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5. 안충석 신부(나)/ 10 6. 수원교구 사제단(나)/ 13
7. 예수 마귀를 쫓아내심(나)/ 15
5 연중 제10주일 마르 3,20-25 (나)
안충석 신부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 않으리” 하던 영국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지난 겨울 끔찍스럽던 눈사태와 갖가지 재화와 인명 피해와 추위로 시달려온 우리 마음에 새 생명이 약동하는 자연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주 죽어 버린 것만 같았던 시커먼 나뭇가지에 새 생명이 움트고 얼어붙었던 한강 물도 따사로운 봄볕에 번쩍이고 있습니다.
사실 필 줄 모르고 동면하는 것 같은 우리네 살림살이에 이 대자연의 봄은 하늘이 주신 가장 큰 삶의 위로자이며 인생살이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또 어느 시인의 말처럼 봄은 잔인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새생명을 살리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의 투쟁으로 피곤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어리기 때문입니다.
새 아기를 잉태한 산모가 사랑을 안은 고통처럼 바야흐로 사랑의 수난 계절입니다. 대자연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성당 안에 들어오셔서 아주 달라진 느낌이 드실 겁니다. 오늘 복음성서의 마지막 말씀인 “예수 몸을 감추시며 성전에 나오시느니”라는 말씀을 기념하는 뜻에서 나는 성당 안의 십자가를 수난의 상징인 자색보로 가리었습니다.
우리의 주의력을 온통 십자가, 즉 예수의 수고 수난으로 집중시키자는 심산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예수님과 그 원수와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주께서는 “천주의 사람은 천주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않음은 천주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하시면서 이제부터 정작 자신의 피를 보는 수고 수난의 십자가의 투쟁이었습니다.
주께서는 그와 같은 수고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가는 길에 따라오도록 우리를 장엄하게 초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가 내 말을 수행하면 영원히 죽음을 당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이 말 뜻에 무어라고 답변했겠습니까? “이제야 네가 마귀 들린 줄 알았도다” 하면서 인신공격을 하였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내 영광을 구하면 헛것이나 천주의 영광을 구하고 나를 천주께서 현양하시니 진실되다”고 끝까지 투쟁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피나는 투쟁의 십자가의 길뿐인 것입니다. 투쟁은 인생의 법칙입니다. 바로 우리의 치열한 생존경쟁이올시다. 이 투쟁은 저 일선에서나 월남전선에서 싸우는 전쟁이 아니고 또 나쁜 투쟁도 아니고 악을 적대하여 가면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악은 저렇듯이 강하게 날뛰는데 선은 왜 그렇게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그런 것을 선이라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니 나의 생활에서 저 십자가의 전 우주를 통해 적용되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투쟁하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받지 못하리라.” 주께서도 이를 재 강조하시면서 “나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고 모진 말씀을 하셨습니다. 칼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밖으로 휘둘러지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박히는 것입니다.
밖으로 휘두르는 칼은 대제관의 종의 귀를 베어 버린 성급한 베드로 사도의 칼처럼 이웃 사람들을 상하게 합니다. 주께서 네 칼집에 네 칼을 꽂기를 명하신 칼은 이런 종류의 칼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칼로 치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악을 악으로 갚는 자는 악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다른 종류의 칼은 이기주의와 그릇된 자기 중심과 탐욕을 잘라 버리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대항하여 싸울수록 밖에 있는 적과 싸울 필요는 적어지고 자신의 더러운 피를 마음으로부터 쏟지 않으면 않을수록 선량한 이웃 사람의 깨끗한 피를 더 자주 보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독선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은근한 시기로 항상 손을 마주잡고 할 일 없이 몰려다니면서 이웃 사람들의 깨끗한 피를 보고 즐깁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적을 찾아내지 못하는 자는 자기 밖에서 적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 속의 악에 대한 공범자를 가지고 스스로 가슴속에 피나는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보다 높은 참된 자기와 낮은 거짓 자기와의 치열한 전쟁터인 양심 속에서 저 십자가의 승리가 없다면 영원한 죽음뿐입니다.
자기의 탐욕과 육정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비열한 독선과 핑계로 갖은 악랄한 수법으로 이웃 사람 등에다 슬그머니 올려놓고 시치미를 뗄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가끔 “어쩌면 우리 마음이 그렇게도 편안치 못한가” 하는 한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신과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자신 안에 평안이 없다” 너무나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는 항상 불안합니다. 자기 자신을 정복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고로 싸워서 얻을 평화를 맛 볼 길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신처럼 우상처럼 떠받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한번 천주의 사랑을 받아 보면 주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마구 남에게만 휘두르는 칼을 거둬들이고 제 칼집에 꽂으면 사정은 사뭇 달라집니다. 거짓 자기와 피나는 투쟁으로 얻은 마음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 드리고 사랑하는 기쁨에 충만한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연합군의 한 병사가 몇몇 동료 군인들과 함께 어느 날 저녁 술집에서 놀았습니다. 술이 만취된 병사들과 술꾼들이 서로 싸움 끝에 말리던 그 집 부인이 살해되었습니다. 일이 공교롭게도 그 부인 살해 협의가 그 병사에게 떨어져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변호하는 법관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살해를 안 했습니다. 그만한 법적 증거도 있습니다. 살인자는 그 때 같이 있었던 모리 하사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혈혈 단신이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모리를 기다리는 가정을 생각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서는 저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버릴 각오이니 당신의 변호는 구구합니다” 라고 거부하였습니다. 드디어 사형 집행 날에 운명의 짓궂은 장난은 그 살인범 모리 하사가 집행관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병사는 아찔하였습니다. 그 인간의 뻔뻔스러움을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눈을 보자기로 가리고 소총병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쏘아”하는 살인범 모리 하사 집행관의 명령에 따라 그 병사는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총살 사형 집행 규칙에 그 지휘 하사관이 일단 집행이 끝나면 사형수 머리에 권총 일발을 쏘게 되었는데 그 하사관은 늠름한 걸음걸이로 그 쓰러진 병사 앞에 나아가 권총을 빼어 명중시키고는 책임을 완수했다는 듯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이 뻔뻔한 병사와 또 사형 받은 병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죽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겠습니까? 그 전에 그 진짜 살인범의 배은망덕과 뻔뻔스러움은 우리에게 무얼 말하려는 것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저 사형 받은 병사의 사랑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들은 외면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성서는 예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비극적인 예수님의 수고 수난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예수님의 투쟁방법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길 밖에 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실 것이시지, 우리는 이해가 잘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더 좋은 길이 있다면 왜 어째서 그 길을 안 주셨겠습니까? 영생에의 일방 통행인 저 십자가의 길 밖에 이 세상에선 사랑의 길을 달리 안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자기 전 생활을 천주님의 뜻에 맞는 재물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고 수난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예컨대 직업상의 여러 가지 고생, 질병의 고통, 가정적인 어떤 불행, 갖가지 모든 근심 걱정 등 어려운 시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한 몫 참여하는 것만이 단 하나 밖에 없는 길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하여야 하며 이웃이나 남에게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으리라. 만일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자기를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주여, 제 자신을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기는 정말로 저 혼자는 주체할 길 없는 것처럼 무겁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따르고자 하거든 사랑과 위로의 조건이 있사오니 대개 당신의 멍에는 달고 당신의 짐은 가볍습니다.” 하는 사랑하는 기쁨의 노래가 우리의 고통스러운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조용히 울려 퍼지도록 저 가리운 십자가 앞에 두손 모아 이렇게 간구합시다. 아멘.
6 연중 제10주일 마르 3,20-25 (나)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란?
수원교구 사제단편
우리는 두 주일 전 주께서 사탄과 사생결단 하시는 싸움을 복음 성서에서 잘 들었습니다. 주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시고 끝내 승리하시는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께서 또 하나의 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즉 자기만 깨끗하고 남을 항상 악하게만 보는 못된 인간들을 물리치시는 실로 통쾌한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따위 인간들이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한패라고 터무니없는 생떼를 쓰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어이없는 말입니까? 주께서 먼저 복음에서 마귀를 쫓으실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 호령만 하시면 되었지 그 외에 다른 말씀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두겁을 쓴 마귀 같은 못된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가면을 벗기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입니다” 하시면서 그들이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중에도 마귀 같은 못된 인간들이 있어 얼토당토않은 허튼 수작을 걸어오기도 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한 수법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더욱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없는 우리 신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가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그들 자신이 자기 잘못으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우리들의 가장 현명한 태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니 우리 자신은 아주 경우 바르고 합리적이고 분명하고 폭넓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일생은 사탄과 못된 인간들을 사랑으로 깨우쳐 이기신 승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패배를 당하지만 절대로 쉽사리 단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귀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세상의 모든 악과 끊임없는 투쟁으로써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결국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죽음으로써만 끝날 수 있으니 지금 당하는 고통을 잘 참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십사처의 가시밭길이 우리의 생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승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살아나가야 되겠습니다. 2천년 전의 주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뭇 사람에게서 받은 조소와 눈총과 악인들의 천대와 멸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죄의 무거움에 짓눌리시며 애닲아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신앙을 위해 양심 바른 삶에 안간힘을 쓰다가 한 때는 그만 맥이 빠져 땅바닥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교만한 자기 자신을 믿다가 나가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망과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찾아 메고 달려야 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며 주를 본받아 우리도 수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수밖에 다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십자가의 승리만 영원히 남을 뿐 다른 승리나 영광은 뜬구름이나 안개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서 저 십사처 가시밭길을 가는 도중에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얼른 알아들을 수 없는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 삶의 목적지까지 도달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까닭을 잘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어이 목적지까지 가야지 도중에 넘어져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한 자살행위인 것입니다.
용기와 인내를 우리의 두 다리 삼아 사랑으로 힘을 내어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겠습니다. 그 길가에서 구경꾼들한테 존경과 치욕, 칭찬과 비방을 들음으로써 신자임을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남들은 우리를 사기꾼으로 치지만 우리는 진실하고, 남들은 우리를 무명인으로 치지만 우리는 유명하고, 죽은 것으로 치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II고린토 6,8-10)하고 바울로 사도께서는 우리를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생활방식은 천차만별하게 가지각색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지와 이성에 따른 의식적인 사고방식의 문제인 만큼 우리는 끝까지 싸워 남보다 더 선행에 힘써 최후의 빛을 낼 수 있도록 항구해야겠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할 그곳에 사랑이 있을 때 고통의 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불화가 있는 곳에는 화목의 씨를 뿌림으로써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랑의 터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순절 동안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묵은 자신의 더럽혀진 영혼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부활합니다.
7 연중 제10주일 마르 3,20-25 (나) 예수 마귀를 쫓아내심
현대의 사람들이 성서를 읽어 나갈 때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아주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보고는 흔히 놀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지금보다는 그 당시에 부마자나 미친 사람들이 훨씬 더 흔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므로 교회에는 부마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특별한 예절이 있습니다.
참말 마귀 들린다거나 미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에 와서 비교적 그런 일이 드물어 진 것을 천주께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마귀가 우리 생활에 끼쳐 주는 영향 즉 마귀의 유혹 자체가 요새 와서 소홀해졌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묵시로 마귀들이 우리 생활 안에 얼마나 속속들이 넓고 깊게 활동하고 있는지, 또한 슬프게도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를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마 놀라서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5장 8절에도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 베드 5,8) 그런 까닭에 교회에서는 평일 미사 끝에 모든 교우들로 하여금 “엎디어 구하오니 성 미카엘 대 천사이여 이 전장에 우리를 보호하사 마귀의 악함과 흉계를 방비케 하시고 또 천주 저 마귀를 억제하시는 이라 세상에 두루 다니며 영혼을 삼키려는 사탄과 다른 악신의 무리를 천주의 힘을 인하여 지옥으로 쫓아 몰으소서” 하는 기구를 함으로써 간악하고 무서운 마귀를 이길 수 있도록 성 미카엘 대천사께 도움을 청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도 이 원수를 꼭 만나게 되며 일단 만나면 그 원수를 쳐 이기거나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 자신이 영원히 멸망하는 길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원수와 그의 전술을 될 수 있는 대로 전부 알아야 됩니다. 적군들 중에 제일 위험한 놈은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적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바로 그런 적입니다.
우리가 만일 마귀가 얼마나 비천하고 더러우며 배신을 잘하고 기만적이며 또한 얼마나 교활하고 속이기를 잘하는지 똑똑히 안다면 어떻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말은 모든 일반적 선전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매혹적이며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연약한 본성에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옛날에 우리 주 예수님께 유혹의 말을 던지듯이 지금도 우리에게 “나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거짓말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부귀, 쾌락, 권능, 영화, 번영 등 마귀가 약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암흑의 왕자로서 광명까지도 약속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자주 마귀를 ‘거짓말의 아비’, ‘시초부터 거짓말쟁이’라고 부르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마귀의 특징입니다. 또한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수 천년 전 에와가 마귀에게 속았듯이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거짓에 속아 자기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교만하게 자랑하며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라고 경멸하고 있습니다. 원조 에와는 마귀에는 속은 다음에 자기 눈이 밝게 열려 자기가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사탄에게 속고 나서도 눈이 열리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움이 그들의 영신적 눈을 꼭 가려서 암흑은 점점 더 깊어지며 결국 자기들이 얼마나 진리에 눈이 멀었는지 조차 모를 만큼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단 자원으로 진리를 배반하게 되면 즉 빛을 보고서도 일부러 돌아서서 거짓말의 아비요 암흑의 왕자인 사탄을 따라 점점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면 이처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마치 죽을 날이 점점 다가오는 병자와 같습니다. 천주께서는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만드실 때 지력을 주셔서 진리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반함은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진보적이며 현대적이라는 과학서적, 문학서적, 또한 우리 주위에서 가장 널리 읽혀지는 여러 가지 세속 잡지 등의 거의 매 페이지마다 솜씨 좋게 쓰여져 있는 마귀의 간악한 거짓말들에 대비해서 얼마나 충분히 준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또한 세속 서적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나 라디오를 들을 때 항상 “교회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한다”는 진리의 기본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지도 성찰해 봅시다. 마귀가 우리 눈을 흐리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마귀에게 우리 영혼 안에 아주 조그만 발 디딜 곳이라도 주어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귀의 계교에서 건져주어야 할 사람들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탄과 그의 전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와 대조를 해보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 주시며 당신 모든 계획을 전부 우리에게 드러내셔서 우리의 맑은 이성에 호소하시고 당신의 길인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까지도 숨기지 않고 말씀하시는 반면에 사탄은 온갖 거짓말로써 정욕과 감각, 감정, 공상, 맹목적 본능 등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흥분과 허식과 텅빈 슬로건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일은 사탄도 사람들이 자기를 아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은 뒤에 숨어 있고 거의 모든 일을 오열(五列)들에게 전부 맡겨 논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데 왜 그에게 눈짓 하나에 왔다 갔다 할 군대쯤이 없겠습니까?
참으로 수많은 남녀들이 자신의 영혼만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자기 온 시간과 정력과 재능, 재산 등을 허비하면서까지 마귀를 도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멸망에로 이끌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무서운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증오하는 공산주의자들, 음탕한 사람들, 물질주의적 불신자들, 산아 제한을 주장하는 자들, 거짓 선지자들 등의 열렬한 활동만 봄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우리 가정에서까지라도 마귀의 활동을 두호하거나 적어도 방관함으로써 마귀를 돕고 있지나 않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가정에서 보고 있는 잡지들을 다시 한번 잘 검토해 봅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