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8. 임승필 신부(다)/ 18
9. 송광섭 신부(다)/ 19 10. 소년아, 내 말대로 일어나(다)/ 21
11. 생명과 죽음(다)/ 23
8 연중 제10주일 루가 7,11-17 (다) 되살리시는 예수님
임승필 신부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각각 과부 아들의 소생이라는 기적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기를 세 번 합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의 힘이 산 사람에게서 아픈 사람이나 죽은 이에게 옮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주된 행동은 기도입니다. 한탄과 간청의 기도로 죽은 아이가 살아납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죽은 이를 되살리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창조 때의 하느님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이 두 방식은 죽은 사람을 되살린 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결국 되살린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으로서 당신의 힘으로 되살리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혼자서 죽은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가서 기적을 행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 앞에서 공공연히 행하십니다. 이로써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일을 하셨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되살리신 사람은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성서에서 과부는 고아와 이방인과 함께 사회 밑바닥 층에 속하는 약자였습니다. 이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서, 권리와 재산을 빈번히 약탈당하기까지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과부에게 “울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를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 그에게 용기를 주고 그를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무턱대고 울지 말라고 하면 무례한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일 때는, 울 필요가 없는 일이 곧 일어난다는 희망의 말씀이 됩니다. 위로만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상여에 손을 대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사람을 만질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상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이에게 몸이 닿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이 얼마나 이런 식의 부정과 정결에 신경을 쓰는지를, 신약성서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율법을 무시합니다. 무법자가 아니라, 인간이 겪는 슬픔과 고통의 한가운데로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상여를 정지시키시고, ‘젊은이여, 일어나라’만 하셨어도,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먼저 과부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고, 죽음 또는 주검에 손을 대셔서 죽은 이를 살리시고, 또 친히 그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군중 앞에서 행해진 이 기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는 표지입니다. 곧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출현과 함께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과부들도 많았고, 때 이르게 죽어야 했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기적은 징표입니다.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도 고통과 죽음 속에서, 또 그것들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나아간다는 표식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미래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징표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 그분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이로써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위로와 기쁨과 희망으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 고통의 끝이면서 절정입니다. 고통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슬픔과 고통을 겪는 이에게 아무리 심오한 논리를 편다 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서 그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 고통을 친히 함께 나누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처럼 깊은 연대성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하느님 나라 건설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9 연중 제10주일 루가 7,11-17 (다) 「일어나라」그리고 實像의 비젼을
송광섭 신부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를 지나실 때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과부의 외아들 장례였습니다. 상여를 세우시고 “젊은이여, 일어나라”고 명하시자 죽었던 그 젊은이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예수께서는 “여성이여,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고 생각해 봅니다.
어느 시대에나 여성의 위치가 중요했습니다만 한국 사회에서 봉건시대를 거치고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시대를 맞은 오늘날처럼 중요한 때도 생각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잠자듯이 침묵만 지키던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서 활기차게 일해야 되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서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과 앓아 누워있는 자들과 잠자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이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과 죽지는 않았지만 병든 영혼들에게 그리고 자는 영혼들에게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우리 여성들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질병에서 그리고 영적 수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첫째로 가장을 위해서도 여성은 일어나야 합니다. 여성은 가정의 꽃입니다. 여성이 가정에서 제 위치를 잃어버릴 때 가정은 시들해지고 죽게됩니다.
둘째로 교회를 위해서도 여성은 일어나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내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높아졌습니다. 여성이 독서며, 미사 해설 등 과거 남성들의 독점 무대에 쉽게 진출하게 되었고 지난번 미국 여행 때는 수녀도 아닌 평신도 여성이 영성체를 시켜주는 것을 본 일도 있습니다. 여성이 조용한 가운데 내조만 하던 시대를 벗어나 교회에서도 외적으로 활동을 할 때 교회는 더욱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튼튼하게 살리기 위해서도 여성은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윤리 도덕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더구나 청소년들의 문제는 우려를 깊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을 유혹의 와중에서 살고 있는 남성들에게는 그 해결책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건전한 어머니, 착실하게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들이 이 일을 점차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여성들이 일어나 일하는 여성이 되려면 다음 몇 가지의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비젼 즉 보는 눈이 필요하고 보는 안경이 필요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사명 곧 할 일에 대한 분명한 비젼이 필요합니다. 또한 내 교회에 대한 비젼도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랑과 봉사로 뭉친 영광스러운 교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미지근하고 냉랭한 교회를 만들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우리가 사는 나라에 대한 비젼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나라를 만들려고 합니까? 자유롭고 번영하고 협동하며 진보적인 나라를 만들렵니까? 그와 반대의 암울한 나라를 만들렵니까? 비젼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고 성서에서 경고합니다. 비젼이 없으면 우리 모두 자멸되고 맙니다. 분명한 비젼의 여성들이 됩시다.
둘째로 위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아주 필요한 정신무장입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여성들에게 위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종종 큰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태15,28).
셋째로 도덕적 성실성이 필요합니다. 부패와 부정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이 도덕적 성실성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가톨릭 여성연합회 회보를 창간하면서 이 회가 더욱 활기차게 일하는 단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들만의 모임이니만큼 더욱 순수하게 더욱 화목한 가운데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한 일이 잘 알려져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더욱 알차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10 연중 제10주일 루가 7,11-17 (다) 소년아, 내 말대로 일어나거라
I. “소년아, 내 말대로 일어나거라”
집안 식구의 죽음은 항상 큰 비극입니다. 과부가 외아들을 잃었을 경우에는 더욱 비참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바로 그러한 경우를 목격하신 장면을 들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나인이라는 고을에 막 들어가고 계시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상여를 메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그 사정을 파악하셨습니다.
동정심이 동하여 그 모친을 보고 “울음을 그치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 “소년아, 내 말대로 일어나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죽었던 소년이 일어나 앉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시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이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시고,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보시었다”하며 하느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복음 성서 역시 우리의 영세 때 받은 은혜와 아울러 지난 부활 때의 영세 재신을 묘사한다는 것을 두 주일 전 강론 때 지적하였습니다. 성세 때, 죽었던 우리는 생명에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한 것입니다. 성 바오로의 말씀을 명심하십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다 그의 죽음 속에 잠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로써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음 속에 묻혔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영광스러운 권능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로마서6,3).
II.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생활의 긴장
그런데 부활절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성당 안에 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독서에 실려 있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확실히 우리에게 이상(理想)을 보여 줍니다. 즉 우리의 부활절 때의 죽음과 부활을 실천해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신의 길을 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즉 서로 남의 짐을 지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완전히 의존하고 겸손하며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육신의 문제 곧 타락된 인간 본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조롱을 참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제 육신에 씨를 뿌리는 자는 그 육신에서 부패를 거둘 것이요, 그와 반대로 영신에 씨를 뿌리는 이는 영신에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선행에 게으르지 맙시다.”
이처럼 높은 이상을 보면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긴장과 비극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 긴장이 항상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산다고 도로는 말했습니다. 이런 것이 문학의 소재입니다. 진지한 작가들은 모두 이 문제를 다루었고 또 사제들 역시 이 문제를 강론합니다.
현대 작가 중에, 이 문제를 다룬 프랑소아 모리악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불안과 기쁨”이라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는, 오늘 마지막 해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 불안 -어릴 때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참혹하게 나타나는 바 인간 조건과 동체(同體)가 되다시피 된 불안 -을 가라앉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몸서리치는 고독, 사랑하는 이가 죽음이라는 무서운 신비 속으로 떠나갈 때의 흔들거리는 그림자, 자아의 한없는 만족, 사랑하되 받지 못하거나 사랑 받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 노령의 시련, 힘의 점진적인 쇠퇴, 정신의 약화, 그리고 불가피한 죽음의 임박 – 만일 이런 것들이 인간 마음의 근본적 불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과 평화와 행복을 어디서 찾을지 모른다는 형이상학적 불안이 있습니다.”
III. “내가 줄 빵은 내 살이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 불안을 가라앉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인의 과부를 몸소 대면하셨듯이, 우리는 신앙으로 우리에게 실제로 현존하여 계시지 않는 한, 이일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러한 실제적 현존은 미사와 성사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이 성당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 위에 작용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동정심과 자비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인의 과부처럼 주의 자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주여, 귀를 기울이시어,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 천주여, 당신께 바라는 이 종을 구하소서. 진종일 당신께 부르짖으오니, 주여, 이 몸을 불쌍히 여기소서”(입당송).
여기서 우리는 주께 말씀 올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께서 우리를 절망의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회복시켜 주시며,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더욱 더욱 구하여 주십니다. “내가 줄 이 빵은 세상 사람을 살리는 내 살이니라”(영성체송). 정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이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시고,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보시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11 연중 제10주일 루가 7,11-17 (다) 생명과 죽음
오늘 주일 복음은 예수께서 나인이라 부르는 읍내로 가시던 도중에 과부의 외아들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신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영적으로써 외아들을 잃고 대성통곡하며 행상을 따라가던 과부 어머니께 대한 인간다운 동정심을 십분 증명하셨고 동시에 이런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당신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인정 많은 완전한 사람이시며 동시에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여 말하는 것을 보고 모든 이가 놀라움에 사로잡혀 :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시고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보시었다”하며 하느님을 찬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심과 예수님의 천주성을 증명하는 것만이 오늘 주일 복음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께서 1900년 전에 행하신 그 기적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도 계속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려는 것이 주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주일은 예수 부활의 기념일이며 우리 자신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 자신의 첫째 부활을 기념하며 동시에 또 다시 부활하는 날이라 하겠습니다. 성세성사 때에 죄의 죽음에서 부활한 우리는 한 주일 혹은 한 달 동안 세속에 잠겨서 범한 죄의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려고 죄를 뉘우치며 주일 미사에 나오는 것입니다. 일찍이 과부의 외아들을 향하여 “소년아 내 말대로 일어나거라”하신 그리스도, 오늘도 수많은 교회의 자녀들을 향하여 “네 죄를 사하노라”하시며 죄의 무덤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옛 과부가 외아들을 잃고 슬퍼한 것처럼 자모이신 성교회도 자녀들의 죽음을 슬퍼하나 자녀들이 타당한 고백의 성사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는 부활한 아들을 다시 품에 안았던 저 과부처럼 기뻐 용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세 때에 부활하였고 고백의 성사로 거듭 부활한 교회의 자녀들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신 생명을 다시 받은 셈입니다. 이에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오늘 주일 독서에서 “성령께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성령의 길을 바로 걸어갑시다”하시며 영신적으로 부활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구체적인 생활 태도를 설명해 주십니다.
“헛된 영광을 탐내어 서로 싸움을 걸거나 시기하지 맙시다. 사람이 어떤 죄에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은 성령의 은혜를 받았으니, 그런 사람을 관용의 정신으로 훈계하며 자신도 유혹에 빠질까 조심하십시오”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형제 중에서 누가 잘못하면 심히 책하고 비웃고 흉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 인간이 아니라 영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누구를 책하고 비웃고 흉보기 전에 우리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고 남 모르는 숨은 허물을 뉘우칠 줄 아는 겸손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어 말씀하시기를 : “실상 아무 것도 아니면서 누가 무엇이나 되는 듯이 여긴다면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하셨습니다.
인간은 남의 허물을 크게 보고 제 허물은 작게 보며 남의 공을 헐뜯고 제 공은 침소봉대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흔히들 남의 흉을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제 허물이 더욱 크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또 제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자랑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과연 스스로 속고 자신을 속여가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혈공로로 구원된 사람들이며 세속의 무덤에서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속일만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반성하며 이웃의 허물을 볼 때마다 자신도 동일한 위험 중에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 또 한번 말씀하시기를 :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하셨습니다.
이미 받은 은총을 잃을세라 깨어지기 쉬운 유리 그릇에 담은 것처럼 조심조심 걸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길을 걷는 방법이며, 이것이 영신으로 사는 길이며, 이것이 영신으로 부활한 우리 교우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