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 주일 / 주님 세례 축일
13 8. 김정진 신부(나)/ 16
9. 변기영 신부(나)/ 17 10. 강길웅 신부(나)/ 19
11. 김영진 신부(나)/ 21 12. 교구주보(나)/ 23
13. 김남조 시인(나)/ 24 14. 현실은 우리 각자(나)/ 25
8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와 신앙생활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아주 중요한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을 깨닫고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도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관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축일은 우리의 세례와도 직접 관계가 있어 우리의 영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의 세례 기념축일로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이제부터 연중 시기라고 부르는 전례상의 새로운 절기가 시작됩니다. 저 성탄날 밤에는 목자들에게 보이시고, 공현의 날에는 이방인들에게 보이신 예수님은 오늘 또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당신의 참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수많은 군중앞에서 천주 성부로부터 당신의 사명을 장엄하게 또한 정식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구세주께서 이미 오셨음을 선언하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으시자 닫혀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보속하려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방대한 아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고 계시며 마치 하느님의 전권대사로 지상에 파견된 분으로서의 신임장을 받고 계시는 엄숙한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예수님을 당신의 친아들로 소개하시고 이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온갖 행동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 성령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성자로 또한 인간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구세주로 알아 받들어 모시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은 성령과 예수님의 생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구세주를 가르켜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실 분>이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성령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리셨고 또 예수께서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해 기도와 단식으로 사십 일동안 지내시도록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세말까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교회의 목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공적 증거로서 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끝으로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적에도 일어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하기를 크리스천 세례는 성령 안에서 받는 세례라고 하였습니다(마르 1:8). 세례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에 불과한데 비하면 크리스천의 세례는 이를 훨씬 능가하며 죄를 용서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성사입니다.
크리스천의 세례는 영세자로 하여금 교회의 일원(一員)이 되게 합니다. 교회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립된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이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인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단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더욱 개인적인 구원이란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협동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적 활동을 하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큰 영예로 여기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9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로 신자되기 시작한다
변기영 신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께서 세례를 받아야 할만큼 무슨 죄가 있다거나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베풀던 것이고, 하나는 우리 모두가 받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던 것입니다. 우선 흥미롭게 연구해 볼 만한 것으로서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무슨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말씀하신 대로, 즉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마태오 28,19)하신 말씀처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의 목적입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정신개조, 혹은 개과천선의 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새 출발의 의식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악과 그에 대한 벌까지도 용서받고 면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문교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례로써 완전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흔히 영세하면 이미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이상 교리 공부도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세례란 예식은 신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 완전히 신자되기를 마쳤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례로써 과거의 죄사함만을 너무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세례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무슨 죄악을 씻기 위해 세례받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생활, 즉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의 목적은 우리의 죄많은 과거생활을 씻기 위해서보다도 앞으로의 덕스러운 신앙생활의 창조를 위해서 더욱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의 주요목적이 각자 인생의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철저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죄많은 과거생활을 잊고 청산하며 양심의 부담을 덜고 용서받았다는 위안을 찾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물론 이러한 태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의 근본 의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상기하고 미래생활의 창조를 위하여 새롭고 거룩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다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것으로서 장래 훌륭하고 위대한 생활 설계보다도 비록 작을지라도 거룩한 인생을 위한 계획과 노력을 짜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로써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몇몇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순간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거처가 되고 궁전이 됩니다. 세례받지 않은 상태에서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세례받은 영혼은 하느님을 모시고 함께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주만물 어디에나 다 계시지만 어디에나 다 거하시지는 않으신다”고 아우구스띠누스 성인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신다는 이 새롭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줍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각자는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 영혼 심부에 거하시며,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고, 우리 영혼을 누리시며, 우리 영혼을 즐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기를 닮은 제 2의 자기인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하며 즐기고 누리는 것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당신 모습을 닮은, 지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당신을 대리하는 인간, 즉 당신의 거룩하고 높으신 성삼위 이름과 권능으로 말끔히 씻어주고 드높이 올려지고 거룩히 꾸며진 한 인간의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나머지 그 영혼 안에 신비롭게 오시어 영혼과 함께 영혼 안에서 영혼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하여 거하고 사시며 활동하십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실은 햇살이 물 속에 깃들어 함께 거하는 이상으로 또 열이나 전기가 쇠 속에 깃들어서 함께 하는 이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사상이나 혹은 사랑이 서려 있으면서 잠재해 있는 그 이상으로 신비로운 영신적인 사실이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상에서의 신과 인간의 일치이며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의 신의 강생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지상에 오셨던 것처럼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으로서 한 개인의 영혼 안에 강생하사 동거하시며 공생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세례의 뜻과 결과를 다시 한번 밝히 깨닫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해나갑시다.
10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예수님 생애의 이정표
강길웅 신부
교회는 연중 제 1주일을 ‘주의 세례 축일’로 정하여 사생활에서 공생활로 건너가시는 주님의 새 이정표를 묵상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세례를 상기함으로써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재음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은 새해를 첫 출발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에 큰 격려요 용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대략 30년 동안 나자렛에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때까지의 주님의 생활에 대해선 성서에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다녀오신 사건만이 그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전 행적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집에서 부모를 돕고 자기 일에 충실했으리라는 짐작입니다. 다만 요셉의 이름이 일찍 자취를 감춘 것을 볼 때 홀어머니와 함께 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우리가 추측하는 마리아는 아마 14,5세에 약혼을 하여 그 이듬해에 결혼을 했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도록 그 삶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그분이 때를 기다리셨다는 뜻이 됩니다. 큰 일을 하시기에는 어떤 여건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성부도 성자도 함께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때가 왔고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쪽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날마다 듣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한 뉴스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아라고 하며 사람들 둘만 모이면 예언자의 말과 요한의 행적에 대해 말하면서 요한에게 희망을 겁니다. 말하지만 요한은 삽시간에 전국의 화제 인물이 되며 드디어 올 사람이 왔다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나자렛의 후미진 목공소에서 요한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때’를 확신하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이었습니까? 이제는 나자렛을 떠나는 시기요 이제는 모친 마리아와 이별하는 시기며 또한 이제는 악의 세력에 들어가서 그 모순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다시 말해 예수님보고 어서 나오시라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바로 당신께서 나가셔야 할 때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의 세례는 그래서 예수님의 사(私)생활과 공(公)생활의 분기점이 됩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활로 들어가시기 때문에 세례 이전을 사생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실 때부터 유다의 법을 지키셨듯이 스스로 낮춰서 세례를 받으시며 강물 속으로 잠기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때를 대신 벗기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성부께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물 속이 아니라 죽음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자녀가 바로 아버지의 맘에 들고 사랑받는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순명하셨으며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가 변화됨을 체험하셨습니다. 이제는 사인이 아니라 공인이었으며 나와 내 가정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모든 백성이 그 활동 대상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당신의 새로운 출발을 장엄하게 내디디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 자신도 어떻게 변화되어 새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새로운 탄생이었으며 장엄한 축복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목소리는 예수님만 경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했던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뜨거운 감동으로 그날을 맞이했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은 또 그날의 감격을 쉽게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종이 오면 세상이 그처럼 바른 질서 안에 새 희망이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그 축복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구원이 있으며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새해가 이미 밝았는데도 여전히 어둡고 음침한 과거에 묶여 방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직접 잡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그분 마음에 드시는 딸입니다.
11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내리막 길에서 만난 예수
김영진 신부
며칠 전, 본당에 있는 6개 공소 중 막내둥이 공소격인 골지리 공소 회장의 모친께서 운명하셔서, 장례미사를 드리러 교우들과 함께 갔었는데, 동네 사람 중 한분이 술에 취하여, 우리가 미사와 연도를 바치는 동안 우리를 향하여 궁둥이를 흔들며, “아가 동산, 아가 동산\”하고 놀려댔다.
그 사람이 보기에, 신부는 아가 동산 교주같은 길고 하얀 옷을 입고 있고, 여교우들은 하얀 수건을 머리에 썼으니, 천주교가 무엇인지, 아가 동산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 사람으로서는, \’초록은 동색\’이니 그게 그거다 싶어, 입에 넣었던 굴 껍데기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버릇없는 촌 늙은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아가 동산 운운하며 떠들어대느냐’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천주교가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많은 외교인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꾹 참았다. 그러나 신부인 나와 교우들을 얕잡아 보고 한 짓거리 같아서,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나는 덕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여, 누가 신부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하거나, 천주교에 대해 얕잡아 보는 행위를 하면 참지 못하여, 곧잘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군종신부 시절, 본인이 개신교 신자라 하여 천주교 병사들을 소홀히 하던 대대장의 따귀를 때려 헌병대 조사를 받기도 했고, 광산촌에 있을 땐 술에 취하여 공소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자기 집 장롱에 숨겨 놓았던 사람을 땅에 엎어놓고 발로 차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거늘, 으스대고 잘난척하고 교만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아프게 해주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신 예수
입으로는 겸손을 말하면서도,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을 꺾지 못하고 있고, 가장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듯한 말을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이기적인 나 자신을 보노라면,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십수년 전에 신부가 되어 버렸구나 하는 자책을 해보기도 한다.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좀더 겸손하고 엎드릴 줄 아는 사제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은 나만의 일인지 모르나, 고심하고 노력해도, 교만과 이기심, 위선과 허세는 좀처럼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복음(마르 1, 7-11)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스스로 죄인임을 자청하며, 죄인들이 받는 세례성사를 받으심으로써 스스로를 인간과 동등하게 만드시는 겸손을 보여주고 계신다.
세례자 요한 역시 요즘 말로, 눈 한번 찔끔 감고 몰러온 군중 앞에서 으스대고 뽑낼만도 하였건만,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지극한 겸손으로 낮추신다.
몇 년 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헨리누에」 박사가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 박약자 수용시설에 들어가서,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이 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 셀러였다.
그가 높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자 시설에 들어가서 정박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 주고, 정박아들과 같이 놀아 주는 등, 잡일을 하면서 받는 봉급이란 생계에도 타격을 입을 만큼 적은 봉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고생과 낮은 봉급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물을 땐, 언제나 웃음과 침묵으로 대답하던 그가, 최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내면서 대답을 주었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올라가는 길만 신경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언제나 1등으로 달렸으며,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왔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오직 성공을 위하여 더 높이, 더 크게 꼭대기만을 향하면서 오르막길만 달려왔다.
그러나 한 정신박약아를 만나면서, 인간이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하 여, 내리막길을 갈 때 더 성숙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내리막길을 달리는 중에 인간은 성숙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처럼 주연만 원하고, 1등만 요구하며, \’왕자병\’, \’공주병\’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겸손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는 것이다. 요한은 인간과 동등하게 되려고 죄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지극히 겸손된 자세로 맞이함으로써, 예수님의 겸손을 닮고 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작은 권력, 작은 재물, 작은 명예로 인하여,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예수님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신발 끈을 엎드려 풀어 줄 예수님을 지금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는가.
12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교구주보
1. 예수님의 세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으시고 나자렛에서의 사생활을 청산하고 메시아로서의 공적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두 가지 신비스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내려온 것과 둘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강한 소명의식을 지니셨기에 세례를 받으신 다음부터 고향, 가족을 멀리하고 이스라엘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일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여기 “사랑하는 아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부자간의 돈독하고 각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이사 42,1참조)는 하느 님께서 일정한 사명, 곧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아들 예수가 아버지의 전권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2절 1장은 “야훼의 종”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 우리의 이해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단순히 유대 민족의 해방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는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시고, 정의를 세우시고, 가난한자, 억눌린 자, 갇힌 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종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하나의 단체에 불과할 뿐이며, 섬기는 모습이 없는 교회는 교우들에게 짐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에는 모든 교회가 하느님의 영을 듬뿍 받고 종의 모습으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함으로써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교회), 나는 너를(교회) 어여삐 여겼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3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주님의 세례
김남조 막달레나/ 시인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이사 55,1)
물은 네 가지 원소 중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이슬이나 눈물같이 작은 물에서부터 바다나 대양에 이르는 큰물까지 그 수량이나 수질 또는 상징성을 살피는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사람의 심령을 씻어 거듭나게 하는 성세의 물은 별격의 신비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물로 세례를 받으나 주님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외에도 수난의 피를 흘리심으로 “증언자가 셋입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요한 1,33 참조)의 진리를 이루셨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도 물과 피의 일치에 달하여 성인 계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원자로가 통제기능을 잃게 되면 미국에서 파생한 사고의 결과가 중국 대륙의 지구표면에 솟 아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합니다만 물의 위력에도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땅 속의 바다」라는 짧은 글(분도 소책자 5) 속엔 사하라 사막 아래 거대한 저수지가 있고 그 지하 수가 위로 솟구쳐서 오아시스를 형성함을 논하면서 “어디서나 모래 층을 파서 물을 뽑아 기름진 낙원을 조성할 수는 있다. 다만 충분히 깊이 파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 포 등의 경이로운 수량이 지구의 내부에 스며들어 수백만 년 동안 비축되었을 일을 생각할 때, 지층 깊은 데서 물이 분출하거나 불이 치받아 활화산의 현상을 일으키는 사례를 능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감탄스러운 일은 수천 년의 시간대를 화살촉처럼 꿰뚫어 진리가 전승되어 왔고 살아있는 복음의 말씀을 생명수처럼 오늘의 우리가 마시고 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도 비통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과 외로움으로 피땀을 흘리신 골고타의 비극은 이 천년의 시공을 관통하여 오늘도 바로 현 시각에 이루어지는 일인 듯이 만인의 심령에 각인을 새겨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이사 42,6)는 소명과 축복을 새 천년 벽두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부어 내리십니다. 이 시대 기술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의 홍수 속에서 마음과 영혼이 자칫 위축되기 쉽고 철학의 부재와 사랑의 품귀현상이 두드러지는 이 위급지경에서 우리는 주님이 맡기시는 소명을 경건히 받아 충실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는”(이사 42,3) 주님께서 자애와 권능으로 우리를 가호(加護)해 주실 것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으로 치르신 주님의 세례를 묵상하며 부디 저희가 소명을 다하기 위해 함께 매진하도록 도와주소서.
14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현실은 우리 각자 삶과 수준의 반영
오늘은 예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삶의 새로운 한 단계로 모든 사람을 위한 봉헌과 봉사를 다짐하는 공적 약속입니다. 인류를 구원키 위한 하느님 계획의 첫 실현이 예수의 강생이라면, 예수의 세례는 이 강생을 현실 속에서 보다 구체화시키는 첫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세례가 지닌 단계적 의미, 봉헌과 봉사, 그리고 현실의 성화(聖化)라는 관점에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일의 순위(順位)이며 또 과정상 꼭 필요한 일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며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삶과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그 사람과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때로 삶의 현실은 고통과 갈등, 고뇌의 장(場)이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세례는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락하여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며, 나아가 세상을 개혁하고 성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나와 현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며, 이웃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과 약속은 결코 사적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공적이며 공동체의 의미를 지녔기에 모두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받은 신앙인들입니다. 세례 때의 우리의 약속, 우리의 다짐은 바로 이러한 공적 및 공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의 약속에 대하여 늘 책임을 지며 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과 증언을 통하여 현실은 더욱 밝아지며 그만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현실은 바로 우리 각자의 삶과 수준의 반영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한 그만큼, 우리가 의롭고 겸허한 그만큼, 우리가 봉헌하고 봉사하는 그만큼, 우리가 노력하고 투자하는 그만큼, 우리가 관심을 갖고 가꾸는 그만큼, 그 비례를 따라 현실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의한 현실 앞에서의 실망과 좌절을 정당화시키는 포기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렴하면서 은총의 힘으로 변화시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상으로 창조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에 당시의 상황을 모두 수락하시고, 그것을 뛰어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시면서 그 사회를 내적으로 변혁하신 것입니다. 그 첫 표지가 바로 예수의 세례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물로 씻겨지면서 깨끗하고 겸허한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깨끗이 씻는 이 작업이 모두에게 요구됨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더럽고 묵은 것을 말끔히 씻어버리며, 깨끗하고 새로운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나해 주님 세례 축일-
1. 말씀읽기: 마르코1,7-11
2. 말씀연구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성탄시기는 끝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선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도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과 같이 신을 들고 다니든가 신끈을 풀어 주거나 매주는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 구실을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에 비하면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하기에도 꺼려야 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것.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모시고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께서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게 만들어 줍니다. 내 안에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게 만듭니다. 헛된 욕망들, 아집들을 모두 버리게 만들고, 오롯이 예수님께로만 향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나를 당신께로 향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사랑의 불이 타 올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나는, 회개하고 오롯이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순절 때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물이 축성됩니다.
4.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
①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세례를 받으셨다고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을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②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신의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③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기 위함입니다.
④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신비스러운 능력으로 물을 거룩하게 하고 이것으로써 당신 죽음에 앞서 세우실 세례의 물에 권능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축성하신 물로 나 또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⑤ 이 예식으로써 유다인의 세례를 폐지하시고, 예수님의 세례를 세우려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⑥ 요한이 예수님께서 참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1-34)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례를 받아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합당한 행위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참된 겸손을 보이시고, 선구자인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 불과 성령의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예고했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대신하게 될 것이며,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지어 줄, 바로 지금의 우리가 받고 있는 세례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게 만들어 줍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내 안에서 잘못된 것들, 헛된 욕망들, 아집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금이 불을 통하여 순수함을 얻듯 그렇게 오롯이 예수님께로만 향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나를 당신께로 향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사랑의 불이 타 올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나는, 세례를 통하여 회개하고, 모든 죄의 사함을 받은 나는 이제 오롯이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내려 오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려고 준비하십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을 늘 들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②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다.”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 세례 축일
구요비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30년 가까운 나자렛의 숨은 생활을 접으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공생활의 첫발을 내딛는 날이다. 특별히 홀어머니 마리아를 뒤에 남겨 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아니 사랑하는 외아들이 반대 받는 표징(루카 2,34)으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겪을 일을 예감하며 아들을 떠나보내시는 성모님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실까? 정들고 안정된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는 자녀의 굳은 결의(決意)와 사랑하는 자녀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고통 가운데서 한 인간은 독립된 인격체로 발돋움하는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聖父)의 품에서 나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오늘은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품을 떠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심은 죄 없으신 분이 우리 죄인들과 똑같아지심(히브 2,17; 4,15)을 말한다. 예수님의 이 결연(決然)한 출발에 하느님께서는당신의속마음을이렇게드러내보이신다. “너는내가사랑하는아들, 내마음에드는아들이다”(11절).
오늘 복음은 아버지(聖父)의 아들(聖子)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하늘이 갈라지며(찢어지며)’라고 표현한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63,13) 하고 탄원하였는데, 오늘 하늘이 찢어지고(갈라지고)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신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세례를 받으시는 자기 비움과 낮아지심 안에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聖靈)이 임재(�在)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人性)으로 받으신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아들(聖子)로서 지니신 신적 생명인 신성(神性)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데 세례자 요한은‘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라고 선포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이루시는 성화(聖化)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오! 사랑의 생생한 불꽃이여!
부드럽게 상처를 입히고
내 영혼의 아주 깊은 중심에!
이제 당신은 무심하지 않고,
만일 원하신다면 이제 끝내주소서!
달콤한 만남의 장막을 찢어주소서!’
– 「사랑의 산 불꽃」첫째 노래 –
하늘이 갈라짐(찢어짐)은 동양적인 표현으로는 개천(開天), 또는 개벽(開闢)처럼 들린다. 장자(莊子)는‘開天者德生(하늘의 본성을 여는 자는 덕을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이는‘하늘의 본성을 따르는 자는 사람들을 친구로 모은다’는 뜻과 같다고 한다. 예수님의 세례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을 알리는 조짐과 같으니 이분 안에서‘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이미 시작되고, 이를 위해 일하시는것이 당신의 사명이다.
하느님에게 예수님은‘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자‘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기는 쉽지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자의식과 확신을 갖기도 쉽지 않지만, ‘내가 과연‘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볼 때 더욱더 그러하다. 예수님 안에서는 이것이 가능했는데 바로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빛으로서의 사명
서범석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는 30년간의 나자렛 생활을 마감하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의 순간에 성령을 통하여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신하셨고, 이제 그 출발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도 예수님처럼 세례의 순간에 다짐하였던 크고 작은 결심들을 이루어 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진정으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일꾼으로써의 새 삶에 충실하였는지에 대한 물음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 한 임금님이 “동전 한 닢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우라.”는 난제를 내었답니다. 만조백관이 모두 쩔쩔매고 있는데, 어느 현명한 신하가 그 동전 한 닢으로 양초 하나를 사다 은은하게 불을 밝혔더니 그 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물질로만 모든 것을 채우기 위해 조급해 하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빛이 온 세상에 가득 채워지도록 그렇게 애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을 선택하시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갇힌 사람을 풀어 주고, 어둠 속에 있는 이에게는 해방을 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마음에 쏙 드는 일을 하는 그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손을 꼭 붙잡아 주시며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듯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세례는 새 생명의 시작이고, 또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듯이, 우리의 세례도 일생을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급한 결론도 포기도 있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빛’의 사명이었듯이,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하여 부여받은 ‘빛’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팡질팡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신앙의 빛, 사랑의 빛을 낼 수 있는 작은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들은 올 한 해가 경제적으로 힘겨울 것이라고들 합니다. 물질로 채우기에는 좀 부족하고 모자랄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더없이 충만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힘쓰는, 나누고 격려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닮고자 애쓰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진정으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 그분의 마음에 인정받는 아들 딸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세례의 의미
서동원 신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는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고(7-8절), 후반부는 요한의 증언이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합니다(9-11절).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행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4절)를 몸소 받으심으로써 자신을 낮추고 비우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도록 하기 위해(갈라 3,13-14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지은 자가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예고하는 행위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1224항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분 위에 내려오십니다(10절).
여기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롭게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음을 표현합니다. 또한 아가서(2,14; 5,2.12)와 요나서(‘요나’란 히브리말로 ‘비둘기’라는 의미) 안에서 비둘기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선교적 신앙 공동체를 표상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복음사가들이 성령을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성령과 신앙 공동체가 체험한 성령이 동일하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선 예수님에게(10절),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 선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어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11절). 예수님 세례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음성은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이사 42,1 참조).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사야서의 ‘종’이라는 표현을 ‘너’라는 2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실존적 의미를 표현합니다. 또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유다 전승에서 메시아를 나타내는 시편으로 이해된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말씀을 염두에 둠으로써 예수님의 고통보다는 부활하신 그분의 승리를 더 강조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맺고 있는 독특하고도 유일한 부자 관계(‘사랑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유일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와 또한 그분의 메시아적 왕으로서의 품위를 드러냅니다.
새해가 이미 밝았는데도 아직도 어두운 과거의 행실에 묶여 방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직접 잡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그분 마음에 드는 딸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박복남 신부
오늘은 주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고 또한 우리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 보는 날입니다. 세례 때 가졌던 그 마음, 그 믿음, 그 기쁨을 다시 돌아보는 날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사명을 온 천하 만민에게 선언하고 증언한 날이었으므로 그 사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공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 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 32-34) 하느님께서 일찍이 세례자 요한에게 “요한아, 네가 세례를 주는 중에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시니 그분을 소개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루카 3,21) 하느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셨는데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는지 시험해 보아라. 돌이 떡이 되라고 명하여 떡이 되면 하느님의 아들이 맞고(마태 4,3) 돌이 떡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들려진 것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흔들어 봅니다. 우리들에게도 마귀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댑니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냐? 네가 정말 구원을 받았느냐?’하며 의심이 나도록 합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들도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다른 것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믿었으면 확실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도 무슨 문제만 생기면 이 문제를 가지고 또 흔들어 댑니다. 사업이 좀 안되면 ‘하느님의 자녀라면서 왜 사업이 안 되지?’라는 유혹으로 방황하게 합니다. 이럴 때 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과 말씀이 임하시어 하느님의 일을 끝까지 영광스럽게 완수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내 아버지이심과 성령의 동행하심을 일깨워주고 성령께서 내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시며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필요하면 주실 것이고 어려움이 있으면 막아 주실 것도 믿게 됩니다.
우리가 세례 받기 전에 적어도 10개월 이상 교리를 배우며 기도했고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가 세례 받을 때 가졌던 그 믿음, 그 기쁨, 그 감격이 커져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봄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 믿음을 지키고 키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되는 이때 주님께 의지하고 열심히 살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시다.
하느님의 소원
최영록 신부
저는 1989년 퇴계원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성당에 다닌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저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따라서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라 세례가 뭔지도, 또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받을 때 간절한 소원 한 가지를 기도드리면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실 거야.’라고 말씀하신 수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어떤 소원을 빌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별 대단치 않았던 소원을 빌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세례가 뭔지도,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잘 모르던 11살짜리 아이에게 제대로 된 소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마치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아기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비록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바람이나 소원을 빌 수는 없지만, 그 아이를 대신해 그 아이를 위한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아이의 부모님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났을 때, 그 아이가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나기를, 올곧고 정직하게 자라나 세상에서 빛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대신해 더 많은 바람과 소망을 담아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 줍니다.
우리들을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어쩌면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하신 말씀일 뿐 아니라 세례를 받은 우리들 모두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 하느님의 바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롭게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우리들에게,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를 위한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 정말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기를,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느님의 바람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를 대신해 기원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어 드리고 있는지요.
오늘은 주님세례축일입니다. 동시에 이날은 성령으로 인한 첫 세례가 시작된 날, 우리 모든 신앙인의 세례축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다시금 돌이켜 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소중히 간직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통한 성삼위의 사랑과 위로
신우식 신부
우리는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우리 가정을 사랑하며 우리 공동체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당신의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성탄은 이 천년 전에 한번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현재 나타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통해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육화의 신비는 우리에게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깨닫도록 초대한다. 연약하고 나약하게 구유에 누운 어린 왕께 세상의 모든 이들이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행위는 어쩌면 이 어린 왕이 부르시는 첫번째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겸손의 태도는 자기 아버지의 배를 버리고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모든 여정을 따랐던 사랑 받는 제자처럼 주님을 따르는 겸손한 태도이다. 즉 겸손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는 것이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성탄을 마치고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연중 시기를 살아갈 것이다. 주님의 세례는 주님의 성탄에서와 같이 당신의 겸손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지 모르겠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이때 요한은 지극히 겸손된 자세로 주님을 맞이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가 당신 안에 살아계신 아버지와 성령, 그리고 당신께서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심을 나타내며, 당신과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과의 소통이듯이 주님의 뜻에 따른 우리가 받은 세례는 구원으로 가는 문이며 나를 깨닫고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겸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그 사랑의 모습을 살려고 다짐한다.
세례 받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인간 구원을 위한 번뇌와 고통과 죽음의 여정에서 사랑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 물과 기름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요즘 경제도 사회도 정치도 어렵고 힘들며 더더욱 여러가지 어려움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러나 세례를 통한 성삼위의 사랑과 위로는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가져다 주었으며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자녀이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우리도 진정 나를 발견하여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나의 변화를 위해 먼저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채지웅 신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한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켜야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좀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이 먼저 변화되기를 기다립니다. 상대방이 변할 때 가족이 평안해지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며,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의 용서가 전혀 필요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요르단강까지 찾아가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변화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무겁게 만들며 행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죄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과 똑같아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낮춰 인간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얼마나 살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변화를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낮추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과 이웃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먼저 변화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변화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우리
이성길 신부
세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한 몸이 되시고,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되신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례 성사를 세우신 은혜를 기념하며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 9)고 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요한)에게 몸을 굽혀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간의 교만이 인류를 죽음의 세계로 몰아냈으나, 이 죽음에 갖힌 인류를 구하시려고 예수님이 세례예식으로 물 속 죽음의 깊은 자리로 찾아 내려 오셔서 그 인류를 다시 물 위 생명의 세계로 데려오실 길을 마련하시고자 세례 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당신의 지극한 겸손과 사랑으로 교만의 인간을 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세례 때 성령이 하늘을 쪼개어 내려오셨고, 그보다 먼저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탄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 오셨고, 또 그보다 먼저는 구약에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 먼저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을 내밀어 주심을 구원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향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례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예수님과 같은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례받은 사람답게 살아감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마태 7, 21 참조)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우리 안의 이기심과 미움에 찬 묶인 인간은 죽고,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의 말씀같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갈라 2, 20)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신발끈을 풀어주고 발을 씻어줌으로써 겸손과 봉사의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내어주는 삶으로, 인류를 위해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는 삶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의 삶이 고달프고 어려워만 가는 서민생활 속에서, 자신의 온 몸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성체의 삶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참 아들 딸이 되기로 노력합시다
마르 1, 7-11. 이사 42, 1-4. 6-7.
서공석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서 그분이 세례를 기리는 오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기억하는 것은 그 사실을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 하나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이야기입니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서민들을 상대로 세례운동들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세례를 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례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정결례였다면, 요한의 것은 죄를 씻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 것을 약속하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은 유대교의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 삶을 바꾸자고 외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동시에 알립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님이신 것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의 입을 빌려서 예수님이 요한보다 뒤에 오셨지만, 사실은 요한과 비교되지 않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지만,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라는 요한의 교훈을 계승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안에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계시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그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초기 신앙인들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후광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 선택하신 종이었습니다.
이사야서는 또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리라.’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분은 목소리를 높여 외치며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주신다고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성전 의례를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명 되지도 않는 제자들을 모아서 초라하게 또 조용하게 가르치면서, 하느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용서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을 받들어 사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이사야가 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단죄하면서 부러트려놓은 약자들을 예수님은 꺾어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라는 확신과 희망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으셨습니다.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병이 있어서 꺼져가는 생명들을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렸다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성령이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우리의 숨결로 삼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분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외치지도,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외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꺾어버리지 않습니다. “수고하며 짐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마태 11,2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좌절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심지가 꺼져 간다고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합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꺼져가는 생명들 안에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나 한 사람 잘 되자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세례입니다. ◆
큰 선물
김영남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교회 전례력으로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각자 마음 안에 새겼으면 합니다.
저는 ‘세례’란 단어를 생각하면 기억나는 한 자매님이 있습니다. 그 자매님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매주 교리와 미사 시간에 아버지를 모시고 다녔습니다. 아버지를 옆에서 부축하며 성당을 오고가는 자매님의 모습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버지 마음에 드는 딸일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사실 예수님의 삶은 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으시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 자신의 뜻을 꺾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일치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사랑받는 아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아니셨음에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세례를 몸소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모두가 세례를 통해 새로 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것은 큰 선물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이신 아버지 하느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은 거기에 따르는 과제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지 늘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길을 걷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세상의 필요한 곳에 하느님을 모셔다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어깨가 되어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