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예수님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37.           부활 대축일 루가 24,1-12 (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나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이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혹한과 눈 속에 파묻혀 죽은 듯싶던 초목들이 이제 봄의 따스한 태양과 수분을 머금고 싱싱하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계절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더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차 환호성을 울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연약하고 망상증에 걸린 격에 어울리지 않는 혁명가가 당치도 않게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는 하느님의 모독자!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호언장담하는 허풍장이!

마지막엔 당신 제자의 고발로 힘없이 사로잡혀 빌라도 앞에 죄인으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누구하나 변호해 주는 사람 없는데도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우기는 자칭 왕!

재판을 받고 살인강도 바라빠만큼도 대우를 못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 로마 병졸들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무참하게도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비슬비슬 쓰러지며 올라가, 처절하게도 손발에 굵은 못으로 사정없이 박혀, 십자가 위에서 동정이나 위로의 말은커녕 !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라”(마태 27,40)고 조소를 당하시건 예수님이!


오늘 무덤을 헤치고 찬란한 광채 속에 부활하시어 사도들과 사랑하던 교우들에게 나타나시어 참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똑똑이 증거해 주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이곳에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너무도 기뻐서 놓지 않으려고 하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같이 붙잡고 헤어질 줄 모르겠지요. 놀라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바로 우리들 영혼 안에 와 계십니다. 마리아는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님이 옆에 계신데도 그분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신앙이 없을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몰라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 28,20)하고 약속하신 주님은 교회 안에 신자들 안에 머무시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성사를 통하여, 말씀(성서)을 통하여, 성직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신도들을 통하여 함께 계시며 함께 생활하시고 계십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마태 18,20)하신 주님은 오늘도 이 자리에 우리 가운데 계시며 부활하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간 줄로 알았습니다. 3일만에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그들이지만 믿음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분의 말씀과 기적을 보고 그분과 함께 하던 그들이지만 참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믿음이 부족한 행동을 많이 합니다.“정말 부활이 있을까?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 천국이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고통은 그것도 신앙 대문에 당하는 어려움, 다시 말해서 계명을 지키는 데 따라오는 어려움을 싫어하고 나도 남들처럼 자유스럽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현세의 고통은 과연 가치가 있을까? 현세에서 마음껏 욕망을 채우고 살면 그만이지 그 다음은 알게 뭐냐”하는 식으로 살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마치 저 유대인들이 부활하시기 전이 예수님을 우습게 보며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세상 쾌락에 대하여 약하셨습니다. 어리석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은 자로, 미련한 자로 취급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어리석음 속에서 참 지혜와 참 기쁨을 찾을 수 잇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골고타의 길을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 고달프고 슬프지만 않음은 주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용감히 세상을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시다.















38.              부활대축일 루가 24,1-12 (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나

                                          – 함세웅 신부





오늘 우리는 또 한번 예수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축일은 기쁨의 축일이요 희망의 축일입니다. 예수께서 무력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 자신까지도 성부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태 27,46) 할만큼 실망하였고, 피땀을 땅에 흘릴만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대승리를 거둔 줄로 알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나시니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서 모든 고통과 슬픔과 절망은 다 사라지고 기쁨과 희망으로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고 참혹하게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날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 도처에서 불의가 정의를 유린하고 갖은 악이 선을 짓누르며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착한 사람들이 악한 자들에게 억울한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의 신비를 통하여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여야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살 때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허망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너무나 큰 고통과 절망 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러한 고통 중에 산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고통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며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의 숭고한 모습을 따라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여 나아가고 또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로하고 도우며 협조해 나아가면 모든 어려움 안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실되어야 합니다. 가면과 기만과 허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으로 혹은 표면적으로는 어떤 이득이 있는 것같고 잘 되는 것같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폭로되고 밑바닥으로부터 송두리째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진실은 사람이 사는데 가장 큰 밑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부활대축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고통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생활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신앙의 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외적 사정에 의하여 무엇인가 아쉬움을 가지고 신앙의 해를 마쳤습니다. 이제 한번 더 구원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 유리 조상들의 훌륭한 신앙을 되새겨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다져나아갑시다. 그리고 또한 금년에는 이웃에 대한 전교의 해를 맞이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고귀한 신앙을 이웃에게 전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올바른 생활방법을 전하는 것이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갖고 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이웃에게 신앙을 전하지 못하면 앙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이 신앙을 반드시 이웃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희망이 없이 헤매는 우리 동포들에게 올바른 희망을 주는 신앙을 전해주는 것은 정말 참다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우리 힘이 자라는 데까지 이웃사람들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화를 부르짖는 우리 사회의 참다운 정화운동을 일으켜 국가와 민족에게 봉사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부활대축에 받은 이 기쁨의 선물을 보답해 드리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금년에 최소한도 한 사람의 이웃에게 신앙을 전하도록 결심하고 노력함으로 주님께 기쁨의 선물을 드리도록 합시다.



오늘, 정말 기쁜 대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각자와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큰 축복이 깃들길 축원합니다. 아멘









39.      예수 부활 대축일 (다)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어  

                                                            김신호 신부





증인 없는 부활의 기적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시어 당신이 하신 구원 사업을 완성시킨 사실을 경축하는 부활 대축일 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정점이요 또는 희망의 극치라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의미에서 좋은 말들로 설명이 되는 사건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 면 부활만큼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사건도 만나기 힘들 것입니다.

  

부활은 여러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기적을 행하시면서 조건으로 강조하신 신앙이 전제되어야만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행하신 기적을 함께 목격하고 증언할 증인들이 항상 같이 있었고, 또한 군중이나 기적이 이루어진 당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에게 이룬 부활의 기적을 이루는 순간에는 그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부활하는 순간과 부활의 과정을 목격한 증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엄청난 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사실에 의거하여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산업 사회로 변하기 전 우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자리에서 삶을 이어가는 전통적인 사회의 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때에는 지금과 같은 차가운 매개체인 홍보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여러가지 소식을 전해주는 매개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방물장수였습니다. 그들은 물건을 가지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람들을 접촉하고 그들에게서 들은 말이나 또는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이나 또는 직접 사건을 경험한 본인들에게 들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수성 잃은 산업사회

그렇지만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수긍하고 거기에 대해 별다른 의문점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전통사회라는 단순한 삶의 구조에 기인하는 순수성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실 이러한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복잡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분석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벌써 받아들이기에 불가능한 사건으로 되어 버릴 것입니다. 부활을 맞으면서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40.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김영진 신부


나는 은혜롭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무덤 속에 있는 제대 위에서 두 번씩이나 미사를 봉런하는 영광을 입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 이제는 부활하셨기에 빈무덤이 되었고, 빈무텀 위에 작은 제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하루종일 미사가 이어지는 곳, 순례객들의 발길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예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묵상하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때의 아름답고 거룩하였던 묵상과 기도는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신부까지 된 나이건만, 이 세상 모든 사상가들의 생각을 뒤흔든 거룩하고 위대한 부활 사건이, 하나의 옛날 추억으로 남아가고 있음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믿음과 변화의 현장이었던 예수 부활 무덤이 하나의 구경거리요, 전설처럼 내러오는 이야깃거리의 한토막이 되어간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부활 무덤제대에서 두번이 아니라 20번, 2백번을 미사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새롭게 변화되고 다시 태어나는 삶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



부활은 변화다. 껍데기의 변화가 아니라 속마음의 변화다.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성녀가 되고, 탕아 아우구스티노가 성인이 되듯 마음의 변화다. 미움이 사랑으로, 교만이 겸손으로 무례함이 감사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어지는 변화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 그것은 바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솝우화 중에 요술쟁이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는데, 고양이를 늘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가 불쌍하여 고양이로 변화시켜주었다. 그랬더니 다시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를 다시 개로 변화시켜주었는데, 이번에는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요술쟁이는 다시 호랑이로 변화시켜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된 생쥐가 고양이를 만나자 오줌을 싸면서 숨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요술쟁이는 “네가 모양(껍데기)만 바뀌었지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구나. 다시 생쥐로 돌아가려무나\”하면서, 생쥐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부활은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 껍데기만 바꿔 뒤집어썼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때때로 아픔을 요구한다. 심은 씨앗이 자신을 썩이는 아픔을 통하여 새로운 싹을 틔워내듯이, 부활은 아픔을 통하여 탄생한다. 속을 색이면서도 사랑을 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용서를 하는 것은 아프지만, 그러한 아픔을 통해서만 부활은 성숙되어간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는, 부인을 둘씩이나 사별하는 불운 속에서도, 아름답고 고귀한 글들을 수없이 남겼다. 그의 나이 75세 되던 어느 날, 한 신문의 기자가 찾아와 “선생은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셨는데,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그리도 주옥같은 글들을 뿜어낼 수 있으셨습니까?\”라고 묻자, 롱펠로는 앞마당에 있는 고목이 되어버린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올시다. 죽은 듯 보이는 저 나무에서는, 해마다 새가지가 나와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죽은 십자가 나무에서 부활의 꽃이 피었듯이, 나의 고통은 나에게 새로운 꽃과 열매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죽은 십자가나무에서 부활의 꽃이 피듯, 깨어진 알에서 날개 달린 새가 나오듯, 부활은 우리에게 자신을 바치고 죽게 하는 아픔을 요구한다.                 



 변화와 아픔을 두려워 말라



자기의 자존심, 교만이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 끊임없이 기억나는 미움과 증오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 그리고 이기심과 질투, 욕망이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을 통하여 부활은 탄생한다.

  

변화와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라. 쭈글쭈글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징그러운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부활은 변화요 아픔이기 때문이다.

예수부활 무덤을 여러번 참배했다 하더라도, 자기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변화와 아픔을 회피한다면, 어찌 부활이 가능하겠는가! 어두운 마음, 흔들리는 마음, 욕심스러운 마음, 음흉한 마음에서 부활하자.

두려움과 외로움, 고통과 좌절의 삶에서 희망과 용기,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부활하자. 교만으로 가득찬 무덤, 욕심과 미움으로 가득찬 무덤, 이기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무덤에서 부활하자, 그럴 때에 나는 내 마음에 죽음을 물리친 또 하나의 무덤, 죄악을 털어버린 승리의 무덤,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룩한 무덤을 만들 수 있다. 주여!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깨어진 알에서 날개 달린 새가 나오듯, 미움에서 사랑으로, 증오에서 용서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41.        부활 대축일 <요한 20. 1-9>   무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강영구 신부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형제 자매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과 평화가 풍성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전대 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평소 예수를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 성묘를 갔습니다. 삼우(三虞)날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가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제자들도 달려왔습니다.

제자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가 흩어져 있었고 예수의 모습은 간 데 없었습니다. 예수를 무덤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대 미문의 사건인 죽은 사람의 부활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그토록 무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던 스승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시며,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무덤에 갇혀 계실 리 만무한 것입니다. 비록 무력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분이 무덤에 그냥 머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그 음습하고 기분 나쁜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암흑과 죽음의 세력이 머무는 곳이 무덤입니다. 악마와 그 졸도들이 머물러 썩어 가는 곳이 무덤입니다. 악을 일삼고 죄악에 몸담고 있던 자들이 그 벌로 받는 것이 죽음이고 그 죽음의 결과로 갇혀서 썩어 가는 곳이 바로 무덤입니다.

  

죽은 자들이나 머물러야 할 곳에서 생명의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덤 가운데서 찾아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악마의 편에 서서 악을 일삼는 자들과 자신의 안일과 안락, 이기심의 충족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 부정과 불의와 야합하면서 이웃과 형제들을 짓밟는 사람들,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들, 정직하지 못한 생활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사람들, 돈과 재물을 섬기기 위하여 하느님을 버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음습한 무덤이 어울리고, 이런 사람들을 무덤에서 찾아야합니다.

  

사실 이런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죽이는 사람들이고 이웃과 형제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무덤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죽음이 지배하는 무덤이 썩 잘 어울리고, 그 무덤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도대체가 무덤이 어울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덤 가운데서 죽은 자들과 함께 머무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당신을 완전히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던 예수께, 무덤이란 당치도 않는 장소였습니다.

더구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몸소 실천하시고, 가난하고 작은 자들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분이, 무덤 가운데서 죽은 자들과 어울려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예수를 모함하고 조롱하고, 매질하고,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의 삼십삼 년의 생애가 끝장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의 시체를 죽은 자들이 머무는 무덤에 안치하고, 큰돌로 그 입구를 막고는 손을 탁탁 털면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리고 예수라는 엉터리 같은 인물 때문에 벌어졌던 소동은 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분이 묻혔던 무덤은 비어 있었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났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 41-42).

  예수 사건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분이 죽음의 지배를 받을 수도 없었고, 죽은 자들과 함께 머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증언대로 그분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무덤의 문을 열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 사건이 그 날 이후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사랑과 자비, 진리와 정의는 결단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 백성들의 소동, 로마 통치자들의 폭력 등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있었어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빛이신 분을 암흑이 지배하는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 있습니까? 거짓과 위선이 어떻게 진리를 덮어 누를 수 있습니까?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이길 수 있습니까? 힘과 폭력이 또한 그분을 무덤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 사건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에서는 전대 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지만, 사랑과 진리와 정의는 결단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 혹은 그리스도라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지배하는 그 음습한 무덤에서 썩어 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덤의 문을 열고 죽음의 권세를 쳐부수신 그리스도,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과 광명을 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당연히 부활의 삶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과 평화,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는 삶이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은 이 세상을 무덤과 같은 곳으로 만듭니다. 거짓과 위선은 그 속에서 사는 자신도 죽이고 이웃과 형제들도 죽이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남편이 아내를 속이고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부모가 자식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그래서 자식이 부모를 속이면,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가정이 생명이 약동하는 살아 있는 가정, 빛으로 가득 찬 밝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가정은 죽음의 어둠으로 가득 찬 묘지 같은 가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밝은 세상이 되려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생활을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 이기심과 탐욕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과 이 사회를 무덤 같은 곳으로 만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증오하고, 복수하고, 죽이고 빼앗는 사람들이 사는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악귀들이 모여 사는 무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죽음의 세력이 판을 치는 악귀의 세상입니다.

베풀 줄도 나눌 줄도 모르면서 자신만 배부르겠다고 눈에 불을 켜게 되면, 모두가 악마로 변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무덤 같은 곳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 도대체 이런 삶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실 수 없었던 것처럼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도 어두운 삶 속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생활, 정직하고 바른 생활, 나누고 베푸는 생활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생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 모두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정의와 진리를 실천하는 생활은 이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기념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살아야 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어두운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지난날의 어둠의 생활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새로 태어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권력과 향락과 재물을 섬기고 추구하던 생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에서 나누고 베푸는 생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복수하고자 하던 생활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생활로, 거짓스러운 생활에서 밝고 정직한 생활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부활 사건을 빠스카(pascha)라고 부릅니다만, 빠스카란 과월, 곧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거짓에서 진실로, 복수에서 용서로, 미움과 증오에서 사랑으로 건너간다는 것입니다. 곧 부활은 우리가 살아야 할 신비입니다.

  

우리는 자칫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면서 부활 뒤에 숨어 있는 십자가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맙시다.

진리와 정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기 위하여 따라오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맙시다. 용감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부활의 영광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합시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히 내리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42.                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15,9-17>  서로 사랑하여라

                                                                  최영철 신부





삶의 어두움 벗긴 사건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의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신비와 우리의 생명과 삶의 근본적인 내용을 볼 수 있다. 예수 부활이란 사건은 현실적으로 모든 어두움과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 사건이다.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는 점점 늙어 가는데, 그리고 결국은 죽고 마는 이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 숱한 의문으로 둘러싸여진 우리의 삶의 의혹과 어두움을 벗긴 사건이 예수 부활이란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생명 즉, 삶은 죽음으로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적인 증언이고, 이 부활이란 사건으로 우리 인간에게 끊임없이 약속하시고 보여주었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출발이 되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방향과 나의 생명의 의미, 내가 존재해야 할 미래의 모습 등 우리 인간존재의 모든 것에 대한 확실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의 현실화를 이룬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제자들의 목숨건 증언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12제자를 부르신다. 그들은 그 부르심에 전적으로 따른다. 베드로 사도 같은 분은 목숨을 내걸고 따르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온갖 기적과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참하면서 큰 희망의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 앞에서 너무나도 허약하게 무너지는 것을 또한 볼 수 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숨어버리고, 사도 베드로마저 세번씩이나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정하면서 배반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당시의 메시아관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당시의 메시아관으로 볼 때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전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시는 분이어야만 했다. 제자들은 그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따랐으리라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믿었던 메시아인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자신들은 속았다고 단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서 달아나 숨었으리라는 짐작은 능히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제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잡히면 죽을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들이 목숨을 내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외쳤다면, 그 부활의 사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만약에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제자들의 목숨을 내건 그런 행동은 있을 수 없었음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은 한 두 제자가 아니라 모두의 행동이었다. 결국 제자들은 예외 없이 치명한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사실이었음을 볼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진리, 즉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진리의 발견이 아니었나하는 것이다.          



새로운 나눔의 출발점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수부활 사건은 모든 어두움과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부활 사건 앞에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라는 실천적 차원으로 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푼이라도 더 가져야 되겠다는 탐욕에서의 해방, 너를 이겨야 되겠다는 승부욕에서의 해방이 참다운 부활의 현실적 모습이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푼이라도 나누겠다는 나눔의 가치, 너도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인간에 대한 가치에로의 해방이 부활이란 사건의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한다.














43.       예수부활 대축일 (특강) 교회 이기주의를 극복하자

                          교회는 나눔의 학교/

                           우리 생활 속의 베풂 안에 ‘부활 예수’가 계신다.

                                                     <서공석 신부>





예수의 부활 축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증언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의 자세 변화와 그 후 교회의 출현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살아 생전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절망 가운데 도피한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도 믿기가 힘들였던 모양입니다. 복음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 복음(16장)에는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후에 이 부분을 옮겨 적은 마태오 복음은 믿지 않았다는 말을 삭제하고 \”몇몇은 의심을 품었다\”(28,17)로 고쳐 놓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예수가 살아있다고 주장\”(사도 25,19 참조)하면서 박해 당하고 죽어간 사람

들입니다.



깨달음과 삶의 변화는 동시에 일어난다

제자들은 예수에서 살아 계실 때 3년 가까이 그분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하느님과 같이 살아 계시다는 그들의 확신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하신 말씀들과 행적들을 회상하면서, 그것들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깨달음과 그들 삶의 변화는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수께 대한 그들의 말과 그들의 삶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한 복음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것입니다\”(16, 13)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과 구별되지 않는 증언들은 각각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편집되어 복음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증언들 안에 있고 이 증언은 삶과 혼연일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없는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12,26)는 말을 전합니다. 제자들의 회상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행업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 삶의 기원이기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수가 사신 삶을 살면 하느님의 자녀 된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합니다.

  

그들의 회상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설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구약에 하느님이 모세와 계약을 맺으실 때 \”나 너와 함께 있다\”(출애 3,12)는 말씀의 연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우리 삶의 공간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아직은 충만히 살지 못하기에 하느님 나라는 다가오는 현실이지만, 또한 이미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루가 17,20-21 참조).



 우리는 하느님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만 생각하기에, 흔히 하느님 나라를 미래의 실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감옥에 있는 요한 세례자가 파견한 사람들이 예수에게 \”당신이 오실 분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마태 1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불행을 퇴치하고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친 대로 하느님은 율법 뒤에 숨어서 사람들을 심판하고

벌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살리고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함께 계심인 \’하느님 나라\’는 구원이고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생애를 요약하여 최후만찬에서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해 쏟을 것입니다\” (마르 14,22-24)는 말씀은 당신 안에 있었던 하느님 생명이 어떤 베풂이었는지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성찬은 우리 예배의 중심입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에 참여하고 삶을 통해서 그것을 육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베푸심을 알았더라면\” (요한 4,17)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4,23) 것이 진실한 예배임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에 참여하는 것이 진실 된 예배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안에 베푸심의 진리를 펼칩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하는 사람은 내 소리를 듣습니다\” (요한 18,37)고 말씀하십니다. 권력과 재물에 모든 보람을 두고 있는 빌라도는 이 베푸심의 이야기를 전혀 모릅니다.



약자의 흔한 마음과 하느님 마음은 통한다



 \”진리가 무엇이오? 베푸심의 이야기는 인류 역사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전승은 역사 안에 이 베푸심이 다양하게 육화된 모습들이 이루는 흐름입니다. 이 베푸심은 병자들에게는 병 고침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어 소외시킨 사람들에게는 죄의 용서로 표현됩니다. 사람들은 \”사실 죄인이지!\”(루가 7,39)하면서 사람을 하느님이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루가 7,48)고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돌로 치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살려 놓으신 이야기를 전하면서, 요한 복음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8,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은 살리고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불쌍히 여긴다\’, \’측은히 여긴다\’, \’가련히 여긴다\’는 표현들을 복음서에서 제거하면 뜻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강한 자와 화려한 자의 말이 아니기에 성서 안에서 우리는 무심히 보아 넘깁니다. 인류 안에, 그것도 약자들 안에 흔하디 흔한 마음들과 하느님의 마음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도시에는 화려하게 지은 성당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하느님의 베푸심을 배우고 우리가 변신하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미사참례의 의무를 하는 곳, 나와 내 가족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곳, 그리고 공짜는 없으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돈도 조금 바쳐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지나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주는 몸\’이신 예수님을 받아 모셨으면, 우리 주변을 위해 베푸는 사람으로 변신할 것입니다. 본당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베풂의 장소로 보여야 합니다. 옛날과 같이 구호품을 주는 곳으로 만들자는 말이 아닙니다.

성당 시설물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하는 것도, 많은 차량으로 주민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도, 지역 주민들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하느님의 베푸심을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을 하신 다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합니다\” (루가22,27)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섬기고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 삶 안에 나타나는 베풂의 이야기 안에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진실 된 예배가 있고,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우리와 함께\” (마태 28,27)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44.       주님 부활 대축일 : <사설>   

                              부활은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 25)라고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셨다.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로마 6,9)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활 대축일을 경건하고 확신에 찬 마음가짐으로 맞는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생명의 길을 열렸다. 사악하기 그지없어 새까맣게 오염된 인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은총의 빛을 쐴 수 있게 됐다. 육신의 멸망을 앞두고도 그 사실을 모른 채, 한시적인 삶의 순간순간을 탕진해온 인간,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육체와 정신을 기사회생(起死回生)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은 죽음 앞에 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구조악(構造惡)도 부순다. 부활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이데올로기, 인간성을 훼손하는 제도적 폭력, 인류를 말살하려는 핵무기, 부정과 부패의 사슬 등 모든 반이성적 해악을 물리쳐, 하느님의 나라가 현세에 임하도록 정화하고 쇄신한다.

  영광의 부활 대축일을 맞은 우리는 죽음의 끝에 부활을 맞는 이 벅찬 기쁨을 만천하에 전할 의무를 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 21)고 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온 누리를 감싸고, 희망이 용솟음칠 수 있도록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한다.



벅찬 기쁨을 만 천하에 전할 의무



 그러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은 눈부신 부활의 아침에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성화(聖化)해야 할 것이다. 부활은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온다. 회개와 보속을 소홀히 한 채 교회력(敎會曆)으로만 부활을 맞은 사람, 회개와 보속을 부활 대축일로 마감하고 다시 죄악의 구렁텅이로 밭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활의 의미를 모독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와 보속은, 부활의 전제조건이다. 동시에 그것은 부활을 실천하는 규범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도 스스로 부활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으면 곧 회개하며, 이에 따른 보속을 이행함으로써 세상의 죄를 탕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신앙인의 자기 쇄신을 요청한다.

  

다음으로 신앙인들은 부활의 이념으로 우리 사회를 줄기차게 정화해야 하겠다. 우리 사회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광범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은 \’윗물 맑히기\’로 국한되고 있다.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른바 복지부동 풍조가 공무원 사회에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혁이 악의 뿌리를 잘라내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개혁을 주춤거리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윤리관, 가치관의 부재에 있다고 우리는 본다.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부활 메시지에서 \”우리 사회는 오늘날 도덕성 부재와 가치관 상실로 모든 면에 활기를 잃고 있다\”고 진단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난국을 극복하는 강한 의지로 일치 단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활의 이념에 맞닿는 개혁



 개혁은 세상의 죄를 씻어 밝히자는 것이요, 불의를 제압해 정의를 세우자는 것이며, 사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잘 살자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혁은 타락한 윤리관, 사악한 가치관을 바로잡는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개혁은 부활의 이념과 맞닿는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세상의 죄악을 물리치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는 지위의 높고 낮음, 고향의 차이, 성별, 재산의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개혁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사소한 이익이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공동선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밀 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한 12,24)는 말씀에 따라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이 되어야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개혁을 무력화하려는 세력들에게 충고하고자 한다. 개혁은 가진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개혁은 잘못된 관행, 오도된 비리와 부패구조를 청산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병폐가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규범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고, 사회를 해치는 독소일 뿐이다.


독소를 지닌 채 건강해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따라서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에 기대어 육신과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부활은 해와 같이 찬란하고 밝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것을 거스를 세력은 없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찬미하며 자신과 사회를 쇄신하기 위해 기도하고 결단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셨다. 알렐루야!















 45.           부활 대축일 (가)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예이츠(Yeats, 1865-1939)는 아일랜드 특유의 유현(幽玄)하고 환상적인 정서를 통해 세계적인 시인이 된 사람입니다. 1923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아일랜드 자유국가 성립에 공헌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조국 아일랜드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이츠는 25세의 청년 시절, 고향 이니스프리 섬을 그리워하는 서정시를 발표합니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 섬으로 가리/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집 지어/ 아홉 이랑 일구어 벌꿀 치면서/ 벌들 잉잉 우는 숲에 나 혼자 살리/ 그곳 평화 깃들어 조용히 날개 펴고/ 귀뚜라미 우는 아침 노을 타고 평화는 오리/ 밤중조차 환하고 낮엔 보랏빛 어리는 곳/ 저녁에는 방울새 날개소리 들리는 그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에도 또 낮에도/ 호숫물 출렁이는 그윽한 소리 듣노니/ 맨길에서도 회색 포장길에 선 동안에도/ 가슴에 사무치는 물결소리 듣노라”



주님은 부활하신 후 최초로 여인들에게 나타나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곳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든 단숨에 갈 수 있으셨습니다. 심지어 문을 뚫고 들어오기도 하셨습니다(요한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약속 장소를 갈릴래아로 정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루살렘에서 400km 정도 떨어진 먼 곳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마태 17,23)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자신의 말씀이 실현된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집합 장소를 갈릴래아로 정했을까요.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산상설교를 하신 곳도 갈릴래아 호숫가입니다.



주님이 갈릴래아를 사랑하셨던 것은 승천하신 후 천사들이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사도 1,11)고 말했던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갈릴래아 호숫가로 부르시고 마지막으로 “아침식사까지 만들어주신 것”(요한 21,12)은 그분께서 그곳을 사랑하셨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보이신 것입니다.

예이츠가 런던의 회색 포장길에서도 이니스프리의 물결소리를 꿈꾸었던 것처럼 주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갈릴래아의 물결소리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예이츠의 시처럼 ‘이제, 죽음에서 일어나 갈릴래아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인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 작가



  















46.       예수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알렐루야





목련과 부활 꽃



아름다운 봄에 부활절을 맞았다. 온갖 식물이 소생하는 싱그러운 봄이다. 성급한 꽃망울은 만개한 지 이미 오래다. 목련도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무에 목련꽃이 피었다고 생각해보면 목련은 부활절과 너무나 상통하는바가 많은 것 같다. 십자나무에서 꽃이 피었으니 아름답게 피어난 그 꽃을 부활꽃이라 할까? 예수님은 꽃이 되어 피어나셨다. 특히 더러운 물에서 수면 위로 아름답게 피는 연꽃처럼 예수님은 피묻은 십자가의 더러움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셨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



 각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를 각기 다른 형태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다. 로마인들이 처참하게 못박아 죽인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 그분의 부활은 라자로의 부활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부활과는 다른 부활이다, 라자로나 야이로의 딸은 다시 죽었으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하며,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이 세상의 삶과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삶으로 부활하셨다. 그분은 다시 죽지 않으셨다. 그분은 생성소멸의 법칙에서 해방되시어 영원히 사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영원히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 희망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만드는 벅찬 희망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1고린 15,14)고 말씀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의 길에서(루가 24,15), 티베리아 호숫가에서(요한 21,1),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요한 20, 14),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요한 20, 19) 나타나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7,21)하고 축복해 주시며 이 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루가 24,47)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신자들에게 아마도 오늘은 최대의 명절이다.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오늘이 기쁜가? 기쁘다면 얼마나 기쁜가! 기쁘지 않고 그저 그런 날로 여겨진다면, 혹은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날이라 여겨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바벨탑을 열심히 쌓는 사람들은, 즉 물질과 명에의 탑을 쌓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그저 그런 날일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루요, 미사전례가 길고 성가대가 길게 성가를 부르는 질력나는 그런 날일 것이다. 과연 나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야할 것이다.

  

예수님 부활에 즈음하여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은 돋보인다. 당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특권을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번째로 뵙는 특권은 대단한 특권이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남정네들에게 전하는 특권도 받았다.

아직도 이 세상은 남성의 권위가 여성보다 우월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은 여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는 날이기도 하다.



복음의 메시지



 만일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누가 제일 먼저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특권을 주실까? 성직자일까? 수도자일까? 평신도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일까? 혹은 어쩔 수 없이 거리의 여인이 되어 매일매일을 눈물로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일까? 오늘은 기쁜날,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다. 그러길래 부활찬송에는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라고 노래한다. 천사들도 용약하는 오늘은 내 인생의 해답을 얻은 날이다. 나도 부활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부활찬송에는 또 “오 복된 탓이여! 아담이 지은 죄․………….\”라고 하였다. 인간의 죄로 그리스도가 오셨고 부활도 맞이하게 되었음을 역설로 표현한 것이다,



이날을 슬퍼할 수 없다. 근심․걱정을 제쳐두고 우리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주님을 찬양하자,

모든 어려움을 몰아내시고 광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마음 속에 혹시라도 맺힌 것들이 있다면 모두 풀고, 용서하고 이 기쁜 날을 경축하자.

  

오늘은 온 가족이 별스런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나누며 알렐루야를 불러보자. 끝이 안보이는 어려운 경제여건을 타개하는 길은, 주님의 부활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언제 들어도 신선한 기쁜소식





부활아침은 생각만해도 상서롭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일 윈스터 교구 신학원에는 「요한네스 부르스」 Johannes Bours라는 덕망이 매우 높으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그의 마지막 저서 「내가 새벽별을 주리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 전체에서 가장 뜻깊은 아침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부활아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아침에 죽음이 생명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긍정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요한네스 부르스 신부님의 이 말씀을 회상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본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쁜소식은 성 금요일의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빈무덤을 보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 무덤」의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빈 무덤」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의 처음 반응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는 걱정아 가득 찬「놀람」이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소식을 듣고 빈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람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빈무덤」에 대한 이들의「놀람」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사랑」에 의해「부활」에 대한믿음으로 변해간다. 「빈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제자가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예수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다는 사실 자체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그 제자가「빈 무덤」의 사실과「잘 개켜져있는 수의」의 사실을 넘어서서 그 사실에 깊이 담겨있는「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에 대해 가지셨던 사랑과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그의 사랑이었다.



이 점은,오늘 부활주일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 안에서 바로 다음 대목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 금요일의 충격 속에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던 마리아를 일으켜 세워 「빈 무덤」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황량한 무덤 가에서 울고 있던 그에게 들려오는 (동산지기로 밖에 보이지 않던) 낯선 사람의 소리, 곧「마리아야!」라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즉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두려움과 실의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 발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부활 축일의 의미는 부활전야 미사 때 있었던 「빛의 예식」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제시된다고 생각된다. 「빛의 예식」 때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잘 표현해 준다. 우리 주변에는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사고로 평생을 침대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살아야 하는 사람들, 중병 중에 있는 사람들,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야하는 사람들, 노년의 외로움, 또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던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지은 큰 죄 때문에 도저히 떨처버릴 수  없이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삶의 어둠들은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 할 수 있는「죽음」이라는 어둠의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모든 어두움을 밝혀줄 수 있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두움이 아무리 깊다하더라도, 「죽음의 어두움」 한 가운데에서까지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부할 전야 「빛의 예식」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부활 초에서 서로 서로가 빛을 전달받았듯이 ,우리도 우리가 전해 받은 그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는 삶은 결국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부활 대축일’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언제 들어도 마음을 신선한 신앙의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48.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빈 무덤과 부활 신앙





지난 95년도에 가톨릭 신앙생활 연구소에서 한국 천주교 평신도의 신앙생활 실태를 종합조사 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 부활에 대해 전혀 혹은 별로 믿지 못하겠다고 한 응답자가 약 30%에 이른다는 놀라운 사실을 읽은 적이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걱정스러운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부활은 인간의 생명이 연장되거나 죽은 후 소생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원한 하느님 생명에로 드높임을 받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영원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 안에서의 삶인 것이다.

  

이번 주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사화 중에서 빈 무덤의 이야기이다. 무덤을 찾아 간 제자들의 당황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다른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극진히 장례를 치른다. 그 때 큰돌을 굴려다가 무덤을 막았다(마태 28,60).

또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청하여 무덤에 경비병까지 세우고 무덤을 봉인하게 한다.(마태 28,62-66),

  

혹시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숨겨놓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시끄러워지니 미연에 방지했던 것 같다.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게 철통같이 경비를 하게 된 사건이 오히려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아무리 인간들이 지혜와 힘으로 무덤을 막고 지켰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흘동안 무덤을 방문하는 전통적 관습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영혼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사흘동안은 영혼이 시체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는 전통적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첫 사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다.

  성서에서 보면 그녀는 창녀로서 ‘일곱 귀선\’이 들린 여자인데,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난 인물이다. 예수님도 그녀를 몹시 사랑하셨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가까이 있었고, 장례를 지낼 때도 그 현장에서 모든 것을 낱낱이 지켜본 인물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제자들이 도망간 자리를 지키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다. 그러나 그녀가 발견한 것은 텅 빈 무덤이었다. 그녀는 당황했고 황급히 베드로에게 알린다. 곧이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역시 빈 무덤이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고 기본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1고린 15,17) 그러나 부활은 믿음 없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다. 인간적인 지혜나 두뇌로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부활을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초자연적인 하느님 계시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특별한 은총이다. 그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의 은총이다.

  

빈 무덤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물론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도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한 생각이나 판단, 의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가끔 빈 무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황과 허탈감, 좌절 등 빈 무덤의 체험은 오히려 더 큰 믿음으로 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믿음의 성숙은 자기수양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하느님의 계시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성에 있다. 그래서 믿음은 신비요 은총이다.

  부활사건은 논리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은 믿음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 신비이기 때문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현(體現)하고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활을 굳건히 믿고 부활의 삶을 철저히 살아야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깨달아야 하겠다. 이번 한 주간, 빈 무덤에서 허탈하고 당황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굳건히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49.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공통)       

                                주님과 함께 죽는만큼 부활

                                                               유영봉 신부



  묵상 :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활신앙은 선(善)이 악(惡)을, 빛이 어둠을, 진리가 거짓을 이긴다는 믿음이다, 신자생활은 매일 죽고 부활하는 삶이다.



예수부활은 신화(神話)인가?



한 예비신자가 교리를 꾸준히 잘 듣더니 갑자기 교리반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이유인즉 성당에서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까지는 봐주겠는데,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으라니 말이 되나! 사람을 바보취급해도 유분수지!\”하면서 화가 나서는 이제 성당 교리반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자기 아내에게 선언했다는 것이다,



예수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염원을 지닌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아무도 건너보지 못한 죽음의 심연을, 제자들은 실망하고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숨어 지냈다. 그러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예수는 부활하여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조상 대대로 기다려 온 메시아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마침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결국 “예수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외치며, 목숨을 바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한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 때, 우리도 그분처럼 죽음을 넘어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가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과 발현이 없었다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사도들의 순교도 없었을 것이고, 사형수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야말로 예수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1945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듯이, 2천여년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예수라는 분이 부활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1고린 15,14)고 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신부님은 예수부활을 참으로 믿습니까? 믿는다면 왜 믿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빌라도가 그 총독으로 있을 때, 예수라는 인물이 실제로 살았다는 것은 대개 인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으로 기대하며 그를 추종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유다 전통신앙을 모독한 자로, 선동가로, 정치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예수 외에도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형수는 많았다.

현세적 성공을 기대하며 예수를 따랐던 제자와 똑같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 I고린 15, 20)이 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등산로를 개척하듯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심으로써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그러면 죽음의 심연을 뛰어넘은 예수님의 승리는 어디서 왔는가? 예수부활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요한 5,44)하신 말씀을 철저히 사신 그 사랑의 결실이었다.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사랑\”을 살 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하신 그분처럼 살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하신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나날이 부활하는 삶



우리는 지금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실직과 파산으로 인해 사회 혼란이 우려되고,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어느 때보다도 고통을 서로 나누는 사랑이 절실한 요즘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죽는 만큼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씨앗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사랑하기 위해 매일 이기적인 나 자신에게 죽고 매일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사는 것이다,















50.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오늘의 기쁨을 영원히

                                                               서웅범 신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힘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전례를 거행하며 하느님의 구원신비를 묵상하고 그분께 깃은 흠숭과 찬미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례 가운데 특히 예수부활 대축일의 전례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신비를 잘 느끼게 해주며, 우지의 마음을 환희와 기쁨/감사로 채워주는 것 같습니다.



부활성야 미사 때, 깜깜한 성당 안이 신자들의 손에 들린 촛불들이 발하는 영롱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 가운데「부활찬송」이 낭랑히 울려퍼지는 그 모습은 참으로 신비롭고 거룩하기만 합니다. 또 장엄한 오르간 전주와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불러지는 승리와 환희의「대영광송」은 가히 모든 전례의 압권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부활 대축일의 아침 공기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싱그럽게만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라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 때문에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이 감사와 기쁨은 우리를 더 큰 쇄신과 신앙의 성장에로 이끌어줍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근간이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그 존재와 이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특히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이 더욱 의미있게 들립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지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비참한 처지의 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착한 새 주인이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었습니다. 더구나 큰배에 재물을 가득 실어주었고 또 원하는 곳 어디든지 그곳에 정착해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감사했고 부푼 꿈을 안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항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그는 목숨만을 겨우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한 낯선 섬에 간신히 도착한 그는 잠시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 섬나라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자 곧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것은 「바다에서 표류해 온 사람을 무조건 1년간 왕으로 섬기고, 그 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항무지 섬으로 쫓아버리라」는 그들의 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왕이 된 그는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리석지 않았던 그는 자기가 지금 누리는 부귀영화에 집착하여 그것에 푹 빠져 살기보다는, 1년 후의 일을 생각하며 그 준비를 하는 데에 소홀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을 내어 자주 황무지 섬을 찾아가, 그곳에 거처를 만들고 논밭을 일구고 여러 과일나무를 심고 꽃밭을 가꾸었습니다. 또 샘물도 팠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다시금 법에 따라 그 황무지 섬으로 가게 되었으나, 그곳은 이미 모든 것이 다 잘 준비가 된 상태인지라 그곳에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왕으로 살 때, 부귀영화에 미혹 당해 자신의 신분/처지를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다 버리고 떠나야 할 그 섬의 물질적 풍요와 명예와 영광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노예를 자유인으로 풀어준 주인이 바로 하느님/예수님이십니다. 그가 왕으로 1년간 산 섬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가 미리 준비한 또 다른 섬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불행한 처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머무를 곳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 지나가는 곳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죄에 대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한」 우리들은 천상 것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성실히 살되 세상 물질과 명예/권력의 노예가 되어 결국 부활의 기쁨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51.          예수부활 대축일 <요한 20,1-9> (공통)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가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신은근 신부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우리에게도 조연의 몫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린이들은 날마다 빠른 속도로 자란다. 어린이가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추면 큰 일이다. 육체적으로만 자라고 정신적 성숙이 따라가지 못해도 걱정이다,

  

영세하고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세하고 10년이 지났는데 예비신자 때보다 신앙심이 더 약해져 있다면 이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다. 왜 믿음을 가졌는지, 믿음 안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식이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체험이 부족하면 깨달음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믿음의 꽃과 열매를 경험하면 신앙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삶의 동반자로 바뀐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점검이 부활을 맞이하는 조연자의 첫 번째 몫이다.

  

믿음은 바치는 행위다, 애정을 바치고 시간을 봉헌하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자라난다. 예수님도 생명을 내놓으셨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다. 봉헌하지 않으면 세월이 가도 신앙은 자라나지 않는다. 그러니 차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한다. 봉헌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조연자의 두 번째 몫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부활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죽였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씀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이제 와서 깨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은 지식이 아니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은 머리로 깨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도 청해야 한다, 주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길 청해야 한다, 빈 무덤은 무엇인가. 그분의 무덤이였다.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였다. 나에게도 빈 무덤은 있다. 자신을 포기하고 죽어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딘가, 우리들 조연자가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관계란 늘 어렵다. 굳어진 탈을 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문을 닫고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다른 어떤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평화가 빠져있다면 청해야 한다. 꼭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희년은 기쁨의 해다, 금년 부활절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한다. 우리들 조연자의 결정적인 몫이다.















52.          주님 부활 대축일 (나)         여   명





봄이 부활절과 함께 온다는 것이 언제나 감격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별 느낌이 없이 봄이 오고 부활도 오고는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자의 슬픈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사실 봄이 예전의 봄과 같지가 않은 것은 어쩔수가 없는 것이 새소리도 훨씬 드물어졌고 꽃도 빨리 이울 뿐아니라 날씨도 일정하게 변하지를 않는다. 사람도 변했다.

무지막지하게 나가는 사람도 많아졌고 예의를 요구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선수를 치며 화를 내는 이도 많아졌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상대방을 이용해 먹으려드는 태도들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의 윗층 아파트 사람들은 아래층에 대한 신경은 전혀 안쓰고 사는 참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가족이다.



그들은 발에 쇠징을 박았는지 어찌나 쿵쿵거리며 밤낮으로 걸어다니고 난리가 난 것처럼 사는지 아래층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래도 천주교 신자가족이고 주일미사는 안 빼고 다니니 모범된 교우측에 든다고 할 말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공청소기로 주로 한밤중에 온 집안을 청소하는데 대개 밤 11시 이후가 보통이고 그집 주부는 해산하는 여인의 목소리 같은 고함소리로 세 자녀들(중고교생 둘과 대학생 하나)을 온갖 욕을 섞어가며 혼내는 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다는 것인데, 거기에 더 혼절할 일은 그 주부가 피정도 꽤 자주 다니는 대단히 영성적 관심이 높은 신자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계절의 혼란보다 더한 마음의 사태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길이 없어진다.



인생은 본래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것인 줄은 알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어둡고 잔인한 일들의 연속이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따르는 이들의 이름이니,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름값은 해야 도리일 것이다.



그 윗층 가족의 사연을 놓고 내게는 그런 면이 없는지 거울에 비춘 듯 비춰 생각해 보면서 양심이 아파졌다. 세상에 맞춰 산답시고 쉽게 적당하게 살아오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이 무거웠다. 사실 이번 사순시기 동안은 예전보다 극기도 적었고 희생도 덜 했다. 건강을 고려해서 먹는 것도 여느때와 다를 것 없이 먹으며 지나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으니 자선을 더하게 될 수는 당연히 없게 되었다. 극기희생한 만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애초에 사순시기에만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마음먹은 것이 잘못이었으리라.

이제는 부활을 맞이했으니(마음이 그러니 제 힘으로 알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고 밖에서 남이 깨줘서 겨우 부화된 병아리마냥 불편하지만) 부활 신앙을 또 누리기로 다짐을 해본다.





첫째, 남에게 어둠 불쾌감 같은 것은 좀더 덜 쏘여주는 하루가 되겠다.

둘째,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를 쓰되 설치지는 않겠다.

셋째, 말보다는 귀로 듣는 쪽이 더 행복이라는 걸 한 번 느껴보겠다.(죽음에서 살아 부활을 나눠주시는 예수님은 불쌍한 마음안에 빛을 비춰주시니 찬미받으소서. 아멘  















53.        예수 부활 대축일 (다해)  죽음을 넘어가신 예수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오늘은 참으로 위대한 날입니다. 교회 전례로 봤을 때는 오늘이야말로 일년 중에 가장 크고 높은 날입니다. 예수 성탄이 기쁜 것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이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그 의미를 가지며 인생은 그 삶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선과 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 은 명쾌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진정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악한 사람이 아무리 잘먹고 세도 부리며 떵떵거린다 해서 절대로 부러워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편에는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깜깜했습니다. 안 보이니까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안으로 들어가셔서는 죽음의 휘장을 걷어 내시고 보니 그 뒤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소망스럽고 너무도 행복한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참으로 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삶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어린 딸을 잃고는 너무도 슬퍼했습니다. 딸은 너무 도 예뻤고 영리했으며 또 착했습니다. 죽을 이유도 없었고 부모가 또 악하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통사고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 날 수 있는지 그녀는 참으로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세상과 하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자 그 자매는 더욱 괴로웠습니다.



삶 자체가 저주요 원수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녀님이 우연히 찾아와서는 딸은 필경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곁에 편하게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수녀님의 말씀에 너무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둡게 닫혔던 세상이 활짝 열렸으며 죽은 딸에 대한 희망 때문에 그녀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실로 예수님 때문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망가지고 부서지고 파괴되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땅은 축복받은 땅으로 변화되었으며 심지어는 고난도 죽음도 다 은혜요 축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을 건져 주셨습니다.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그 열쇠였습니다. 부활이 그 해답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저주였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다.\” (신명 21,23; 갈라 3,13)라고 성서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로는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혼자 다 뒤집어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이들에겐 십자가는 부끄러움이요 저주이지만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진정 하느님의 힘이요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죽음 속을 들어가셔서 죽음의 저주를 다 깨뜨리셨기 때문에 죽음도 이제 은혜가 됩니다. 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원래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니까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 아니요 새 삶을 열어 주는 관문이요 또는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부활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신의 부활, 생활의 부활, 그리고 마음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가 있고 알게 모르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새롭게 부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지 죽어봐야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에서 작은 아들이 알거지가 된 후에야 새 인생이 되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동료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 동료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자기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면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할 수만 있으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 동료를 생각만 해도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기도회에서 그 형제는 미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적 치유를 인도하시던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것이 올바른 치유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자기 동료를 위해 기도함으로 해서 자기가 오히려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건너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새 삶의 세계를 열어 주시어 닫혔던 세상의 모순을 풀어 주셨기 때문에 세상은 이제 절대로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위대한 새벽을 늘 바라보도록 합시다. 거기에 우리의 참 미래가 있습니다.

      













54.       예수 부활 대축일 (가해)    부활은 죽음의 보상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 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세상에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인류 최대의 적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또한 그 속 을 다녀온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그 캄캄한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분에 의하면 죽음이 꼭 무섭고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이라 는 위대한 세계가 죽음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죽음은 실로 은총과 축복의 관문이었습니다.

인생은 진정 죽음으로 끝장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무도 억울하며 세상 만사 우주 전체가 모순이 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완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상에는 부조리가 많습니다.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혼란이요 엉망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모순과 부조리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기에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사건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머리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불에 타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 다시 생명을 가진 나무로 변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모두에게 나타나신 것도 아닙니다. 한정된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구하나 믿지도 않았고 호기심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다고 외쳤을 때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주제 파악을 못했습니다.



아무도 제자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오신다고 해도 미친 소리쯤으로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갇혀 있는 자기 자신밖에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그 이상은 절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일이요 부활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 친구 중의 어떤 형제가 아주 괴물이었습니다. 세상에 자기밖에 몰랐으며 얼마나 이기적인지 살아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치사하고 유치했습니다. 사회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너는 팔자 소관이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인가 보다.\”하여 신앙을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공동체 안에 큰 해를 끼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부가 되고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뜬금없이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부부가 1년 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으며 하나 있는 아들은 신학교에 보내고, 하나 있는 딸은 수녀원에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재를 만나 꼼짝없이 죽는 것인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걸레조각 같던 그 성질들은 다 사라져 버렸고 하느님 앞에 자기를 부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 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친구 안에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는데 그는 그 속담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저 사람은 아주 지옥에 갈 놈이라고 내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그 판단과 멸시를 훌쩍 넘어서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부활을 실감나게 묵상합니다.



부활하기 위해선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의 새벽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믿기 위해서도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만이 믿음의 문이 참되게 열리며 그 열린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앞당겨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백 번 부활하신다 해도 자신이 부활하지 못하면 신앙은 허깨비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서 부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날의 새벽이 장엄하게 돌아온다 해도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새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또한 새로운 광명의 세계로 부르십니다. 따라서 먼저 믿고 그리고 우리도 악습의 잠에서 깨어나 새 삶을 살도록 합시다.

모두에게 부활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55.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언제 들어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신선한 기쁜 소식

                                                              김영남 신부



부활아침은 생각만해도 상서롭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일 뮌스터 교구 신학원에는 “요한네스 부르스(Johannes Bours)”라는 덕망이 매우 높으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그의 마지막 저서 “내가 새벽 별을 주리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 전체에서 가장 뜻깊은 아침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부활아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아침에 죽음이 생명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긍정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네스 부르스 신부님의 이 말씀을 회상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본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성금요일의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빈무덤을 보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 무덤’의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빈 무덤’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의 처음 반응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는 걱정이 가득 찬 ‘놀람’이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소식을 듣고 빈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빈무덤’에 대한 이들의 ‘놀람’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랑’에 의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변해간다. “빈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제자가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다는 사실 자체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그 제자가 ‘빈 무덤’의 사실과 ‘잘 개켜져 있는 수의’의 사실을 넘어서서 그 사실에 깊이 담겨있는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에 대해 가지셨던 사랑과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그의 사랑이었다.



이 점은, 오늘 부활주일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 안에서 바로 다음 대목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금요일의 충격 속에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던 마리아를 일으켜 세워 ‘빈 무덤’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황량한 무덤 가에서 울고 있던 그에게 들려오는 (동산지기로밖에 보이지 않던) 낯선 사람의 소리, 곧 “마리아야!”라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즉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두려움과 실의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 발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 축일의 의미는 부활전야 미사 때 있었던 ‘빛의 예식’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제시된다고 생각된다. “빛의 예식” 때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잘 표현해 준다. 우리 주변에는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사고로 평생을 침대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살아야 하는 사람들, 중병 중에 있는 사람들,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 노년의 외로움, 또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던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지은 큰 죄 때문에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이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삶의 어둠들은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어둠의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모든 어두움을 밝혀줄 수 있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두움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죽음의 어두움” 한 가운데에서까지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부활 전야 “빛의 예식”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부활 초에서 서로 서로가 빛을 전달 받았듯이, 우리도 우리가 전해 받은 그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는 삶은 결국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부활 대축일”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언제 들어도 마음을 신선한 신앙의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56.       예수부활대축일 <요한 20, 1-9> (가)     우리도 부활해야 한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우리에게도 조연의 몫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린이들은 날마다 빠른 속도로 자란다. 어린이가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추면 큰 일이다. 육체적으로만 자라고 정신적 성숙이 따라가지 못해도 걱정이다.

영세하고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세하고 10년이 지났는데 예비신자 때보다 신앙심이 더 약해져 있다면 이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다. 왜 믿음을 가졌는지, 믿음 안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식이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체험이 부족하면 깨달음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믿음의 꽃과 열매를 경험하면 신앙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삶의 동반자로 바뀐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점검이 부활을 맞이하는 조연자의 첫 번째 몫이다.

믿음은 바치는 행위다. 애정을 바치고 시간을 봉헌하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자라난다. 예수님도 생명을 내놓으셨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다. 봉헌하지 않으면 세월이 가도 신앙은 자라나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봉헌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조연자의 두 번째 몫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부활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씀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이제 와서 깨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은 지식이 아니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은 머리로 깨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도 청해야 한다. 주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길 청해야 한다. 빈 무덤은 무엇인가. 그분의 무덤이었다.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였다. 나에게도 빈 무덤은 있다. 자신을 포기하고 죽어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딘가. 우리들 조연자가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관계란 늘 어렵다. 굳어진 탈을 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문을 닫고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다른 어떤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평화가 빠져있다면 청해야 한다. 꼭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ꡐ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ꡑ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희년은 기쁨의 해다. 금년 부활절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들 조연자의 결정적인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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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다해 예수님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1. user#0 님의 말:

    부활하신 예수님

    1. 말씀읽기: 요한 20,1-9

    부활하시다 (마태 28,1-8 ; 마르 16,1-8 ; 루카 24,1-12)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며, 부활의 증인으로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기에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을까요?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사랑했기에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기쁜 소식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부부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내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보고 싶습니다. 뒷산에 묻혔다면 캄캄한 새벽에 무덤에 갈 수 있을까요? 응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편들에게는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조건 손들라고.” 그리고 물었습니다. 만일 아내가 그렇게 먼저 가서 묻혀 있다면 새벽에라도 가서 보겠냐고! 그랬더니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다가설 때, 나 또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2.1.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 막달레나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엄격히 지켜야 했기에 안식일에는 향료를 살 수도 없었고, 예수님의 무덤까지 걸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여인들은 향료를 살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해가 지면 끝납니다. 하지만 그때 무덤으로 달려가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서두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서둘러서 치렀기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요한20,1).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워졌고, 무덤은 비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한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2.2. 빈 무덤 사건(부활)을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 도착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즉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20,2)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부활하셨기 때문이지만, 마리아의 마음에는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마리아는 아직 믿지 않았지만 이제 믿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을 한 차원 올려 주실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예수님께로 향할 때,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나의 신앙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3.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

    베드로와 요한(다른 제자)은 즉시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들도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부활하셨을까? 그런데 우리 눈앞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부활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베드로와 요한은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① 무덤에 먼저 다다른 요한

    두 사도가 곧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보다 젊었던 요한이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요한20,4). 요한 사도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이 사실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무덤은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요한20,5).

    요한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 사도를 향한 겸손의 표현(장유유서)인 듯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수위권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권위를 요한 사도는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는 것입니다.

    ② 시몬 베드로가 무덤으로 들어가 무덤을 확인하다.

    시몬 베드로는 숨을 헐떡이며 무덤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감쌌던 아마포만 남은 것을(요한20,6)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아마포만 남은 것입니다. 이제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옮겨질 차례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한 순간에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서서히 생겨나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요한20,7). 그러나 수의가 그곳에 놓여 있다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갔다.”는 말과는 모순됩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갔다면 수의와 수건도 다 가져 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고 전해줍니다.

    ③ 보고 믿었다(요한20,8).

    베드로 사도가 무덤에 먼저 들어가고 난 뒤에야 요한 사도도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예고를 회상하고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으뜸으로 세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믿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그 증거를 보고 베드로 사도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아마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부활을 믿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무덤 앞을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도 함께 못했고, 또 믿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지켜보지 못했기에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만 들었을 것입니다.

    ④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세 차례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수난예고만 들렸을 뿐 부활예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합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도 제각각 다르게 듣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예고를 흘려버렸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아하! 그랬었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될 것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누가 말해 준다 해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이 이렇게 하면 생기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하는 생각이 결국 그런 실수를 하게 만듭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깨달아야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말씀에만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결국 내 삶이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비록 부활을 믿지는 않고 있었으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첫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 또한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4. 부활의 증인으로서 삶

    ① 기쁨에 넘치는 삶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 또한 부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있기에 하루 하루의 삶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기쁨에 넘치는 삶은 내 일상을 바꾸고, 내 주변 사람들을 바꾸고, 마침내 온 세상을 바꾸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②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하는 삶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놓습니다.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며,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자매는 비신자인 남편과 함께 살면서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남편이 성당가지 말라할까봐 주일이나 축일이 되면 남편 눈치를 보며 남편의 기분까지 맞추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남편은 주일이나 대축일이 되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매는 남편에게 신앙을 권면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남편이 신앙생활 하는 것 방해 안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는 신앙생활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종인가? 내 신앙생활이 가정생활을 망치고 있는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축일을 지낸 자매는 남편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당신 내일부터 성당에 다닙시다.”이렇게 당당하게 나오자 남편은 당황을 했습니다. 자매는 또 말을 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정을 깨뜨렸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소홀히 했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지금까지 당신의 눈치를 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의 종이나 이집 소나 말입니까?”

    “……,”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남편은 “그래! 나도 성당에 다닐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어떤 외짝교우에게 이야기하자 “에이~ 그걸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배우자가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면서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고자하면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③ 복음을 전하는 삶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선포된 복음을 내가 받아들여 나 또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만이 그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가까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 그 삶이 바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그 말씀이 와 닿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만일 내가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서 빈 무덤을 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③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내가 부활의 증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4. 실천사항

    ① 부활의 기쁜 소식을 먼저 가족들에게 알리기

    ②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당으로 인도하기

    ③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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