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19. 강길웅 신부(다)/37 20. 강영구 신부(다)/39
21. 김동식 신부(다)/42 22. 류장선 신부(다)/45
23. 변기영 신부(다)/47 24. 서웅범 신부(다)/49
25. 유영봉 신부(다)/51 26. 조순창 신부(다)/53
19 부활 제6주일 (다해) 사랑이라는 평화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5,1~2.22~29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복 음 요한 14,23~29 (성령은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하나의 종교로서 출발하는 데에는 몇 가지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희랍의 발달된 거센 문화였으며, 둘째는 로마라는 강력한 이방인 세력이었고, 셋째는 율법을 고집하는 유다이즘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율법을 고집하는 유다교 계통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이 율법에서 오느냐? 아니면 믿음에서 오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회의를 소집했고 거기서 결정한 사항은, 새롭게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이들에겐 율법의 멍에를 더 이상 지우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한 매듭이 정립이 되며 말썽이 많던 요지를 해결해 버립니다. 구원이 율법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결정을 하면서 \’성령의 결정\’이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공의회며 사도들의 후계인 주교들의 결정은 \’성령의 결정\’으로서 오늘날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보여 줍니다. 그 도성에는 아름다운 치장이 있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천상의 성전은 아버지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을 영접하면 성전에 들어간 것이며 이분을 믿으면 성전을 이미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이미 성전은 우리 안에 건설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율법으로만 구원될 수 없듯이, 우리도 세례만 받았다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에 의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활짝 개방이 되었지만, 우리가 직접 올라가지 않으면 그분의 나라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층계도 없고 사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가느냐?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제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천상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잘 지킬 것이며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인생과, 사랑하는 가정 안에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찾아가시어 거기에 머무십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거기 머무르시면 평화는 저절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주님이 거기 계시면 천국의 평화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먹고 잘산다 해도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면 평화는 없게 됩니다.
저도 성격적으로 화를 자주 냅니다. 급한 성질 때문에 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제가 사랑을 거스르면 바로 그 순간부터 마음은 지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떠나시기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썩은 오물만이 저를 괴롭힐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 고집에 있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어떤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시어머니의 심성이 고약한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며느리의 근본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믿는 집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정이 지옥이요 사는 게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며느리가 시장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중태에 빠집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빠른 수혈을 해 줘서 며느리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에 큰 감명을 받았고 시어머니 또한 며느리의 아픔을 통해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평화를 만날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만나는 최고의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합시다. 이것이 주님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것이 또 평화를 얻는 최고의 길입니다.
20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다) 두 부류의 삶
강영구 신부
오늘은 부활 제6 주일입니다. 방금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들은 예수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원(身元) 혹은 정체(正體), 영어로는 Identity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며, 어떤 능력으로 살며, 무엇을 누리면서 사는가 하는 점을 명쾌하게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 땅 위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의 지표를 밝혀 주신 대목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세속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부류가 겉모습으로는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지만, 삶의 질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예수를 사랑하기에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이미 지난 주일에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이웃을 섬기는 것, 누구에게 자신이 바라고 싶은 것을 자기 자신이 먼저 해주는 것, 그리고 사심 없이 용서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면 독단과 독선을 버려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언제나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참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스승이신 예수를 닳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에 바보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키우고 계시지만, 부모인 여러분의 말을 잘 듣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성령 곧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받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여서, 하느님의 영의 인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그 어리석음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겨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의 원칙은 적자 생존의 원칙, 약육강식의 원칙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머리 숙여 조아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무자비하게 짓밟고,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며, 항상 손해보다는 득을 보아야하며, 당한 일은 언제나 복수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악하고 꾀스럽고 약삭빠릅니까? 이러해야만 이 악한 세대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더욱 살벌해지고 다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짐승이기를 거부하면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원칙을 따르면서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참으로 살벌한 세상, 난장판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 세상의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우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원수 갚고자 하며, 이웃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선 보기에 그들이 힘있어 보이고, 득세하여 잘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혼란과 멸망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 번째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에서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누리는 평화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며,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확고한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바탕으로 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믿고 신뢰하는 어린 아기는 어머니 품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평화롭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 안에서 그 무엇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의 근본적인 삶의 차이입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더구나 내일 우리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를 염려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비록 어제의 시간이 죄로 얼룩진 시간이라 하더라도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평화를 누리며 오늘에 성실한 사람들, 지금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은 이미 주님이신 예수의 부활로 극복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과거에 죽고, 주님 안에서 새 삶을 누리는 신앙인들은 그래서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시고 길가의 하찮은 꽃들도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실한 삶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되리라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누리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신앙인들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매사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라지고야 말 돈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향락 안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돈과 재물을 쌓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힘과 무력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과 권력과 힘을 바탕으로 한 세상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거짓 평화에 매달려서 그 평화를 잃게 될까 불안해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신앙인인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겉모습으로 보기에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는 않지만, 삶의 질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믿기에 공짜로 주어진 은총이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은총 속에 머물도록 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평화를 누리는 나날의 삶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21 부활 제6주일(다) 영의 이끄심
김동식 신부
하루의 생활이 평범하지만, 늘 새롭게 시작하고 감사하게 마치는 사람들의, 살아 움직이는 마음과, 신선한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마주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며칠 전 아침에 저는 치하철을 탔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일터를 향하여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짐짝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들리는 소리는 지하철이 정차할 때마다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힘들어진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뿐입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이 공허할 뿐,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이런 씁쓸한 체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에 이끌리는 삶의 필요성
경제적 번영, 부의 축적, 성공적인 삶, 아마도 이러한 가치들이 어느덧 우리 모두의 의식 깊숙한 곳에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마련했습니다. 국가 전체의 부유함은 그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되었습니다. 잘 살게만 된다면, 물질적일 풍요를 누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가치도 정당화되어 갑니다.
교육은, 이제 능력있는 일꾼들을 제조해 내는 지식은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치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조직으로 후퇴했습니다. 경제는 인간다운 맛을 잃었습니다. 문화는 감각적인 쾌락을 얼마든지 제공해주는 분만실이 되었습니다. 매스컴은 자극적인 사건과 인간을 멍청하게 만드는 자랑스러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발전이라는 맘몬을 숭배하는 현대 종교입니다.
이제 인간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물질, 돈, 명예, 권력, 능력 등등)에 따라서 자신들의 가치와 존엄성의 척도를 측량합니다. 우리들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만, 외롭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면에서는 모든 것이 편리하고 화려하지만, 내적인 공허와 궁핍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 속에서 우리를 살리는 하느님의 영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거대하고 힘있는 것에 이끌리는 우리에겐 작고 소박한 곳에서 피어나는 하느님의 진정한 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 세상의 수많은 체제 중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치대로 움직이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새로움
오늘 제1독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 얼마나 하느님의 영의 이끄심의 중요성을 알고, 그에 따라 살았는가를 너무나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만났고, 그분의 정신을 배웠고, 그분의 삶을 맛보았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그분들은 직접 듣고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자신들의 삶의 내용이 변화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겐 늘 철저한 회개, 즉 하느님의 사랑에로의 마음의 문을 여는 그 회개를 죽는 순간까지 해왔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늘 염두에 두고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끊임없는 자기 비움의 길을, 충격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내려가는 삶, 비우는 삶이, 곧 하느님의 본질적인 모습을 닮아 가는 삶임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한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임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양식을 이 세상 끝까지 전파할 사명을 뚜렸하게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삶의 양식이란 곧 \’영이 중심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성부의 뜻을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이 세상과는 대조가 되는 복음의 가치에 의해 이끌려지고, 이 복음의 힘으로 세상 속에서 완전히 자신을 비우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가치관은 있는 그대로 인간들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소중함이 인정되고, 소유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작은 사람들의 참 만남이 중요한 그런 가난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초대 교회 공동체 내의 갈등과 어려움을 인간의 논리와 힘으로 극복하려하지 않고, 하느님 영의 이끄심에 따라서, 복음을 기준으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 복음의 기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도한 후에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곧 가난함을 선택한다는 것이요,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힘에 의하여 이끌려지겠다는 결단의 표시였습니다. 느꼈습니다.
영의 이끄심에 따른 삶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을 대하면서 저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사람은 저 자신이며, 교회여야 함을 느꼈습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대로 변화되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우리 안에서 기쁨과 평화의 생명수가 흘러 넘치지 않을 때,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한 이념에 불과한 것이라 느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소박한 삶의 양식으로 변화될 때, 한 인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현대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선의 힘을 회복하고, 그 회복된 힘으로 새로운 가치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아니 이 협조자 없인 우리가 선해질 수 없습니다. 그 협조자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내면 속에서 성령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을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이 느끼는 욕망과 좌절, 분노와 고통, 불안과 괴로움, 미움과 갈등, 외로움과 상처 속으로 파고 들어가, 고요의 자리로 떠나야 합니다.
현실에 눈을 감고 피하고 싶은 것을 피할 때, 우리는 결코 내면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만날 때, 우리는 세상의 아픔과 우리 자신의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결코 감각적인 안락에 빠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우리 자신의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과 우리 자신의 부조리에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부조리를 내면에서 파악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투신할 힘을 하느님께 요청하게 되고, 급기야 그 힘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발을 현실에 놓고, 우리의 손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에 두게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삶터에 둘 때, 우리는 진정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외치는 이상이란 현실을 변화시키라는 이상이오, 이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고 절망적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희망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이 극적인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와는 다릅니다.
이 평화가 우리 안에서 살아 넘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이끌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의 양식이란 깊고, 넓게 하느님을 체험하는 삶이며,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약하고, 깨지기 쉽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삶의 가난함입니다.
22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다)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류장선 신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가장 가까이 따르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았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시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서 그들과 함께 계속 머무르시길 원했습니다. 아마 우리들도 예수께서 육체를 갖고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한다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당신들에게는 더 유익합니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당신들에게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당신들에게 보내겠습니다.」(요한 16,7)고 주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증거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으로 그리스도의 협력자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살아 계시면서 모든 이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거치른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시고, 돌처럼 차거운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고, 죄를 깨닫게 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시켜 줍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항상 원하시지만 많은 교우들께서는 그저 성령은 먼 곳에 있는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저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강론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도 없었고,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을 것임을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 승천 대축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천주교회의 창립 기념일인 성신강림 주일입니다. 매사가 준비 없이 잘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성령을 받아들임도 준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성령을 받기 위한 생활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하는 생활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을 연결하는 생명줄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잠시는 견딜지는 몰라도 결국은 시들고 맙니다. 물 속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잠시 퍼덕거리면서 숨을 쉬지만 곧 죽고마는 것처럼 기도 없는 생활은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습니다.
현대 생활이 복잡해지고 먹고살기가 힘들자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이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전부 구입해놓고 윤택한 상류생활을 하면서도 기도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하느님 앞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허비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기도하는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기욕구 만족에만 충혈이 되어 분주하다는 핑계로 성령께서 임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닫는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오지 않으시고 밖에서 열어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을 맞을 자유도, 막을 자유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분망한 생활 중에도 여하한 일이 있어도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실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우리의 생활에서 너무 분리시키지 맙시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생활 자체가 살아있는 기도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주님의 사랑을 깨달읍시다.
부모가 주는 지극한 사랑을 자녀가 받기만 하고 이 사랑의 고귀함을 깨닫지를 못할 때 자녀로서 부모님께 사랑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깨달은 자녀가 있다면 이 자녀는 자발적으로 부모님께 어떠한 사랑을 바치면 부모님께서 기뻐하실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왔고,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으로 영세로서 자녀가 되었음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쉬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흘러오는 이 사랑의 물줄기를 찾아 올라가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사랑우물」을 발견합시다.
이 솟아오르는 맑은 사랑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면서 나의 갈증을 없앨 때 어찌 나 혼자만 만족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우물은 전 인류를 위한 우물입니다. 이 우물을 모르고서 물이 나오지 않는 땅을 파는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줍시다. 이 우물은 나로 인해 다른 목말라 하는 이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더욱 맑은 물을 마시게 되는 이 사랑의 신비를 깨달읍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이는 이 물이 바로 내 앞에 있어도 마시지 않고 목말라 갈증으로 죽어 가는 족속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마실 자유까지는 빼았지 않으십니다. 물은 본인이 마셔야 갈증을 없앨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루도 쉬시지 않고 이 생명의 물을 우리 입가에 주고 계심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깨닫고 있을 때 우리는 자나깨나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맺음>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복음을 통해서, 기도를 통하여, 선행을 통하여, 사랑의 실천 속에서, 그리고 교회의 말씀을 통하여, 성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겠고, 이 사랑의 성체성사를 받는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시다.
견진성사를 이미 받으신 분들은 마땅한 준비로서 이미 받은 성령을 되찾아야 하겠고, 아직 견진성사를 받지 않고 받기를 1년, 2년 계속 미루고만 있는 분들은 성령의 우물을 외면하는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언제 걷우어 가실지 모르는 우리로서 오늘 이 순간의 나의 생명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견진성사 받기를 지체하지 맙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가 갈증으로 죽어 가는 이 현실을 어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 성령을 받아 「생명의 우물」찾아주기 운동의 대열에 모두 참여합시다.
아 멘.
23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다)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변기영 신부
누구든지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말을 가장 잘 아는 사람끼리 모여서 같이 일하게 되고 놀게 되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모여서 이루는 것이 바로 친구요, 부부이며, 가정입니다. 서로 서로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며,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되기 어렵고 가족이 되기 어렵습니다.
즉 같이 살 수 없고 일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실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고 머무시며 살으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성서에서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집과 땅을 팔아 가지고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고 에덴동산이나 천국을 찾아서 다닐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서울에 가서 있는 아들하고 같이 살기 위해서는 시골을 떠나서 서울로 가든지, 아니면 서울의 아들이 시골로 다시 내려와야 하겠지만,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만 지켜드리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 많고 힘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같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는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이것은 가장 복된 인생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길은 세상의 다른 길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사는 이들이 누리는 은총 중의 하나는 바로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우리의 노력, 즉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노력 위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싸우기를 좋아하고 살인을 일삼는 사람도 평화를 사랑합니다. 전쟁터에서 총과 대포를 쏘고 있는 사람도 평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쟁으로써 평화가 완전히 주어진 적은 매우 드뭅니다. 비록 평화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은 이미 살인과 파괴, 패배들을 전제하고 있는 평화이므로 그러한 평화는 한 편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화는 지상에서부터 이미 천상생활의 분위기를 맛보게 하는 천상적 평화이며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삼기 위하여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바로 평화의 씨앗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바로 평화를 지키는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참다운 평화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게 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용기와 행복이 영원히 깃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하느님의 벗이요,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과 온 우주만물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복된 이들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믿고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평화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바로 실천으로써 증명을 해야만 합니다.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이 박물관의 박제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를 이 세상에 이룩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주일날 성당에 나와서 미사참례나 하고 지내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의 일거일동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다운 표양을 보여, 이 세상 방방곡곡에 하느님의 말씀을 심고 하느님의 평화를 이룩해야 하겠습니다.
24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하느님께 의존하는 존재
서웅범 신부
「인간은 의존(依存)하는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특히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의 모습을 조금만 살펴봐도 쉽게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 물론 전체적인 수명(壽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알에서 부화되자마자 잘은 못하지만 그래도 헤엄을 칠 줄 압니다.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새들도 얼마 후면 이내 날기 시작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서 걷는 동물도 많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인간은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존재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성장해 살아가면서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느끼며, 다른 도구에 의존하게 됩니다.
새처럼 날지를 못하니까 비행기를 만들었고, 날쌘 동물처럼 빨리 달릴 수가 없으니까 자동차를 발명해 그것을 타고 다닙니다. 물고기처럼 헤엄을 잘 칠 수 없으니까 배를 만들어 물위를 건너다닙니다.
무언가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도구(道具)를 만들어 그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궁극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는 이러한 「의존」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의존」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꽃들이 태양을 향해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내적 갈망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라고 말씀하시며,「내 마음이 당신 곧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내게 참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그분 안에서만 기대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평화의 선물」은 성령의 도래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평화와 일치, 사랑의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은,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불안과 고통의 심연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지혜를 주시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인종․종교․사상의 차이를 이유로 벌이는 전쟁과 학살, 그리곤 그로 인해 더욱 심각해지는 가난한 이들의 기아와 질병의 문제들로 이 세상은「참 평화」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만연하는 사치악과 부조리, 인간성 ․도덕성의 상실 그리고 더욱이 외환위기로 말미암은 경제적인 불안감 등등이 우리의 내적/외적 평화를 빼앗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에 참 평화를 이룩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 같아 보입니다.
비근한 예로, 어려운 우리의 경제현실문제에 있어서,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의 욕심을 버리고 거국적 아니 거세계적인 차원에서 일을 하고, 재벌은 직원, 노동자들을 사랑으로 배려하여 그들이 함께 잘 살수 있게끔 도와주고, 노동자 역시 사용자를 신뢰하고 주어진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며 성실히 일을 하면 무언가 잘 되지 알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사람 마음이 백인백색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일진대, 그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의 마음으로 모은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세속적정치적 힘의 원리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의 의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더욱 더 간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영육으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존해야 하는 존재」인 내가, 지금 현실적으로 가장 믿고 의지로 삼는 것은 어
떤 것입니까? 권력이나 재물, 명예 따위는 결코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불안과 고통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5 부활 제6주일 <요한 14, 23-29> (다) 주님의 성전으로 사는 삶
유영봉 신부
묵상 :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성자께서 그 사람 안에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신앙인은 바로 하느님을 모신 살아있는 성전이다.
성전이 없는 천상 예루살렘
많은 신부들이 신설본당을 맡아 새 성전을 짓기 위해 말도 못할 고생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신부는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과로를 하여 건강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돌아가신 분도 있다. 나도 요즘 아파트 단지의 신설본당에 와서, 부지 매입과 함께 사들인 기존 건물을 수리하여 성당 사제관 회의실 꾸미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묵시 중에 천상 예루살렘을 보고는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묵시 21,22)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영원한 고향으로 지향하는 천상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고,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다\”(묵시 21, 22)는 것은 깊이 묵상해볼 말씀이다. 그러면 없어질 이 지상의 성전을 짓는 일은 쓸데없는 일인가?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깨닫자
예수님은 이미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 19)고 하시며, “당신의 몸을 성전\”(요한 2, 21)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하시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성자께서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가 그와 함께 사시겠다는 약속이다.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이 그 사람 안에 오시어 함께 사는 ‘하느님과의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 3,16)라고 하셨다.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지은 이 지상의 성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 그리하여 하느님과 하나되는 삶을 매일매일 추구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직 이 지상의 성전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성전이 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평화가 주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있지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모두 모닥불처럼 타고 있는 마음 한구석의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나 자신이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쳐 올 수 있는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나다움을 지니고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할 때, 내가 하는 모든 일 또한 제대로 될리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하느님을 등지고 진리 편에 서 있지 못하면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힘과 잔꾀로 얻는 평화는 거짓 평화다. 그것은 허세이고 일종의 거품이라 할 수 있다. 참 평화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매 순간을 그분과 의논하면서 사는 삶, 그분의 성전으로 사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화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이 평화는 세속의 어떤 힘과 상황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인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최선을 다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최상의 삶이 아닐까?
26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다)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조순창 신부
오늘은 부활 제 6주일 특전 미사를 봉헌하고, 내일은 부활절의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 주일이 예수 승천 주일이며, 그 다음 주일이 ‘성령 강림 대축일 주일’입니다.
루가 복음 사가(史家)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을 시간적으로 또렷이 구분되어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 사도는 인류 구원의 신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승천과 강림을 하나의 커다란 빠스카 신비로 보고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 만찬 중에 하신 예수님의 최후 설교의 일부분이지만, 벌써 루가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의 가르침인 듯한 성령, 곧 협조자에 관한 말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승천 대축일’을 앞둔 오늘,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와 함께 거처하실 것”이며, 성령을 보내시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믿는 이들에게 세상(世上)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화를 주실 것이요, 이제 시공(時空)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기쁨을 누리게 하시리라”는 교훈을 새로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 종말(終末)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임 곳은 내가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믿는 이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이며,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신자들은 바로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며, 두려움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활고가 고통스럽고, ‘오늘이 불안하고, 내일이 두렵다’면,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고 깨달음이 적은 탓일 것입니다.
참으로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신앙인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와, 참 도리를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의심을 버리고 굳게 믿게 되었고, 신앙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고, 용감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신앙의 의미를 모르고, 믿음이 허약하다면, 성령을 더 풍성히 받도록 기도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합니다.
참 신앙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날이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거짓이 없고, 의로우며, 진리와 정의가 빛을 보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권력이나 무력보다는 복음적 사회 건설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마태6,30)고 하셨습니다.
또 마르코 복음에서는 거센 풍랑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소? 당신들은 아직도 믿음이 없소?”(마르 4,39) 하시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신뢰와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이 꾸준할 때에,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참 안정과 평화, 참 기쁨과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여, 우리에게 굳은 믿음 주시어, 항상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