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부활 제 7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주일 주일 강론 모음

 

예수 승천 대축일


        24. 김몽은 신부(다)/40

        25. 함세웅 신부(다)/41           26. 강길웅 신부(다)/43

        27. 강영구 신부(다)/45           28. 유영봉 신부(다)/48

        29. 김신호 신부(다)/50           30. 서웅범 신부(다)/52

        31. 당신들은 이 모든 (다)/54   32. 당신들은 이 모든 (다)/55

        33. 이기명 신부 /57



24      예수 승천대축일 루가 24, 46-53(다해) 당신들은 이 모든 일의 주인,

김몽은 신부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이 주일의 초점

오늘은 예수 승천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어 있는 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신 사실을 기념한다.

“예수께서 그들(사도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들로부터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

루가는 이렇게 그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담담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역사 하신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메시지란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곧 예수는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인간들이 행한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모든 민족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는 기쁨인 것이다. 그래서 성서를 복음(기쁜 소식)이라 한다.



우리 교회의 활동은 바로 이 사실들을 증거하는 데 있다. 증거 방법은, 말로써, 글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자 개개인의 생활로써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로 복음의 사실들을 증거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 2,14-17). 그런데 그와 같은 믿음의 증거는 인간의 힘만으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의 힘 없이는 우리는 결코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다. 때로는 피로써 증거해야 할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인간의 힘만으로써 그러한 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 주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을 위해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



이는 예수님의 승천이 있는 후 10일 만에 일어났다. 주님의 부활하심과 하늘로 오르심은, 당신의 근원이 하느님이시고 원래가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계셨던 분이시기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주님의 승천이라는 영광스런 광경을 목격하고 기쁨에 넘쳐, 성전에 모여 하느님을 찬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실 분(성령)을 기다렸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거저 주셨습니다”(에페 1,5-6).

우리는 이 사실을 온 천하에 전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현대에 있어서는 현대적인 방법을 통해서 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현대는 매스컴 시대이다. 우리 교회도 이 매스컴을 통해서 활발히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오늘을 매스컴 주일로 정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매스컴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함께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키 위해 노력하자.

사도들은 엎드려 예수님을 경배했다. 루가복음은 이와 같이 주님을 경배하고 예찬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주님의 부활과 하늘로의 승천은 당신의 본 위치로 되돌아 가셨음을 뜻하고, 이제는 영(성령)으로서 만민 안에 사시기 위해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만민은 그로서 각자의 가슴속에 친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위해 주님께로 향하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마땅히 성령을 모시고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삶으로써 자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할 것이다.











25        주님 승천 대축일 <루가 24,46-53> (다)   하늘로 향하는 신앙인

함세웅 신부



교회 전례의 전통을 따라 예수 승천 축일은,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톨릭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아, 사목상 신자들의 짐을 덜어 준다는 의미에서 부활 제7주일에 승천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축일의 변동은 한국의 특수 환경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에 해당되는 날은 예수 공현축일(삼왕내조), 성체 축일,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과 오늘 지내는 예수 승천 축일입니다. 우연히 주일과 일치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해당 축일의 다음 주일에 이러한 축일들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선 승천(하늘에 오르셨다)이라는 단어의 뜻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어원적인 뜻은 ‘제사를 바치다\’, ‘번제의 향기를 올리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 예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죽고 부활하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는, 사실 부활의 신비, 구원의 신비를 논할 때, 같은 주제에서 논하고 묵상하고 생각할 주인공입니다.



제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바치고, 바쳐진 제물의 향기가 하늘에 오름은, 바로 내 마음 내 뜻이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제물과 제사만의 현세의 일에 매여 있지 않고 그 결과를, 즉 미래를 바라다보게 해 주는 것에 승천의 의의가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그 예수는 우리 모두의 부활의 보장이기도합니다. 지상 생활에 대한 상급은 후세에 가서 영혼만이 받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고 실천한 나의 육체도 공동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라는 뜻은, 지상에서 생활한 육체적인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고, 바로 완전한 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나의 구원, 부활의 보장이 바로 이 축일의 의의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지만, 성령이 오시면 예루살렘뿐 아니라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땅 끝이라는 이 표현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계속성, 단계성, 그리고 일치성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지리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그 예루살렘을 기틀로 잡되, 지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 무대가 이제는 온 세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구약과 신약,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성령강림축일을 교회의 창건일로 지내는 전례적 이유가 있습니다. 루가는 부활과 승천, 그리고 강림축일의 기한을, 명시적으로 47일 오순절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견해가 더 옳은 듯합니다. 십계판을 받기 전에 40주야를 준비한 모세, 예수의 40일간 광야에서의 재계 또는 구약에서 40이라는 수가 의미 있는 수이기에, 루가가 이 의미를 살렸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어떻든지 부활하신 예수와 승천하신 예수는 시간적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전례적, 상징적 의미에서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축일에 우리는 부활의 기쁨, 부활의 개선을 마무리지으면서, 미래의 새 설계를 합니다.

충만한 기쁨 속에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곧 나의 제헌이 하늘로 향하고 있음을, 그러면 나의 제헌은 하느님의 은총을 끌어내려, 성령이 내려오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고 감사드리는 나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희망의 또 다른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26               예수 승천 대축일 (다해)   승천은 새로운 강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에페 1,17~23 (그리스도를 하늘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복 음 루가 24,46~53 (예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확신과 희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 다음 우리에게 돌아올 영광의 예표요 보증인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 7,13).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떠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말한 작가는 루가뿐입니다. 루가는 사도행전과 루가복음 두 권의 책을 썼는데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사실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예수님의 승천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은 먼 나라에 계셔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이별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더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의 슬픈 장면이 아니며 새롭게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만나는 기쁨과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신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오셔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떠나심과 동시에 새롭게 찾아 주신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자녀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떤 자매님이 찾아와서는 이야기 끝에 주님은 자기를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았고 너무도 서운함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어느 한 시기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옥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는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거나 어려운 때, 그리고 슬프거나 외로울 때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 대축일에 산이나 들에서 야외 미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이지 산이나 들만이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은 또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또 그 분이 우리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어떤 장소와 시간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원하는 시간마다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시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을 때 신부님께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그러셨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사셨으면서도 하느님을 못 보았다고 하십니까? 자, 여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하며 성체를 영해 주시는데 형제는 그때 비로소 주님의 현존을 체험했다면서 지나온 생에 대한 감사와 회개를 눈물로써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옛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 좀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사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존재 방법으로 우리 앞에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승천의 믿음을 활짝 엽시다.











27       예수 승천 대축일 <루가 24,46-53> (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대인

강영구 신부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승리자로 하늘에 오르시어 개선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세계 홍보(弘報)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늘 들었던 제1독서, 사도 행전은 예수의 승천을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 사도 행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저 높은 곳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승리자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승천이라는 사건은, 예수를 승리자로 선포하는 사건이며, 예수의 구원 사업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사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또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오르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사도들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장엄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말에 의하면, 승천하신 예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재림하실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흰옷 입은 두 사람은 타볼 산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그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실 때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라고 성서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흰옷 입은 두 사람, 즉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즉 그 두 사람은 예수께서 이미 구약에 마련된 율법을 완성하고 예언을 성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인간들의 구원 사업을 성취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승천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예수께서 하늘 저편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떠나가셨음을 의미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 행전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시자, 마침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모습이 사라졌을 뿐이지 결코 예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고 우리와는 관계없는 저 멀고먼 하늘로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고 제자들의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류 구원 사업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승천하시어 승리자가 되신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시대,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면서 그분이 성취하신 구원의 은총을 누려야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 사업을 성취시키신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왕이요 구세주로 함께 계시는 새로운 신앙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오늘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 오르신 하늘을 동경하면서 멍청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서있다고 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막연히 하늘을 바라보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하늘 나라에 오르는 발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하늘 나라로 오를 수 있는 발판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삶이 그릇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나라에 오르신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도록 사셨기에 당연한 결과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사람들을 온갖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끝내 그분은 사랑하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마저도 십자가 위에서 바치셨습니다. 그 결과가 부활이요 승천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의 삶이 저 땅속 어두운 곳으로 꺼져 들어가야 할 삶이었더라면, 그분이 아무리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할지라도 부활과 승천이라는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당연히 하늘로 오르셔야 할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늘 나라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예수께서 오르신 저 하늘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사는 인간은, 하늘을 향한 존재이지 저 땅속 어두운 곳으로 꺼져 버려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하늘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향해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산 사람들은 하늘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부끄러운 사람들은 하늘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불행한 것은, 사람들이 막연히 하늘에 오르기를 동경하면서도, 살기는 땅속 저 어두운 곳에 꺼져야 마땅할 모습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싸우고 다투면서 자신만을 위한 탐욕을 만족시키려고 어둡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어울릴 수도 없고, 그런 사람들은 하늘에 오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땅속 저 어두운 곳이 제격입니다.

  

적어도 하늘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이 늘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딱히 우리가 하늘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는 것은,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은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계시듯이, 인간은 그 어디를 가나 하늘 아래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몸을 숨긴다 할지라도 하늘을 피할 도리는 없습니다. 온 하늘이 이 땅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자가 되신 예수께서 땅속으로 꺼져 들지 않고 하늘로 오르셔서, 그 모습이 사라지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승리자이신 예수, 우리의 왕이 되신 예수는, 그 어디라 할 것 없이 곳곳에 계시는 분이 되셨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두려워하면서 하늘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은, 승리자가 되신 예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늘로 오르신 예수께서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하늘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우리 동양에서는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승리하여 살아남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필히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 곧 천명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뜻이 아닌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소인배(小人輩)와 대인(大人),즉 군자(君子)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데, 소인은 자기의 뜻을 고집하면서 자기 뜻대로 살고, 대인 군자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우선 눈앞의 이익과 편함을 찾고 이웃과 형제에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삶이 자기 뜻을 좇는 소인들의 삶이요, 이런 삶이 이 세상을 아귀다툼의 장소, 지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뜻을 좇는 소인들에게는 하늘나라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소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을 주장하면서 살기에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망쳐 먹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지옥이 제격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옥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대인 중의 대인, 군자 중의 군자 곧 온 인류의 주님이 되셔서 하늘에 오르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아시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인 소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이 온 땅을 감싸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도 모든 것을 감싸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겠지요? 너그럽고, 부드럽고, 남을 탓하지 않고, 용서하고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그러다 보면 거기 “나\”라는 이기적인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텅 비게 됩니다. 텅 빈 것이 곧 하늘입니다. “나\”가 아닌 하늘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목숨마저도 포기해 버리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리신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한 인간이 아닌 하늘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분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고 비우면, 거기 모든 것을 감싸는 하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이 땅에 하늘나라를 만드는 사람이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처럼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늘에 오르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 땅을 먼저 하늘 나라로 만들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자렛 사람 예수는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믿고 섬기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앙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같은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 가정을 하늘 나라로 이 땅을 하늘 나라로 만들어 갑시다. 망연히 하늘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 땅을 바라봅시다. 소아(小我)에 집착하면서 아귀다툼하는 삶을 그만둡시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는 하늘이 됩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28                    주님 승천 대축일 (루가 24, 46-53)(다)

매스미디어는 인간을 세뇌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유영봉 신부



 묵상 :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주님의 이 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있어 홍보매체의 활용은 필수적이다. 매스미디어(대중전달수단)를 진정한 상호 소통, 친교, 일치를 위한 수단이 되게 해야 한다. 이는 TV와 신문에 세례를 주는 일이다.



이 일을 어쩌나?



본당 신부님과 청소년부장, 주일학교 교사들이 한 자리에 앉아 청소년들의 이런저런 문제를 이야기하던 중에, 지난해(1997년) 가출 중고생들이 자취방, 여관방을 전전하며 음란비디오를 제작하여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이야기도 나왔다, 더 섬뜩한 것은 어른들이 그 테이프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여, 십여만원에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런 무책임하고 가증스런 어른들이 사는 사회엔 이런 문제 학생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의 책임이 크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문명의 이기(利器)인 VTR이 청소년들을 탈선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도구로 전락한 셈이다.



참 홍보는 복음전파로 인류의 일치를 구현하는데 있다․

  

승천은 지상생애의 완결이며, 교회의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하나의 장(章)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르 16,15)하시며 교회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다. 교회는 주님의 이 명령을 받들어 구완의 기쁜소식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기에, 주님승천 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지내고 있다.

홍보란 문자 그대로 \’널리 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널리 알려 서로 통하게 함\’ 즉 상통(Communication)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 말은 친교, 일치를 뜻하는데 이는 주님과 하나되고 형제들과 하나되는 영성체(Communio)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홍보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통하여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친교와 일치는 진리에 바탕을 둘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의 진리야말로 전 인류의 일치를 가져올 수 있는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홍보매체는 인류의 일치를 가져올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사람들에게 진실된 정보를 알려 신뢰와 친교와 일치를 도모해야 할 홍보매체들이, 홍보수단을 독점한 기업들의 상업주의와 정치적 목적에 악용됨으로써 불신과 타락, 혼란의 주범이 되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보고 있다,

여기에 교회가 홍보주일을 제정하고 홍보매체의 올바른 사용을 외치는 이유가 있다,



TV에 구원의 세례를 주자

  

인간의 역사는 의사전달 수단의 발달에 따라 대화를 통한 구전(口傳)문화시대, 활자매체에 의한 인쇄문화시대, 전파매체에 의한 전자통신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요즘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안방에서 세계 여러 대학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며 참으로 정보의 바다를 왕래할 수 있다. 위성통신시대를 맞으면서 세상 구석구석의 모든 일을 TV화면을 통해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CNN방송을 통해 중계되는 걸프전(戰)을 불꽃놀이를 구경하듯 앉아서 지켜볼 수 있었다,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가 된 것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의사전달 수단을 매스미디어라고 한다. 매스미디어는 인간을 세뇌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똑같은 TV 프로를 보면 나중엔 의식수준이 비슷해진다고 한다. 인간은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느냐가 좌우된다. 반복되는 TV광고를 보며 짜증을 내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그 광고에서 알게 된 약품이나 상품을 찾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교수는 이런 TV의 위력을 일컬어 \’전능하신 TV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혼(魂)과 정신을 지배하는 20세기의 신(神이라 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는 구원의 신도 될 수 있고, 멸망의 신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불량 미디어가 범람할 수록 영혼의 양식이 되어 우리의 영(靈)을 맑게 하고 인간다움을 지켜줄 성서, 신심서적, 그리고 교회 홍보물과 방송 등을 가까이 하면서, 우리 자신을 지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할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도적 내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매스미디어에 부여하여 인류공영의 큰 기대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은 특히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매스미디어 교령, 1항)고 하였다. 매스미디어가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세례를 줘야 한다는 말이다, 신문이나 방송의 모니터를 열심히 하면서 방송이나 신문을 감시하는 것도 좋은 활동이 아닐 수 없다.











29     예수 승천 대축일   <루가 24, 40-53> (다)   고정관념에 얽매인 현대인

김신호 신부



우리는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여러가지 소식을 듣거나 또는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경험은 감각기관과 뇌의 작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많은 경우에 자기가 경험한 사실들이 현실적으로는 실제와 다르게 감지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학문의 연구를 통하여 확인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린이 앞에서 마술을 하는 것과 어른 앞에서 어른 앞에서 마술을 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쉬운가 하는 질문을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 앞에서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대답을 했고, 이에 대해 그 사람은 어린이 앞에서 마술을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설명을 하였다.

  

그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어른들이 갖고 있는 지각의 과정은 계속되는, 반복 경험을 통하여 하나의 습관성에 의한 고정적인 기능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을 속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고정된 지각의 과정만을 알면 되지만 아이들은 이러한 고정된 지각의 과정이 아직 형성되지 않고 있으므로, 하나 하나의 현상을 분석적으로 보기 때문에 아이들을 속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고정된 지각 경험을 토대로 하여 상식이라는 개념을 창출해내고 있다,

상식이라는 것은 건전한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범위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이 범위 내에서 인간들은 서로 큰 어려움 없이 상통할 수 있게 된다.



초월을 거부하는 상식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실제적으로 인간을 습관적으로 살게 하는 데 용이한 역할도 하지만 이러한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실들에. 대하여는 매우 어려운 입지조건을 제공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식을 초월하는 사실에 접할 때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써 간단하게 거부하는 경향에 빠지게된다, 특히 자연적인 현상을 넘어서는 현상에 접하거나 또는 그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사람이나 글을 통하여 접했을 때 우리는, 초자연적이라는 말로써 이해하기를 포기하거나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오늘 루가가 전하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이야기도 이렇게 보면 하나의 믿기 어려운 허황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초자연적인 사실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현실 앞에 우리는 서있게 된다.

예수님이 특히 제자들을 베다니야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주시고 축복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내용은, 과학적인 지식에 젖어 실증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문제 해결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이해하기\’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으로 블 때 인간은 초월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현상을 동경하고 있고, 또한 그 같은 초월에 대한 동경이 긍정적인 면에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영원에 대한 향수병적인 심적 경향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질 수있다.



인간은 한정된 삶 속에 자신을 찾는 과정을 인생이라는 여정 안에서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는 한시적인 존재이지만 여전히 무한이나 영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이러한 개념의 실체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바로 초월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얼마 전에 일본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오움 진리교의 교주가 자기 수련을 쌓아 염력으로 자신의 몸을 공중으로 띄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의 글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이것이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 교주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도 이러한 단순성에서 받아들여야지 어떤 복잡한 분석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단순할 신앙의 눈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30     주님 승천대축일 <루가 24,46-53> (다)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서웅범 신부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던 올리브 동산 꼭대기에 「주님 승천 기념경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예수님에서 승천하실 때 밟으셨다는 돌(石)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꼭 그 돌! 위에서 마치 로케트가 하늘을 향해 발사되듯 그렇게 승천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승천사건 그 자체는 성경의 증언을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제1독서),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 아니라면, 세상을 초월하시는 그분께 승천이라는 현상은 전혀 불가능하거나 신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구원의 대업을 완성하시고 아버지의 나라로 승천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처럼 영광 중에 개선 승천하신 예수님을 기리며, 구원은혜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우리들 자신의 참모습에 대해 묵상하게됩니다.



크리스천들은 이미 「승천한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지체인 몸이 함께 하늘로 올라감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승천은, 곧 그 지체인 우리들의 승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이 아직 땅에 매여있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이미 하늘의 그분과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친히 확인해 주신 사실입니다 : 「너희가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안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 (안해 준 것)이다」(마태 2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J(사도 9,4). – 그러므로 아무리 나의 현실이 보잘것없고 비참한 것으로 체험되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본질상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는,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오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결국 마지막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묵상하며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사업을 완성하시고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마음으로 하늘에 오르셨을 터인데, 아직도 이 세상에는 죄악과 죽음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에서 구원의 승리를 이루고 개선 승천하셨음에도, 그러한 비구원의 행태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이 날이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듯한 현실에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더 큰 사명감을 자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구원사업의 그 완성을 당신의 제자들인 바로 우리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20)



세상을 구원하는 일, 이 세상을 사랑과 평화, 기쁨의 하느님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은 예수님 혼자 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의 일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 땅을 다스리게 하셨음」(창세 1,28)같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셨던 「빵의 기적」과 같은 구원의 업적을 오늘날 우리들이 「사랑의 나눔」을 통해 계속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보여주셨던 화해와 용서의 모범, 십자가상 죽음을 통한 사랑의 절정을 모든 크리스천들이 본받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어서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히 자기의 일, 골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믿으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지금 우리를 굽어보고 계십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선함과 성실함으로 세상의 구원을 이루며, 결국 우리 또한 천국에로의 몽소승천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1       예수 승천 대축일 루가 24,46-53(다해) 당신들은 이 모든 일의 증인



매우 이름높고 덕성스러운 어떤 기사가 성지 순례하러 팔레스티나로 갔다. 그는 순례를 합당하게 하려고 우선 경건하게 고백을 하고 영성체를 한 다음, 제일 먼저 간 곳이 말씀의 거룩한 잉태가 이루어진 나자렛이었다. 거기서 하느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베들레헴으로 갔다. 베다니아로 가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을 묵상하고, 사막으로 갔다. 단식하시는 예수님을 뵙고, 그리고 다시 시온으로 갔다.



마지막 저녁을 잡수시며 성체 성사도 세우신 것을 보니, 게세마니 동산에 들어가 피땀을 흘리며 죽어 가는 고통과 체포되어 압송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예수님이 안나, 가야파, 빌라도, 헤로데의 저택을 이리저리 끌려 다닌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는 매맞고, 조롱당하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시는데, 슬픔에 잠겨 슬피 우는 예루살렘 부인들도 회상하였다.



이윽고 그는 갈바리에 올라갔다. 공중에 높다랗게 세운 십자가와 거기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몸, 그 온 몸에서 흐르는 피, 그리고 예리한 칼날에 찔리듯 마음 아파하시는 그 어머니를 바라보고, 죽으시고, 창에 찔리고, 장례 지내는 광경을 묵상하고, 무덤 안에까지 들어가 자기 마음도 함께 장사지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엠마오에도 가보고, 끝으로 승천하신 자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랑의 탄식을 하며 이렇게 호소하였다.

“오, 예수님, 이제 이 지상에서는 당신을 더 찾을 곳도, 더 따라갈 곳도 없나이다…. 이 마음, 당신 따라 하늘에 계신 당신 곁으로 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듯, 자기 영혼도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가 별안간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보고, 그를 급히 의사한테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의사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는, 그의 심장이 격렬한 사랑을 견디다 못해 터진 것이 틀림없다며, 자기 진단을 확인하기 위해 심장을 열어 보았다. 과연 심장은 찢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나의 사랑 예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신애론 7권 12장 참조).



예수님이 하늘 나라에 개선 입성하신 사실을 성서에서 보고, 우리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라고 고해한다. 이처럼 누구도 이 세상에 길이 머문 사람은 없다. 예수님도 그랬고, 성모님도 그 밖의 많은 성인들도 그랬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하늘에 올라가기를 갈망해야겠다. 해바라기가 언제나 해를 따라 돌 듯이 “주바라기”로 언제나 주님만을 쳐다보고, 주님만을 뒤따르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로사이 3,1-2)















32        예수 승천대축일 루가 24,46-53(다해) 당신들은 이 모든 일의 주인



예수께서 승천하셨다. 이 사실은 주님으로 우리와 더 긴밀히 계심을 가리킨다. 이제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이 “주님 믿습니다”, “주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던 말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 능력의 주님께서 더 가까이 계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의 승천하심을 경축하는 날이며 세계 홍보의 날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40일 간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그들이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것이다. 이는 나자렛 예수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잘 드러낸다. 오늘 예수께서 승천하심을 알리는 복음과 사도행전의 말씀을 돌이켜 보자.



복음은 루가복음의 끝 부분인 24장 46-53절의 말씀인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여러 번 반복하여 확인시켜 주신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이 온 세상에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어야 하고 제자들이 그 증인이라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하신 후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행전은 좀더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 자주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들려주시고는 전에 일러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 하셨다. 그때 사도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하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하느님의 권능에 속하는 일이므로 너희들이 알 바 아니라고 하시면서 “성령이 임하시면 따 끝까지 내 복음을 전하라”하시고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싸여 승천하셨다.



그런데 오늘 복음과 제 1독서 사도행전은 모두 루가 사가가 쓴 것으로 전ㆍ후편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네 복음서 중에 루가 복음만 승천과 성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편인 루가 복음은 성령의 힘으로 구세주의 탄생이 이루어짐을 알려 준다. 성령이 마리아를 감쌈으로써 예수를 이 세상에 낳으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후편인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할 수 있는 교회를 낳고 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제자들이 빠지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러하였듯이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붙잡으려 한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하고 묻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제 우리 안에 더 깊이 오실 수 있고 주님으로서 온 천하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다.



이는 주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게 하셨듯이, 또 제자들을 기초로 하여 교회를 세우려 인도하셨듯이 성령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주님으로 알아 뵈올 수 있는 눈을 갖도록 재촉하고 계신다. 단지 눈으로만 바라보는 안이한 방법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몫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해내야 되는 것이다. 내일은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없는 날이다.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섭섭해하기보다는 나의 촛불을 밝혀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오늘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삶을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행복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다. 빌 곳이 있고 바라보아야 할 곳이 있으며 삶의 이유를 뚜렷이 가지고 있으며 할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소식을 모든 이들에게 전해야 될 만큼 현재 일어나고 있고 진행되는 과정을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직접 듣고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보도 매체에 관한 교령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도 매체가 옳게만 사용된다면 인류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이익을 인정하는 바이다. 과연 그것들은 정신적 휴식, 교양의 향상,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튼튼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이것들을 이용하여 창조주를 거슬러 자신들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것들의 남용으로 인류 사회에 너무나 자주 해독이 초래된다는 것을 교회는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또 “어찌하여 허위, 오류, 타락, 외설만이 사회 홍보 수단의 파괴적 선전과 입법에 의한 허용, 착한 사람들의 비겁, 악한 사람들의 뻔뻔한 자세로 사람들에게 억지로 선전하도록 하고 있단 말입니까?”고 묻고 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온갖 지혜와 용기를 주셨듯이 우리 안을 채우시도록 의탁하는 마음으로 성령 강림을 맞자.

33.             예수 승천 대축일 (사도 1,1-11) 왜 쳐다만 보고 있느냐? 

                                                              이기명 신부





오늘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예수승천 대축일 입니다.



첫번째 독서에서 보면: —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40일 동안 사도들과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당신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곤 했던 것입니다. 즉,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죄와 죽음의 권세를! 부활하심으로써 이기신 승리자이심을 확인시켜 주시고는, 이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승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그러지게 마련이기에,

–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세상 끝날 때까지 부활하신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 또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아기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고, 33년 간 장성하여 지내셨다면, 어느 시점엔가는 그 육신이 이 세상 삶을 마감하여 떠나야 하는 것이 – 예수 승천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승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당신의 역할은 끝을 내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 28, 20에서 보면:— “나는 세상 끝 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고,

에페 1:19에서는‥‥‥그분은 영으로서 더욱 힘있게 현존하시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           시어 믿음을 가진 이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심으로써, 한 지역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성령으로서 어디서나 누구와도 함께 하시기 위하여, 새롭게, 더욱 가깝게, 당신 모습을 바꾸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 육신의 자연스러운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에로의 다시 살아남이고!

       죄와 죽음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통에서 영광에로!

       현세에서 하느님의 세상에로의 장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 강생하신 그 육신이, 지상 생활을 마감하여 성부 오른편에 좌정하시는 영광의 완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의 승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알지 못하고,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주시는 새로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인 요한 14:1-3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률 믿어라.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며, 다시 와서 내가 있을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겠다. 이리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들도 함께 있게 하겠다.\”—하시는 말씀대로 입니다.

즉, 우리가 일을 곳을 마련하러, 먼저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승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골로 3.1-4에서 보면‥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으니, 천       상에 것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지상에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현세의 사물에만 우리의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 자신의 마음과 머리를 들고, 영원하고 참된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삶을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디 우리의 본 고향은 하늘나라이며, 찾고 두어야 찰 참된 희망은 주님과 함께 누릴 천상 영광인 만큼, 현세 생활에만 마음을 쓰며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희망과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듯이, 오늘에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세상일에 박식하고 민첩하다 하더라도,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의 최후목표가 무엇이며, 자신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누구 앞에 서게 될 찌를 모르거나,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죽음과 하느님, 구원에 관해서는 아는바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현세적인 희망이외는  아무런 기대고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막연히 무덤만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들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들어내 보이신 새로운 삶의 길을 가르쳐 주고,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 개인만 구원되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하시지만, 구원의 은혜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 만민에게!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입이—오늘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형제 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입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손발이 봉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손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승천 대축일을 맞는 우리는, 예수 승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승천하시면서 당부하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률 깨달아, 복음전파에 나름대로 헌신하는 자세를 갖는 신앙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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