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부활 제 7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주일 주일 강론 모음

 

예수 승천 대축일




         1. 김정진 신부(가)/2                     2. 최재용 신부(가)/3

         3. 송열섭 신부(가)/5                     4. 강길웅 신부(가)/7

         5. 정웅모 신부(가)/8                     6. 최인호 작가(가)/10

         7. 왜 하늘만 쳐다보나?(가)/11  8. 세상 끝 날까지(가)/13

         9. 하늘과 땅의 (가)/16  



1         예수 승천대축일 마태 28,19-20(가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김정진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천주 성부로부터 받으신 대사 즉 인류 구원이란 대사업을 성취하시고 많은 영광과 기쁨을 누리시려고 하늘나라로 개선하신 날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승리의 기쁨으로 개선하시는 예수님께 마음의 축하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순전히 우리들 모두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세상에 사셨고, 수난 당하신 후 돌아가셨고 또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오늘 또한 우리를 위하여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당신들에게는 더 유익합니다”(요한 16,7)하시며 설움과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안심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승천을 앞두고 “내가 당신들을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꼭 당신들에게로 돌아옵니다”(요한 14,18)라고 말씀하시며 신자들은 결코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습니다. 어버이를 잃은 고아들처럼 가엾은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며 또한 우리 곁에 계시며 말하자면 우리편이 되셔서 우리를 뒤에서 우리를 뒤에서 밀어 주시고 앞에서 이끌어 주십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을 어느 산꼭대기에 모이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말씀과 축복을 하신 후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마냥 승천하시는 예수님만을 우러러보고 있을 즈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갈릴래아 사람들, 왜 당신들은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까?”(사도 1,11)하고 말했습니다. 이 천사의 말은 그들로 하여금 멍하게 있지 말고 각기 사명에 따라 일터로 가라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생활을 최고로 장식하는 날이요, 또한 영광스러운 승리를 엄숙히 종막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드높이’라고 미사 때마다 기도도 바치지만 우리의 마음을 지상으로부터 하늘나라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현세적인 이득이나 쾌락이나 즐거움을 떠나 얼마만큼 예수님과 일치하여 생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세상일에 집착하고 지상 것에 부착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늘나라로 시원스럽게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데는 언제나 공허와 좌절감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세 가지인 줄 압니다.

첫째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한 탓으로 천국의 문이 굳게 닫혀져 어떠한 힘으로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벨의 의로운 피도 모세의 열성도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도 예언자들의 충성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었으나 오직 예수께서만이 우리를 위하여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천국에 우리의 자비를 준비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나 너희 거처할 곳을 준비하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육안으로 대할 때보다 하늘나라에 계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더욱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라고 똑똑히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 세상은 달라졌고 제자들은 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천주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외적인 인간 모습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예수님과 접촉하게 하시며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승천의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고 승천의 현의가 주는 기쁨과 이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제 서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사무쳐 오실 수 있고 이 세상에 더욱 널리 현존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주의 현존을 보증해 주는 것은 막달라 여자가 하려 했던 것처럼 주님의 인간은 인간 모습을 붙잡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을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우리를 주께로 인도해 주는 것은 눈으로 바라보는 안이한 방법이나 어떤 기적이나 육감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성령을 모시고사는 마음이 깨한 선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영광되이 하늘나라로 개선하신 예수님은 구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지만 성령과 함께 더 밀접하게 우리와 일치되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하늘나라를 동경하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아멘.











2         예수 승천대축일 마태 28,16-20(가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최재용 신부



갈릴래아 사람들, 당신들은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사도 1,11)

우리 「어린이날」이 지난 지도 벌써 6일이 되었고, 「어버이날」이 지난 지도 사흘이 되는



오늘 우리 교회는 큰 축일을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우리 어린이들을 가장 많이 사랑해 주시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시기 위해 하늘 나라 천국으로 올라가신 예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곳에는 그분이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그리고 그분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 또 부모님을 따라왔던 어린아이들이 그분을 환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환송하는 그들의 얼굴을 한 번 머리에 그려봅시다. 예수님이 하늘로 점점 높이 올라가셔서 구름에 가려지게 되니까 그 사람들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워서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또 병을 낫게 해주셨고 자기들도 이제 하늘 나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큰 기쁨을 알려 주시고 또한 참다운 사랑과 우정을 가르쳐 주신 그렇게도 고마우신 분을 이제 뵈올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웠겠어요? 그래서 그들은 구름만이 한가롭게 떠 있는 하늘만을 멍하니 눈물 젖은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때 바로 사람의 모습을 가진 천사 두 분이 나타났습니다. 이 천사들은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보십시오. 어쩌자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그분은 올라가신 그 모습대로 또 다시 내려오실 텐데 뭘 그렇게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습니까? 이제 그분이 일러주신 일들이나 하시오.”라고 꾸중을 했습니다.



그제 서야 그들은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시기 바로 전에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케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 16,15)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복음 즉 행복의 말씀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과 또 우리 죄인들도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와서 예수님의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래도 난 아직 어린데……” 천만에요! 어린이고 노인이고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저 섬나라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높은 집 지붕 밑 다락에서 살던 “톰”이라는 소년은 절름발이였습니다. 게다가 아주 가난했습니다.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에 밖에도 나다니지 못하고 낮에도 어두운 방에서만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이 소년이 하루는 예수님의 복음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그러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종이 쪽지에다 성경말씀을 써서 창 밖으로 날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부자가 길을 가노라니까 종이 쪽지가 날아와 앞으로 쑥 나온 자기 배 위에 앉았습니다. 그 종이에는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은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마태11,27)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서 집에 와서 머슴에게 물었습니다. 머슴은 다행히 우리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부자는 천주교란 어떤 것인가 호기심이 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열심한 우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는 교회의 꽃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의 꽃이기도 합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착한 어린이여야 합니다. 그와 같이 어린이들도 향기로운 행동,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행동, 남을 흐뭇하게 하는 행동, 한 마디로 착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행동을 보고서 여러분의 동무들이나, 이웃 사람들이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된 말씀을 다른 이에게 직접 전하는 것 중에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또한 성당에서나 모범된 어린이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하늘 나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우리는 좋은 일 한 가지씩만이라도 해서 예수님께 선물로 드립시다.











3         부활 제7주일 요한 17,1-11 (가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송열섭 신부



일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 오직 성부의 뜻만을 위하여 생활하신 주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날에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기도입니다. 조금 있으면 자신을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바로 그 제자들을 위하여 성부께 간구 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소외당한다는 것은 스승으로서 실패요 끝장인 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극한 상황을 넘어서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오늘은 제자들의 일치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는 주 예수 안에 나타난 성부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로는 교회생활을 사람의 몸에 비유하였습니다. 지체는 여럿이나 몸은 하나임과 같이 교회의 일치는 여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마음을 향하고 힘을 같이 하는데서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치와 유대를 완성하려면 각자가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에페소서에 보면 우주도 하나요, 인류도 하나이며, 주님도 하나요, 신앙도 하나라 하였습니다. 과연 어떻게 서로 다른 인종들이 하나가 되며, 다른 국민이 하나가 되며,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창조의 주인이 되시는 하느님과 그분을 계시해 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느님만이 온 인류를 포함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느님을 함께 모시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서 능히 일치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믿는 자에게는 못할 바가 없다고 하셨음 같이 믿음은 모든 인종들을 하나되게 하며 사람들의 심정을 하데 묶어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성부의 뜻인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해야할 마땅한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악마 같은 무기가 많습니다만 가장 무서운 암적 존재는 사람과 사람을, 가정을, 나아가서 국가와 국가를 이간시키는 무관심과 미움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입니다. 왜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사랑이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능가하는 존재는 이 우주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미움은 극복되었습니다. 이 사랑의 용서야말로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요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부르짖거나 외치는 어른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실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최초의 순교를 한 스테파노도 그 임종시에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폭도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하고 빌었습니다.



자기를 해하는 원수도 성부 안에서 하나로 뭉쳐야 할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그를 용서사고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도 이 같은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면서 가르쳤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목이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로마 12,20-21)



서반아에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의 일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하는 옛 말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일치를 가능케하는 것은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선을 선으로 갚는 사람도 결국 일치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오직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의 행위만이 일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녀 대 데레사는 사탄이란 놈은 사랑할 줄 모르는 놈이기 때문에 가장 가련하다고 했습니다. 과연 미움은 사탄의 일인 것 같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랑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일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용서와 평화와 믿음을 가져오고 미움은 죽임과 분열을 세상에 던지고 있습니다.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성부의 뜻은 자녀인 신자들이 일치, 그리고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자녀들이 화목할 때에 진정 성부께 영광이 되고 온 세상이 평화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치를 위하여 먼저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어야 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승천 대축일 (가해)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에페 1,17~23 ( 그리스도를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복 음 마태 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오늘 세 차례의 독서는 모두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따라서 승천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늘에 올라간다는 일은 대단히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여행의 장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어도 인간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사람이 승천한 사건이 몇 차례 있습니다.



창세기(5,24)에 보면 아담의 6대 후손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 가셨다고 했으며,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은 그때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11,5참조). 열왕기 하권(2,11)에 보면 하느님께서 예언자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가셨으며, 토비트서(12,20)에 보면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나옵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늘에는 하느님과 천사와 성인들이 사는 곳이요, 지하에는 마귀와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에 오르셨다는 성서의 표현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실제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을 어떤 물리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물리적인 승천 이상의 보다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소련 최초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지구 궤도 저 위에 올라갔을 때 그는 말하기를 \’하늘에 올라와 보니 하느님이 안 보인다.\’하면서 지상 관제소에 유명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말은 백 번 맞습니다. 무신론자들인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에겐 아주 통쾌하고도 시원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한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의 어느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 해서 주님이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을 통해서 진실로 우리 가까이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육신의 시야에서는 사라지셨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신 것이 승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선 승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야 합니다. 따라서 승천은 부활이라는 말과 크게 일치합니다. 그분이 육신을 가지고 우리 곁에 언제까지 머물러 계실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잡지에 보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계속 승천 중이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낸 최고의 스피드를 가진 로켓트를 타고 하늘에 간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가장 가까운 별의 십분의 일 거리도 못 가셨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얘깁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언젠가 부활 승천 할 때 그렇게 됩니다. 물리적으로 10만 광년, 또는 백만 광년 걸린다 해도 부활한 영혼에겐 0.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이 뜻하는 의미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하느님의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 성자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위해서 다른 모습으로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신 육신에 더 이상 머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승천입니다.



승천은 우리의 희망이며 목적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먼저 체험하신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만일에 그것이 우리 각 사람에게 실현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허무요 믿음은 절망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 말씀을 항상 굳게 믿으면서 신앙에 더 큰 희망을 가집시다.











5       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가) 영원한 만남을 위한 짧은 만남

정웅모 신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당신이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까지는 여러 가지의 의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생전에 시공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지만 부활하신 뒤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인 분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육안으로만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자 한다면 우리는 결코 뵙지 못할 것이다. 저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영적인 신앙의 눈이 열려야만 이 세상 곳곳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40일 전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고 지금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과 승천은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과 승천은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셨던 예수께서 구원사업을 완수하시고 다시 하느님으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이 우리들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이제 예수께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으로서 언제 어디에나 머물러 계시면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벗이요 동반자가 되어주신다. 특히 루가에 따르면 주님 승천은 예수 시대를 마무리하는 사건이다. 곧 이어서 있을 성령 강림으로 새 시대, 곧 교회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유언처럼 남기셨다. 그것은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쳐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인데(마태 28,19-20), 이는 교회공동체를 세우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나가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도록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며 좋은 표양을 보여야 할 것이다. 특히 산상설교(마태 5-7장)와 공동체 설교(마태 18장)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공동체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제33차 홍보주일이다. 승천하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는 홍보매체를 적극활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홍보매체의 발달로 우리들은 하나의 지구촌에 속한 이웃으로서 다양한 정보들을 서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홍보매체는 순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도 가지고 있어서 잘못된 가치관의 확산 등이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홍보매체들이 인간성의 향상과 사랑의 문화를 확산하는 데 사용되도록 관심을 가져야 하며 또한 비판적인 안목도 가져야 한 것이다. 또한 교회 내의 홍보매체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관심이 생명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가)   어둔 밤

최인호 베드로/작가

 올리브산은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해발 800m의 높은 산입니다. 올리브나무가 많아서 감람산(橄欖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주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자주 기도를 하셨으며 수난 전날에도 이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루가 22,41)에 앉아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헛맹세를 했던 장소도 이곳이며, 유다가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들을 끌고 몰려와 주님께 입을 맞추고 체포했던 장소도 이곳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사제 종의 귀를 베어버린 곳도 이곳이며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 버린 곳도 이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리브산은 분노와 절망, 헛맹세와 폭력, 전쟁과 체포, 음모와 배신, 살상과 불의, 광기와 속임수, 게으름과 비겁 등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우리들이 살고있는 어두운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톨릭 사상 가장 뛰어난 영성가의 한 사람인 십자가의 성요한은 주님이 보내셨던 올리브산에서의 밤을 ‘어둔밤’으로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친히 어둔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에 위도를 베푸시려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악이 난무하는 어둔밤을 거쳐야만 비로소 ‘정신의 밤’에서 ‘신앙의 밤’으로 정화되어 나아갈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처럼 온갖 악과 죄가 난무하는 올리브산이야말로 주님께서 십자가의 어둔밤을 거친 후 승천하시는 이 지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장소로 변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산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내리신 후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두 손을 들어 축복하시면서(루가 24,50)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듯 게으름 속에 잠들어 있던 올리브동산은 이제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분노와 절망에 가득찼던 산이 기쁨에 가득찬 산으로, 온갖 배신과 광기에 가득찼던 산이 하느님께 찬미하며 노래하는 산으로 바뀌었으며, 주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는 거룩하고 신성한 계약의 장소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사들의 말처럼 “승천하신 예수께서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사도 1,11). 바로 그 올리브산 위에서 주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것처럼 무화과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았으니 여름이 가까워와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의 사명이며 의무입니다. 우리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루가 19,40).











7          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 16-20)(가) 왜 하늘만 쳐다보나?





인간은 죽으면 땅에 묻힌다. 그러므로 땅보다는 하늘이 더 희망적으로 보인다, 희망적이기에 사람들은 하늘을 좋아한다.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갔다는 말을 신앙인이건 아니건 자연스럽게 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미지의 세계다.

넓고도 높은 무한대의 공간을 혼자서 기구를 타고 날아본 사람들은 이 세상의 어떤 스포츠보다도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준비가 덜 된상태에서도 무리하게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하늘


하늘을 오르면 오를수록 세상은 작아 보인다. 그래서 하늘을 높이 날아본 사람일수록, 저 작은 세상에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싸움을 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가를 후회하게 되고, 드넓은 하늘처럼 조금씩 마음이 넓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어디부터인가? 지상에서 10m혹은 1000m부터 하늘인가? 아니면 1m부터 하늘인가? 막상 하늘이 어디냐고 물으면 난감해진다.

하늘은 지붕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하늘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사람은 하늘을 맞대고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승천축일이다. 그렇다면 하늘 어디만큼 올라가셨다는 말인가?



하늘에 오르셨다.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 어디엔가 궁궐을 마련해 놓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떠나 그곳으로 가셨다는 말인가? 그 궁궐에 의자가 셋이 있는데 오른편 의자에 앉으셨다는 말인가?

주님 승천대축일에 우리는 사고의 한계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인간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성부께서 계신 곳을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은 신이시기에 신적인 방법으로 존재하신다. 하느님은 무형의 존재이시기에 우리에게는 불가시적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뒤에는 40일간을 머무시면서 가끔씩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셨다. 너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때로는 음식도 함께 잡수시기까지 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뒤 40일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시더니 이별하실 때가 됐음을 아시고 제자들을 산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다.



나는 이제 떠나간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이 말씀을 마치시고 승천하셨다. 마태오 복음은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가 24,57-53: 마르 16,19-20; 사도 1,9-11은 주님의 승천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제 다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셨다. 이를 공적으로 선포하시고 공식 이별을 하신 날이 바로 승천축일이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시지 않는다. 그분은 이 세상 종말 때에, 재림하실 때에야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분의 인성이 하느님의 천상영역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감을 나타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꿈에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토마스 사도가 저질렀던 실수를 또 범하는 것이다. 보고서야 믿어보겠다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염이 하얀 예수님과 대화까지 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럴 수는 없다.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이제는 영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



복음의 메시지

사도행전은 자세히 주님의 승천소식을 전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셨을 때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 흰옷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기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마태 1,23에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였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께서 세상 마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니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씀하셨다.

  불효자도 마지막 가는 길에 선 부모가 정식으로 들려주는 유언은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는 이제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승천에 앞서 유언을 남기셨다. 우리는 그분의 유언을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모두 다 내제자로 삼을 수 있도록 세례를 베풀라하셨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전도를 하였는가? 이날에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8   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 (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간호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나이팅게일(1820-1910)은 크리미아 전쟁 때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많은 군인들을 치료해주었다. 그는 의사들이 포기한 환자조차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고 새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어떤 환자든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많은 환자들을 소생시켰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등불을 든 여성」으로 존경받았다. 종전 후 영국 국민들은 대대적인 환영식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름을 바꾸어 몰래 귀국할 정도로 겸손한 여성이었다.



오늘날에도 국제 적십자사에서는「나이팅게일」상을 제정해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원에게 표창하고 있다. 간호원이 될 때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고 있다.



크리미아 전쟁 때의 일화이다. 그녀는 병원의 마루를 닦고있었다. 담당의사가「시간 있으면 쉬도록 하세요」라고 하자, 그녀는 「이 손은 하느님이 주신 손입니다. 제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대신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이팅게일의 봉사활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 기자가「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나이팅게일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것뿐입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일생 동안 언제 어느 때나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 신앙인의 전형이다.

  

실제로 신앙이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다. 신앙인의 가장 큰 은총은 하느님과 함께 살며, 그분의 보호하심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팅게일은 참다운 신앙인이었다.

  

오늘 복음은 열한 제자가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내용이다. 세상 모든이에 대한 세례와 선교의 사명을 맡기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 부할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즉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분, 즉 임마누엘의 주님이시다.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사 7,14; 8,8)

 

마태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은 바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사상이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을 임마누엘의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복음 서두에 예수님의 족보와 「하느님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의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상을 구원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성격이 잘 나타나고있다.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도「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말씀으로 맺고있다.



마태오 복음의 처음과 끓을 장식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다. 남아있는 우리들이 할 일은 주님에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일을 부족한 우리가 대신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의 신성한 사명인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일부인 우리 자신도 이 사명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사항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복음선포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행동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또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와 약속하셨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나이팅게일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었으면 좋겠다.

 「주님! 내 손과, 내 마음과, 내 행동은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늘 함께 하심을 굳게 믿습니다.」살아야한다. 오늘 주일 복음은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열한 제자」라는 말은 사실 아픔을 지닌 말이다. 본래 「열두 제자」라고 불려야 하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고 떨어져나가, 이제는「열한 제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거치면서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루었던 「열두 제자공동체」는 깨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자들 편에서 보면, 이렇게 깨어진 제자공동체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만 해도 지극히 은혜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만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막중한 사명까지 주시고 승천하셨다고 전한다.



복음서들은 모두 제자들의 이 파견이 있기 전에 예수에서 그들을 오랜 기간 동안 얼마나 정성들여 가르치셨는지에 관해 전해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의 앞부분들은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있는, 세상 만민을 향한 제자들의 이 파견을 준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누구신지 배워야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눈구이신지를 깨닫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꼭 필요했던 것은,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누구신지 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파견될 준비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으로의 파견을 의미하였다. 사실, 복음서의 다른 대목들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자, 세상으로부터「도피」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한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가오시어 힘을 주시어 일으켜 세우셨다. 예수님의 승천도 제자들에게는 또 다시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스승 예수님이 떠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 용기있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님으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굳은 믿음이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신 (마르 16,19) 예수님은 이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신다. 떠나셨다는 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에게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떠나가심」은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과「더 가까이, 함께 계시기 위한」것이었다.

그분은 이제 특정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갇지 않고,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존하실 수 있는「주님」(퀴리오스))이시다. 그러기에「주님이신 예수님」(마르 16,19)은 이제 그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오리려 그 전 보다 「더 가깝게」 계실 수 있는 분이 되시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어느 곳에 가 있건, 어느 처지에 있건,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주님」이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의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러 저러한 구체적 능력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분께서 자신들과 늘 함께 해 주실 것이리라는 믿음도 포괄하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끝 구절에 나오는 다음의 말씀은 이를 증거한다: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마르 16,20).

구약성서를 보면 만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광경을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심 구원의 날로 묘사하는 곳들이 있다(예컨대 이사 2,15; 미가 4,1-5).



그리고 그에 관한 소식을 「복음」(기쁜소식)으로 삼고 있다. 이와 비교해, 오늘 복음에는 정반대의 움직임, 곧 만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오는 움직임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제자들만이 만백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이 보인다.

오늘 복음 말씀에 의하면, 이제 만백성의 구심점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마르 16,19) 그리스도이시다

이 분이야말로 「기쁜소식」의 진원지이며, 하느님 백성의 중심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보았듯이 열 한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어 만민에게 다가가, 스승 예수께서 계시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전파할 사명을 받았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뜻은 곧 제자들의 뜻이 되어, 세상 만민들에게 전파되어야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도 같은 사명을 갖고있다. 그런데 남에게「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소식이 기쁘다는 것을 체험하고 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보았듯이 먼저「함께 계시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런 믿음과 사랑이 실천될 수 있는 공간인 신앙공동체가 꼭 필요하다. 신앙의 기쁨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살아가는 고립된 삶에서는 결코 나을 수 없기 때문이다.











9          예수 승천대축일 마태 28,16-20 (가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Ⅰ. 역사적 광경

“시 읊어 주를 찬미하라. 태고의 하늘, 그 하늘 오르신 주를 찬미하라.” 오늘은, 그리스도께, 사도들께 그리고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런데 역사적 광경은 약간 이상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에 여러 차례에 걸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은 주께서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주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사도들은 주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지 않은 것과 완고한 마음에 대해서 주께서 나무라시니, 사도들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들은 서슴지 않고, 주께서 성신을 보내신 다음 이스라엘 왕국을 복구하실 것인지를 또 다시 주께 여쭈어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을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미련둥이들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열흘 후 성신이 강림하신 다음에는 딴 사람들이 될 것임을 아시는 까닭입니다. “그대들 위에 임하시는 성신의 능력을 받아 그대들은 예루살렘뿐 아니라, 땅 극변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될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으리라.” 주께서는 이렇게 말을 마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어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Ⅱ. 우리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

이렇게 예수께서는 성부께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마 우리 마음속에서는 “뭐 정말!”하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말하면 사도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들이 종교를 정치적인 나라로 여겼다면 우리 중에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알려 준 복음사가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있습니까? 주께서 부활하셨고 또 당신의 성교회 즉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주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어떤 상태의 “완고한 마음”을 고집하고 있습니까? 탐욕입니까? 분노입니까? 이기심입니까?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멸시를 당하는 사람에게 대한 무관심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일생이 곧 세상을 위한 일생이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 애쓰셨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인생이 교회년력에 비추어서 볼 때 뜻이 있는 인생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려 애쓰셨습니다. 해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사시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교회년력을 따라서 해마다 우리를 훈련하시고 영감을 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미사와 성사로써 우리를 굳세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사도들에게 있어서처럼, 그다지 성공을 거두시지 못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Ⅲ. 주님의 마지막 교훈

그러나 주님은 단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께 너무나 귀여운 자녀들입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완수하실 수 없는 것을 성신께서 완수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열흘 수에 우리는 성신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던 신앙을 우리로 하여금 증언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이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겉보기에 완고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시고 주께서 참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과 주께 대해서 진실한 인간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더욱 완전한 자 되고자 해야 하며, 우리 세계를 성부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본 집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곳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 말씀으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마지막이요 가장 근본적인 교훈입니다.



Ⅳ. “영광의 임금이시여”

이제, 그리스도의 가족인 우리가 여기 식탁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여기 와 있는 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받아 모시며, 우리 자신을 한층 더 주의 제사와 결합시키고 우리 자신을 주의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 위하여 여기 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우리는 이 말씀에 순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기쁜 소식이 우리 안에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즉 주님의 승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즐거움, 주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기쁨 –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기쁨은 우리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드립시다. “영광의 임금이시여, 오늘 당신은 하늘로 개선하여 오르셨나이다. 우리를 고아로 버려 두지 마시고 성부의 약속이신 진리의 성신을 우리에게 보내 주소서.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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