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5주일
24. 강길웅 신부(다)/44
25. 강영구 신부(다)/45 26. 김신호 신부(다)/49
27. 김태진 신부(다)/50 28. 유영봉 신부(다)/53
29. 김정진 신부(다)/55 30. 김창석 신부(다)/57
31. 황익성 신부(다)/58 32. 낮에는 종(다)/60
33. 이규철 신부(나)/61
24 부활 제5주일 (다해) 사랑의 아이러니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4,21b~27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 주신 모든 일들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제2독서 묵시 21,1~5a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복 음 요한 13,31~33a.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소망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그 어려움이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보다 또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때로는 사랑받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아이러니입니다.
오늘 1독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4년 동안 많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신자들은 날로 부쩍부쩍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각 도시의 신자들에게 당부합니다. ꡒ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ꡓ
믿는 것은 쉽지만 믿음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양심적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손해볼 때가 많으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잠 못 자고 몸부림칠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믿음 때문에 오는 박해가 많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거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피땀흘리는 노력 없이는 그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2독서는 또 그와 같은 내용을 암시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묵시록의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집이며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때는 하느님이 사람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흘렸던 모든 이들은 그때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울었던 사람은 평화의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영광을 돌려주십니다. 이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누가 자기 아들에게 도움을 줘서 그 부모에게 영광을 주었다면 그 부모는 당연히 그 영광을, 도움을 준 그 사람에게 돌려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하느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영광을 우리에게 열 배, 스무 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새 계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겐 600개도 넘는 많은 율법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백성들에게만 무거운 법의 짐을 지워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일목요연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율법의 핵심이며 또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로서, 이것은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필로로서, 우정이나 자연적인 부모의 사랑이나 스승의 사랑 등을 말합니다. 셋째는 아가페로서, 초자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 죄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병자들에 대한 사랑 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주 내용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에로스나 필로는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다릅니다.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입니다.
세상에는 원수도 많고 마귀도 많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많으며, 해는 끼치지 않았다 해도 거부감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하느님께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특히 희망이 없는 인생들,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심한 말로 밥맛 없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 세상을 환하게 열 수 있고 또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합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25 부활 제5주일 <요한 13, 31-33. 34-35> (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사랑
강영구 신부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서를 펼치면 온통 사랑하라는 이야기이고, 저도 강론 때마다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도 사랑이라는 말이 빠지면 아예 노래가 되지 않을 지경이지요. 그만큼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은 휴지 조각처럼 널려 있어도, 정작 참사랑은 그리 흔치 않은 듯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시대에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구태여 사랑이라는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서 신명기 6장 4-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은,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입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온갖 아름다운 말로 사랑을 거론하면서도, 정작 사랑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닌, 실질적인 사랑을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분은 속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우리가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먼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절에서 예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는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저 높은 곳에 앉아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同情)을 베풀 수는 있어도 사랑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동정은 베푸는 것이고,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동정으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명절 날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는 것은 동정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선물을 받는다고 고아나 외로운 노인들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고아는 고아로 남아 있고 외로운 노인은 외로운 노인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지 않고 불쌍한 처지를 동정하셨더라면,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셨기에 인간이 되셨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어서 사랑하게 되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성녀라고 칭송받는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를 아시지요? 인도의 빈민가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생명들이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은,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그 빈민가에서 그들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처지로 살면서 그들을 돌보고, 또 서로 돌보도록 가르치기에 버림받은 생명들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각박하다고 합니다마는 참사랑의 삶을 사는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을 보고, 아직도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몰로카이 섬에서 나병 환자가 되어서 나병 환자들과 함께 살다가 돌아가신 다미안 신부님을 잘 알고 계시지요? 나병 환자들의 불쌍한 처지를 아시고 처음 그 섬에 도착한 다미안 신부는, 나병 환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건강한사람이 나병 환자들의 수용소인 그 섬에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나병 환자들은 건강한 다미안 신부가 자신들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정을 베풀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미안 신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셔서, 그도 나병 환자가 되었을 때, 몰로카이 섬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미안 신부가 나병 환자가 되어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나병 환자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다미안 신부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참사랑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산송장들이 사는 섬, 절망과 죽음으로 가득한 섬이 생명으로 용솟음 치는 섬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자신들을 사랑하는 다미안 신부를 만난 나병 환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그 섬은 죽음의 섬이 아니라 낙원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자신을 낮추었을 때 가능하게 되고, 자신을 낮추었을 때, 비로소 동등한 입장이 됩니다. 사랑이란 상하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 대등한 입장이 되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참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에는 “눈 높이 사랑이니, 눈 높이 교육\”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자주 실리고 있습니다. 눈 높이라는 말은 곧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등한 관계가 이루어질 때, 서로 편안해지는 법입니다. 사랑이란 무슨 엄청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서로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가 서로 편안해지고 부모 자식 사이가 편안해지고 스승과 제자 사이가 편안해지고, 이웃 간이 편안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눈 높이로 자신을 낮추면 그렇게 편안한 관계가 되는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우러러보아야 할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셨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벗이 될 수 있었고,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편안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주위에 죄인, 떠돌이, 세리, 창녀, 버림받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도 그 때문이고, 그들이 예수와 더불어 편안함을 누리면서 새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에 모든 것은 새롭게 되고, 거기 희망과 생명이 피어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 있고,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사람이 있고, 서로 사이가 불편하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라면, 그런 곳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음은 분명하고, 거기 하느님 나라가 없음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오늘 제2 독서를 통해서, 사도 요한의 묵시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도대체 사도 요한이 묵시록에서 말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어떤 곳을 말합니까? 하늘 저 높은 곳, 별나라 건너편에 있는 어떤 곳을 말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별천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새 하늘이며 새 땅”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고 새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눈물이 씻겨지고 웃음과 기쁨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기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 천당, 혹은 천국이라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정 안에 있고, 이웃 사이에 있고, 우리 본당 안에 있고, 이 땅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만 이 나라를 저승이 아닌 이승에서 누리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참사랑은 이렇게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변하게 하고, 이웃 사이를 천국으로 변하게 하고, 이 땅을 천국으로 변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생명력으로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도 당신처럼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의 요구가 무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언감생심 어찌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그 무슨 엄청난 것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서로가 눈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것, 그래서 서로 편안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서로 눈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을 낮추어 봅시다. 거기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일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26 부활 제5주일 (다) 사랑은 현실이다
김신호 신부
사랑의 이중적 개념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섯 번째로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만큼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 중에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매우 구체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개념에 속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개념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 안에서 그 실체가 개체적으로 파악되는 것, 또한 사실일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볼 때, 개체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많은 경우에 감성적인 의미를 중점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감성적인 면으로 볼 때 매우 달콤하고, 달콤한 그 정도에 비해 실패한 후의 상처도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흔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이러한 감성적인 요소만이 강조되는 성질의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목숨도 내놓는 사랑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는 새 계명에 해당하는 사랑에 대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는, 사실 예수님의 유언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이러한 당부의 말씀을 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하나의 당위성으로 내세우신 이유가 당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곧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인간으로서는 실행하거나 선택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하나의 의지적인 행위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하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감상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인양 착각하는 신앙의 행위는, 사실 언제라도 기분이 안 맞으면 하느님을 버릴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27 부활 제5주일 (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
김태진 신부
살아오는 동안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변두리 산동네의 사글세방, 기껏해야 값싼 전세방에서 삶을 가꿉니다. 가꾼다기 보다는 마지못해 삽니다. 돈이 없어서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혼식도 못하고 동거하던 때에는, 끼니를 거르면서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쳤지만, 냉혹한 세상은 날이 갈수록 삶을 찌들게 만듭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감격의 눈물
안정감 없는 막노동 일에 지쳐 한잔 걸치고, 한잔 두잔이 술주정이 되고, 사랑스럽던 아내가 잔소리 많고 앙알대는 마누라로 보여 실컷 두들겨 패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한(恨) 많은 삶을 욕지거리로 소리소리 질러대고, 지쳐버린 여자들은 가출하기도 하고, 부부갈등이 행복해야 할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하며, 많은 아이들이 소아 정신병에 시달려 또 다시 가난에 찌든 삶을 이어갑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 입니다. 남들처럼 뾰족하게 배운 것도 없으니, 능력위주의사회에서는 가능성 없는 삶일 뿐이고, 기껏해야 방 한칸 짜리 일지라도 쫓겨나지 않을 보금자리를 얻으려는 소박한 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가슴이 터질 만큼 그렇게 기쁜 일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러니까 맞벌이 부부들에게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애기방(탁아소)이 장마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집수리를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낮에는 일터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애기 아빠들, 엄마들, 대학생 선생님들이 모여서 집수리를 하는데, 이날은 낮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에 있던 한 아빠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모래와 시멘트를 그냥 마당에 두었는데‥‥비 맞으면 안 되는데‥‥ 누가 알아서 비 맞지 않게 덮어놓을까?\”하고. 비가 계속 올 듯 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공장 주인에게 사정을 하고 헐레벌떡 단숨에 동네 꼭대기에 있는 애기방 대문을 열어 제끼는 그 순간, 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심전심이라고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지, 다른 아빠들 모두가 벌써 모여서 걱정하던 일들을 끝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겨운 눈물이 무엇인가를 잊고 지낸 세월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그런 적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아빠들 눈에서 눈물이 고였습니다. 가슴 터지는 이 순간에 사랑을 확인하는 눈물을‥‥
‘나눔의 삶\’을 체험하는 행복
이런 체험이 있은 뒤에,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어쩌면 생활이 궁핍한 만큼 소유에 대해 욕구와 집착이 강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눔의 삶\’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제 비록 없는 살림이지만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았습니다.
그동안 명절을 잊고 지냈으나 그 해 가을에는 추석을 맞아, 애기방 마당에 전등을 달고, 자리를 깔고, 송편 만들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아줌마들은 물론이고 동네 할아버지들까지 모였고, 늦게나마 일 나갔던 아저씨들도 함께 하여, 정성껏 송편을 만들었습니다. 송편은 골고루 나누어졌고, 엄마가 가출해서 쓸쓸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아저씨네 집에도, 미처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돌아다니며 송편을 나누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김치도 없이 겨울을 나던 세월들을 걷어버리고 공동김장을 하였고, 함께 일하는 즐거움과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나눔의 신비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공동작업 거리를 찾아내고 있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공동작업을 계획할 때마다, 이제 사람들은 으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일하는 날,\’ 응어리졌던 갈등들과 창피스러워 꺼내지 못하던 말들을 다 끌어내고는 한바탕 웃음에 실어서 날려보내는 그런 ‘신명나게 노는 날,’ 그리고 ‘집수리 하던 날\’ ‘송편 만들던 날\’ ‘김장하던 날\’의 기쁨을 ‘기억할 수 있는 날\’로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틀림없이 기쁜 날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고통을 통해 이뤄지는 교회공동체
부끄럽게도 저희 교회라든가, 공동체라든가 하는 말들을 흔하게 쓰면서도, 자신 있게 설명할 만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체험도 부족하지만, 이같은 가난한 이웃들의 삶이야말로 교회공동체의 시작이 아닐까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고통과 갈등을 통해 얻어지는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가려는데, 인간이기 때문에 느껴야만 하는 나약함, 무력함, 이중성 때문에 고민하고,(사실 저는 정의, 평화,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계속 실수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고, 드러나고 싶어하고, 인정받으며‥‥ 그렇게 살고 싶은 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하고는,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그런 내 모습 속에서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시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 아파하며, 괴로워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마음을 열고(비우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을 때, 자기 삶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사랑의 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괴로움의 여정과 하느님 체험이 자기 안에만 머물지 않고,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친구들에게 고백할 때, 공감하는 동료들의 체험이 모여 교회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
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노력하는 가시밭길 여정에서, 비록 모든 것을 버리기에는 너무도 이기적인 저와 우리의 모습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보여진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할 때, 더 이상 나 혼자만의 교회가 아니요, 모두가 함께 모여 사랑을 나누는 교회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원수 같은 가난이라 치욕스러운 가난이라, 그렇게 찌든 모습을 드러내기도 싫고, 자존심 상해서 서로도움을 청하지도 나누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그들만의 고유하고 소박한 공동체를 이루듯, 우리도 우리의 고유한 교회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눈 앞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슬픔 때문에 아파하는 오랜 시간들, 제 자신의 끊이지 않는 강한 욕망 들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지루한 시간들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8 부활 제5주일 <요한 13,31-35>(다) 참된 사랑, 우리 인생의 숙제
유영봉 신부
묵상 :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있다. 배가 불러도 가슴이 고프면 살지 못한다, 가슴은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다. 참 사랑을 체험하고 구원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숙제다.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이 껍데기다.
구멍 뚫린 내 가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실직 때문에 실업자가 한꺼번에 늘어나고, 가장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편의 실직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떠나는 아내들이 많아진다는 보도도 있고, 가난을 비관하여 가족이 동반자살을 한다는 보도도 있다. 그런데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넘는, 소위 말하는 최첨단 복지국가는 실업수당만으로도 생계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이고, 모든 복지시설이나 제도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복지국가의 자살률이 우리보다 더 높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은 “그놈들 호강에 겨워서 제정신이 아니겠지 뭐!\”하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설명되는 일이 아니다.
물질적인 궁핍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굳이 병명을 붙이자면 ‘의미상실증\’, 또는 ‘실존 공허증\’이라고나 할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가져보고 누려보았지만, 남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의미를 느낄 수 없는 ’구멍 뚫린 내 가슴\’뿐이라는 말이다.
뚫린 가슴은 무엇으로 채우나?
우리는 단군 이래 최대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았다. 그런데도 마음놓고 밤에 나다니기가 겁이 나고, 학생들이 마음놓고 학교에 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살인 등 강력 사건과 청소년 자살도 급증하고, 이혼도 급증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인간화된 것이고, 우리의 가슴이 허해진 것이 사실이다.
정치판과 관료사회 뿐만 아니라 금융, 대학, 병원, 법조계 등 구석구석이 참으로 골고루 썩어 \’총체적 부패상\’을 노출하고 있다. 공사판에서부터 법조계에 이르기까지 임기응변과 눈가림 아닌 것이 없다. 종교계라고 크게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런 사회상은 우리 모두에게 삶의 허탈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각계각층에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를 위한 봉사라는 의식은 아직도 희박하다. 집을 짓는 사람, 옷을 만드는 사람,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모두 누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일 안에서 참된 보람을 얻을 수 없다.
누군가를 참으로 위하는 삶이 없을 때,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공허를 채우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비록 일 자체가 성직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자세가 없을 때, 그는 품꾼에 불과하게 된다.
가족을 위하는 깊은 사랑이 없을 때, 가사 일도 무겁고 힘든 멍에가 될 수도 있다. 이기적인 껍질을 벗고 남을 위하는 사랑의 삶을 살 때만이 \’의미상실증\’과 \’실존 공허증\’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遺訓)처럼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사랑을 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픈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하려 한다.
자기 방식대로 하는 사랑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내 방식대로 내 기준대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가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방식은 우리를 위한 제물로 자신을 완전히 내놓는 그런 사랑이었다.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간에도, 상대방이 완전히 나와 같아지기를, 나에게 맞춰주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려고 하면, 참된 사랑은 이미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큰 관심으로 지켜보며, 상대가 자기다움을 지니며 살도록 배려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주변의 모든 \’너\’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 사랑의 출발이다.\”
이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만이 더불어 살면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에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시면서도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길이 있음을 깨닫자. 참으로 ‘서로 사랑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숙제임을 명심하자.
29 부활 제5주일 요한 13,31-33a 」4-35 (다) 사랑의 새 계명
김정진 신부
오늘은 벌써 부활 제 5주일입니다.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예수님은 전대미문의 색다른 계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미사의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이 사랑의 새 계명을 받아들이며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새로운 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말씀과 정신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없이 들어왔고 예수님의 일생은 사랑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다음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같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성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첫째도 사랑이요, 둘째도 사랑이요, 셋째도 사랑이라고 가르쳤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 졌으며 그는 어느 사도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배웠고 또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문자 그대로 따른 충실한 제자였음을 드러냈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예수님의 마음이나 생활의 원칙은 사랑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일관하시다가 사랑으로 세상을 마쳤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의 신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었고 사랑의 실은 예수님의 생애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벗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언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당신의 말씀을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하시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나는 당신들에게 새 계명을 하나 주겠습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라고 감히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참되고 진실한 사랑은 큰 희생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기 일쑤이고 이웃을 칭찬하기보다 헐뜯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미움과 비난을 받으며 부당하게 침해를 당할 적에 남을 용서해 주기란 퍽 어려운 일입니다. 억울함을 참아 견디고 분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의 잘못을 깨끗이 잊고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영웅적인 사랑의 행위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알뜰히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고까지 가르쳤습니다. 구약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애 21,24)라는 동태(同態)복수법 혹은 탈리온 법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마태 5,44)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상에 달려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즉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새로운 사랑의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계명을 성 스테파노는 철저히 본받으며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무참히도 돌로 쳐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마소서>(사도 7,60)하며 원수들을 용서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우리 이웃을 자기 몸 위하듯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목숨을 바쳐가며 실천한 영웅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저 망망한 대해인 태평양을 향해하던 여객선이 있었습니다. 며칠간이나 불어닥친 폭풍우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거센 파도는 산더미처럼 닥쳐와서 여객선을 금방이라도 삼켜 버릴 것 같습니다. 여객들은 모두 겁에 질리어 창백한 얼굴에 산송장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요행을 바라며 살아날 욕심으로 구명대를 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객선은 드디어 파선되고 모두가 파도 위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두 젊은 부부가 구명대도 없이 금방이라도 죽어갈 처지였습니다. 다행히 구명대를 두른 두 선교사가 보고는 『저 사람들은 자녀들이 있을 터이니 차라리 우리가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생명과 같은 구명대를 그 젊은 부부에게 넘겨주고 자기네들은 용감하게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지나가던 배에게 구조되어 구사일생으로 생환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지만 언제나 두 선교사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의 영웅적인 죽음이야말로 예수님과 같이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가며 사랑의 길을 걸은 가장 좋은 산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아멘.
30 부활 제 5주일 요한 13,31-33a 34-45 (다)이웃사랑
김창석 신부
며칠 전에 어느 목사를 만났는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의 크리스천들은 신․구교를 합해서 1천만 명이나 되며, 이는 한국 총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많은 숫자이다.
그런데도 이 사회의 혼란과 부패는 여전하다. 그러므로 이 사회의 혼란과 부패에 대해서 크리스챤들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 목사의 지론이었다.
우리나라 전 인구의 4분의 1만이라도 청렴하고 깨끗하다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밝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사회는 마치 크리스천들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암담하게 부패되어 있다.
그 동안 크리스천들이 이웃에게 준 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크리스천들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보다 수백 억 원이나 들여 큰 교회당을 짓는 데 더 정신을 쏟는다. 그리고 교회당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데만 급급하다. 그래서 이웃에게 위압감을 주게 되고 다들 교회 옆에서 사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크리스천들은 수적인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걸핏하면 여의도 광장에 수십만 명이나 수백만 명이 모여 행사를 한다. 1984년 5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 103위 순교자들의 시성 미사를 여의도에서 지냈을 때, 여의도에서 사는 어떤 분은 제발 천주교만은 우리에게 불편을 주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크리스천들은 서로 분열되고 서로 잘 싸우기로 이름나 있다.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크리스천끼리 다투는 소송 건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양보할 줄 모르고 저돌적이란 평이 있다. 종교인들이 좀 양순해야 할 텐데 더 따지기 잘하고 배타적이란 말이 많다.
교회가 기업화됐다는 말도 있다. 교회당을 사고 팔고 또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만 교회에서 우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가 마치 수퍼마켓이나 복덕방처럼 되어 간다고 한탄하는 이들도 많다. 신문기자들은 교회를 국제적 주식회사로 쓴다고 들은 적이 있다.
크리스천들이 이웃 사랑을 별로 안 한다는 말이 많다. 판자 집 동네에 들어가서 그곳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사는 신부․수녀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나와서 잘 쉬고 영양 보충을 하고 다시 들어가니까 판자 집 동네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다지 사정이 딱한 사람들은 아니다. 이렇게 이웃을 소홀히 하는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을까? <요한 1서> 4장 20절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참다운 이웃 사랑의 사례가 더러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성당 근처에 한 크리스천 부부가 살고 있는데, 그 남편이 5년 전에 어느 증권 회사에 취직하는 한 친구의 신원 보증을 서 준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 그 친구가 수억 원의 회사 돈을 축내고 감옥에 갇힌 사건이 일어났다.
신원 보증을 서 준 부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느닷없이 법원으로부터 차압 통지를 받았다. 5천만원 짜리 집이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이 부부는 며칠 전에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친구를 찾아갔다. 가서 보니까 그 친구의 형편이 매우 딱하고 어려웠다. 이 부부는 그 친구에게 “우리는 아직 젊으니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서 없었던 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훌륭한 이웃 사랑의 표본인가? 집을 잃은 그 부부에게는 오히려 큰 기쁨과 행복감이 깃 들게 되었다. 그 부부는 집을 잃고도 너무나 태연해서, 사람들은 그 부부에게 집이 또 한 채 있는 줄 알았을 정도다.
우리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살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해서 살 재미가 없는 것이다.
<요한 1서> 4장 16절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31 부활 제5주일 요한 13,31-33a 34-45 (다)새 계명-서로 사랑하시오
황익성 신부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서로 사랑하시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잠시 후에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막연하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이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까?
1) 예수님은 자기를 잊고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상한 사랑에도 자기란 것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사랑에서의 소득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얻고 고독과 공허감을 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이 사랑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혹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유일한 염원은 자기 자신과 모든 소유를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려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희생적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은사와 그 사랑이 할 일에는 한이 없습니다. 만일 사랑이 십자가라면 그것도 지실 결심입니다. 사랑이 행복만 가져온다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결국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은 고통도 가져오고, 십자가도 요구합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든 약점을 잘 아시면서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의 가장 못된 점들을 알고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과 여러 해를 같이 지내셨으므로 그들에게 대해 아실 것은 다 이시고도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맹목”이라 하나 맹목적 사랑은 실망으로 끝나지만 참 사랑은 그 사랑의 장단 전부를 보고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생긴 대로의 우리의 향상을 바라보고 사랑하십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장이 곤란해지면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요, 예수께 친구가 가장 요구될 때 다 주님을 버리고 달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 가능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구한 사랑은 용서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하는 반면 용서를 모르는 사랑은 죽어버립니다.
사랑의 실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를 잊고, 희생적이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원칙을 따라 살며, 그 나라의 특색을 발휘시킴이 우리들의 본분일진대 실패하면 우리는 맛 잃고 빛 잃은 신자가 됩니다. 주께서 그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보다는 선을 행하라(루가 6,35)는 적극적 행동입니다. 악도 아니요, 선도 아닌 것은 무용입니다(묵시록 3,16).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 부자의 인격이나 사생활이 나빴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아니한 것이 그의 죄였습니다. 젊은 부자도 계명을 다 지키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치 않았으나 선을 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지 말라”라는 도덕을 “하라”는 도덕으로 대치시키셨습니다.
십계명을 훌륭히 지켜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란 말로 인간의 모든 의무를 간추리셨습니다. 교회의 요소는 자기 보호가 아니라 자기를 내주어 남을 돕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하셨는데 그것을 실행할 힘은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입니다. 교회의 표적은 곧 친절 애타(愛他) 관대 등 미덕으로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그것을 철저히 실행하여 교인들은 물론 교회 밖의 사람들도 그들의 사랑과 봉사를 부러워하며 그들은 별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이래 지방적 혹은 세계적 구제사업도 다 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니 이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32 부활 제5주일 <요한 13,31-35> (다) 낮에는 종, 밤에는 왕
인간불행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는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사람은 죽으면 먼저 「슬픔의 나무」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 서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그가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수고와 고통의 짐을 벗어 그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대신 그곳에 이미 걸려있는 것 중 어느 것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과 바꿔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가 지고 왔던 것보다 덜 불행하고,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을 고르다가, 결국은 대개 자기가 걸어놓았던 것들을 도로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자기가 당한 고통과 슬픔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고 또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만 알았는데‥
그리고 남들은 다 행복하고 편하게만 사는 줄 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며 신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그들을 격려합니다. 또 제2독서에서 요한은「눈물, 고통, 슬픔, 울부짖음, 죽음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마지막 때」에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실 때에는 언제 어디서나 현실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하느님 나라, 새 하늘 새 땅」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나의 새로운 계명, 곧「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하느님 나라, 새 하늘 새 땅」을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위해 인내와 사랑의 실천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째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의 욕심과 나태, 이기심 때문에 자초하는 세속적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그것을 인내하면서 기도-애덕 실천으로 봉헌-승화하려 하기보다는, 회피-포기함으로, 결국은 신앙과 생활의 생명력을 잃는 경우가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종들에게 모질고 인색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물질적인 풍요 가운데서도 항상 심신이 피곤하고 삶이 괴로웠습니다. 그 까닭은 그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인데, 꿈에 그는 종이 되어 늘 어떤 못된 상전 밑에서 혹독한 종살이를 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실제로 부리는 종 가운데는 항상 웃는 낯으로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노인이 한분 계셨습니다. 고된 노동을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늘 만족해하는 그를 불러,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비록 낮에는 종으로서 힘든 삶을 살지만, 밤만 되면 「꿈에 나라님이 되어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에 있어 낮과 밤이 반반씩인데, 낮에는 종살이를 하더라도 밤에는 임금이 되니, 어찌 낮의 괴로움을 원망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다 뜻있는 것, 그는 낮에 종살이를 하면서, 밤에 임금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부자도 낮과 밤의 참 의미를 깨달아,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세상은 분명 지나가는 「낮」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은「일을 할 때」이고, 편안한 쉼을 위해 부단히 준비를 해야할 때입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죽을맛이더라도 지금은 세상의 그 노고를 감수인내하고, 또 영적인 싸움에 철저히 임해야 할 때입니다. 인내함 없이 그런 것들을 다 회피하고, 지금부터 편히 살기만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영원한「새 하늘 새 땅」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고통」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처절히 체험되는 이즈음, 고통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예수님을 알게 될 때, 이 세상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눈물, 고통, 슬픔, 울부짖음, 죽음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이 될 것입니다.
33. 부활 제5주일 <요한 15,1-8> (나) 하늘도 땅도 통곡
이규철 신부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론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기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요한 15,,7).「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사형언도를 받은 니콜라오(교도소에서 세례 받음)에게 교화 담당신부로서 물었을 때 「어머님을 꼭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필자는 74년9월-87년4월 안양교도소, 95년2월~97년2월 수원교도소 천주교 종교위원으로 재소자 교화담당).
지난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며 마지막으로 불효 자식으로서의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 사십이 넘도록 홀어머니(67세)를 제대로 한 번 모시고 살지 못했으니, 혹시 얼마간의 유산이라도 남기기 위해서 뵙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통념적인 생각으로 니콜라오의 어머님께 연락을 드려 모자상봉을 마련해드린 일이 눈에 선합니다. 「한 여름밤에 고슴도치는, 새끼 고슴도치를 품에 꼭 껴안고 잔다고 하는데‥‥ ? 하는 생각을 하면서 ‥‥」
어느 부모 막론하고 자식 잘 되기를 바라며 한 평생을 산다고 하는데 ‥‥ 니콜라오는 유복자(遺腹子)였습니다. 결혼한 지 육개월도 안되어 아버지는 6․25 전쟁터에 끌려가 전사한 후, 니콜라오 어머니는 금이냐? 옥이냐? 하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이사 43,4) 유복자 아들이 원하는 일이라면 하늘의 별을 따서(?)라도‥‥ 기침이 심해 잠을 이루지 못하면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냇가의 얼음을 깨고서라도 붕어를 잡아 다려 먹이면서까지 키운 자식인데, 어쩌자고 이지경이 되었는가? 니콜라오 어머니의 한(恨) 많은 한평생의 이야기는, 장편소설 한 권이 모자를 정도의 애환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서울로, 말이 새끼를 낳으면 제주도로‥‥보내라」는 말대로 소를 팔고 논과 밭까지 팔아가며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올려보내어 공부를 시켰는데‥‥ 이모 집이 불편하다고 하면 학교 가까이 하숙을 시키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중 땅까지 팔아 공부를 시켰는데‥‥급히 용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급전까지 빌려가며 공부를 시켰는데‥‥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이게 웬 일입니까? 니콜라오 어머니는 불자(佛子).
대학원까지 나와 직장에 입사했으면 됐지! 무슨 영문인지 사업을 한다고 어거지를 써가며 집까지 저당 잡혀 자가용을 굴리며(70년초에는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이 별로 없었음) 큰 소리 뻥뻥 치더니‥‥그것도 양에 차지 않아 이모집까지 은행에 저당 잡혀 무역을 한다고, 비행기를 시내버스 타듯이 하더니,
「니콜라오 아버지도 무심하시지! 아들이 사형언도 받기까지 하늘 나라에서 무얼 했남유?‥‥」 서울로 올려보낸 후 30여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장독대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불공을 드렸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4대 독자요 유복자인 아들을 대신해서 이 에미가 죽을 수는 없습니까? 자식을 키우는 재판장님! 자비의 부처님! 사랑의 예수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식을 잘못 다스린 이 에미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어떻게 합니까? 법대로가 아니라 그저 살려만 주신다면 무기징역도 좋습니다. 종신징역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숨죽이며 모자상봉을 지켜보던 이들의 눈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머니에게 잘못을 청하며, 용서를 청해야 마땅할 아들은 악을 쓰며 어머니의 팔목을 물어뜯으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마치 개싸움을 하듯 어머니를 끌어안고 땅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진짜 나를 낳은 어머니라면, 내가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언제 한 번 회초리를 든 적이 있었습니까? 안돼! 한 번한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언제 한번 울어 본 일이 있었습니까? 큰소리 한 번 내신 일이 있었습니까‥‥제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자식을 잘못 키운 어머니 탓입니다. 야단이라도 한 번 치셨으면 이렇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 대신 죽어야 합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어머니!‥‥ 」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아들은 지쳤는지‥‥ 아니면 기운이 다 빠졌는지, 어머니 품에 안겨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어머니!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게 다 제 탓입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통곡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는 겁니까? 늘 매섭게만 다스리던 교도관도,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동행하였던 사람들도, 하늘도 땅도 통곡하였습니다. 위로할 말도 잊었습니다. 철창 밖에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단풍잎도 슬피 울어야만 했습니다. 가을 바람마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윙! 윙!‥‥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4~5). 다칠세라, 그르칠세라, 조심조심 타이르시는 어머님의 말씀과 훈계를 잘 받아들였다면,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보다도 넓은 어머님의 사랑의 눈길을 스스로 외면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들 하나 잘 되기를 몸부림치시며 살아가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잊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 5). 이제는 더 이상 하느님의 시야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충동에 현혹되지 말고,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여 떨어져 나가는 안스럽고 억울한 일은 없어야하겠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단 들고 올 때 춤추며 기뻐하리이다」(시편 126, 5)하셨으니,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처럼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신 하느님 앞에서「잘난 체 하지 않게」(야고 3, 14)하옵소서. 혼자 다 컸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