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부활 제 7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주일 주일 강론 모음

 

예수 승천 대축일


        10. 최영철 신부(나)/18

        11. 김영진 신부(나)/20           12. 강길웅 신부(나)/22

        13. 김몽은 신부(나)/24           14. 김영남 신부(나)/25

        15. 허성규 신부(나)/27           16. 오정선 신부(나)/29

        17. 신은근 신부(나)/30           18. 수원교구사제단(나)/32

        19. 교구 주보(나)/33                     20. 김명순 박사(나)/34

        21. 예수님의 승천(나)/36         22. 사랑은 생명력을(나)/37

        23. 온 세상에 기쁜 소식(나)/38





10       주님 승천 대축일  <마르 16, 15-20> (나)   하느님의 구원 의지

최영철 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사실(사도 1,1-11)을 사도들의 증언과 그 증인으로서의 사도들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해서 증언되고 있다는 말이다.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증언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사건은 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사도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이 불렀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따랐고 그렇게 따랐던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뿔뿔이 도망가서 숨었었다. 그런데 그런 사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군중 앞에 나타나서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그분의 승천을 외쳤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두명의 사도가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불리웠던 사도들 모두가 그렇게 군중 앞에 나타나서 말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승천의 사실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메시아관과 사도들의 모습을 알아 볼 필요가 있으며, 이것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사건의 사실성을 활 수 있다. 당시의 메시아관, 그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이었다. 메시아가 오시면 억압받던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온 희망은 메시아의 도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적인 여러 사건 앞에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함께 그분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사도들의 기대와는 딴판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사도들은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숨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도들이 어느 날 모두가 군중 앞에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어떤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사도들에게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 그리고 그분의 승천사건, 그분이 끊임없이 약속했던 성령강림 사건일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 하나하나가 동떨어진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연관된 사건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사도들은 이 사실 앞에서 이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들은 모두 치명했다. 그 연관된 사건 앞에서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는 생명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사건의 사실성을 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예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사건이 갖는 현실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교회가 신비체적 존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곧 우리 교회의 승천인 것이다. 이 말은 교회의 현실적 의미,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현실적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승천사건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습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높이시어  승천시키듯이 이 세상도 그렇게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구원적의지인 것이다.

  

오늘 예수 승천 대축일은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하신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가 선포되는 날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이 또한 교회 홍보주일임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11       주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 (나) 복음 선포는 우리의 의무

김영진 신부


90년 초에 남미의 에콰도르라는 나라엘 갔었다, 콰야킬이라는 시골 교구에서 원주민을 상대로 선교사 일을 하는 친구신부를 만나기 위하여 갔던 것이다. 당시 뉴욕에 있던 나로서는 뉴욕이 한겨울인데 비해, 그곳은 찌는 듯한 날씨여서 밤잠을 설쳤다. 선교사로서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친구신부와 다른 신부들도 찾아뵈면서, 나의 사제직 삶이 너무 화사하고 이기적인 것 같아 말문을 열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한번은 그곳에서 선교사 일을 하는 한 자매와 같이 방문을 나갔다. 그 자매는 강원도 춘천에서 직장생활하며 모은 돈을 가지고 가서, 도움 받는 곳 없이 스스로의 돈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방문을 나서는 자매는, 가방 가득히 비타민과 초콜릿 그리고 물파스 등등의 약품을 넣어 가지고 갔다. 자매는 만나는 환자들에게 비타민과 초콜릿을 나누어주면서, 얼굴을 비비대며 껴안아 주었다. 그네들의 겉모습이 너무나 비위생적이고 불결하여 나는 손대기를 꺼렸으나, 자매는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여 주었다.

  

부러진 팔의 뼈가 튀어나와 썩어가는 아줌마에게 물파스를 발라주면서 자매는 “신부님, 어떤 약도 쓴 적이 없어서 그런지, 비타민과 초콜릿을 주고 물파스만 발라도 썩어가는 곳이 다시 살아나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손은 가난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손이요, 그녀의 마음은 버려진 그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지금도 지구의 어느 구석에선가 소리 없이 겸손하게 예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마음이 되고, 있을 수많은 선교사들 앞에, 연필로나 끼적거리고 입으로나 나불대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네들의 거룩한 희생과 봉사와 사랑을 어찌 보잘것없는 글쟁이의 한줄의 글과 한마디의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끝까지 그들을 믿는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나라에서 몇몇 천사들과 주고받는 대화 중 한 토막이라고 하며 상상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천사 하나가 “주님, 주님께서는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저 세상에서 죽으셨지요?\”하고 묻자, 주님께서 “그렇지\”하고 대답하셨다. 천사가 다시 “그러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님이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지 다 알고 있겠네요?\”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아, 오직 몇몇 사람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지\”라고 답하셨다,



천사가 다시 “주님, 주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죽으셨는데, 세상 사람들 이 모두 모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저라도 세상에 가서 주님이 하신 일을 밝힐까요?\”하자, 주님께서는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안드레아 및 몇몇 나를 아는 이들에게, 나의 삶을 저 지구상의 마지막 한사람에게까지 전하라고 했거든, 그들은 그 일을 통하여 고통도 받겠지만, 기쁨도 누리며 온 세상을 변화시킬 거야\”라고 대답하셨다,


 천사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주님, 베드로는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요한도 얼마동안은 부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20세기를 살면서 세상사에 너무 바빠서,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 가지고는 안될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무슨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주님은 조용하고도 엄숙한 말씀으로 “나는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그들을 믿고 의지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이 이야기는 상상의 이야기지만, 이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애써야 할 사명이, 이 글을 읽는 독자와 내게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손이 되고 입이 되어



세상에서의 일을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온 세상을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선교는 자유가 아니라 의무다. 또한 선교는 낭만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결단과 희생이다,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가, 구원과 비구원의 갈림길임을 알면서도, 또한 한사람의 영혼을 온 세상 땅덩어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라는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1년 아니 일생을 통틀어 한사람의 영혼조차 선교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하느님 앞에서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쳐다만 보던 사람들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섰다. 승천은 세상만 보던 얼굴이, 하늘을 보는 것이요, 자기만 보던 마음이 이웃을 보는 마음이며,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던 신앙에서 타인에게 믿음을 가르치는 선교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사람에게까지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심어주려고, 예수님의 손이 되고 다리가 되고,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용광로 같은 적도의 땅 에콰도르에서, 오늘도 들로 산으로 강으로 영혼을 찾아 나서는 선교사들에게,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곳에서 복음의 씨앗을 심는 선교사들에게 머리 숙여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











12           예수 승천 대축일 (나해)   승천은 믿음의 보상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에페 1,17~23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복 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우리의 믿음에 큰 희망과 기쁨을 안겨 줍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승천으로 우리도 승천할 수 있고 또한 승천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부활 승천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다 값지게 살아서 아버지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소망입니다. 여기서 승천이란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승천은 결코 하늘로 올라가는 물리적인 현상만은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늘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요 땅은 인간의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상의 임무를 마치고 승천하셨다는 것은 구름을 뚫고 우주의 저 먼 곳으로 가셨다는 사건이 아니며 아버지의 그 영광의 자리에 다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길을 인간들에게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승천은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며 동시의 우리 자신의 기쁨입니다.



시골에 사는 어떤 부부 교사가 있는데 남편이 해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아내는 막막했습니다. 남편이 잠시라도 없는 세상은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말하기를 자기가 먼저 가서 자리를 마련하고 그리고 아내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2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부인도 남편이 있는 곳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승천은 바로 이런 만남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상에 40일 동안 머무셨다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대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기간을 통해서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교회 창립을 준비하셨다는 뜻이 됩니다(40이라는 숫자는 충만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각별한 신경을 써 주셨고 능력과 지혜와 신앙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승천의 이별은 성령으로 만남의 기쁨을 보상해 줍니다.



주님이 안 계신 세상은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그래서 서운함과 불안함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학식도 부족했고 대중 설교를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으며 또한 정치 세력이나 유대교의 보수적인 수구 세력들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두 천사가 나타나서 위로를 해 줍니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먼 미래의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외롭고 쓸쓸할 때 다시 오십니다. 또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몸부림치고 죄와 미움에서 괴롭게 헤맬 때 그분은 오십니다. 분명히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 일종의 승천이요 그것이 또한 승천 대축일을 지내는 뜻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잘 아는 어떤 형제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술 담배로 찌들어서 몸이 많이 상해 있었고 표정도 늘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왠지 얼굴 전체가 개운하게 보일 정도로 맑아 있었고 표정도 크게 밝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새 사람이었습니다. 뭔 일이냐 했더니 술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또한 일종의 승천입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에 나오는 작은 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불성실한 삶으로 자신의 가치를 내던져 버린 불행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내 고집대로 살면 거기에 행복이 있고 참 기쁨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많은 실패가 있었고 허위와 기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신의 모순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주님을 믿고 매달리는 신앙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만남이 또한 승천이 주는 의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나날이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으며 또한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기쁨이 승천에서 완성이 됩니다. 참고 기다렸던 보람, 사랑하고 용서했던 숱한 아픔들이 바로 거기에서 보상을 받습니다. 승천은 그래서 분명한 보상입니다. 그리고 보상은 자기가 행한 대로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13      예수 승천대축일 마르 16,15-20(나해)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김몽은 신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여러 가지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오늘은 예수승천대축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입당송에서는 “만백성은 손뼉을 치며 기쁜 소리 드높이 주를 부른다”고 한 시편(46,2)의 노래를 외친다.



이주일의 초점

오늘의 복음에서는 부활이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다시 여러 가지로 교훈을 남기신 후에 결정적인 사명을 부여하신 다음 그 사명을 완수케 하기 위해 또한 여러 가지 특은을 주시고 승천하셨음을 전해 준다.



즉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만민의 구원을 위함이다. 그 어떠한 사람도 빠짐 없이 구원되도록 무한한 사랑으로써,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 보속하시면서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고귀하고도 감격스런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가진다.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그래서 성 바울로는 “만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16)이라 했고, 또 구약(이사 52,7)을 인용해서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로마 10,15)라고 하면서 복음 선포의 벅찬 기쁨을 피력했다.



인간은 이 ‘복음’에 의해서만 주님과 일치할 수 있고 구원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없이 구원이 없다는 사실, 이것은 마치 물에 빠진 자에게 구조선을 보냈는데 그 구조선을 타지 않고는 구조될 수 없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완고함이 있고, 회의가 있고, 무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도 외친다. 사실 자유의 남용으로 인한 원죄의 유전은 역시 슬픈 자유의 남용으로 해서 구원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다는 그 사실, 즉 구조선에 타기를 거절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구원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우리들)에게 복음 선포를 위해 즉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하기 위해 당신이 하시던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다. 즉 오늘의 복음에서는 다섯 가지 능력을 표명하셨다.

① 기적이 따르게 된다. ②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다. ③ 여러 가지 새로운 언어(이른바 방언)를 한다. ④ 뱀이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 ⑤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낫는다는 것이다.



복음 선포를 위해 사도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부여하셨는데,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복음선포와 교회 건설을 위해 협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이 약속은 해당되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무수히 열거되고 있다.

이런 권능까지 주신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우리도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아가자! 우선 가정에서, 친척, 친구들, 그리고 직장의 동료들, 그리고 모든 이에게 ! !











14   예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나)“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김영남 신부



오늘 주일 복음은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열한 제자”라는 말은 사실 아픔을 지닌 말이다. 본래 “열두 제자”라고 불려야 하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 이제는 “열한 제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거치면서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루었던 “열두 제자 공동체”는 깨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자들 편에서 보면, 이렇게 깨어진 제자공동체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만 해도 지극히 은혜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만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막중한 사명까지 주시고 승천하셨다고 전한다.



복음서들은 모두 제자들의 이 파견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그들을 오랜 기간 동안 얼마나 정성들여 가르치셨는지에 관해 전해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의 앞부분들은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있는, 세상 만민을 향한 제자들의 이 파견을 준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누구신지 배워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깨닫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꼭 필요했던 것은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누구신지 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파견될 준비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으로의 파견을 의미하였다. 사실, 복음서의 다른 대목들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자,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한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가오시어 힘을 주시어 일으켜 세우셨다.

예수님의 승천도 제자들에게는 또 다시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스승 예수님이 떠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 용기 있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님으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굳은 믿음이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신”(마르 16,19) 예수님은 이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신다.

 떠나셨다는 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에게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떠나가심”은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과 “더 가까이, 함께 계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이제 특정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존하실 수 있는 “주님”(‘퀴리오스’)이시다. 그러기에 “주님이신 예수님”(마르 16,19)은 이제 그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오히려 그 전 보다 “더 가깝게” 계실 수 있는 분이 되시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어느 곳에 가 있건, 어느 처지에 있건,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 “주님”이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의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러 저러한 구체적 능력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분께서 자신들과 늘 함께 해 주실 것이리라는 믿음도 포괄하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끝 구절에 나오는 다음의 말씀은 이를 증거한다: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마르 16,20).



구약성서를 보면 만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광경을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실 구원의 날로 묘사하는 곳들이 있다(예컨대, 이사 2,15; 미가 4,1-5). 그리고 그에 관한 소식을 ‘복음’(기쁜 소식)으로 삼고 있다. 이와 비교해, 오늘 복음에는 정반대의 움직임, 곧 만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오는 움직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부터 제자들이 만백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이 보인다.

오늘 복음 말씀에 의하면 이제 만백성의 구심점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신”(마르 16, 19) 그리스도이시다. 이 분이야말로 “기쁜소식”의 진원지이며, 하느님 백성의 중심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보았듯이 열 한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어 만민에게 다가가, 스승 예수께서 계시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전파할 사명을 받았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뜻은 곧 제자들의 뜻이 되어, 세상 만민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도 같은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남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소식이 기쁘다는 것을 체험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보았듯이 먼저 “함께 계시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런 믿음과 사랑이 실천될 수 있는 공간인 신앙공동체가 꼭 필요하다. 신앙의 기쁨은 자기이익만 추구하고 살아가는 고립된 삶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15         부활 제7주일 요한 17,11-19(나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허성규 신부



일치는 자기포기와 이해로써 성숙한다.

현대는 분열과 혼란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부분에 분열과 혼란이 떠날 날이 없는 것이 현실이며, 또 그런 현실 대문에 사회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혐오감과 실망은, 인간구제를 내거는 종교나 사회 단체 안에서 분열과 쟁투를 발견하게 될 때네 더욱 큰 것입니다. 사실 사회에 지치고 인생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며, 마음의 위로와 안식, 그리고 인생 문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하여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에 바라던 마음의 양식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혼란과 분열, 신자들의 쟁투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실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저녁에 하신 기도는 이 일체의 염원을 너무나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일치에 대하여 에페소인에게 “주안에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불린 성소에 합당하게 살고 겸손과 부드러움과 관용으로써 서로 사랑에 의해 참고 평화의 맺음으로 정신의 일치를 지키도록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신에 있어 육신의 업적을 없애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포기를 가르치고, ‘그리스도께 속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육신과 그 욕심과 동경을 십자가에 못박아라’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인 갱신을 목표로 사랑의 실천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란 각 신자가 다른 신자나 세계의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께 바쳐야 할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 일치의 토대는 열심한 신자의 신앙생활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생명에 사는 유기체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의 한 사람 한사람의 선악은 교회 전체의 선악을 줍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유대인도 희랍인도 노예도 자유인의 구별 없이 한 몸이 되기 위해서 한 정신으로 모두 세례를 받았다 한사람이 괴로워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괴로워하고 한 사람이 상을 받으면 다른 일원도 같이 기뻐한다.”



한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교회의 생명에 주는 협력은 다만 인간적인 활동의 결실에서 분만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보내는 것은 우리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요, 교회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인간에게 구원과 하느님의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업적을 계속한다면, 교회에서의 우리 생활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사람과 진리의 일치에서 그리스도로부터 격려되어 전 인류의 구원의 수단과 세상의 빛, 땅의 소금이 되기 위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에게 부과된 사명을 자각하고 신자는 교만에 흐르지 말고 받은 은혜는 하느님이 무상으로 주신 것이라고 믿고 사도 바울로와 같이 ‘하느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할 것이요, 동시에 이 자각은 큰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참 일치는 출발점의 근본에 있습니다. 그러나 일치는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을 잊어버리고 다만 기도에만 잠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겸손한 신뢰에 넘친 기도는 없어서 안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 신앙생활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자기포기와 사랑에 타는 개심의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완전한 일치의 결실을 하루 빨리 얻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일치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대안에서만 태동하는 것이며 자기포기와 너그러운 이해로서만 성숙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에게 지워진 이 일치의 큰 사명을 완수하는데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공헌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염원을 채워드리는 길이며 또 그리스도 신자로서 인류에게 봉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열성과 진심으로 합동하고 나를 의지해서, 나와 하느님의 협력으로 이 무강한 세상이나마 일치로써 천국으로 변화시키라고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16               주님 승천 대축일 (나)   그리스도의 향기

오정선 신부



ꡐ냄새ꡑ와 ꡐ향기ꡑ라는 말!

우리 인간의 후각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반응의 표현이다. 냄새가 난다는 말과 향기가 난다는 표현은 어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냄새라는 말을 쓸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국어 사전의 ꡐ냄새나다ꡑ라는 표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냄새가 풍겨 후감(嗅感)을 자극하다. ㉡좋지 못한 냄새가 나다. ㉢신선하지 아니한 맛이 있다. ㉣<속> 싫증이 나고 물리다. 운전수 노릇 30년에 자동차만 보아도 냄새가 난다. ㉤<속> 기미가 보이다.



ꡐ향기ꡑ라는 말은ꡐ香氣ꡑ라는 한자를 쓰고 있고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ꡐ향냄새ꡑ라고 되어 있다. 향냄새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없고, 후각을 자극하는 표현들 중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모두가 각기 서로 다른 고유한 냄새와 향을 가지고 있다. 몸에서 뿐 아니라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나 삶의 형태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냄새와 향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공동체가 존재하고 그 공동체 역시 각기 다른 냄새와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또한 신앙인으로서 한 개인은 하느님 앞에서 어떠한 향기를 가지고 있는가!



주님의 승천 대축일과 홍보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 승천의 의미와 홍보주일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과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ꡐ위해서ꡑ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고 우리가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죽음의 한계에서 우리를 꺼내주시고자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승천하셨다. 주님의 부활 승천의 영광은 그분의 사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의 결과로서 승천의 영광은 우리의 모범이며 본보기인 것이다.



홍보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분의 부활 승천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예수님의 삶은 ꡐ드러내 보여주는 삶ꡑ이었다. 당신을 드러내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ꡐ드러내 보여준 삶ꡑ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그에 대한 결과가 부활 승천의 영광인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나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고린토 후서 2장 15절을 보면 ꡒ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ꡓ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향기를 당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여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ꡒ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ꡓ나는 삶일 것이다.



다시 맞는 홍보주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볼 때 우리의 삶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거나 남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살아오신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삶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홍보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이들이 나의 향기를 맡고 나에게 모이고, 그들 역시 다른 이들을 하느님 나라로 모이게 하는 복음전파의 일꾼이 되어 나아갈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가르치는 복음전파의 사명은 거대한 것이 아닌 사소한 삶의 성화와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전하는 나의 삶을 통해서부터 시작 될 것이다. 우리 삶에 좋은 향기를 가득 실어보도록 노력하자. 작은 것부터…











17                   부활 제 7주일(나)   예수님의 승천

신은근 신부




승천 축일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분의 승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셨을까. 대기권을 뚫고 우주 저쪽으로 떠나가셨을까. 중학생만 되어도 이 표현에 머리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동화같은 이 표현은 이 천년 전에 씌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 이상 이 세상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의 사명을 끝내셨으니까 하늘나라로 되돌아가실 거라 생각했다. 성서기록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승천사건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사람으로 오셨던 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승천의 교훈은 이 점을 깨닫는 데 있다. 실제로 우리도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지상의 것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한 발자국 물러나서 바라보는 여유를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승천사건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믿는 사람에겐 기적이 따를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이한 언어로 말을 하며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기에 의미를 지닌다.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묵상해보자. 무엇을 믿는 사람이겠는가. 승천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다. 지상의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는 사람, 언젠가는 모든 것을 둔 채 하늘나라로 갈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기이한 언어로 말을 한다고 했다. 세속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돈이 우선이고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들린다는 말이다. 아무나 이 세상을 잠시 지나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한다. 그러니 분명 기이한 말이다. 실제로 세상은 잠시다. 그렇건만 끝없이 매달린다. 결국은 모든 것을 두고 갈 것인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이 깨달음이 승천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적인 셈이다.



승천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모습을 바꾼다. 지상의 것을 뛰어넘는 시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스승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으니까 모든 초점을 그 쪽으로 맞춘 결과였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자에게 무서울 것은 없다. 그들은 용감해졌고 너그러워졌다. 시각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이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시각을 주님께로 맞추어야 할 것이다. 지상의 것만을 보도록, 이익이 되는 것만을 보도록 익숙해져 있는 시각을 승천하신 예수님께로 돌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선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다. 첫 단추가 올바르면 결국은 깨닫게 된다. 그러니 오늘 승천미사를 봉헌하면서 새삼스럽게 고백해보자.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신앙생활이 새로워질 것이다.











18     예수 승천대축일 마르 16,15-20(나해)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수원교구사제단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 16,15).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고 이 세상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성서는 마르코 복음 16장 14절에서 20절까지인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1제자들이  앉아서 밥을 먹을 때 예수께서 그 자리에 나타나셔서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꾸짖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하고 명령을 하신 후 기적을 행할 권능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이것을 예수 승천이라고 합니다.



그 후 제자들은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사방에 두루 다니면서 전교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교회로 이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이 복음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얼마나 잘 지켰는가 생각해 봅시다.



1. 전교하는 것을 신부나 수녀에게만 미루고, 우리는 집안 일이나 하고 돈버는 데만 힘쓰지 않았는가?

2. 우리는 교리에 대한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웃과 친지에게 교회로 나가자는 말 한 마디 못한 겁쟁이는 아닌가?

3. 집에서 묵주기도나 하고 미사참례만 궐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간다는 부족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반성해 봅시다.



교우 여러분은 평신도 사도직이란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평신도 사도직이란 신자들이 바친 헌금이나 교무금으로 회장들이나 몇몇 간부들이 교회의 경제적 운영면에 관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친지와 친척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여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당신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르 14,38)하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당신들은 사방에 두루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기도하라는 명령 하나만을 지키고서, 예수님의 명령을 다 지켰으니,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컨대 성당에 꿇어앉아서 돈을 많이 벌게 하여 주십사,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게 해 주십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 알아듣고 믿게 하여 주십사 한다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까? “실천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강조하신 사도 성 야고보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야고보서 2,14-17까지 보면 이렇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에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전교사업에 있어 열 마디의 말보다 한 가지 일이라도 실천을 합시다. 용기를 가지고 실천합시다. “제자들이 길을 떠나 전교 하니 주께서 도와주셨다”(마르 16,19-20)고 하셨습니다. 교리 지식이 없다고 겁내지 맙시다.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꼭 도와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열심을 가지고 전교에 힘씁시다. 여러분이 인도한 사람이 성세를 받고 착실한 신자가 됨을 볼 때 여러분은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하여 전교사업에 힘껏 매진합시다.























19      주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나)  승천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심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와 ‘승천’으로 짜여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온 세상에 나가서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복음을 믿고 세례 받는 이는 종말에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믿음과 세례는 구원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세례 받은 믿는 이들의 초월적인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즉, 신앙인들에게는 다섯 가지 기적적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기적적 현상 중, 귀신을 쫓아내는 ‘구마이적’(사도 16,16-18),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언어이적’(사도 2,1-11), ‘독사이적’(사도 28, 3-6), 병을 고치는 ‘치유이적’(사도 3,1-10; 9,31-35; 14,8-10; 28,8-9), 이 네 가지는 사도행전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뱀의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음독이적’만은 신약성서 밖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초월적인 능력은 복음 전파에 나선 유랑 전도사들의 카리스마를 강조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늘에 올라”는 “하늘에 맞아들여지고”(수동형)라고 직역됩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예수를 승천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받은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자 즉시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마치 예수께서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장소를 옮기셨다는 인상을 주지만,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분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을 넘어 영원하게 되시고, 공간을 넘어 편재(遍在)하게 되시고, 일체의 한계를 넘어 영원하신 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시기 전의 예수님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분이셨지만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써 온 우주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부활, 곧 예수 승천은 역사를 넘어선 초월적 사건으로 예수 부활과 예수 승천은 온전히 동일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 부활에 대한 실제적인 확증의 표현이 곧 승천인 것입니다.











20             주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나)  성당 가는 길

김명순 루피나/영문학 박사



제가 사는 아파트를 나서면, 오른쪽으로는 여자중학교와 남자중학교가 나란히 있고, 왼쪽으로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습니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는 저의 학창시절, 교사시절, 그리고 현재 교편을 잡고 있는 막내딸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소리입니다.



쭉 뻗은 아스팔트 길 옆으로 인도가 있지만, 저는 작은 동산의 오솔길을 택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배드민턴 연습장이 있고, 여기를 지나가면 솔밭이 나옵니다. 향기로운 솔 냄새가 나의 코끝을 간지럽히며, 저의 긴 호흡에는 마음도 정화되는 듯합니다.

철봉 등, 간단한 운동기구가 있는 곳을 지나면, 300여 년 전부터 사용했다는 약수터가 있는데, 약수터 뒤로는 봄에는 타는 듯이 붉은 철쭉꽃, 여름에는 짙푸른 녹음,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 겨울에는 하얀 옷을 입은 설경을 보여주는 병풍 같은 언덕이 있습니다.

다시 언덕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이르면 성당의 종탑과 십자가가 보입니다. 영국의 어느 시인은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했으나, 저는 종탑과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뜁니다. 특히나,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갖고 있는 우리 성당의 종탑은 저에게 신비로운 감동을 줍니다.

여름에는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겨울에는 성당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나이 탓인지, 저는 여름보다 겨울의 성당 모습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봄에는 딱딱한 대지 속에서 긴 겨울을 인내하며 봄기운이 돌 때를 기다리던 여리디 여린 새싹이 굳은 땅을 헤집고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보여주고, 여름은 욕심, 이기심, 허영, 자만심으로 옷을 입은 사람처럼, 무성한 잎으로 마음속에 있는 것을 꼭꼭 숨겨 놓은 듯합니다. 그러나 거짓과 허세를 다 털어 버린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겨울의 성당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주님과 같아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동안 살며시, 자기 것을 하나씩 하나씩 내어놓고, 그  밖의 모든 것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알몸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체험했던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 곧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다”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성당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인 후 고개를 들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햇님의 모습이 보일 때의 그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며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성당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성가를 조용히 불러봅니다.

저 수풀 속 산길을 홀로 가며, 아름다운 새소리 들을 때, 산 위에서 웅장한 경치 볼 때, 냇가에서 미풍에 접할 때,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느님.











21             부활 제7주일 <마르 16,15-20>(나)   예수님의 승천





승천 축일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분의 승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셨을까. 대기권을 뚫고 우주 저쪽으로 떠나가셨을까. 중학생만 되어도 이 표현에 머리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동화같은 이 표현은 2000년 전에 씌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 이상 이 세상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의 사명을 끝내셨으니까 하늘나라로 되돌아가신 거라 생각했다. 성서기록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승천사건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사람으로 오셨던 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승천의 교훈은 이 점을 깨닫는 데 있다. 실제로 우리도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지상의 것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한 발자국 물러나서 바라보는 여유를 되찾아야한다. 이것이 승천사건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믿는 사람에겐 기적이 따를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이한 언어로 말을 하며,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기에 의미를 지닌다.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묵상해보자. 무엇을 믿는 사람이겠는가? 승천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다. 지상의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는 사람, 언젠가는 모든 것을 둔 채 하늘나라로 갈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기이한 언어로 말을 한다고 했다. 세속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돈이 우선이고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들린다는 말이다.

아무나 이 세상을 잠시 지나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한다. 그러니 분명 기이한 말이다. 실제로 세상은 잠시다. 그렇건만 끝없이 매달린다. 결국은 모든 것을 두고 갈 것인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이 깨달음이 승천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적인 셈이다.



승천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모습을 바꾼다. 지상의 것을 뛰어넘는 시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스승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으니까 모든 초점을 그 쪽으로 맞춘 결과였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자에게 무서울 것은 없다. 그들은 용감해졌고 너그러워졌다. 시각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이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시각을 주님께로 맞추어야 할 것이다. 지상의 것만을 보도록, 이익이 되는 것만을 보도록 익숙해져 있는 시각을 승천하신 예수님께로 돌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선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다. 첫 단추가 올바르면 결국은 깨닫게 된다.

그러니 오늘 승천미사를 봉헌하면서 새삼스럽게 고백해보자.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신앙생활이 새로워질 것이다.











22        부활 제7주일 (나)(요한 17,11-19)    사랑은 생명력을 주는 행위



사랑은 무엇인가. 질문은 분명해도 대답은 모호하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험만이 사랑을 깨닫게 한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관심을 보노라면 \’이게 사랑이구나\’하고 느낄 때가 많다. 부부간의 애정, 형제간의 우애 역시 사랑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관심 없는 곳엔 사랑도 없다. 사랑하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음에서 예수님은 ꡒ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ꡓ하라고 말씀하신다. 말을 바꾼다면 내가 너희에게 관심을 갖고 있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관심은 돌보는 행위다. 꽃나무에 물을 주며 가꾸듯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며 살라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관심이 있기에 세상 만물 역시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당신의 부활을 모른 체 하던 제자들이었지만 꾸짖기보다는 애정으로 대하셨다. 부활사건이 어떤 사건인가. 당신의 전존재가 걸린 사건이 아니던가. 생전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못 깨닫고 있다니, 더구나 토마스는 ꡒ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ꡓ고 고집까지 부렸다. 그러나 스승은 사랑으로 마무리하셨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감동한다. 스승을 위해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감동시켰듯이 너희도 서로에게 감동을 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감동이다. 사랑은 감동을 주고받는 행동이다. 감동을 주어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그런 사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다. 어떻게 감동시키는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한두 번은 몰라도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은총의 힘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려워한 것은 스승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죽음의 길을 갔더라면 은총의 힘이 두려움을 몰아냈을 것이다. 은총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주어진다. 외면하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의 은총도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주어진다. 그 길이 무엇일까. 희생과 인내의 길이 아닐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걸었듯이 너희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 그래야만 가족을 감동시키고 생명력을 주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할 수 있다. 영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만이 지니셨다. 그 능력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세상은 앞만 보게 만든다. 우리 역시 앞만 보며 살고 있다. 눈뜨면 당연한 듯 새 날을 맞이하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낸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사랑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매일의 생명력을 주듯이 너희도 매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어라. 얼마나 따뜻한 말씀인가.











23    예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나해)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 선포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복음을 정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기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라고 단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시면서 하신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이 곧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하여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승천하시던 때의 모습을 상세히 전해준다. 그 자리에서도 주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복음 선포의 사명에 대해 간곡하신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결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입으로’ 전하고 ‘행동으로’ 증거해야 한다. 주님은, 신앙이 단순한 정신적인 면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 자체가 완전히 탈바꿈되어, 말이나 생각은 물론 행동으로서 사랑이 표현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복음 전반에 걸쳐 말씀하셨다.



첫째, “물과 성령으로 서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심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간상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의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길만을 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한다. 즉 이것은 썩어야 할 것들이 썩지 않는 것으로 변하고, 시간이 영원으로 변하며, 육이 영으로 변하는 일대 대전환과 새로운 지평을 여는 대역사를 뜻한다.



둘째는, 자아의 부정이다. 새로운 삶이란 이기심에서 죽고 이타심에서의 삶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 그리하여 죽기까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다(마태 24,45-51 참조).

셋째는, 곧 그러한 삶으로써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될 것을 요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 선포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입으로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즉 복음 선포는 행동으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그러한 행위를 따르게 함에 있다.



그렇게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과 어딘가 다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성령을 내려 주셨다. 앞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오늘의 제2독서에서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재려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여러분이 물려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성령)”에 대해서도 자각하기를 바란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온 세상 만민을 한 가족으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 가면서 평화를 이루어 갈 것과 서로 관대한 마음이 되어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호소한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신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2-6).



여기에서 우리는 온 인류가 한 형제라는 이유를 알게 된다. 아버지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저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역시 우리도 한 분이신 아버지께서 낳아 주신 자들이니, 어찌 한 형제가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모르고 고아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절대적인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사명 완수를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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