님의 일을 돕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거룩한 품성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기 위한 섬세하고도 치밀히 단련하며 항상 부모와 함께 성전에 나아가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절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 우리는 가정을 현세적 생활의 방편으로 하느님께서 설정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혼인과 비유하여 말씀하셨고, 사랑과 평화의 보금자리로 구원을 가정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성서의 구구절절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 옛 문답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 더구나 예비자 교리 강화 시에 주님의 계명을 배울 때에 가정의 중대성을 이미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의 현실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제거한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까? 사회적 현실이 자녀교육의 그리스도적 의미를 터득하는 데 방해하고 있다고만 생각해야 합니까? 현세의 조류가 성가정의 거룩함과 덕스러움을 모두 빼앗아간다고 생각을 해야만 하겠습니까?



일터에서 퇴근길에 친구들과 주막에 들러서 세상일을 궁구하여 시간이 자정이 가깝도록 이야기해야 하고, 과외 수업을 통해서 지식을 얻을 욕심으로 모든 기도를 송두리째 버리고 국어 수학 자연에 머리를 파묻어 버린 채 기도 없는 학업으로 우리는 살아야겠습니까? 또한 주일에도 휴일에도 우리는 기도하는 집으로 우리가 정한 곳에서 한시의 반성도 없이 유흥가 산과 들 오락장에서의 소일 그것이 바로 현세 가정의 실태라면 너무나 가혹한 비판이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기도하는 가정, 하느님을 배우는 가정,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와 연결되는 가정, 가장이 솔선수범하고 그 가족을 따르게 하면서 정말로 우리는 2천 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여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다운 가정이기를 비는 바입니다.

  

12.           성가정 축일    루가 2,22-40         사랑의 공동체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또한 한 해를 마무리짓는 연말에 즈음하여 지난 일년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다운 모습을 갖추어 왔는지 반성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내 자신이 우리 가정의 분위기를 밝고 화목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힘써 왔는지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웃하여 사는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가정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대 가족 이었고, 또 다른 가정은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가족을 가진 한 가정은 웃음꽃이 피어 항상 화목한 반면에,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은 사흘이 멀다고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의 남편이 이웃집의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여러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데 저토록 화목하다니 왜 그럴까?” 그래서 그 젊은 가장은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이웃집 가장을 찾아갔습니다. 술을 한잔 권하며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저씨네 가정은 대가족인데도 웃음꽃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싸움만 하는데,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십시오!”



화목한 가정이 되기 위한 비결을 묻는 젊은 가장의 이와 같은 부탁에, 그 아저씨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아주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하나같이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젊은 가장은 도무지 그 말에 이해가 안 갔던지,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웃 집 가장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가정이 화목한 비결을 자상히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기 위하여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거울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물그릇을 발로 차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제 아내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나의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오!” 그랬더니 제 아내는 도리어 제게 용서를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어요, 제가 머리가 모자라 그만 물그릇을 그 곳에 놓아두었으니 제 잘못이지요.”



그런데 그 옆에 게시던 저희 어머님께서도 며느리한테 질세라 한 말씀 거두어 드립니다.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물그릇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바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가정은 미사 시작할 때, 우리 모두가 외우는 기도문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철저히 실천하는 가족이었기에 화목한 가정일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3,18-21) 화목한 가정이 되는 비결은 순종과 사랑임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어느 어린이의 미담입니다.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께 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선생님, 이거 무슨 좋은 일에 써주세요.” “뭐가 들어 있지?” “5천원이요.” “5천원? 이 5천원이 어땠다는 거지?” “저, 말예요. 선생님, 제가 지난 번 부활절 때 영세 받았는데 참 기뻤어요. 그래서 전 예수님이 이렇게 기쁘게 해주셨으니까 나도 예수님께 무엇을 한 가지 라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주 용돈을 조금씩 저축했거든요. 엄마도 좀 보태주셨지만 거의 제 돈이지요. 써 주시면 좋겠어요.” 그 선생님은 그 돈을 남쪽에 있는 나환자촌에 보냈고, 얼마 후에 정중한 감사장이 나환자촌에서 이 소년에게 날아 왔습니다. 소년의 기쁨은 대단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 모레면 이 해도 다 갑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서 할 본분을 다 했는가?



나는 아내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자녀로서 부모님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실행했는지를 반성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우리 가정 안에 진정 용서와 사랑의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이 미사 중 간절히 기도합시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가정의 화목한 모습은 바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이나 실수를 자기 탓으로 돌리려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덕에서 나왔습니다. 5천원을 모아 나환자촌에 보낸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창조적인 사랑은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실천적인 표상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저는 어는 화목한 가정의 한 학생이 쓴 글을 소개하면서, 성가정 축일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저희 가정은 가난합니다. 그러나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는 감사해야 할 일이 꼭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정의 식사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 가정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비록 식탁에 맛있는 음식은 없지만, 가족들이 하루를 지낸 재미있는 이야기와 유쾌한 분위기, 서로의 이야기를 즐겨 귀담아 들어주는 사랑으로 식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도 이 사랑과 대화의 분위기가 더 좋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가 내 가정이란 것을 다시 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끝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교우 분들의 가정에 더욱 충만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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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강론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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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졌다

    제1독서 : 집회 3, 3 – 7. 14 – 17a

    제2독서 : 골로 3, 12 – 21

    복   음 : 루가 2, 22 -40

    실제로 한 해가 끝나게 되는 성탄 8부내 성가정 축일을 지내도록 배려한 것은 전례상 적절한 직관이었다.

    사실, 오늘 축제는 한편으로 볼 때 성탄축일의 연장이며 확장이라 항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어 도구 역할을 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볼 때는 인류가 존립하기에 필요한 사랑, 형제애, 출산을 가능케 하는 상호협혁, 교육, 희생 등 모든 가치의 ‘종합’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나자렛 가정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가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게 해주는 전례적 행위는 그리스도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극히 인간적이기도 하다. 나자렛 가정은 우리 각자가 그 가정의 주역들을 통해 자신들을 재발견할 수 있을 때, 즉 아버지들은 요셉의 모습 안에서, 어머니들은 마리아의 모습 안에서, 자녀들은 예수의 모습 안에서 자신들을 투영시킬 수 있을 때 우리 인간 생활의 참목적과 삶의 자세에 있어 원천이 될 것이다.

    나자렛 가정은, 가족구조가 수세기 동안 겪어 왔고 또한 앞으로도 겪게 될 다양하면서도 일정치 않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구하게 모든 가정의 모델로 제시된다. 사실, 가정 안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인 사랑의 ‘점화’ 능력이다(에페 5,25-33 참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냐가 아니라 그 사랑이 가족구조의 본질을 이루고 형성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이차적인 것이며 역사의 흐름과 관계가 있다.


    주님께서는 자식들에게 아비를 공경하게 하셨다


    오늘의 독서들은 비록 과거의 행동양식에 매어 있긴 하지만 우리가 반복하여 말하게 될 내용들을 훌륭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집회서에 의한 제1독서는 그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제4계명을 실천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출애 20,12). 여기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부모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생명의 선물을 상징적인 의미에서 확장시켜주고 연장시켜주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오랜’ 삶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계명의 준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러내는 자녀들의 삶을 연장시켜주실 것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집회서의 저자는 제4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주님께서는 자식들에게 아비를 공경하게 하셨고 또한 어미의 권위를 보장해주셨다”(3,2). 그 다음 공경을 드려야 할 때와 그 자세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준다 :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떄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말아라. 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받고 네가 젊고 힘있다고 해서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3,12-13).

    우리 각자는 이러한 요청이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전생명이 부모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그들의 전생명도 또한 우리가 그들에게 드려야 하는 – 특히 필요한 경우에 – 사랑과 공경 안에서 우리에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집회서의 저자는 자기 시대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어떤 부정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제4계명을 지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점들 – 그중에는 생명의 연장에 관한 것도 있다 – 에 대해 주장하는 것 같다 : “아비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며, 어미를 공경하는 것은 보화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어미를 평안케 한다. 아비를 잘 섬긴 공은 잊혀지지 않으리니, 네 죄는 용서받고 새 삶을 이룰 것이다”(3,3-6.14).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숭고한 인간성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 하나의 종교적 행위이다. 즉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바로 자기 죄를 벗는 하나의 길이며 자기의 기구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보증이 된다. 그 까닭은 분명히 가정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층계송은 주님을 경외하는 가정에 감도는 환희, 즉 행복과 평화와 노동의 기쁨을 감동적인 시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 “복되어라.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 도를 닦는 자는 수고의 열매를 먹고 살리니, 너는 복되고 모든 일이 잘 되리라. 너의; 집 안방에는 네 아내가, 마치도 열매 추진 포도나무인 듯 너의 상 둘레에는 네 자식들이, 마치도 올리브의 햇순들 같도다”(시편 127,1-3).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성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총체적 의무를 대비적 방법으로 말해주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해 개별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그러한 의무를 모든 믿는 이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현시켜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의무와 결부시켜 이야기한다.

    그 까닭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존재의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이다 :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골로 3,12-14).

    비록 바울로의 이야기 내용이 그 당시 가족들의 의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혁신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은 없지만 – 예를 들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같은 것 – 바울로는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18절)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차원으로 새롭게 이끌어간다. 분명히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은 선후의 관계나 또는 누가 더 권위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등 각 사람의 품위와 인격을 평등하게 인정케 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신앙의 차원보다는 심리학에 더 밀착되어 있는 듯한 그의 다른 제언들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바울로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심리학적 도움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능가하는 종교적 관점에 귀결된다 : “남편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자여인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됩니다”(19-21절).

    이와 같이 가족들 상호간에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녀들이나 아내들을 ‘못살게 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해, 그 근거로서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의 ‘점화’인 가정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제시한다.


    복음의 그리스도론적 의미


    루가에 의한 오늘의 복음은 역사가 지금까지 인식해 왔던 것보다 더 전형적인 가정적 체험에 직접 근거하고 있는 어떤 점들을 특별히 시사해주고 있다.

    오늘 전례의 특별한 의미를 감안해서 복음에 담겨 있는 지극히 풍부한 그리스도론적 내용 – 확실히 루가복음사가가 부활체험에 비추어 깊이 통찰했고, 가정에 대한 체허을 유일하고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 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늙은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백성을 위한 구원사업의 중심으로 명백히 고백하고 있는 찬미가의 내용이다 :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30-32절).

    또한 예수의 모친에게 하는 늙은 시므온의 말은 예언적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만나게 될, 또는 부딪히게 될 예정된 시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친께서 아들이 겪게 될 고통과 속죄의 운명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34-35절).

    이제 오늘 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가정축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정생활의 표본으로서의 나자렛 가정


    무엇보다도 먼저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평법한 가정생활, 즉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고 극적인 긴장감마저 감도는 그러한 일상의 가정생활을 거쳐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한 가지 단편적인 예로 마리아의 예기치 못한 신비스럽고도 놀라운 잉태가 드러나면서 그녀와 은밀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의 심증을 생각할 수 있다(마태 1,18-25 참조).

    육화는 인간적인 모든 체험들이 뒤덮여 있는 악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내면 깊숙히 간직되어 있는 가치들을 승화시켜 재생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 체험들을 취하심을 의미한다. 나자렛 가정은 바로 그 전형적이면서도 독특한 특성을 통해 가정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근거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랑에 근거한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면 요셉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 한편, 여기서 아주 분명한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은 육체적 또는 성적 영역 안에서 폐쇄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랑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들이 자신 안에 도는 자신을 위해 갖는 구체적인 중요성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두 번째로 주목할 만한 것은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봉헌으로 이해되는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행위’이다(22-24절).

    이런 행위는 루가복음사가에 의해 분명히 기억되고 있는 모세법의 규정에 관계된 것이고(출애 13,2-11;레위 5,7;12,8 참조), 확실히 예수게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통해 장차 이루셔야 했던 성부께서 ‘봉헌’을 예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루가복음사가가 보다 직접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으 특별한 경우를 게외하고는 그 생명을 사랑과 감사의 ‘봉헌’으로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간에 자기 자녀들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막 피어나려는 생명을 질식시켜버린다면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불경죄까지도 범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정에 대해서나 또는 여자나 부부의 경제걱 사회적 심리적 권익 옹호같은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으며, 오직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바로 항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을 유린하고 마음대로 취급하는 그릇된 정신이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내용은 어머니(마리아)께서 아들(예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이다 :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35절). 이 구절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특별히 가정생활에 대한 진지한 교육학적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 각자가 다른 가족들을 위해 살고 또한 그들의 문제들을 자기 문제로 알며, 그들을 자기 척도에 꿰맞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충만한 교류는 보다 적합한 상황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의 일치 안에서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의 역할과 자질, 성향, 올바른 원의, 잠재력, 능력에 대하 상호인식을 요구한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의 생명을 점유했다고 한다면, 그녀는 예수의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방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요셉의 태도에 대해서도 같은 예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갈릴래아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복음의 결론부분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행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39-40절).

    인류의 역사가 집중되어 있는 이 작은 가정은 침묵 속에서 단순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모든 가정의 표본이 되기 위해 다른 가정들과 같은 평법한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마 나자렛 가정에는 먹을 양식이 넉넉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일거리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모든 사람ㅇ르 이해하는 무한한 사랑이었으며, 또한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사업을 위해 신비스럽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그 ‘어린아이’에 대해 특별히 쏟았던 무한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 가정은 하느님과 대화할 줄 아는 가정이었다. 즉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과 빛을 향해 모든 것을 개방하였던 그런 가정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오늘날 나자렛을 향한 영적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가정의 본질을 사는 기교를 배워야 할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1964년 1월 5일 성지 나자렛으로부터 전세계에 다음과 같이 참으로 아름다운 메시지를 보내셨다 : “여기서 우리는 가정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나자렛은 우리로 하여금 가정이란 무엇이고, 사랑의 공동체란 무엇이며, 소박하고도 단순한 가정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또한 신성하면서도 결코 침해될 수 없는 가정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움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으켜주며, 사회적 질서 속에서 가정이 갖는 자연적 기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늘 전례의 본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게 된다 : “성가정의 빛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천주여, 우리로 하여금 성가정의 덕행과 사랑을 본받음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주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 user#0 님의 말:

     

    과연 제 눈으로 당신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1. 말씀읽기:루카2,22-40

    2. 말씀연구

    성가정 축일은 예수님과 마리와 요셉이 이루신 가정을 본받아 더욱 가정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이해하는 가정생활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성가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가정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실 때 나의 가정 또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레위기(12,1-8)에 따르면 여자가 사내아기를 낳으면 7일간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고서도 그 후 33일간 축성된 것을 만질 수 없었고,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40일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정결예식을 받아야 했는데 여자 아이인 경우는 부정 기간이 80일이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출산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도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예를 행했습니다. 맏아들을 속량할 때 부모나 아기가 성전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기의 부모는 열심한 신앙인이었기에 그러한 규정들을 의무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받아들였고, 지켰던 것 같습니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첫 아들은 주님에 의해 축성되고, 속세를 떠나서 사제로서 오로지 하느님을 섬겨야 했는데(탈출13,2;민수18,15-16),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제직을 레위인들에게 한정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첫아들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권리를 기억하도록 하려고 첫 아들은 성전에 봉헌하게 하셨고, 5세겔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속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레위기에 의하면(레위기12,6-8) 여인은 정결례의 제물로 일년 된 양 한 마리와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바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또는 집비둘기를 바치면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무척 가난한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정결례를 치룰 필요도 없었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새삼 하느님께 봉헌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가정은 율법대로 모든 것을 실천했습니다. 커다란 겸손과 순명을 나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또한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메온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메시아에 의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이사40,1,61,2). 또한 랍비들도 메시아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는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본당에서 나이가 든 형제자매님들은 하느님 구원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고, 그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치하고, 주변의 신앙인들을 주님 안으로 모아들이는 삶, 그 삶이 교회 안에서 원로의 삶이고, 그 삶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많은 히브리인들은 그 당시 “위로”(구원)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이에 대하여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고서, 죽기 전에 메시아를 만나 뵈올 수 있는 위로를 받으리라고 약속을 받고 있었습니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시메온.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뵈올 수 있는 축복과 메시아를 만지고 품에 안을 수 있는 축복을…,

    세메온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약속을 눈으로 손으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금을 캐는 사람이 금맥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쁠까요?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헤맨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것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제 시메온의 찬양을 들어봅시다. 성무일도 끝기도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수도자들이 하루를 마치면서 바치는 이 기도. 나의 매일 밤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뵙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시메온은 바랄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으니 이제 평안히 죽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기쁨이요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갈까요? 혹시 그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축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버이의 마음처럼, 탕자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다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것을 이제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시메온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오신 메시아는 시메온 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시메온은 명백히 메시아의 구원이 민족, 계급의 구별 없이, 모든 백성을 위한 은혜라고 선언합니다. 시메온은 메시아의 구원이 히브리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던 유다인들의 편협하고 그릇된 구세주관을 바로 잡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메온의 찬양을 통해서 나만 생각하는 신앙,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신앙, 내가 아는 사람을 생각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을 위해주는 편협한 마음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메시아는 온 인류에게 주신 구원이시며 지금껏 이방인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을 비추어 주는 빛입니다. 또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구원이 유다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4,22). 약속된 대로 유다인에게 먼저 구원의 은총이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태생이십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이 세상 생활을 보내시고, 이스라엘에서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은 놀랐습니다. 놀랄 만도 합니다. 시메온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사실 마리아와 요셉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가까웠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만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 곧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계시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 신비의 풍요로움을 아무리 많이 깨닫는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더 많은 것이 언제나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될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지만 걸리는 돌과 부딪치는 바위도 되시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덫과 올가미도 되신다.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져 터지고 올가미에 걸려 잡히리라”(이사8,14). 그러나 이사야의 또 다른 말도 예수님께 적용됩니다.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이사28,16).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반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사람은 들어 높여질 것이고 구원받을 것입니다. 심판 때에 구원받게 될 사람은 그가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표징을 기꺼이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참다운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선택권을 제공하시므로 하나의 표징이십니다. 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네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사도7,51).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요한3,19) 선택은 내 마음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던 검시관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웃고 있는 것이지요? ”

    “저기 한 사람은 로또 복권을 맞히다가 마지막 숫자까지 맞아서 너무 좋아서 죽어서 웃고 있는 것이구유, 저 사람은 벼락 떨어지는 것이 사진 찍는 줄 알았다나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모님의 마음 또한 많이 아프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더욱 자녀를 사랑하고, 성모님께는 사랑과 존경을 드리며, 예수님께 믿음을 가지고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시메온과 한나. 이들은 모두 해방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들어 주셨습니다.

     한나는 은혜 받은 이, 아름다운 이란 뜻입니다. 한나 예언자는 15살에 시집가 7년간 결혼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잃어 22살에 과부가 되었으나 재혼하지 않고 수절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대단합니다.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날마다 기도하면서 보냈습니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나는 성전에서 일어난 엄청난 은총의 순간을 목격한 증인입니다. 성령의 빛을 받은 한나는 마리아가 성전으로 데려온 그 아기에게서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께 드린 찬양은 이미 시메온이 말한 것에 대한 참된 “응송”(찬양하면서 응답하는 환호의 노래)이었습니다. 그녀는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선포한 메시지는 그 메시지를 맞아들이는 사람들의 준비 여하에 따라 그 효력이 제한되었습니다. 계시된 말씀은 마치 손님처럼 반드시 환영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드심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배려로 모든 원수들로부터 예루살렘이 해방되는 그 시작을 표시합니다. 한나는 자신이 체험한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체험해야만 그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해야 될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지말아야 할 말을 해야 될 말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나자렛은 마리아와 요셉의 마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년기를 보내실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따르셨고, 어머니 마리아는 남편 요셉을 따랐으며, 요셉은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완전한 인격은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혜와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튼튼하게 자라셨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성가정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려움은 어떤 것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시메온과 한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이 있으면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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