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주님 세례 축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1 주일 / 주님 세례 축일




        1. 성민호 신부(가)/ 2                    2. 최정오 신부(가)/ 4

        3. 조옥진 부제(가)/ 6                    4. 양주열 부제(가)/ 9

        5. 최인호 작가(가)/ 10           6. 체험과 신앙(가)/ 12

        7. 홀연히 하늘이 열렸다(가)/ 13       



1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성민호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요한 세자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졌으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셨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성부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공현 대축일날, 예수께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알려주신 사실을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믿음직스러운 요한의 증언을 들려주시고 더욱이 삼위일체이신 성삼의 발현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이 천주 성자이심을 다시 한번 더욱 확실하게 선포하신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 심부름꾼에 불과한 요한에게 몸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천주 성자로서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시기에 구태여 어떠한 세례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푸셨어야 할텐데 어찌하여 죄인들이나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 점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도 퍽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황송하고 두려운 나머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이 제게 오십니까?”하면 굳이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하자는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주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동시에 직접 세례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삼위일체의 현존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장엄하게 공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세례는 성삼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의 선구자로서 사람들에게 “주의 길을 닦으라.”고 외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의 탁월한 인품에 매혹되고 엄격한 생활과 훌륭한 가르침에 감동되어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필요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장차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와의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전혀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이로써 요한은 장차 주님이 베푸실 세례야말로 구원과 직결되는 근본적인 세례로서 인간의 죄를 태워 없애버리는 동시에 성령의 강림으로 사람을 새로이 탄생시키는 재생의 성사임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과연 요한의 예언대로 주님은 후에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셨으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삼의 이름으로 이 신비스럽고 놀라운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궁전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신비체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하찮은 우리를 뽑으시어 지존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세례의 은총이야말로 참으로 큰 은혜이며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특은입니다. 우리가 세례의 은총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하느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례가 이처럼 중대하고 필수적인 성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믿음직스러운 요한의 증언을 들려주셨고 친히 세례를 받으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될 것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정하신 이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은 간단하지만 효과가 이처럼 엄청나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의 작용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하느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드리면서 세례 때 약속한 것처럼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세례의 특은을 간직하며 일생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만이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다소나마 보답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존하신 천주 성자께서는 죄인들이 사는 세상에 강생하시어 죄인들과 함께 사시면서 마치 죄인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러한 겸손은 하늘을 열리게 하였고 성부와 성령을 동원시켰으며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30년간의 조용했던 사생활을 마치고 구세주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로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날이며, 동시에 세례의 신비를 보여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바오로 사도는 아주 똑똑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 6,4).



따라서 우리도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하며, 결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또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명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세례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인류 구원사업에 한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의 각오이어야 하며 한 해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이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답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면서 금년 한 해도 주님 안에서 보람있게 지냅시다.











2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세례받으신 예수님

                                                        최정오 신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는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 3,16).



우리는 부활과 성탄 때가 되면 그때까지 교리를 배우며 익혀오던 예비자들이 주님의 아들 딸들이 되고 구원에 대한 확실한 외적 표시로서 성세성사 곧 세례받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영세하신 분은 물론, 이번 성탄 때 영세하신 분들은 예비자라는 긴 교육기간을 이제야 마친다는 안도감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구원에 확고한 보증이 곧 영세였기에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분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시란 말인가?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영세를 받지 않으셨더라면 구원받지 못하실 분이었던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가 복음서는 이런 질문을 뒷받침하는 인상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하고 회개의 세례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세례가 그분의 공생활의 출발점이었음을 가르칩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 나타난 때는 예수님이 30세 되시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 예루살렘 순례 이후 18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나자렛에 사시면서 시골 목수노릇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는 고향을 떠나 성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할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이 왔다는 어떤 표시를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그때 마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하느님 나라를 강론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보시고 이제 당신의 때가 온 것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과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당신의 때가 왔음을 세례자 요한을 보고 다시 한번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결심하셨고,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것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인 셈입니다. 오늘 제 1독서 이사야 42장을 보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야훼의 종」이 등장하며, 이분이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모습임을 가르칩니다. “나의 종을 보라……내가 뽑은 자에 대하여 나의 영혼이 만족하느니라”하고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심을 암시합니다.

또 53장에는 그 종에 대하여 “야훼께서는 우리 모든 이의 잘못을 그에게 지우셨도다”하고 우리를 구하실 분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실 것인가를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복음말씀이 이를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표시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께 대한 예수님의 복종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을 바쳐 비천한 종이 되고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실에서 두 가지 교리를 배웁니다.



1.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명은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이 사명을 완수하시는데 권력과 영광보다는 비참한 죽음과 십자가로 그 임무를 다하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것을 예수님이 성부께 당신의 위치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신 것이며,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대답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제 완전히 당신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는 일종의 서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표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도 스스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에서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30년의 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성세로써 당신 사명을 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세받기 전의 방황을 모두 청산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갖고 새 생활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로부터 메시아로 인정받은 반면, 예수님은 마땅히 야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하시리라는 하나의 서약입니다. 우리의 세례도 같습니다. 우리가 온갖 잡신에 마음이 이끌리고 만신창이가 되고, 고통으로 괴로와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일련의 인간문제에 대해 우리는 성세를 받음으로써 이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사업을 번뇌와 고통과 죽음으로 완수하셨듯이 우리도 생활의 불안정에서 오는 온갖 고통 번뇌 괴로움 불신 그리고 비참과 절망까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에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의 세례」축일을 기념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3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조옥진 부제



인생행로에서 나그네인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길잡이로 삼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면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던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날은 인류 구세사의 중대한 한 사건으로 우리들에게 심오한 진리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가장 깊은 양심의 번뇌의 소리를 듣고 한번은 적어도 나는 무엇때문에 존재하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생의 여로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철인들이나 문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한결같이 인생을 가르켜 나그네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인 인간은 행인이 되어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각 가지의 생의 사건들로 희비의 연속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공짜로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동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을 감탄할 때도 있고, 인생행로에서 만나는 타인들로부터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 타인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와같이 길을 걷기도 원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기로 결심할 때도 있으며 남에게 봉사하고 자신을 바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그네인 인간은 때때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시련과 고초로 나그네인 서러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으며 드디어는 자신을 위하여 타인에게 악을 저지르기도 할 것입니다. 때문에 나그네인 인간은 타인을 만났을 때 그를 멸시할 수도 있고 타인이 나에게 귀찮은 존재로 나타났을 때 이를 박멸하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선과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생의 모순을 발견하기도 하고 실망과 좌절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어 눈물의 골짜기에서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인생의 길잡이로 되어 주기를 애절한 음성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현세적인 물질에서 부귀영화를 인생의 길잡이로 여겨 이를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지마는, 여기 모이신



신자 여러분은 물질보다 오히려 2000년전 조그만 팔레스티나의 요르단강에서 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라는 인물에 전 인격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한 입문성사로써 물과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는 세례성사인 것이며 세례성사의 깊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주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세례성사의 신비성에 대해서 다함께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인 인간은 메마른 사막을 걷다가 불타는 목마름때문에 기진맥진하여 푸른 샘을 찾습니다.



인간은 드디어 물을 만나 마음껏 목을 추기다 못해 온 몸을 물 속에 담구어 버립니다. 물은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은 또 더러운 인간의 몸을 씻어 줍니다. 그래서 물은 또 정화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고뇌와 죄악의 더러움에서 인간은 자신을 씻으려 할 때 모든 종교들은 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세례도 요르단강에서 죄인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시어 이 인간의 정화되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하여 예수는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악이 없으신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씻기기 위해서 당신이 몸소 실천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물속에 잠긴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죄악에서 회개하며 신의 생명의 기쁨을 맛볼 것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물 속에 잠긴 예수는 또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겠다는 뜻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셨고(1고린 3,5)”, 그리스도신자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져 거룩하게 된다”는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세례와 구원을 예수의 죽음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물은 잠긴다. 장례식이라는 뜻으로 물에 잠긴다는 사실은 무덤에 묻힌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세례행위는 구약의 충실한 야훼의 종, 즉 “고통당하는 종”의 숙명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희망이 없는 죽음이 아님을 절실히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물에서 몸을 담근후 수면위로 나타났을 때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은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이 공포의 말씀은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같이 죽고 부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례는 구원신앙의 표현이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기인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그와 운명을 함께 하여, 그의 구원계획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죽고 부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모든 죄악과 불의에서 회개해야 하며 복음을 신앙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악에서 회개한 이는 복음의 진리가 인간 구원의 옥토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서 죽음과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외우지 않았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셨다는 우리의 신앙을 모든 이들 앞에 고백하고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에 몸을 씻고 재계하는 기계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행위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는 동화되기를 노력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모든 죄악에서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죄악의 무덤에 묻히고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며, 드디어는 지옥의 문을 부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에서, 법에서, 죽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즉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명으로 이전하여 새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두고 생명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물은 외부로 더러움을 씻어 주지만 성령은 내부의 더러움, 즉 원죄나 본죄까지 말끔히 없애 줍니다. 그래서 세례 때에 성령으로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완고해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죄로 인해 말라버린 인간에게 침투하여 은총의 생기를 불어넣어 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되고 그리스도의 힘을 입은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종말의 승리까지 힘차게 걷는 희망에 가득찬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인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이기 때문에 나 혼자 구원될 수 없으며 타인을 만나 같이 동행할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깨끗한 물은 생명의 정화를 상징하지만 죽음과 죄에서 허덕이는 인류의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아닌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두차례의 세례, 즉 요르단강에서의 물의 세례와 갈바리아에서의 피의 세례가 바로 그리스도교 세례의 근원을 이루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바입니다.



예수의 생애는 바로 이 물의 세례에서 시작하여 피의 세례로 마친 것이라고 볼 때 예수를 따르고 믿는 우리 신자들이야말로 그와 운명을 함께하기를 요구한 것이 지당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행로가 주어질 때 우리는 실망과 고독의 골짜기에서 허덕일 수 없으며 비록 어려운 시련일 망정 나그네의 시련과 고충을 기쁨으로 알고 구원의 정착지인 영원한 생명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4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사랑 받기 위하여

                                                                양주열 신부



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커다란 주머니가 있습니다. 그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일생을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재물로, 명예나 권력으로, 쾌락으로 빈 주머니가 가득 채워지는 듯하지만 기쁨은 잠시뿐, 이내 비어버리고 마는 마음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하여 인간의 삶은 또다시 고달파집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빈 주머니를 채우려는 노력의 연속인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마음을 열고 주머니 속을 들여다봅니다.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깊은가? 혹시 새는 구멍은 없는가? 이 속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요함 중에 떠오르는 깨달음은 바로 ‘사랑’입니다. 한 처음 나를 사랑으로 내시고 나와 함께 하셨던 주님을 떠나온 허전함을 채우려는 열망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원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주머니를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고민스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는 정말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복음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라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바로 마음의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겸손되이 자신을 낮추고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마음에 드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시어, 겸손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자신을 구유에 눕히셨습니다. 그리고 비천한 목동들에게 천사들로 하여금 구세주가 나신 소식을 전하게 하고 당신을 가장 처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다음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백성이라 여겼던 유다인들이 아닌,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의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느님만을 섬기며 성령이 충만하여 살아오던 노인 시므온과 안나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을 찾아 먼저 다가오시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낮음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되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빈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이며,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란 바로 교만한 마음을 돌이켜 겸손되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자녀가 되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참으로 풍요로웠던 우리의 처음 시작을 기억합시다.        











5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최인호 베드로/ 작가



「햄릿」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이 희곡에는 전형적인 비극의 인물로 복수의 화신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등장하는데 극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독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길 것인가.” 극중 내내 고민하던 햄릿은 결국 복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에서 방황하는 햄릿은 흔히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유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햄릿처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자유선택에 맡겨진 ‘선택의 인간’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죽하면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말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요한 1,27)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마태 3,6).



예수님은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자 생명이자 빛이시므로 죄의 어둠은 있을 수가 없었던 하느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백할 죄가 없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시자 요한은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사양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 일들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단 하나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초라한 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셨으므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마태 26,39)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죄많은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 스스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씻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다면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임을 예수님은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참조) 베드로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길보다 사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햄릿처럼 항상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선택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그 정답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6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체험과 신앙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체험이 없으면 산지식이라 수 없다, 한국 남자들은 모이기만하면 군대 체험으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가 좋은 부대에서 지내다 제대했다고 뽑낸다. 취사병으로 일했다는 사람이나 전방 철책선을 밤새워 지켰다는사람은 별로 없다. 모두가 자기 과시병에 걸려서 침소봉대를 하는 것이다. 대화가 무르익다보면 군대에 갔다 오지 뭇한 사람은 할말이 없어서 슬금슬금 구석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책을 통해서 군대생활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도 체험이 없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위로 제대한 사람은 한두마디 거들 수는 있으나 면제받은 사람은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체험은 귀중한 것

외국 사람에게 아무리 김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도 한번 맛을 보게 하는 것만큼 효과가 있지는 않다. 그래서 체험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체험은 개인적인 체험이 있고 단체적인 체험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개에게 물린 적이 있으면 그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를 따라다닌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개라도 가까이 오면 은근히 마비 현상이 일어나고 자기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개인의 체험은 그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종살이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홍해를 걸어서 건너는 체험을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흥해를 건넜턴 그들의 체험은 민족의 하느님 체험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과거에 그들에게 보여주셨던 하느님 사랑의 체험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600만명의 유다인들이 학살되어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체험

구약성서에는 모세나 엘리야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런 대화들은 하느님과 그들 개인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깨 바치는 삶을 살아간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르단강으로 가셨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 회개하시려고 가신 것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돌에게 모범을 보이시려고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시자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고 성부깨서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예수님께 하나의 큰 체험이었다. 그 옆에 있턴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난 성령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이 체험은 예수님의 체험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의 체험으로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자신의 신원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신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시려고 길을 나서신다.



복음의 메세지

예수님의 사생활은 30년간 계속되었다. 목수로서의 사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분께서 음식을 짜게 잡수셨는지 맵게 잡수셨는지 노래는 잘 하셨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의 사생활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즉 메시아로서의 생활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 공생활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시작하신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잘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으셨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데 그 원인이 되셨고, 구세주로서의 임무시작에 있어서도 그 원동력이 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우리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례, 즉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은 새롭게 되셨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이 새롭게 변화되었는가? 만일 세례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나 별로 변한것이 없다면 우리는 왜 세례를 받았는가?



우리는 무슨 체험을 가지고 있는가? 세례을 받았을 때 뜨거운 감정이킵도 느쪘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체험했는가? 과연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세례에 대하여 무슨 체험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령 체험을 오늘의 세례자들에게도 체험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 그 체험을 못 잊어하면서 어떠한 어려움 중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만일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체험이 없었다면 체험을 쇄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또한 일상의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할 것이다.











7         주의 세례축일  마태 3,13-17 (가) 홀연히 하늘이 열렸다

  

내가 예수회 수도훤에 입회하게된 동기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결정적인 이유가 명확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서을 대신하교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예수회의 유명한 학자들처럼 되고 싶기도 했고, 복잡한 세상사를 떠나서 조용하게 道(도)를 깨우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예수회에서 살게된 깊은 뜻은 요즘에 와서야 조금씩 깨우치게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뭔가 새릅게 살아야겠다는 그 당시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수도생활을 택하도록 이끈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수도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갸야하나? 이 두 가지의 기로에 서서 그 어느 것도 깁게 선택하거나 포기하기가 나로서는 상당히 어려웠다. 며칠간 기도도 해보고 여러 사람들과 밤늦도록 대화도 해보았지만 속시원한 해답은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급기야 나의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수단으로 제비뽑기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제비뽑기는 나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예수회의 입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기한이 끝나기 전날 나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내가 어차피 양단간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면 무조건 물 속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일단 선택하고 난 다음에 차차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아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예수회의 수련자가 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10시경에 잠을 잘 때까지 빈틈이 없는 하루를 지냈다. 이러한 수련 생활을 통하여 과거의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태어남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나에게 특별히 어려웠던 것은 그동안 나 중심으로 살다가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어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 중심의 생할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나의 삶의 뿌리를 옮겨서 마치 다른 나무에 접목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었다. 우선 집에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 맛, 늦게 잠자는 버릇, 소리나게 음식을 먹던 습관, 큰 소리로 말하는 버릇, 남이 말할 때 딴전 피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만을 골라서 하는 경향, 경쟁심 등등을 포기하기란 어떤 때는 죽기보다 싫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작은 포기와 희생을 통하여 나 자신이 새로워짐도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복음을 읽어보면 성모 마리아님과 요셉의 가정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온 인류를 위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선택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물로 베푸는 세례와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의 차이는 무엇인가?



요한이 베푼 세례는 단순히 통회의 세례이며, 사람들이 통회를 원한다는 징표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그러므로 이 세례는 온 생애에 걸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서에서 이 새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2장 12절).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는 새 삶의 시작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성사를 그리스도의 몸(나무)에 접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세례를 예수님의 몸 안에 뿌리를 두고,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새해를 맞이하여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십시오. 그리하여 나의 삶을 본받아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 가해 연중2-7주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가해 주님 세례 축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1. 말씀읽기: 마태3,13-17   세례를 받으시다 (마르 1,9-11 ; 루카 3,21-22)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로 축성하신 그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 또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27년경(루카 3,1) 요르단 강 유역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가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30년의 사생활을 정리하시고, 공생활을 시작하려 하십니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 드리기를 사양합니다. 요한은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세례를 청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또한 요한은 메시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요? 저는 아직 당신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도 받지 못했는데 말입니다요.”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대신하게 될 것이며,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지어 줄, 바로 지금의 우리가 받고 있는 세례입니다. 요한이 감히 사양할 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양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감히 하고 있는 일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을 닮아 겸손한 내가 되어야 하겠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거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요한은 자신의 일을 해야 하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의로움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나”라고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잘 아셨고, 결국 예수님의 자신의 일과 세례자 요한의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드러냅니다. 같은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①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세례를 받으셨다고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올바른 사람도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뜻을 밝히기 위해 세례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를 인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루와즈이).

    ②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을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③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신의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④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기 위함입니다.

    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신비스러운 능력으로 물을 거룩하게 하고 이것으로써 당신 죽음에 앞서 세우실 세례의 물에 권능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축성하신 물로 나 또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⑥ 이 예식으로써 유다인의 세례를 폐지하시고, 예수님의 세례를 세우려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⑦ 요한이 예수님께서 참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1-34)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례를 받아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한 행위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참된 겸손을 보이시고, 선구자인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나 또한 나에게 부여된 작은 일들을 충실히 행하여 마땅히 의로움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는데, 이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예수님께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려고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은 단지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단 하나의 아들, 영원하신 본성에 있어서 하느님과 동등하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벌써 시편(2,7)에서도 예언되었고, 성모님께도 그것을 천사가 알려 주었습니다(루카1,35).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셨고,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을 취하시고, 죄인으로서의 태도를 가지시고 요르단 강에 오셨다는 것은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과 함께 살아가신 예수님의 겸손, 죽기까지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겸손할 수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더욱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4.말씀으로 기도하기

  2. user#0 님의 말:

     

    1. 전영우 루보

    1.1. 주님 세례 축일(가해-연중 제1주일)


    ● 1독서 : 이사 42,1-4,6-7

      이사 42,1-7은 제2이사야서에(이사 40-55장)들어 있는 네 개의 소위 ‘주님(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42,1-7;49,1-6;50,4-9;52,13―53,12) 가운데 첫째 노래이다. ‘주님의 종’(히:‘에벳 야훼’)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데는 주석학상으로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노래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이해한다. 본문은 주님께서 종을 소개하시고 종의 사명을 설명하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에서 본문은 오늘 복음의 내용과 공통점을 지닌다. 두 군데 모두 종은 주님의 마음에 들어 선택되고 주님의 영을 받은 이들이다. 네 노래에서 묘사되는 주님의 종의 모습과 자세, 그리고 그의 역할과 운명은 복음서들이 전해 주는 예수님의 생애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주님의 종의 소명 (1절)>

      1절 : ‘종’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비천한 신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곧잘 영예로운 칭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윗(2사무3,18), 모세(출애 14,31), 예언자도(2열왕 9,36) 주님의 종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 종들은 본문에서처럼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이기도 하다(시편 89,4;106,23). 제2이사야서에서는 야곱과(45,4) 이스라엘 백성도(41,8) 주님의 ‘종’이며, ‘선택된 이’로 불린다. 이 이중의 호칭이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된다. ‘종’, ‘선택받은 이’는 그분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를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시어 뭇 민족에게 공정을 펴게 하신다(히:‘미쉬팟’, 공동:‘바른 인생 길을 펴다’). ‘공정’은 3절과 4절에서도 종의 임무로 언급된다. 공정을 뜻하는 히브리어 ‘미쉬팟’은 원래 ‘재판하다’(히:‘샤팟’)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이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이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공정과 정의는(6절) 주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원의 실현을 의미한다. 


      <주님의 종의 사명 (2-4.6-7절)>

      2절 : ‘주님의 종’은 자신의 사명을 왕이나 정치가들처럼 권력과 압제로 수행하지 않고(“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주님의 영을 받은 자답게 예언자적 모습으로 수행한다. 물리적인 외적 영향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내적인 영향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다.

     3절 : ‘부러진 갈대’, ‘깜박거리는 심지’는 가난한 이들, 억압당하는 이들, 삶에 지쳐 절망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주님의 종’이 수행해야 할 사명의 주된 대상이다. 그가 선포해야 하는 것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과 빛을 주는 기쁜 소식이다.

      4절 : ‘주님의 종’은 어떠한 장애와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결코 실망하는 일없이 끝까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둘 것이다. 그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오해와 배척과 박해의 길, 곧 고난의 길이 되겠지만, 그의 길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6-7절 : ‘주님의 종’은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사람들을 위한 ‘계약’과 ‘빛’이 될 것이다. 곧 그는 사람들을 다시 하느님과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이며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류는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가 없이는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다.

      ‘소경’과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 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절망적인 상태,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이들을 뜻하는 성서적 은유이다.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당신의 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10, 34-38

      사도행전 10장 1절부터 11장 18절은 이 책의 중심 대목이다. 이방인이었던 고르넬리오가 회개하여 그리스도교로 온다. 이 사건은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무대에 깊은 변화를 가져다 주게된다. 고르넬리오의 회개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그리스도교가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이제 이방인에게까지 가게 된다. 둘째, 유다인과는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분리주의를 뛰어넘는다. 셋째, 정결법으로 표현된 선입견을 뛰어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 회개 그리고 증거 등이 베드로 연설의 주요 테마들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신자의 세례와 세례 교육에 나타나는 본질적 특징들이 다 나타나 있다. 세례는 신앙의 성사이다. 그러나 세례성사는 신앙을 자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악을 이길 힘을 주고 자신의 삶을 부활의 삶으로 만들도록 한다. 그래서 이러한 삶은 벌써 다른 또 하나의 삶을 준비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준비를 벌써 한다(죽음의 세례).

      오늘 베드로의 연설은 그리스도교 설교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고들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이나 유년시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세례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 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을 팔레스티나적 유다 그리스도적 어느 분파로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보편성을 모든 이에게 알렸다. 여기엔 국가나 민족들, 여러 역사와 문화들이 함께 받아들여져 어울렸고, 어느 형태의 정치나 종족이라 해서 차별을 받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말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다.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이루어진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교리교육을 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선입견을 갖고 계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이 한 가지 있다.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고, 올바르게 산다는 것(정의를 실천한다는 것 또는 나눔과 형제애를 실천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자유와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어서,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의 가족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즉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모든 사람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베드로는 사도들이 선포한 사실을 정당화함으로써 교리교육을 마친다. 사도들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세우셨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할 사명을 받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바를 배우기 위해 스스로를 비춰보아야 할 거울이기 때문이다.

      


    복 음 : 마태 3, 13-17

      예수님의 세례는 네 복음서가 일치하여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22; 요한 1,29-34). 마르코와 루가는 단순하게 그 사실을 전하지만 마태오는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요한은 명백하게 예수의 세례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하느님께로부터 뽑히신 분,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와서 머무시는 것을 보았다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마태오는 다른 두 공관복음에서 볼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전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자 요한이 못하게 막는 장면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할 때 마르코 복음(1,11)과 루가 복음(3,22)의 2인칭과는 달리 3인칭을 쓰는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여기서 3인칭을 쓰는 이유는 아마 예수께 대한 메시아적 선포가 예수님 자신에게 보다는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한 선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세례는 상당히 많은 회의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왜 예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참조, 마태 3,2,6, 11)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세주, 그리스도이신 그분께서 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의 흔적들이 오늘 복음의 서두에 잘 나타나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과 루가 복음에는 없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대화를 삽입함으로써 이 의문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세례자 요한에게 오셨을 때 세례자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14절)라고 하면서 극구 사양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15절)라고 대답하셨다. 공동번역에는 ‘원하시는 모든 일’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모든 의로움’으로 되어 있다(200주년 기념 번역 참조). 마태오 복음에서 ‘의로움’(dikaiosynē)이란 마태오의 특징적인 개념으로서(5,6.10.20; 6,1.33; 21,32 등 참조) “하느님의 뜻, 의지”, 에 대한 신선하고도 철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세례자 요한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고한 섭리(의지)에 복종한 셈이다. 여기에 세례자 요한도 동참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하신 메시아가 이 세례를 받기를 원하셨던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하느님의 뜻이지만 분명히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을 나타낸다. 세례는 예수님의 실존과 행위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른 것, 즉 그 다음 것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러 오셨고 그분 자신이 먼저 그 뜻을 실천하신다. 바로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시면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예수께 모든 영광과 권한을 주셨다. 복음 맨끝에(마태 28,16-20)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실 때 여기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와 부활은 예수님의 선교 사명에 있어서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죽기까지 순명(세례와 십자가)하심으로써 무한한 영광(부활)을 얻게 되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 앞에서 죄인처럼, 미천하게 처신하셨다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 아버지의 ‘의로움’과 신비스런 ‘구원 의지’를 이루기 위해서 당신 여정의 첫 발을 내딛으시는 첫 행위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사이에 맺어져 있는 관계이다. 즉 예수님의 세례로부터 우리의 어두운 인간 존재를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로 변모시킬 모든 힘과 능력이 주어진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토리노의 성 막시무스 주교의 강론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 주 예수님께서는 성세대에 내려오시어 당신의 거룩한 육신이 물로 씻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왜 세례 받기를 원하셨는가? 자, 들어보시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은 당신이 그 물을 통하여 성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통하여 그 물이 축성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의 몸이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당신이 접촉하시는 그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성받으심으로써 물이 축성되었습니다”(공현 후 금요일 독서의 기도 제2독서).


    강론

      신학교에서 10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곳을 실제로 방문하는 은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을 거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인 로마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방문 장소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었습니다. 로마의 4대성전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성당에 들어가자 그 웅장함에 좀체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웅장함에 대한 감탄은 잠시 뿐이었고, 저의 관심을 끄는 것은 벽면에 걸려있던 성화들이었습니다. 그 성화들 중에서 제 발을 오랫동안 붙잡았던 그림은 베드로 대성전 출구 쪽에 있던 세례 받는 예수님 성화였습니다. 성화를 비추던 조명의 전구가 나갔는지 다른 성화들과 다르게 어두침침하였는데, 저는 오랫동안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 머리에 물을 붓고, 예수님은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위로 비둘기가 빛을 받으며 내려오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성화를 보면서 저는 갑자기 제가 바보가 된 것 같았는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물론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걸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그저 마음으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저는 긴 탄식을 하듯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정말 우리 인간과 똑같아 지고 싶으셨구나…”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아 지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단지 겉모습만 같게 오신 것이 아니라,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을 자처하여 여느 인간처럼 오셨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당시에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그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회개’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물로 씻는 세례예식을 통해 죄를 용서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 이러한 세례가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라고 놀라 답변한 건,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답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에서 강조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자처하셨고, 이에 요한은 인간적인 눈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뜻을 받아들여 세례를 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토리노의 성 막시무스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은 당신이 그 물을 통하여 성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통하여 그 물이 축성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의 몸이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당신이 접촉하시는 그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성받으심으로써 물이 축성되었습니다”(공현 후 금요일 독서의 기도 제2독서).

      인간의 눈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그 세례는 결국 예수님 당신이 정화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을 정화시키시고, 나아가 그 물에 닿는 모든 이와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낮추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세례가 이루어지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실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아들은 어떤 분일까?

      1독서인 이사야서 중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는 우리에게 그 답을 알려줍니다. 이 노래에서 ‘주님의 종’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분.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는”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리의 길 잃은 양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며, 어떠한 죄인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시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하면서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죄인이기를 자처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으로 감사해야겠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언제나 새롭게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3. user#0 님의 말:

     

    주님 세례 축일

    당신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하여 요르단 강물을 신비롭게 하셨나이다.


    주의 세례 축일은 최근의 전례개혁을 통해 새롭게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축일이 지니고 있는 깊은 신학적 의미 – 특히 네 개의 복음서가 일치하여 강조하고 있는 – 때문이고, 둘째로는 예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 예수의 세례로부터 어두운 인간 존재를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로 변모시킬 모든 힘을 얻고 있는 – 사이에 맺어져 있는 관계 때문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동방 전례에서는 오늘 성세수가 축성되고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는다.


    전례의 전체적 배경

    독서 외에도 전례상의 여러 기도문의 내용과 특히 고유 감사송을 통해 오늘 축일의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오늘 축일의 고유 감사송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 감사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천주여, 당신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하여 요르단 강물을 신비롭게 하시어, 새로운 성세수로 만드시고, 하늘로부터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당신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살아 계심을 믿게 하셨으며 성령을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성자를 보내셨음을 알게 하셨나이다.” 여기서는 주님의 세례의 신비에 관해 특별히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물에 들어가심으로써 만드시어 믿는 모든 이에게 베풀어주시는 ‘새로운 성세수’의 의미이고, 둘째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활동으로 그가 사제요, 예언자이며, 또한 왕으로 ‘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기도는 이 모든 내용을 어느 정도 압축해서 담고 있으며, 우리가 세례로써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과 그로써 얻어지는 결과에 대해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 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 당신 자녀가 된 우리도 항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영성체 후 기도는 ‘말씀’을 들음과 하느님의 ‘참된’ 자녀답게 살아야 할 의무를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다. “거룩한 선물을 가득히 받고 인자하신 천주께 간구하오니, 우리로 하여금 독생 성자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주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독서들은 이제 곧 보게 될 것처럼 한결같이 모두 예수의 세례의 신비를 집중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서로 간에 놀랍게 연결되고 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복음의 내용이다. 마태오에 의해서 편집되어 있는 오늘 복음은 다른 두 공관복음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하자 요한이 못하게 막는 장면이 다른 두 공관복음에는 없고, 또 여기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할 때 3인칭을 쓰지만 마르코 복음이나(1,11) 루가복음에서는(3,32) 2인칭을 쓰고 있다. 여기서 3인칭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예수께 대한 메시아적 선포가 예수 자신에게보다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선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요한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예수 앞에서 취하는 반응은 요한 자신의 놀라움만이 아니라, 그렇듯 지극히 겸손한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자신의 놀라움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참회와 ‘회개’의 의식에 불과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조금 앞에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그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3,5-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시어 ‘죄가 없으신’(요한8,46참조) 유일한 분이신 당신 자신과 ‘죄 많은’ 인간들 모두와 일치를 이루시고자 하신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그 행위는 베드로가 표현하듯이(1베드 2,24 참조) ‘십자가 나무 위에서’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들의 모든 죄를 부숴버리기 위해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와도 같다. 그러므로 바로 그 즈음에 요한이 다음과 같이 위엄있게 말한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1,29). 세례자 요한의 말은 예수가 그 순간에 성취시키고 계셨던 행위의 의미를 해석해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부숴버리시는 이 임무를 지금 그리고 그의 생애 모든 순간에 이행하여 성취시키신다. 그래서 요한에게 언명하신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15절)

    이 대목에 나오는 dikaiosyne(정의)라는 개념은 마태오 복음의 특징적 개념으로서(마태 5,6.10.20; 6,1.33; 21,32등 참조)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선하고도 철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러 오셨고, 그분 자신이 맨 먼저 그 뜻을 생활화하신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바로 예수께서 성부의 ‘뜻’을 수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십자가를 거쳐야 한다 할지라도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실 수 있다. 그분의 순명이 첫 아담의 불순명의 죄로 파괴된(로마 5,19) 태초의 질서를 회복시킨다.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복음의 후반부 즉 요르단강에서 올라오시는 예수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는 장면은 복음의 후반부에서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장면과 대립되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반대로 성부께서는 성령을 내려 보내시고, 그분을 ‘사랑하는 아들’(17절)로 선포하시어 메시아로 들어 높이신다.

    여기서 복음사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입증해주고 있는 실질적인 어떤 사실을 겨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예수께서 겸손하신 자세로 공적 출발을 취하셔야 했던 자신의 구원적 사명에 대한 의식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마태오도 다른 공관복음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16절) ‘비둘기’라는 말은 암시적이며 또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홍수 때의 비둘기 또는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의 비둘기(시편68,14참조)일 수 있다.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도 이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고 메시아이신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아주 세세한 문제들을 접어두고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어떤 유명한 주석가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보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부터 그분을 부추겨 활동케 하시는 성령께서 예수 안에 현존해 계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지만 그분의 사명은 현세가 기다리는 바와는 아주 다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사상과는 아주 달리 겸손과 고통으로 점철된 메시아사상이다. 사실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바로 이러한 메시아니즘을 북돋워주고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 말은 그 유명한 야훼의 종의 네 개의 노래 – 죄로부터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메시아가 짊어지게 되는 고통과 능욕과 수치의 사명을 점진적 형태로 묘사하고 있는 – 가운데 첫째 노래에서 취해지고 있다. 분명 메시아는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던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멸시를 당한 후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제1독서는 우리가 앞에서 해석한 복음과 시작 부분 외에도 여러 가지 일치점을 볼 수 있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를 거의 전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내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리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리라.”(이사42,1-3.6-7)

    이사야 노래의 시작 부분(42,1)이 거의 글자 그대로 복음에서 취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다만 빠스카의 신비에 비추어 그 내용이 압축되어 있을 뿐이다. 사실 ‘종’이 ‘아들’로 바뀌고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언어학적으로 보더라도 그러한 변화는 가능하다. 왜냐하면 70인 역에서 쓰고 있는 pais라는 희랍어는 ‘종’도 뜻할 수 있고, ‘아들’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도 다른 공관복음사가들도 다같이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수와 성부 사이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를 강조하고자 했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오늘의 이사야서는 ‘성령’게서 특별히 메시아에게 내리심을 상기시키고 있다. 메시아는 그 성령의 힘으로 인간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와 해방을 심어야 할 그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1절). 여기서는 메시아가 이 세상에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4절, 6절) ‘바른 일’과 ‘정의’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시며 ‘이루어져야’한다고 말씀하시는(마태 3,15참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 여기서 정의라 표현되고 있는 – 은 폭력과 지배와 탄압적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과 순종, 침묵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는 다른 모든 형제들과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들의 생명력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빛을 잃고 가물거린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그로 인하여 저지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리라”(3절)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서의 이 대목 거의 전부(이사42,1-4)를 좀 더 뒤에 가서(마태12,15-21) 예수께서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행하신 기적들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한다. 예수께서는 ‘권능을 가지고’ 활동하실 때 요란스러운 ‘대중적 인기’에 의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의 힘에 의존하신다. 말하자면 예수의 신적 ‘자녀관계’는 바로 세례의 순간에 그랬듯이 권세를 통해서보다는 나약함을 통해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제2독서는 제1독서와 복음에서보다 더 의미 깊은 요소들을 첨가시키고 있다. 제2독서의 내용은 주님의 성령께서 베드로를 보내신(사도 10,1.19)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베드로가 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는 베드로가 교회에 제일 처음으로 받아들인 이방인으로서 가족들과 더불어 세례를 통하여(사도10,47참조)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은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참으로 그분은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인류와 계약을 맺으시고 만국의 빛이 되셨다.”(이사 42,6)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사도 10,34-35. 37-38)

    이 말은 그 당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려을 통해 축성되심이 바로 그분의 구원의 사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기적의 힘과 특히 자신의 성성을 통하여 쳐 이기시는 악마의 세력은 그분의 겸손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명 그리고 형제들을 받들어 섬김에 의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분의 이러한 행동의 의미는 똑같이 공적으로 장엄하게 ‘하느님의 자녀’로 선포되어 믿음의 빛과 사랑의 불로 성령을 증거 하도록 세상에 파견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의 세례를 통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의 세례를 영광스럽게 받들며 축하하여 거행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깨끗이 하고 그 깨끗함을 보전해 나가야 한다. 인간의 회개와 구원만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우리는 다른 형제들을 위한 생명적 힘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한한 빛 앞에서 완전한 빛이 되어 그 빛의 초자연적 광채가 넘쳐흐르도록 해야 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