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4주일
21. 강길웅 신부(다)/35 22. 강영구 신부(다)/37
23. 김신호 신부(다)/40 24. 서웅범 신부(다)/42
25. 유영봉 신부(다)/43 26. 최준규 신부(다)/45
27. 함세웅 신부(다)/48 28. 함세웅 신부(다)/49
29. 김몽은 신부(다)/50 30. 김정진 신부(다)/52
22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3,14.43~52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제2독서 묵시 7,9.14b~17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복 음 요한 10,27~30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부활 제4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날을 성소의 날로 정하여 착한 사제, 착한 수도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특별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양으로 자주 묘사합니다. 양들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보통 목자가 아니라 착한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이익이나 편리만을 생각하는 목자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양을 보호하고, 그리고 양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참된 목자가 필요합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들은 또 자기 목자를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목소리며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도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목소리를 모르면 그분을 따라갈 수 없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으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런 얘기지만, 저와 함께 서품된 신부중의 한 사람이 옷을 벗고 환속을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쩌면 잘된 일이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부터 본래 희생이니 양보니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절대로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친구들이 뭐라고 충고를 했고 또 교수 신부님들이 지적하여 타이르기도 했지만 그 친구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선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고, 좀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이 친구가 스물다섯 살에 사제로 서품 받고 군종 장교로 임관을 했는데 밑바닥의 사병생활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위 아래로 여러가지 고달픈 문제가 생기는데 동창 신부들이 찾아가서 말도 해보지만 귀에 먹혀들지가 않았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그보다 답답한 것도 없었습니다.
제대 후에는 어떤 본당의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가 거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그때 아무리 붙잡고 사정을 하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귓구멍이 꽉 막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못을 벗더니 환속을 했습니다. 그는 결국 결혼도 실패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고생을 합니다. 아직도 뭘 못 알아듣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아들은 유대인뿐입니다. 그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듣고도 배척했습니다.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 타일렀어도 오히려 무시하고 예언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도 나옵니다.
개종한 바오로가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들이 듣고 회개를 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오로를 쫓아다니며 그를 박해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참으로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주님의 업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들, 교사들, 그리고 각종 지도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목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에 참으로 좋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너무도 악화되어 있고 또한 스스로 많은 상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있으며 각종 범죄가 들끓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 누군가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좋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다행스럽게도 성소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소자는 양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문제는 더 중요합니다. 그들이 정말 착한 목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양들에게 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따라서 그분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을 갖도록 합시다.
뿐만 아니라 평신도부터 좋은 귀를 갖고 또 부모들부터 열린 귀를 갖도록 합시다. 땅이 좋아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좋은 평신도의 바탕 위에서 착한 성소자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바로 이것이 좋은 성소자, 좋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지름길입니다.
23 부활 제4주일 요한 10, 27-30 (다) 가정은 성소의 못자리
강영구 신부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며 동시에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주일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신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특별히 우리의 가정에서 주님의 목장에서 봉사할 수 있는 많은 성소자들이 나오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왕에 성소의 길에서 하느님과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성직자들과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성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소란 글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 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물론 교회가 오늘을 성소의 날로 정한 것은 특별히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즉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성소라고 할 때 꼭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는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성소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즉 우리 교회는 평신도, 성직자 그리고 수도자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성원들은 교회 안에서의 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하느님의 한 백성일 따름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각기 맡은 바 고유한 업무가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평신도가 수도자의 일을, 수도자가 성직자의 일을, 그리고 성직자가 평신도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이 교회 안에서 맡은 바 직무를 잘 수행함으로써, 교회는 고유한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계층에 속한 구성원들이 더 중요하고, 또 어느 계층에 속한 구성원이 덜 중요한가 하는 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중요한 직무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신도가 없으면, 성직자나 수도자가 있을 수 없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있기에 평신도들은 은사를 받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토 전서 12장 12절 이하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에는 손, 발, 눈, 코, 귀, 입과 같은 지체들이 있고, 각 지체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고유한 역할을 함으로써, 몸을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게 합니다. 손이 발을 대신할 수가 없고 눈이 입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손과 발이 없는 몸, 혹은 눈과 입이 없는 몸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도 이렇게 각각 나름대로 고유한 직무를 수행하는 구성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 맡은 바 고유한 직무를 일컬어서 성소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 고유한 성소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를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평신도의 성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직 성소나 수도 성소는 평신도의 성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평신도가 없으면,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에서 배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신도 여러분의 가정은,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의 못자리인 셈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평신도들의 성소가 그 어떤 성소보다도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불림을 받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고유한 성소를 완성시켜 가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평신도로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무는 가정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신도인 여러분은 결혼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의 성소를 완성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신도인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정을 성화시키는 일입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이 가정 안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은 기도하는 법과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가정 교육을 통해서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가장은 남편으로서의 역할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그 가정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일은 물론이지만,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 신앙인으로서의 모범과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교육이 될 것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훌륭한 자녀들이 나오는 법입니다.
한편으로 주부는, 아내로서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성소를 받았습니다. 가장을 내조(內助)하는 일과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 살림을 꾸려 가는 일을 성소로 받은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과 자녀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부는 마치 마리아가 요셉과 아기 예수를 대하듯이 가족들을 대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기도함으로써 자녀들을 교육하고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 성소를 받은 부부들은 우선 가정을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성스러운 가정으로 만들어서, 작은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직 성소나 수도 성소는 바로 이런 가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부모들의 모범과 기도 가운데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평신도로서의 여러분의 성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됩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 기도하지 않는 부모, 사랑과 용서가 없는 가정에서 어떻게 훌륭한 성직자나 수도자가 탄생될 수 있겠습니까? 평신도로서의 가정 성소에 충실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결코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오늘 이 사회의 물질 만능, 황금 만능, 그리고 안락과 향락을 추구하는 그릇된 풍조가 우리의 가정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세와 돈과 향락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가정에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할 성직자나 수도자가 나을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사회 풍조에 흠뻑 물든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하느님과 백성들을 위해서 사심 없이 봉사하겠다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요령 좋게 돈을 잘 벌고, 그리고 꾀를 부려서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고, 그래서 자신만의 이익과 안락을 얻는 약삭빠른 인간이 되겠지요. 이래서야 우리 가정과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꿈과 이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고 시련과 고통도 참아 받을 줄 아는 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교육시켜 주시기를 다시 한 번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으로 교육시키십시오. 자기 위주의 편안함과 안일만을 찾는 나약한 사람, 설자리 앉을 자리도 구별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아는 사람, 그리고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키웠을 때, 여러분은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자란 여러분의 자녀들은, 이 사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어느 날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나약하고 버릇없이 키운 대가로 여러분의 자녀들로부터도 버림받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교회는 사심 없이 하느님과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젊은이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없다.\”(마태 9,37)는 예수의 말씀처럼, 오늘 우리 교회는 심각한 성소 부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가정에서 배출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일생을 남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사는 일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탐욕에 찌들어서 돈과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고, 자신의 안락과 편안함만을 찾으려고 애쓰는 이 어두운 세대를 밝혀 줄, 꿈과 이상을 지닌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평신도로서의 소명인 결혼 성소를 비로소 완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가 나온다면, 그보다 더 큰 하느님의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지금 성직자의 길과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돈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가기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다른 세상에서 온 별종들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나약한 인간입니다. 때론 자기 자신 한 몸마저도 추스르기 힘겨워하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의 길에 충실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성직자수도자들이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많은 성소가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24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다) 말이 아닌 삶을 통해 신앙을 심어주어야
김신호 신부
착한 牧者와 순한 羊
오늘은 부활 후 제4주일로서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려지는 주일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목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사목자가 되기 위한 후보생들이 많이 나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관심을 갖도록 하자고 교회가 정한 성소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존재적 특성에 대한 설명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착한 목자라는 특성은 우리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으로 착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존재 특성이,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볼 때 자기와 상반된 것을 동경하고, 자기가 실천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가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종종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착한 목자라는 사실은 양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양은 집짐승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온순한 동물에 속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 중에 예수님을 양에 비유하는 내용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것을 간접적으로 뒷받침 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하고 와서 하는 말이, 이제는 어느 정도 성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의 거치른 산과 거기에서 사육되는 양의 무리를 보고 착한 목자의 비유를 잘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는 내용의 말을 강조하여 그 신부님은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사실 이 말은 매우 의미가 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통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서 눈이 오지 않는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에게 눈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눈을 경험한 사람은 눈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즉시 눈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설명을 통하여 눈의 실체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소주일 행사를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상을 전해주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인식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코 말로써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착한 목자가 되신 것도 결국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기 때문에 성취되신 것입니다. 삶을 통하여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5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서웅범 신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전례의 중심이 되시는 오늘「부활 제4주일」을, 교회는 특별히 성소주일(聖召主日)로 제정하여 지냅니다. 「성소」하면, 사제성소나 수도성소가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생명으로 태어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자신을 포함한 인류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성소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소주일」을 지내며 , 하느님 나라를 위해 참으로 헌신하는「예수님 닮은 착한 목자」들이 이 세상에 많아질 수 있도록 기도함과 동시에, 아울러 우리 각자의 성소에 대해 한번 깊이 묵상하며 나의 삶을 전적으로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개인적으로 저는 올해로 수품(受品)된지 10년째가 됩니다. 별로 길지 많은 세월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이 10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과연 얼마나 제대로 변화되고 성장되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제성소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동기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아침등교 길 학교 문 앞에는 입시학원 광고지를 돌리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돌리는 광고지의 내용은, 대개 학생들이 이미 알고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그 종이를 받아선 이내 버리든가, 아니면 아예 받기를 거절하곤 했습니다‥‥
어느 아주 추운 겨울날, 한 아주머니가 아기를 등에 업으신 채, 예(例)의 광고지를 돌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주머니가 내미는 광고지를 받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춥고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학생에게 거절을 당하고, 또 이내 정신 없이 다른 학생을 향해 광고지를 내미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하는 그 모습에, 왠지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새벽부터 아기를 들쳐업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 세상을 힘들게 애틋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음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뜻 있는 일을 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신부가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에 신학교에 입학을 했고, 그후 10년 뒤에 수품되어 이제 10년째 사제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말씀은, 많은 반성의 소재를 제공해 줍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 회당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제1독서).
요한 사도가 본,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승리의 종려나무를 들고 하느님의 옥좌와 어린양 앞에 서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여, 그 붉은 피로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도리어 희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고, 당신의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착한 목자이십니다(복음). 이같은 담대함과 충실함, 용기와 투신의 자기봉헌, 사랑과 봉사의 정신들이, 과연 내 안에서 얼마만큼이나 철저하게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더 큰
쇄신과 도약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당신 방에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하러 왔느냐?」라는 글귀를 써놓고, 항상 묵상을 하셨다고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걷기 시작한 「하느님의 길」을, 제대로 잘 걷고 있는지?「하느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모습에 맞갖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늘 염두에 두고 사셨던 것입니다.
처음의 순수함과,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향한 열정, 기도하는 삶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탁해지고/ 게을러지고/ 변형되고/ 식어 굳어지지 않은 채, 꾸준히 잘 성장돼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도 마찬가지이실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부르심」을 통해 함께 성장하고, 기쁘게 완성되는 우리 모두이기를 기원합니다
26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다)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유영봉 신부
묵상 : 우리 모두의 성소를 생각해보는 주일이다. 그러나 사계나 수도자 성소의 감소는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소의 감소는 교회 생명력의 약화를 가져온다. 성가정이 없어 성소증가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참으로 행복한 삶
점심 식사 후에 의례적으로 한바퀴 도는 산행길이다. 신학교에 함께 있는 동창신부와 약수터에 이르러 물 한잔하고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데, 가끔 산에서 만나는 다른 동료 신부님 한 분을 만났다, 산모퉁이를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서, 우리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얘!\”하며, 사제생활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신부가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더니, 모두들 입시걱정에, 딸 시집 보낼 걱정, 아들 취직 걱정, 불황에 사업 걱정, 노모 걱정 등등 끝이 없는데,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더라고! 신부는 세상에 살아도 세상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어!\”하며 한마디 보탠다.
동창 신부는 “우리 또래의 신자들이나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요즘은 또 무슨 요구를 할까 해서, 마누라 보기가 겁이 난데.\” ”성당 지을 때면 신부들도 돈 걱정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아옹다옹하는 것은 아니잖아!\”
모두들 사제생활의 자유로움과 가정생활의 번거로움을 한마디씩 한다.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저도 신부가 되고 싶은데‥‥
미사 복사를 하는 초등학교 학생이, 입만 열면 자기는 신부가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집에서 여동생을 복사로 세워놓고, 찻잔을 들고 미사 드리는 흉내를 곧잘 내었다. 그런데 중3이 되더니, 일체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엄마가 “너 아직도 장래 희망이 신부님 되는 것이지?” 하고 물었더니, 머리를 긁으면서, “엄마, 나 신부 되지 않으면 안돼? 나 장가도 가고 싶고, 신부도 되고 싶은데 어쩌면 좋지?”하는 것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성에 눈을 뜬 중학생에게 결혼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국민소득의 증가, 부부 중심의 핵가족화, 성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흐름 등이 성소감소의 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성소주일은, 진로를 결정해야 할 젊은이들에게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일생을 살 것인가?, \’한번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지게 후회 없이 사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권고하며 그 기회를 제공한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떤 삶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는가?\’\’어떤 뜻을 품고 살았는가? 그리고 \’얼마나 그 일을 통해 행복을 체험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에릭 프롬은 인간을 두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어느 것이 이익이 되는가를 찾는 \’이익 추구형(소유형)\’과 어느 것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를 찾는 \’의미 추구형\’이 있다고 했다.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신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기만족을 찾는 동물적인 삶으로는 참 행복을 체험할 수 없다.
사제로 수도자로 봉사하는 삶은 참된 자기 실현과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소주일의 의미
교회는, 오늘 주일을 ‘성소주일\’ 또는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한다. 교회는 하느님과 교회공동체를 위해 몸바쳐 헌신할 수도자와 성직자가 배출되지 않으면 교회의 생명력도 함께\’시들게 된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깊이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성소계발을 위한 노력은 교회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청소년들에게 사제생활과 수도생활의 가치를 일깨우고, 그 생활을 소개하기 위해 각 수도원과 신학교를 개방하고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응답하는 지원자가 없으면, 신학교나 수도원을 아무리 많이 지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 투신할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항상 열심한 신자가정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거룩한 평신도 가정이 없이는 수도성소나 사제성소가 고갈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사제성소나 수도성소가 없는 본당은 토양이 척박한 자갈밭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이나 딸을 신학교나 수도원에 보내기 꺼리고, 사제양성에 무관심하다보면 언젠가는 고해성사나 병자성사를 청하지도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을 지도 모른다. 오늘 특별히 수도자 성직자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성소후원을 위해 함께 뜻을 모으도록 하자.
27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다) 착한 목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길
최준규 신부/
“나는 착한 목자이니, 내 양들을 내가 알아보고, 내 양들도 나를 알아보도다(요한 10,14).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며 성소의 날입니다.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양들인 우리 자신도 목자이신 그분을 따라(요한 10,27)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
목자와 양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모두(우리에서) 이끌어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갑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요한 10,4).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또 양들도 목자를 압니다(요한 10,14).
목자는 자기 양들을 데리고 다니며, 더 좋은 풀밭을 찾아다닙니다. 뜨거운 태양, 척박한 토양 때문에 풀밭을 찾기에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실 물도 넉넉지 않습니다. 때때로 광야에서 양
들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도둑과 강도들의 위협도 받습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여 함께 먹고 잡니다.
해가 지면, 양들은 양우리로 돌아와 밤을 지내게 됩니다. 각기 목자가 다른 많은 양들이 뒤섞여 함께 밤을 지냅니다. 새벽 동이 트면, 목자들은 자기 양을 찾아서 다시 풀밭으로 데리고 나가는데, 양들 자신도 자기 목자를 찾아 모여듭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0,4). 양들은 그를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2,14).
그러면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고, 노심초사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자는 새벽부터 양들을 데리고 나가 좋은 풀밭으로 인도해주고, 거센 비바람을 피할 동굴을 마련해주고, 다치거나 병들었을 때 밤을 새우며 보살펴주고, 길을 잃었을 경우 아흔 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즉시 벼랑 밑에까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강도나 도둑과 위험으로부터, 또 때로는 이리떼의 습격으로부터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들을 보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삯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이 닥치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나 자신보다 더 깊이 나를 아는 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로 부르시면서, 우리들을 그분의 사랑스런 양떼임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우리의 관계가 혈연과 같은 관계, 아니 그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성부와 성자가 맺는 삼위일체의 친교를 반영하는 것임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15).
예수님을 생각하면, 마굿간의 구유와 갈바리아산의 십자가와, 감실 안의 성체가 떠오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마굿간 구유 안에 누워 계심으로써, 헐벗고, 무기력하고, 가난한 인간의 조건에 동참하시는 하느님을 계시하셨고, 공생활 중 당하신 몰이해와 조롱, 수난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십자가형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주시는 하느님을 계시하셨고, 오늘날도 성체성사를 통해 부숴지는 빵의 모습으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위해 먹히는 하느님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유, 십자가, 감실의 성체는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의 표상과 일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안다\”(요한 10,14).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분 자신을 알 듯이 목자도 자기 양들을 압니다.
우리의 주님은 나를 아시는 주님, 나의 처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나의 한계와 결점과 결함을 아시고, 나의 꿈과 희망과 필요를 아시는 분입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약한지, 어느 때 상처를 쉽게 받는지, 내게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 훤히 꿰뚫듯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늘이 무너질 듯한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넘어져 일어서고 싶지 않은 괴로운 순간에도, 범한 죄로 인해 심한 죄책감과 실망의 늪 속을 헤맬 때도, 언제나 주님은 사랑 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너를 깊이 알고 있단다.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깊이 너를 사랑한단다.\”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의 기쁨
착한 목자인 주님과 함께, 사랑 속에 있는 양들은 얼마나 행복할는지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처럼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서 현실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지만, 어린양의 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깨끗이 정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큰 환란을 겪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이제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태양의 뜨거운 열도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며,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묵시 7,16-17).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오늘 묵시록의 말씀처럼, 어린양의 홀리신 피로써 구원받은 사람답게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안티오키아의 신자들처럼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신자들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던 그 날을 기억하면서,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모습을 보다 충실히 따라 살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각 신학교와 수도원은 오늘 많은 청소년들과 일반인들에게 개방될 것입니다. 신학교와 수도원은 일반신자들로 하여금,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목소리에 응답하여 사는 이 삶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또 그분과의 깊은 친교 속에 영위되는 삶이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일인지를 보여주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 함께 동참하자고 기꺼운 초대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주일을 맞이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는 자신이 있는 처지에서 각각 불리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직의 길로, 어떤 사람들은 수도의 길로, 어떤 사람들은 평범한 신자의 길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어떠한 길로 불리움을 받았든지, 주님을 아는 데 힘쓰고, 그분의 목소리에 응답하도록 노력하면서,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당신 양들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착한 목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니, 내 양들을 내가 알아보고 내 양들도 나를 알아보도다\”
28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다) 나를 따르라
함세웅 신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옵니다\”(요한 10,27)
성소 주일을 맞는 오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 모두는 그 부르심(聖召)과 우리의 발걸음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계급의 사회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성직자는 교회의 주인이고, 평신도는 거기에 속한 수동적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차츰 교회 안에 더 고상하고 거룩한 생활을 지향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있고, 최소한의 신앙 생활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신자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고, 수도자나 성직자는 완덕의 신분이요, 평신도의 신분은 계명 준수의 신분이라는 관념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분명히 똑같이 양떼요,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동일한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 제사드리는 사제적 백성\’이라고 사도 베드로께서는 역설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단일한 평신도요, 또 동시에 단일한 성직자,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평신도는 세속 사람이고 성직자는 신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불림을 받았고, 평신도들은 세상에 남아 있도록 된 것은 아닙니다.
간택된 하느님 백성은 하나뿐입니다. 주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구원도, 희망도, 사랑도 모두 하나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서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가 같은 성덕과 신앙에 불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느님 나라란, 단 하나의 건축을 위해, 하는 일은 다르지만 같은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가정생활과 직업 생활 같은 세속 활동을 하니 70%만 주님을 따라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주님 앞에 100% 불림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접할 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세말론적인 복음의 절대성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가정, 재산, 국가 이런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 앞에 내놓으신 부르심은 이렇게 초월적인 것이었고, 그분의 생애 자체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운명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사제나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마음의 헛갈림이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충실성과 자유를 위해 바쳐질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소명을 받지 않은 평신도는 마음이 헛갈려 있다는 말인가? 혼인을 하고, 재산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가 잘못된 일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들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부족한 데가 있는 법입니다.
반대로 성직자나 수도자로 불렸다고 단번에 마음의 헛갈림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그들의 끊임없는 과업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소가, 팔자나 운명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소는, 그들 각자의 성소가 아니라 우리의 성소이고, 우리 교회 전체의 성소란 뜻입니다. 따라서 신학교는 우리의 신학교가 되어야 하고, 가정 자체가 이런 성소의 못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세대에 우리가 음식으로 키워 가는 생명 이상의 또 다른 생명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쳐서 찾아 주신- 이 있음을 보여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는 평화가 있음을 보여 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뿌리박고 살지만, 이곳이 영원히 머물 우리의 거처가 아님을 선포할 이들이 필요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그 대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29 부활 제4주일 요한 10, 27-30 (다해) 아버지와 나는 하나
함세웅 신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옵니다”(요한 10, 27)
성소 주일을 맞는 오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 모두는 그 부르심(聖召)과 우리의 발걸음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계급의 사회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성직자는 교회의 주인이고 평신도는 거기에 속한 수동적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차츰 교회 안에 더 고상하고 거룩한 생활을 지향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있고 최소한의 신앙 생활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신자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고 수도자나 성직자는 완덕의 신분이요, 평신도의 신분은 계명 준수의 신분이라는 관념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분명히 똑같이 양떼요,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동일한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 제사드리는 사제적 백성’ 이라고 사도 베드로께서는 역설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단일한 평신도요, 또 동시에 단일한 성직자,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평신도는 세속 사람이고 성직자는 신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불림을 받았고 평신도들은 세상에 남아 있도록 된 것은 아닙니다.
간택된 하느님 백성은 하나뿐입니다. 주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구원도, 희망도, 사랑도 모두 하나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서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가 같은 성덕과 신앙에 불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느님 나라란 단 하나의 건축을 위해, 하는 일은 다르지만 같은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가정생활과 직업 생활 같은 세속 활동을 하니 70%만 주님을 따라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주님 앞에 100% 불림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접할 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세말론적인 복음의 절대성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가정, 재산, 국가 이런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 앞에 내놓으신 부르심은 이렇게 초월적인 것이었고 그분의 생애 자체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운명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사제나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마음의 헛갈림이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충실성과 자유를 위해 바쳐질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소명을 받지 않은 평신도는 마음이 헛갈려 있다는 말인가? 혼인을 하고 재산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가 잘못된 일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들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부족한 데가 있는 법입니다. 반대로 성직자나 수도자로 불렸다고 단번에 마음의 헛갈림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그들이 끊임없는 과업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소가 팔자나 운명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소는 그들 각자의 성소가 아니라 우리의 성소이고 우리 교회 전체의 성소란 뜻입니다. 따라서 신학교는 우리의 신학교가 되어야 하고 가정 자체가 이런 성소의 못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세대에 우리가 음식으로 키워가는 생명 이상의 또 다른 생명-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쳐서 찾아 주신-이 있음을 보여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는 평화가 있음을 보여 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뿌리박고 살지만 이곳이 영원히 머물 우리의 거처가 아님을 선포할 이들이 필요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그 대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30 부활 제4주일 요한 10, 27-30 (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
김몽은 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를 당신의 행복에 참여토록 초대하셨다. 창조를 시작하시는 순간부터 모든 우주를 우리 인간의 행복한 삶의 터전으로 준비해 오셨다. 우리가 설 땅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가 먹을 음식, 우리가 숨쉴 공기를, 우리가 보고 즐길 산천초목을 꾸미시며, 우리가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을 우리 곁에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온 땅위에 인간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풍부히 부여해 주셨다.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우리 인류에게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신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통해서다. 아브라함은 보잘 것 없는 유목민족의 한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 보잘것ㅇ 없는 목동 출신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인류에게 풍부히 내려오는 통로와 관문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떠나라. 나는 너에게서 수많은 백성이 나오게 할 것이며 너를 축복하겠노라. 너를 축복하는 자 나에게서 축복을 받을 것이며 너를 업신여긴 자 나에게서 저주를 받으리라. 너로 말미암아 땅위의 모든 백성들이 나의 축복을 받으리라.”
이러한 하느님의 일방적인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의 자세로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순종해 버렸다. 일개 목동으로서 자신의 무력함과 보잘 것 없음을 잘 아는 아브라함이었지만 일단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자신의 무력함은 문제가 되지 않고 모든 일이 순조로히 풀려 나가는 것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무력함과 볼잘 것 없는 모습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사랑과 자비의 크기를 깨닫고 기뻐했으며 복된 일생을 보냈다. 하느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아브라함의 이러한 복된 인생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아니 아브라함보다 몇 갑절이나 더 복된 인생으로 초대하고 계시다.
다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을 전달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도구를 필요로 하신다. 아브라함과 같이 나약하고 미소한 존재이지만 그 나약함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이후 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자신의 무기력함 안에서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이 땅 위에 눈부시게 꽃피고 열매를 맺는 줄기와 통로의 역할을 했다.
하느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신의 도구를 우리 안에서 찾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보면 숫자적으로는 분명히 옛날보다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아직 가톨릭은 전 인구의 3 펴센트 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합쳐서 전 인구의 1할이 될까 말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현대 세계는 예전과는 달리 사회 전체가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들고 있어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통로가 오히려 조금씩 막혀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세계 전체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모든 가치를 물질적으로 저울질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진실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도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요구하는 이 세대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눈에 보이도록 중개해 주는 인간 매개체와 통로가 전보다 몇 배나 더 필요하다.
우리 교회가 구원의 단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도구화 할 수 있는 영적인 인간이 많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증거가 없을 때 교회는 인류에게 아무런 구원을 가져다 주지도 못하고 실제로 아무런 매력도 없어집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교회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도구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어 내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사제 성소는 물론이요 수도자의 성소 개발을 위해서도 총력을 다해야겠습니다. 또한 평신도로서 보다 적극적인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는 이들을 길러내야 하겠습니다. 불과 천 여명밖에 되지 않는 사제들만으로 3천 5백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역부족이고 벅찬 것입니다.
반드시 신품성사를 받지 않아도 사회의 각 분야에서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신앙의 기쁨과 보람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투사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비교적 좁은 테두리 안에만 알려져 있는 사제들보다는 가정생활, 직장 생활을 통하여 사회 전역에 퍼져 나가 있는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식을 투철하게 가질 때 아주 훌륭한 구원 사업을 펼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각층의 성소를 다양하게 개발해 나가기 위해서 우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가정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너무 근시안적으로 자녀들이 장래에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만 있도록 준비해 주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가정은 자녀들로 하여금 자기 한 몸을 떠나서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인생이며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 배우게 하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성소 개발에 두 번째로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본당이다. 본당 신부님과 본당 교우 전체가 합심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봉헌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장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겠다.
31 부활 제4주일 요한 10, 27-30 (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열네 번째 맞는 성소(聖召)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목자로서 양떼를 지키시고자 당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교회는 오늘을 성소주일로 정하고 양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본받아 착한 목자가 될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둘째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성직자들이 자기 소명에 항구하고 자기 사명에 충실한 목자가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무릇 우리 신자들은 자기네 구원과 영생을 얻는데 직결되는 성직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자기 사명과 성무이행에서 만족과 보람을 느끼고 건강과 축복이 함께 하도록 항상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요한 사도는 착한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소신이며 생활양식이기도 합니다. 자기 벗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도와 주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은 확실히 착한 목자의 특징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우리 생활의 반성과 각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러 말씀 중에서도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 양들을 데려다가 돌보아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양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라는 언명은 오늘 성소주일의 뜻을 더 깊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양우리 안에 들어있는 신자들 뿐 아니라 양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 즉 외교인, 비신자, 타종교인들 모두를 돌보아 주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하느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무도 말하지 앟고 설교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이 들을 것입니까(로마 10, 14-15). 예수님의 음성, 즉 하느님의 말씀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이에 헌신하는 이들이 반드시 가정과 세상일에서 떠나 조금도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면서 평생을 바치는 젊은이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신앙교리와 신비적인 면을 이 세상 곳곳에 그리고 모든 세대에 알리기 위하여 이를 읽고 전하며 널리 전파하는 남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소와 복음전파와의 밀접한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듯이 당신 공생활을 통하여 모든 백성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 줌으로써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도 좋은 모범을 주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루가 8, 1). 예수님은 이렇게 함으로써 가장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복음 전파의 전도자이시며 거울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날 적에는 당신의 복음 전파의 사업이 인간에 의해서 계속되기를 원하시면서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코 16, 15) 라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 같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주님의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모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으시고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으로 삼아 온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교회 전체는 파견된 것이며 복음 선포는 하느님 백성의 근본적 임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복음 전파를 담당할 젊은 남녀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 시각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대신하여 인간 구원 사업을 도맡아줄 협력자를 간곡히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 본당 젊은이들 중에 이에 응하는 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기도 올려야 하겠습니다. 젊고 씩씩하고 관대한 열의와 박력 있고 풍부한 행동력이 있는 용감한 젊은이들이여! 예수님의 이 간절한 부르심에 선뜻 “예” 하고 선뜻 나서지 않겠습니까. 신학교나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는 문을 개방하고 여러분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많은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 성소의 길은 하느님의 은총 하에 여러분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여러분의 결단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신자 여러분! 신자 가정은 제일의 신학교이며 수녀원이라 합니다. 열심한 가정에서 기도생활과 좋은 표양으로 어린이에게 성소의 싹이 트게 하여 장차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성소를 위한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기도를 다 같이 바치기로 합시다.
주여 간구하오니 많은 성소의 은총으로 당신 교회를 계속 풍부하게 하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 또한 많은 이들이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해 주시고 그들의 응답으로서 관대한 정신과 충실한 순종으로 당신 교회에 기쁨을 주도록 항구하게 해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