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4주일
8. 강길웅 신부(나)/13
9. 김영남 신부(나)/15 10. 김희태 신부(나)/17
11. 민병섭 신부(나)/18 12. 신은근 신부(나)/20
13. 이규철 신부(나)/21 14. 최영철 신부(나)/23
15. 이한택 신부(나)/25 16. 김몽은 신부(나)/26
17. 김대성 신부(나)/28 18. 서울교구 주보(나)/30
19. 노순자 젬마/소설가(나)/33 20. 서울교구 주보(나)/34
8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가정은 성소의 못자리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4,8~12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제2독서 Ⅰ요한 3,1~2 (우리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뵈올 것입니다)
복 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사람이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가치가 담겨져 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성소에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선 아무나 부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대하시는 자를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맘에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고 그래야 부담이 없습니다. 일에 능률도 오르고 일의 가치도 크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짐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누고자 하며 또한 대신 짊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길은 대단히 고달프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면 거의가 주저하고 발뺌을 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으며 예레미야 역시 그랬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고난입니다.
오늘은 특히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교회는 또 이 날을 성소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서 착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이 시대에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고 자기를 떠나 인류 구원사업에 헌신할 수 있는 목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만이라도 선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하는데 오늘의 풍토를 보면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순전히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으로 종교인들이 난투극을 벌이고 사기를 자행하며 재물의 습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고 있으며 등잔이 불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착한 목자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특히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먼저 착한 양이 될 수 있어야 착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는 늑대가 되며 사기꾼이 되고 위선자가 됩니다. 오늘의 시대에서 일부 종교인들이 타락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떤 사업가가 있는데 재산이 엄청납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사업을 빙자해서 돈만 낭비합니다. 그는 특히 작은 것을 아낄 줄 몰랐고 소중하게 여길 줄을 몰랐습니다. 사업에 대한 연구나 계획보다는 자신의 취미나 오락을 즐겨 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섭게 고생을 해서 사업을 일으킨 분입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업을 더 성장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모릅니다.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냉정한 판단을 내립니다. 아들에게 사업을 맡기면 불원간에 망할 것은 뻔히 내다보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딸들이 있었는데 마침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위를 얻어서 당신의 사업을 물려줬습니다. 이것은 누가 판단해도 당연한 일입니다. 아들 편에서는 아버지께 따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이 유일한 상속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버지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고 짓밟는 아들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시대에 목자들이 주님의 목소리를 올바르게 들을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양들을 많이 불렸다 해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면 그는 그 많은 양들을 다 죽여 망치게 됩니다.
올해 성소주일 담화에서 교황님께선 가정이 성소의 못자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삶이 되어야 하며 그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대단히 불행스럽게도 믿는 집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고 함께 성가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사목회 임원들도 가정기도를 안 하며 레지오 단장이라고 하는 자들도 안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착한 목자가 많이 나오기 위해선 먼저 가정부터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 부모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자녀들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됩니다. 그리고 실상, 우리가 주님의 뜻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 모순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기도하는 가정, 성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정 을 만들고 그리고 그 안에서 착한 목자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협력합시다
9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18 (나) 착한 목자이신 주님
김영남 신부
요한 복음서에는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식의 이른바 ‘예수님의 자기계시’ 말씀이 여럿 나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그 예이다. 이 말씀들은 인류가 참된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밝혀주는 말씀들인데, 오늘 주일에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목자’와 ‘양떼’를 생각하면,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넓은 들판에서, 양들이 싱싱하게 자라난 푸른 풀을 한가롭게 뜯고 있는 그야말로 ‘목가적’ 풍경을 연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이스라엘에는 비가 매우 적게 내리는 광야 변두리 지역 같은 곳에서 양떼를 치는 목자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도 열악하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어려움도 긴장도 없는 목가적인 환경보다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데 마실 물도 푸른 풀도 별로 없고, 이따금 강도마저 등장하는 열악한 환경을 연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착한 목자’를 떠난다는 것은 양떼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착한 목자’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듣는 오늘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성소 특별히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공동체적으로 표현하는 ‘성소주일’이다.
신자 공동체가 예수님처럼 양떼를 사랑하여 당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착한 목자들’을 교회에 많이 보내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날이다.
이렇게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의 목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소주일’에 새롭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목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청중 전체, 더 나아가 ‘그리스도 신앙인’ 전체를 염두에 둔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착한 목자’에 관한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인간들인 교회의 목자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복음말씀의 원래의 뜻을 가릴 우려가 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착한 목자인 인간들’에가 아니라, “착한 목자이신 주님”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초점을 맞추고 더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착한 목자이시다”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이야말로 비유에 나오는 ‘착한 목자’처럼 목숨까지 내어 주시며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 그분은 우리가 약해서 비틀거릴 때, 우리를 찾아와 일으켜 세워 주시며,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위험에 빠질 때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고 살아 가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믿음은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따라서 당연히 ‘교회의 목자들’에게도 요청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목자’이냐 아니냐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착한 양’이냐 아니냐를 먼저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라면 누구나 어떤 직분에 있거나 언제나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주님을 우리의 ‘스승’이요 ‘착한 목자’로 모시고, 늘 그분으로부터 겸손하게 배우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공동체의 참된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진정으로 주님의 소리를 알아듣고 따르는 “주님의 양”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자 공동체의 “착한 목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은 신앙공동체 전체가 교회의 “목자들”을 위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요청한다. 교회의 ‘목자들’이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말고, 주 예수님을 그들의 ‘참된 목자’로 굳게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만큼 양떼들을 잘 알고 사랑하는 “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하기를 요청한다. 이런 기도에는 교회의 목자들이 혹시라도 유혹에 빠져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에서 말하는 자기 욕심만 챙기는 ‘악한 목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그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다짐해야하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복음 말씀에 나오는 삯꾼처럼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마음 속 깊이 “뜨겁게” 느끼며 적극적으로 살도록 노력해야하겠다. 그리스도 신앙을 갖지 않은 분들 중에서도 훌륭하다는 분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천직(天職)”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해 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보든 말든, 개인적으로 고통과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들이 발견한 그 “가치”를 위해 온 삶을 불사르듯이 살아가지 않는가?
10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하느님을 따르는 길
김희태 신부
부활의 은총과 기쁨이 아직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이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교우들의 가정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제 36차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는 우리 각자가 걸어야 할 나름대로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주신 길을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영원한 삶의 결실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길이 곧 <성소>입니다.
그런데 특별성소라 하는 사제직과 봉헌생활은 영원한 생명에 비추어 볼 때 성소의 중요성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훌륭한 은혜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성소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 교회를 풍요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ꡒ성령의 힘에 이끌려 말과 행동으로, 때로는 순교로써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일에 끝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을 아버지로 보여 주십니다. 또 주교, 신부, 부제들의 성품 교역을 통하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을 항구히 보장하여 주시고 다양한 성소와 교역과 은사들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제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교회를 자라게 하십니다ꡓ(제 36차 교황성하 성소주일 담화) 사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구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나 언어, 삶의 방식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마련된 법을 준수하고, 질서를 지키는 것은 모든이들이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육체속에서 영혼이 살아 숨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생활속에서 충실하게 실천하며,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받은 하느님의 소명을 이 세상안에서 충실하게 응답하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성령을 가득 부어 주셨으며, 여러 형태의 봉헌생활을 통하여 당신의 아버지다운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 사랑을 온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십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완전히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교회를 더욱 풍요롭게 하며,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더욱 증폭시키기 위해 교회는 특별히 성소주일을 제정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단순히 교회의 몫으로만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특히ꡒ가톨릭 운동단체들과 어른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청소년들을 계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ꡓ(사제양성에 관한 교령 2항)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봉헌할 많은 젊은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의 성화를 위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들이 더욱 절실합니다.
11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나는 착한 목자
민병섭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을 양 우리를 들어가는 문으로, 착한 목자로 비유하는 이 설교는 제9장과 함께 초막절 동안 행한 설교와 봉헌절 중에 행한 설교 사이의 과도기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실 10장은 소경의 눈을 고치신 사건의 파문을 계기로 개시한 유다인 지도자들을 향한 공격으로 시작되고 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권력자들의 형편 없는 지도력을 비판하시는 이야기는 가짜 목자에게서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고통 당해 왔던 이스라엘 양 떼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예수님의 긴 설교(10,1-21)의 결론 부분에 해당한다. 그것은 대립되는 두 인물을 내세워 앞의 세 개의 비유, 곧 목자와 강도(1-3?절), 목자와 낯선 사람(3遁-5절) 그리고 목자와 삯꾼(11-13절)에서 담고 있는 어떤 일치점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사상은 간단하게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로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목자와 양들에 관한 비유\’는 구약성서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백성과 지도자의 관계(이사 63,11; 에제 34,1-10)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로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뜻만을 전하는 비유가 아니라, 우화와 비유가 혼합된 ‘수수께끼 같은 비유\’로서 예수님의 그리스도론적인 자기 계시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나는 착한 목자이다\”(11절). 요한 복음에서 “나는 …… 이다.\”라는 형태의 표현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고 있는 요한의 전형적인 표현 방법인 것이다. “곧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6,51).
동시에 요한은 이러한 표현으로써 예수님의 역할까지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그분의 신원뿐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도 역시 우리 개개인을 위한 구원의 목자로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활동까지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복음서의 저자는 목자와 양들이 서로 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안다\’라고 하는 말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단순한 인식의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험의 차원을 말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사랑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분께서 착한 목자이시지 결코 “양들을 조금도 생각치 않는 삯꾼\”(13절)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그 양들을 먼저 아시고 그 양들에게 당신 부름에 응답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당신 피로써 당신의 양 떼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셋째 사상은 바로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16절)라는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미 잠재적으로 그분의 양 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양 떼는 이스라엘 백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양 떼 사이에 존재하는 결속은 양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려와서 그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오는 모든 사람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넷째 사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상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으로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18절)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명령에 복종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하여 구체화시키신 아버지의 뜻은 여기에서는 명령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망설임 없이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신다. 어느 누구도, 빌라도도, 유다인도, 다른 사람들도 그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원리 원칙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에만 열매를 맺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께 주어질 영광의 한 국면일 뿐이고 부활과 승천 안에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아버지는 그분을 다시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우리에게 단순한 모델이 아닌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하신 사제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12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착한 마음을 지닌 목자
신은근 신부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나는 착한 부모다. 착한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나는 착한 남편이다. 착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착한 아내 역시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복음의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본다.
성소란 거룩한 부르심이다. 부르심은 만남이 아닐는지. 그러므로 성소란 거룩한 만남이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고, 부부의 만남이며, 사제와 신자의 만남이다. 더구나 이 만남은 주님께서 연출하신 것이다. 어떻게 이 성소를 가꾸어야 할 것인가.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쇠를 주신다. 바로 착한 마음이다. 착한 마음을 지닌 목자가 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착하면 바보라고 생각한다. 할 말도 못하고 남에게 당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착하면 손해라는 생각이 완연해졌다. 그렇게 착해빠져서 어떻게 험악한 세상을 살 것이냐고 한탄한다.
그러나 진실로 착한 사람은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 때문에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성질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엔,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어린이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착한 목자는 이리가 왔을 때 도망치지 않는다\”고 하셨다. 만남의 성소를 가꾸어갈 두 번째 열쇠다. ‘이리’를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해본다. 시련과 아픔이라고 생각해본다.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원망과 보복인가. 자신의 몫으로 돌리는 십자가인가. 십자가로 여기며 정면으로 끌어안는 것이 이리가 왔을 때 도망치지 않는 행위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있다.
십자가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발아 들여야 만남의 관계는 성숙해진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길을 가셨기에 부활이라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실 수 있었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단순하게 성직자와 수도자가 될 것을 홍보하는 그런 주일만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시면서, 내 운명 속에 심어주신 당신의 뜻을 찾아보는 주일이다. 진정 그것이 무엇일까. 조금이라도 해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했다. 고통스런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무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보이는 줄기와 잎의 건강은 뿌리에 달려있다. 화려한 꽃과 알찬 열매도 사실은 뿌리가 좌우한다. 만남의 관계에도 뿌리가 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을 찾아 끝없이 땅속으로 들어간다. 이 뿌리의 역할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다. 성소의 나무를 위해서도 누군가 뿌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 착한 목자로 가는 세 번째 열쇠인 것이다.
모든 성소의 연출자는, 분명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지금의 만남을 주관하셨고 앞으로도 개입하실 것이다. 그러니 내 운명의 미래는 주님의 것이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으면서 이 깨달음을 더욱 확고히 하자.
13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신부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습니다
이규철 신부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앙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1-18) 요셉 신부님,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 부임한 지 벌써 육개월이 지났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뜨거운 가슴에 안고, 마지막 보좌신부로서의 벅찬 희망을 앞세우며, 첫 본당신부로 부임한 후 동창신부나 주교님께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 사목생활의 고충을 요셉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는 마음으로 말씀드리오니 선배님으로, 형님으로서의 조언을 해주십시오.
첫 본당 신부로 부임한 후, 제 나름대로「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5)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전 교우대상으로「본당 신부에게 바란다」는 내용을 주문한 후, 그 내용을 요약하여 사제관 응접실 벽면에 큰 붓글씨로 써서 붙여놓고, 하루에 적어도 3회 이상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기로 하였습니다.
① 모든 미사 30분 전에는 고해성사를 주시는 신부님. ② 고백소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는 신부님 ③ 주일미사나 평일미사 때 성의있게 준비된 강론을 하시는 신부님 ④ 미사를 봉헌할 때 큰 소리로 천천히 정중하게 미사를 봉헌하시는 신부님 ⑤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교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시는 신부님 ⑥ 성당 안에서나 성모님상 앞에서 자주 기도하시는 신부님 ⑦ 특히 어린이 미사 중에 야단치거나 화를 내지 않으시는 신부님 ⑧ 미사 전에 면도하시는 신부님 ⑨ 강론 내용이 중복되지 않게 성의있게 준비를 하시는 신부님 ⑩ 예비자교리를 직접 하시는 신부님이 되어주십시오. 사제품을 받을 때 그 순수한 마음으로‥‥
⑪ 사목협의회나 구역장회의 뿐만 아니라 모든 단체 회합 특히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에 참석하여 훈화와 강복을 주시는 신부님 ⑫ 교우 장례 때 상가(喪家)방문을 빠짐없이 하시는 신부님 ⑬ 장례미사 후에 산소에서 하관예식(下棺禮式)을 정중하게 집전하시는 신부님 ⑭ 모든 단체에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기우러지지 않는 신부님 ⑮ 사제관이나 수녀원보다 성당 관리, 수선, 비품 하나하나마다 비중을 두고 훨씬 신경을 쓰는 신부님 ⑯ 성당 내에서나 외출할 때에는 늘 정복(로만칼라 착용)을 입으시는 신부님 ⑰ 사제관을 방문하는 교우들에게 부담 없이 맞아들이는 신부님 ⑱ 전화 상담이나 개인적인 면담에도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신부님 ⑲ 가급적 외출을 삼가하고 사제관이나 성당 내에서 자주 뵈올 수 있는 신부님 ⑳ 취미나 오락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부님이 되어 주십시오.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라고 하신 주님의 제자답게,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려고 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21) 포켓볼이나 볼링, 골프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 없는 문외한 신부님 (22) 휴일이나 휴가를 모르시는 신부님 (23) 불우이웃을 자주 방문하시고 위로해 주며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은 신부님 (24) 승용차에 여교우를 합승시키지 않는 신부님 (25) 늘 성당 주위가 정리된 환경이 되도록 신경을 쓰는 신부님 (26) 성당 청소를 앞장서서 하시는 부지런한 신부님 (27) 사회 신문이나 TV내용을 잘 모르는 신부님 (28) 개인적으로는 교우집 방문을 하지 않는 신부님 (29)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대말을 할 줄 아는 신부님 (30)특히 어른(노인)들을 잘 모시는 신부님이 되어 주십시오. 「노인을 공경하라」(레위19,32)고 하시며,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다」(루가 16,10)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사시는 신부님을 보고 싶습니다.
요셉 신부님! 괜히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순간순간의 분심이 온몸을 누르는 듯한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하고 교우들을 위해 시작한 일이 시간이 흐를수록 보람을 느끼지만, 힘겨웁게도 느껴집니다. 요셉 신부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정말 힘이 듭니다‥‥
예수께서 비유(예)를 들어 말씀하신「목자와 양」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목자들의 생활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유목 민족이기에 들판에서 수많은 밤을 세워가며, 때로는 더위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을 돌보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일정 한 곳에서 울타리를 쳐 놓고 방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고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마태 18,12)고 하신 말씀처럼 목자의 생활은한 마디로 고달픈 생활, 늘 사슬(고삐)이 없는 자유분망한 양을 따라다니며 지키는 생활이었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목자와 삯꾼」 비유를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는 말씀까지 덧붙여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요한15,16)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확신과 희망을 두었던 사도 베드로와 순교자들, 특히 김 안드레아(대건) 신부님과 최 토마(양업)신부님을 본받아, 온전한 마음으로 최고의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는 성소주일의 기도와 다짐을 재확인 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시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10,17)하신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희망을 두며,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1고린 15,58)하셨으니, 삼십이 아니라 사십가지라도 하는데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필립 1,12).
14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18 (나) 착한 목자이신 아버지께로
최영철 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제1독서, 제2독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즉 제1독서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설교하기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 인간의 조건 속에 현존하심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즉 제1독서(사도 4,8-12)에서 사도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현존은 제2독서(1요한 3,1-2)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모습에서 그 아버지는 착한 목자와 같은 분으로서 양떼로 비유된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 분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위한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분으로서 당신 안에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 말씀(요한 10,11-18)은 착한 목자상을 제시하면서, 그 분은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복음적 맥락에서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그 하느님의 현존과 나의 존재의미인 나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정립하면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마무리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
우리의 하루는 무엇 때문에 달렸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정신없이 지내지 않았나 한다. 이렇게 정신 없이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진지해야 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내가 어떤 삶의 모습을 띠고 있든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현존하여 계시고, 그 현존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해야 된다는 것을 목자와 양떼의 비유로 현실화시키고 있는것이다.
그 현실화는 끊임없는 우리의 방향전환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려야함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양떼가 끊임없이 목자에게 돌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사실상 우리의 삶은 고달프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어디에서나 해야할 일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 자체도 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른 것인지에 대한 의식은 아예 없는 듯이 사는 경우가 우리의 삶의 모습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바꾸자
이러한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커다란 기쁨의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우리를 양떼로 보시면서 목자로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크다하더라도 인간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커다란 아픔으로 허우적거리는지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덴마크의 어떤 철학자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성서말씀의 내용대로 살려고 작정한다. 하지만 그는 성서말씀을 다분히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하게 되고 자신의 삶의 내용도 그런 해석하에서 이루려고 한다. 온갖 노력을 다한 그는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견딜 수 없는 실망감으로 몸부림친다.
자신의 허약성에 대한 실망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은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게 된다. 그는 치유받을 수 없는 그 괴로움으로 해서 더욱 큰 실망의 구덩이로 빠진다. 그는 그 괴로움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는다. 그 순간 그는 그 어느 때에도 체험하지 못한 평화를 느끼게 된다. 그는 구원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이러한 한 철학자의 예를 빌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다운 구원은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마리 양이며 하느님은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면서 오늘을 시작하고 마치는 삶이 우리의 삶일 때, 하느님의 현존은 삶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15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18 (나) 나는 착한 목자
이한택 신부
오늘은 성소(聖召)주일입니다. 성소는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모든 사람이 – 그리스도인은 물론 비그리스도인까지도 포함 –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된 사실을 주님의 부르심이라 하겠습니다. 이 뜻으로는 세상에 태어나는 이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즉 영원한 구원과 사랑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행복하고 싶고 착하게 살기를 원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합니다. 이 갈망의 궁극적인 해소는 주님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이 갈망 자체가 바로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좁은 의미로 성소라고 하면 하느님의 왕국 안에서 각 사람에게 맡겨지는 특정한 사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뜻으로는 신부나 수도자가 되는 것은 물론 결혼을 하게 되는 것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다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또 학자가 되는 것이나 의사가 되는 것이나 또는 농부가 되는 것 중에 부르심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찍이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보내신 서간(1고린토 12)에서 이러한 부르심을 우리 육신의 지체에다 비유하셨습니다.
온 몸에 모든 지체가 필요하듯이 하느님 나라에도 여러 가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개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완성하는 데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는 것은 이 여러 가지 성소 중에서 특별히 성직자와 수도자의 부르심을 보다 더 인식시키려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더 인식시킨다는 것은 결코 성소의 수를 늘린다는 것과 혼동하여서는 아니되겠습니다. 물론 오늘날처럼 신부나 수도자(특히 신부)가 모자란 때도 없었지만 아마 앞으로도 신부가 넉넉할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줍시사고 청하시오”(마태오 9, 37-38)하고 명하신 것을 잊지 맙시다.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다 <그리스도다운> 신부나 수도자입니다. 즉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다운 신부나 수도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다운 신부나 수도자야말로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인 것입니다(2고린토 2, 15) 그리스도다운 사제 또는 수도자가 되려면 그리스도가 삶으로써 가르치신 것을 우리도 삶으로써 증거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가 말로 뿐만 아니라 삶으로써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오늘 복음에 나타난 것만이라도 좀 생각해 봅시다.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요한 10, 11이하).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들 양떼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신부나 수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자기 희생의 정신을 생활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 희생은 자기를 몽땅 바쳐야 하며 기꺼이 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다”(요한 10, 18).
그리스도다운 신부나 수도자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서이고 또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아버지께 봉사하고 양떼인 우리에게 봉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로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이것을 우리에게서도 요구하십니다(마태오 20, 26-28). 무엇보다 잊어서 안될 것은 신부나 수도자가 될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신부나 수도자가 되는 것은 내가 잘나서 또는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1요한 4, 19)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매우 상식적인 동시에 신부나 수도생활을 하려는 이에게는 반드시 묵상하여 볼 만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한 젊은이에게 사제생활이나 수도생활을 권할 때도 용모나 소질만을 보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 젊은이로 하여금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잘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스스로가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겠습니다.
16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18 (나) 나는 착한 목자
김몽은 신부
예수 자신이 착한 목자였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대로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그와같은 사랑과 열성으로 양떼를 돌보는 목자를, 오늘의 교회는 목마르게 원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 종교적 기만 등 온갖 유혹들이 세상 전체에 현란하게 깔려있는 현시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양들은 아직은 분별력이 없고 방향감각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 속이는 자들이 별의별 감언이설을 할 때 혹은 협박과 공갈을 칠 때 어린 가슴에 현혹되거나 놀라지 앟을 수 없다. 사회적 타락은 어느 시대고 있었지만 특히 종교적인 타락과 기만 등은 현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만연돼가고 있다. 특히 ‘묵시록’을 들먹이며 종말의 날짜까지도 예언하면서 떠들어대는 현실이고 보면 착한 목자의 출현과 임무는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막중하고도 시급한 염원의 하나이다.
길잃은 양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양들, 어디에 좋은 풀밭이 있는지를 분간치 못하는 양들을 위해 착한 목자는 바로 길이 돼주고 방향자체가 되어 앞장서야 하며 스스로가 기름진 풀밭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리떼들이 어리고 순진한 양들을 잡아가고 살육하려 들 때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구출해내야 한다. 따라서 목자가 된다는 것은 성숙한 지성과 완숙한 인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타는 사랑의 넋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가장 신비스런 초자연적인 생명을 감지한 사랑의 흐름이며 맥박이다. 그것은 이미 천상의 기쁨, 특히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알고있는 영혼이 아직은 천상적 기쁨이나 부활의 환희를 알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세계에 흘러 들어가는 천상의 감로수(甘露水)와 같은 것이며,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을 연결시키는 교량이기도 한 것이다. 착한 목자는 이렇게 양들의 사정을 자신의 일처럼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요한 10, 14-1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요한 6, 53-58 참조)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목자는 스스로의 살과 피를 깎아줄 정도로, 또 주님께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것처럼 목자는 양을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돼 있어야 함을 뜻한다. 주님은 그 고귀하신 생명을 아니 당신 전존재를 양을 사랑하고 구하는데 쏟으셨다. 이는 가장 위대하고 초자연적 신비의 사랑을, 즉 양들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사랑의 신비를 나누어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물질적인 것, 계산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것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게 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거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대로 가슴을 감동시키는 사랑의 진동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처럼 어린이들은 사랑에 의해서만 참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 없이 자랄 때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양을 기르는 방법은 이와 같이 목숨을 건 불타는 사랑 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착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요한 10, 11).
풀은 누구나 먹일 수 있지만, 신비의 극치인 사랑은 오직 참된 목자만이 먹일 수 있다. 그때 양들은 병들지 않고, 방황하지 않으며, 좋은 풀을 먹게되어 곧고 씩씩하게 자라난다. 이때 양은 자라나 또 하나의 목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곧 ‘신앙의 신비’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적’이다.
사도들은 분명 최초의 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분명히 목숨을 바친 목자들이었다. 그것은 천상의 신비,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것이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성령으로 가득차 부당하게 자신들을 재판하려는 법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불구자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그가 어떻게 낫게되었는가 하는 경위에 관해서 심문을 하는데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된 것입니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4, 8-12)
삯군은 많지만, 참된 목자는 적다. 참목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그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요한 3, 1). 목자와 양은 바로 어버이와 자녀와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목자 밑에서 한 우리의 양’인 동시에 ‘하느님의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17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18 (나) 나는 착한 목자
김대성 신부
사랑을 희랍말로 아가페라고 합니다. 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해타산을 가지고 ‘내가 주면 얼마나 받을까’ 하고 미리 생각하여 행동을 하고 또한 그렇게 사랑을 얘기합니다.
즐거움을 얻을까, 이득을 얻을까 이런 생각 속에서 사랑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조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무조건이란 말은 하나를 주고 열을 받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천 만개를 주고 반 개도 생각치 않는 그런 사랑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장의 형태를 세워놓고 사랑을 얘기합니다. 심장이라는 것은, 온 몸으로 따뜻하고 깨끗한 피를 보내주고, 또한 더럽고 식은 피는 거두어 다시 깨끗하고 따뜻한 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낡은 것 더러운 것을 거둬들이고 새롭고 깨끗한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들에게 활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또 우리의 아픔과 괴로움을 거둬들이고, 우리에게서 더러운 죄악을 거두어 들여서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는 심장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숭고하고 좋은 사랑을 어찌하면 얻을 수 있을까!
계명을 지키라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명을 지키라 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쳐다 보는 이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 모든 사람을 벗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벗으로 삼으셨다함은 여기에 위대함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벗이 되셔서, 당신의 몸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했듯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이웃을 네 몸같이 그렇게 사랑해라 했습니다. 내 이웃, 과연 누가 이웃입니까?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우리들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웃은 바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 남편이요, 내 자식이요, 내 형제요, 내 이웃이요,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십자가로 상징하셨습니다 아픔과 더러움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심장의 비유로 사랑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따뜻해져서 더러운 죄가 사해지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 있는 사람, 고독한 사람, 병이 있는 사람까지도 모두 내 이웃임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실한 아가페 사랑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으며 나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신뢰감을 갖을 수 있어 희망에 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속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나는 기쁘게 산다’는 신앙의 고마움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다시 생각합시다.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다시 닦고 진정한 사랑으로써 대합시다. 만 개를 주고 반 개도 받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하느님께서 주신 그 사랑을 인간에게 모두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참 사랑을 논의합시다.
18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예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어 양치는 목자와, 양을 훔치기 위해 양우리에 몰래 들어가는 도둑을 비교하면서 양들이 과연 어느 쪽을 알아보고 따라가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십니다. 하지만 청중들은 어리석게도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합니다(요한 10,1-6). 그러자 예수께서는 비유에 담긴 뜻을 자세히 풀어서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십니다(요한 10,7-18).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이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데, 예수를 마귀들린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과소평가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요한 10,19-20). 그러니까 청중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도 예수의 정체를 일깨워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 말씀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로서 계시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품삯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일하는 삯꾼들과는 달리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으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우리에 들어있는 양들’(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우리에 들어있지 않은 양들’(이방인들)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분으로서 구원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하느님 계시의 충실한 전달자이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의 온전한 수행자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로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관계라 하겠습니다(요한 10,17-18).
영원무궁한 선재자(先在者)가 하늘로부터 사람이 되신 다음에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끝없는 사랑으로 하나 뿐인 목숨까지 바치면서 양떼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법을 완전하게 깨달으시고 그 사랑을 목숨 바쳐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 있게 “나는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역시 사랑이신 아빠를 본받아 그 사랑을 몸소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빠의 사랑과 그 사랑을 목숨 바쳐 이룩하신 선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끊임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19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서에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식의 이른바,「예수님의 자기 계시」말씀이 여럿 나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그 예이다. 이 말씀들은 인류가 참된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밝혀주는 말씀들인데, 오늘 주일에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목자」와「양떼」를 생각하면,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넓은 들판에서, 양들이 싱싱하게 자라난 푸른 풀들을 한가롭게 뜯고 있는, 그야말로「목가적」풍경을 연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이스라엘에는, 비가 적게 내리는 광야 변두리지역 같은 곳에서 양떼를 치는 목자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착한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도 열악하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어려움도, 긴장도 없는 목가적인 환경보다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데, 마실 물도, 푸른 풀도 별로 없고, 이따금 강도마저 등장하는 열악한 상황을 연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착한 목자」를 떠난다는 것은 양떼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을 듣는 오늘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성소 특별히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공동체적으로 표현하는「성소주일」이다.
신자 공동체가 예수님처럼 양떼를 사랑하여, 당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착한 목자」들을, 교회에 많이 보내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날이다. 이렇게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의 목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소주일에 새롭게 주의를 기울여야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목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청중 전체, 더 나아가 그리스도 신앙일 전체를 염두에 둔 말씀이라는 사실이다.「착한 목자」에 관한 오늘의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인간들인 교회의 목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복음말씀의 원래의 뜻을 가릴 우려가 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착한 목자인 인간들에가 아니라「착한 목자이신 주님」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초점을 맞추고 더 마음을 써야 할 것은,「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착한 목자이시다」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이야말로 비유에 나오는 착한 목자」처럼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 그분은 우리가 약해서 비틀거릴 때 우리를 찾아와 일으켜 세워 주시며,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찾아 나서며, 우리가 위험에 빠질 때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고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믿음은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따라서 당연히 「교회의 목자들」에게도 요청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착한 목자」이냐 아니냐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착한 양」이냐 아니냐를 먼저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라면 누구나 어떤 직분에 있거나 언제나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주님을 우리의「스승」이요「착한 목자」로 모시고, 늘 그분으로부터 겸손하게 배우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주님의 소리를 알아듣고 따르는 「주님의 양」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자 공동체의「착한 목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은, 신앙공동체 전체가 교회의 목자들을 위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요청한다. 교회의「목자들」이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말고, 주 예수님을 그들의 「참된 목자」로 굳게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만큼, 양떼들을 잘 알고 사랑하는「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하기를 요청한다. 이런 기도에는 교회의 목자들이 혹시라도 유혹에 빠져,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에서 말하는, 자기 욕심만 챙기는 「악한 목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그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다짐해야 하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복음 말씀에 나오는 삯꾼처럼,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부르심」을 마음 속 깊이 뜨겁게 느끼며, 적극적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그리스도 신앙을 갖지 앓은 분들 중에서도 훌륭하다는 분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해 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보든 말든 개인적으로 고통과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들이 발견한 그 「가치」를 위해 온 삶을 불사르듯이 살아가지 않는가?
20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샘을 파듯이
노순자 젬마/소설가
소설을 ‘허가 받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사실을 넘어선 허구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사실 이상의, 일종의 생명력이 깃들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읽기는 쉽고 쓰기는 쉽지 않은 특성을 지닙니다.
백년 전에 이 땅에 태어난 소설가 김동인과 현진건의 생명이 깃든 작품들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5년경, 문학비도 유적지도 드물던 시절에 어렵게 사직공원에 세운 김동인 문학비가 언제 어떻게 왜 없어졌는지를 아무도 모르는 채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선 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이 문학의 생명이라던 현진건의 자취는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에조차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아쉬움과 이유에 대해 분분하던 끝에 나온 화두는 한(韓)민족의 유목민 기질이었습니다. 소중한 전통이나 유적을 아끼며 보존할 줄은 모르고 충동적으로 필요하면 만들고 금새 없애는 민족성이 유목민 기질이며 현재의 경제성장 원동력도 폐단도 그 기질이 원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동인과 빙허(현진건의 호)는 행복한 분들이지, 소설이 영상미디어의 시녀로 전락할 것이냐 소멸해서 사라질 것이냐의 위기는 겪지 않았으니…”
누군가의 말에 소설장이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습니다.
얼마 전 ‘스토리 뱅크’에 대한 세미나에서 그들은 활자언어의 쇠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발제는 ‘순수문학의 옹호와 문학의 산학협동’이었으나 텔레비전 드라마 관계자와 만화가, 애니메이션 작가, 전자출판 관계자들은 소설이 어떻게 쓰여져야 드라마 대본이 되고 만화 줄거리를 제공하며 애니메이션에 실제적 도움을 주는가를 열렬하게 토론하였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작업이라는 소설쓰기 외에는 별 능력이나 재주가 없는 소설장이들은 한껏 더 어깨가 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원작, 만화의 원작구실이나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면 그만 사는 게 낫지 않아?”
“그만 사는 걸 마음대로 하나? 시장논리가 진리인 세상이잖아. 소설보다 드라마와 만화의 수요 인구가 많다는 데야 무슨 할말이 있어?”
“새삼스럽게 뭘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샘 파듯 산 사람들은 있어 왔고 타고난 게 샘 파듯 원고지 칸 메우는 일인데 샘 파듯이 사는 수밖에…”
오로지 원고지 칸 메우는 것 외엔 아무 능력을 가지지 못한 소설장이들은 웃었습니다. 그 웃음 끝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습니다.
21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나)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예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어 양치는 목자와, 양을 훔치기 위해 양우리에 몰래 들어가는 도둑을 비교하면서 양들이 과연 어느 쪽을 알아보고 따라가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십니다.
하지만 청중들은 어리석게도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합니다(요한 10,1-6). 그러자 예수께서는 비유에 담긴 뜻을 자세히 풀어서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십니다(요한 10,7-18).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이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데, 예수를 마귀들린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과소평가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요한 10,19-20).
그러니까 청중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도 예수의 정체를 일깨워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 말씀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로서 계시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품삯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일하는 삯꾼들과는 달리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으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우리에 들어있는 양들’(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우리에 들어있지 않은 양들’(이방인들)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분으로서 구원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하느님 계시의 충실한 전달자이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의 온전한 수행자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로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관계라 하겠습니다(요한 10,17-18).
영원무궁한 선재자(先在者)가 하늘로부터 사람이 되신 다음에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끝없는 사랑으로 하나 뿐인 목숨까지 바치면서 양떼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법을 완전하게 깨달으시고 그 사랑을 목숨 바쳐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 있게 “나는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역시 사랑이신 아빠를 본받아 그 사랑을 몸소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빠의 사랑과 그 사랑을 목숨 바쳐 이룩하신 선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끊임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베풀어야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