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8주일
13. 유진선 신부(다)/ 22 14. 안충석 신부(다)/ 23
15. 김종헌 신부(다)/ 25 16. 이계중 신부(다)/ 28
17. 강길웅 신부(다)/ 29 18. 강영구 신부(다)/ 31
19. 홍금표 신부(다)/ 35 20. 신은근 신부(다)/ 37
21. 서경윤 신부(다)/ 38 22. 임용환 신부(다)/ 40
13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말에 순결하라(야고 3,12)
유진선 신부
언어, 즉 말이란 것은 사람의 의사를 표시하는 기능입니다. 말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생각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배가 고프다, 피곤하다, 섭섭하다, 등등 자기일신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심리발표로부터 점점 인생이 문화를 창조하기에 이르기까지 사상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말이란 인생 생활에 없어선 안될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마로 말미암아 생을 유지하고 의사를 전달하고 상호 협조하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역사를 이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입을 내신 것은 두 가지 역할을 위해서 내리신 것이 사실인데 하나는, 입으로 식물을 섭취하고 살게 마련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하여 충심을 발표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입은 가장 신성한 것이요, 말은 엄숙하고도 간절한 표현인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2장 34절에 보면 “독사의 종류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하겠느냐?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와 말하는 것이니,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는데서 선한 것을 발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는데서 악한 것을 발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망령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로 인하여 힐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너를 의롭다하시고 네 말로 네 죄를 정하리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속에 악이 가득했으니 겉으로 악이 넘쳐흐르고 이 말로 인하여 심판날에 심판을 받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 중세기의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에는 악한자의 입술을 불바다에 내려 밟고, 그 혀를 잡아 뽑는 광경을 묘사했는가 봅니다.
친애하는 신자여러분! 입 하나씩 다 가지고 있고 또 여러분이 내가 벙어리가 되지 않고 자유로 말할 수 있는 인간임을 감사하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정면에 크게 뚫린 구명! 이것이 먹으라는 구명인줄 알고 먹고, 말하는 구멍인줄 알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 다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혀는, 말하는 기지입니다. 야고보서 3장5절에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마치 적은 불이 큰 숲을 태우는 것과 같이 혀는 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성냥 한가치가 매우 작은 것이지마는 역사적 Roma 성(城)의 화재도 그 작은데서 시작하여 연소된 것입니다. 내 지체중의 심히 작은 혀일지라도 그 역할은 세계같이 크다고 야고보의 편지에서 말씀하십니다.
요염한 여인의 한마디가 대장부를 거꾸러뜨리고, 필부의 궤변 한마디가 국가를 기울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조시대의 당쟁사가 능지처참한 피의 역사도 있지마는, 대개는 혀의 싸움, 말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말하고 저 사람은 저 말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난마같이 흐트러진 혼란한 그 가운데, 의는 밟히우고, 불의는 득세하여 공정은 깨어지고 권모가 성립하는 것은 모두 혀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이 혀라는 것은 작고도 무서운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하등지인이 사람을 죽일 때는 몽둥이로 죽이고 중등계급의 사람은 혀로 죽이고 상등계급의 사람은 붓으로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혀는 살인도구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무서운 혀이기 때문에 야고보서 3장3절에 “혀를 재갈 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입을 주의하고, 말에 조심하여 쓸 말을 하고 몹쓸 말은 하지 말며 말에 순결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다 허물이 많으나 만일, 말에 허물이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 되리라”(야고 3,2)
14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어릿광대 인생의 가면과 진실
안충석 신부
오늘 복음 성경 장면을 보면서 이사야 하느님의 종의 넷째 기구를 절감하였습니다. 누가 우리의 설교를 믿겠으며 또 누구에게 하느님의 팔이 환히 드러나 보이겠느뇨! 우리 사회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살아가기 위하여 죄악의 생활 수단과 구별이 날로 어려워만 지고 영육을 병행하여 간다지만 기막힌 현실생활의 소용돌이 속을 도시 헤어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가면을 씁니다.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 어느 장소나 어느 때나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다른 이의 가면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는 가장 무도회의 규칙 같은 세태풍조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지면서 아테네 시장 바닥을 쏘다니다가 다른 이들의 가면을 벗김으로써 죽음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는 불멸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놓고 있는 자와 그 말을 듣고 있는 자의 관계는 가면적인 말, 거짓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이런 사실과도 같습니다.
순회 공연하고 있는 서커스 곡마단 쇼가 어느 말을 입구에다 천막을 쳤는데 갑자기 불이 났습니다. 이제 막 쇼를 하려고 얼굴에다 잔뜩 화장을 하고 가면을 쓴 어릿광대들을 마을로 보내어 불을 끄러 오라고 마을 사람들을 부르러 보냈습니다.
쇼 구경을 가려는 마을 사람들에게 먼저 불부터 끄지 않으면 곡마단은 물로 피땀 흘린 가을 메마른 들판과 논들을 불사르고 마침내는 온 마을을 불바다가 되게 할 것이라는 절박하고도 진지한 사실을 가면을 쓴 쇼 단원들은 열심히 소리쳐 외치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진실을 말하여도 그 말을 들어주어야 할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경하러 오라는 교묘한 수단, 그것도 쇼인 줄 알고 박장대소를 하면서 안타까운 그들의 호소는 아랑곳없이 박수갈채만 보냈습니다.
이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그들의 기막힌 초조한 표정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오히려 극적인 효과로밖에 더 이상 들리지도 보아주지도 않는 것입니다. 강 건너 불만이 아닌 바로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똥도 끄려 하지 않고 대체 무슨 말을 듣고 말하며 보고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 격입니다. 우리 귀에 들려 오느니 라디오나 텔레비전, 신문들은 마치 한 방향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처럼 광고 방송소리 뿐입니다. 진실된 말을 듣고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용기는 가면적 얼굴, 죄악으로 그늘진 나와 참된 나 사이에서 생기는 이야기를 하여야만 합니다.
진실된 자기와 가식적인 말마디가 아닌 진실된 이야기는 천주님과 기구처럼 자기 자신과 쇼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남에게 가면을 쓴말을 하지 않고 반벙어리처럼 마구 지껄인다면 무수히 오해만 낳고 날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는 건너지 못하는 구렁텅이가 생깁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 우는소리만 낸다면 그는 이미 말로서 죄악의 수단으로 삼은 자인 것입니다.
총칼만으로 쓰러진 자 많으나 자기 혀로 망한 자가 더 많다고 ‘집회서’는 지적합니다. “심판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에 대해서 낱낱이 해명을 해야 될 것이오. 당신이 한 말에 따라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결 받게도 될 것이오.” 루가 6,39-4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어느 재판에든지 원고 피고자가 있어서 쌍방측의 말을 다 들어보지 않고 어느 한쪽 편의 말을 듣고 생각하며 판단한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처사라고 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으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먹는 것이라고 잠언 18절에서 일깨워 주십니다. 천주님과 남들은 또한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고 놀린 그 혀로 어떻게 남들을 그렇게 간단히 삼중살인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하고 있는 당사자의 영혼 생명과 그 말을 듣고 잘못 판단한 자들의 영혼 생명, 그 말에 오르내리는 자의 사회적 생명 이렇게 해서 말 한 마디가 세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살인인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대로 우리들이 가진 물질이 없어서 물질로는 남을 사랑 못하는 것만도 괴로운데 말로는 과연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남들 눈의 티끌은 보면서도 내 자신의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거짓 착한 자의 말도 듣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관한 말을 우리들이 들었을 때 일단 자기 나름대로 확신하는 말만을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남들이 지껄인다고 하는 것은 핑계로 천주님 대전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지옥에 가면 나도 지옥에 가겠다고 하시는 말은 아니잖습니까?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말에 있어 표양을 보이지 않으면 나귀가 돌리는 맷돌을 메고 강물에 빠져 죽느니만 못하다는 주님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천주님께서 우리들의 기구를 안 들어주신다는 야속한 생각을 가집니다. 언제가지나 대답이 없으신 천주님께 우리들은 말도 기구도 냉담해질 수밖에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귀먹은 반벙어리인 줄 모르고 천주님과 남들 탓만 합니다. 천주님의 대답의 말씀을 우리들이 이 세상의 처세술로 쓰는 그 위선적인 말마디, 우리가 바라고 공상하는 말, 얄팍하고 어리석은 감정을 만족시키는 극단의 이기주의를 키워 주는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듣기를 우리들은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님께서는 무수히 우리들의 귀를 두드리시나 우리 자신 편에서 빗장을 걸고 마음의 문을 쳐 닫고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네가 열으면 나 네 안에서 말하고 네 안에 거처하리라.” 말씀하신 주님을 외면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복음 성서를 대면하면서 천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어 묵상기구를 하며 또한 할 말을 하면서 기구하는 생활을 하십시다.
나의 혀로 남들을 상하게 한 보속을 남들을 위한 끊임없는 기구의 말로써 기워 갚아 나갑시다. 이 세상에서 머리털 끝만한 말도 기워 갚지 않는다면 저주받을 곳에 가서 기워 갚아야 한다고 주께서 재촉하셨습니다. 소용없는 귀와 소용없는 입을 갖고 오늘을 살지 마십시다.
제 아무리 귀먹은 반벙어리일지라도 신앙과 사랑의 생활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방향 감각을 갖고 우리들의 기구로 그래도 할 말을 하고 사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아멘.
15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판단 보다 사랑을
김종헌 신부
지난 달 여동생과 함께 서울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겨울 밤 9시는 꽤나 어두웠고, 매섭도록 추운 날씨였습니다. 동생과 저는 볼일이 달랐기 때문에 동생을 먼저 보내기 위해 저는 택시를 잡았습니다. 문을 열고 운전사의 얼굴을 본 순간 저는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목적지까지 동생을 데려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운전사의 얼굴이 시커멓고 흉터가 있는 것이 아주 험상궂고 무서워 보였습니다. 요사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밤늦게 혼자서 택시를 타는 여자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동생을 데려다 주었습니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 문을 열고 내리려 할 때 운전사의 큰손이 저의 팔을 덥석 잡았습니다. 저는 섬뜩하여 운전사를 쳐다보았습니다. “신부님,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영업 첫날부터 신부님을 모실 수 있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본명은 마르코입니다.” 저는 그때로만 칼라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겉모양만을 보고 그분을 나쁜 사람으로 성급한 판단을 했으나 오히려 그분은 저에게 친절을 베품으로써 저를 부끄럽게 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마라고 엄히 명하시면서 남의 눈에 든 티를 보고 호들갑을 떨면서 욕하고 자기 눈은 깨끗한 양 여기지만, 실상 자기 앞은 하나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꾸중하십니다. 오늘은 주님의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기로 합시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개의치 않고 행동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간섭하려 드는 본성이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느라면 너무나 많은 경우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쉽게 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해 버리거나 아니면 나와 똑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강요할 때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이기심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에는 상관없이 “주는 것 없이 밉다”는 식으로 ‘저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게 인상이 깊지 못하다’느니 하며 상대방의 용모, 행동거지, 생각 등 모든 것을 노출시켜 놓고 흠을 잡거나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어떤 때는 아주 재미있기도 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른, 더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해 주겠거니 하는 우월감조차 가지게 합니다. 이제가지 외적으로만 상대방을 보고 살핀 판단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좀 더 깊숙이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신이 아닌 이상 실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일일이 우리 생활에서 우리 자신이 잘못한 것을 꼬집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쉽게 시인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지 생활에 있어서나, 남을 보는 눈이 나의 잘못을 내가 용서해 줄 때와 같이 너그러운지 한번 생각해 봄직 합니다.
이웃사람과 다툰 어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말어, 돼먹지 않았어, 남의 은혜도 모르고 이제는 손찌검가지 해” 하면서 노발대발합니다. 그 뒤 어떤 일이 있어 자기가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삶은 “정말 너무한다 너무해”하면서 사실을 변명하더랍니다. 실상 이런 종류의 예는 허다 하지만 설교대에서 말하기란 거북한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일상 생활을 하면서 두개의 커다란 저울을 가지고 사는 듯 합니다. 자기의 잘못이나 죄를 계산하는 저울과 남의 잘못을 재는 저울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에게 이로운 저울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이며 죄의 근본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과 연결괴기 쉬우며 이 점이 곧장 죄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너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보기도 싫다”고 할 때도 왕왕 있습니다. 보기 싫다는 것은, 즉 일생을 두고 안 보려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무서운 말은 사람의 죽음을 재촉하는 악마의 주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의 잘못은 나 역시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이웃과 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더 나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께 죄인임을 고백하여 용서를 받아 하느님의 자비로운 처우를 받고 살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 같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남을 판단할 수 있고 더구나 악인으로 낙인찍어 남의 구원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알게될 때,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될 것이며 이웃과 나 자신의 용서를 위해 애덕의 행위를 하느님과 이웃에 바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겸손의 정신은, 잘못이 있는 형제들을 이해해 주게 되고, 꼬치꼬치 그 잘못을 캐지 않고 언제나 관대하게 대해 주며, 그 형제가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남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혹은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남을 판단한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위선자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가르치심대로 판단은 그분께 맡겨 드리고 형제를 사랑해야할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의 형태로 반드시 나타날 것이기에, 이제 이웃과 친밀하게 되어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며 주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도 주님 안에 하나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16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올바른 언어의 정신
이계중 신부
복음 중에 예수님이 어떤 벙어리의 입을 열어 주심으로서 똑똑하게 말을 할 수 있게 하신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잘못 사용하면 남에게 물론 자기에게도 손해를 가져오고, 잘 사용하면 이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또 말이란 한 번 하면 이에 대한 책임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일상 생활의 언어를 어떻게 다루고있는 지를 스스로 물어보면서 다음 몇 가지 점에 대하여 묵상하여 봅시다. 우선 언어의 위력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시다. 가끔 천주께서는 그 자체로 보아서는 극히 미약한 것에 막대한 힘을 주셨습니다. 언어가 바로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언어가 인간의 내적 정신과 합치게 되면 어떤 힘을 가지게 되며 그와 같은 힘을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자신이 서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언어를 통해서 천주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언어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며, 하나의 정신적 무기와도 같은 강론으로써 세상을 정복하도록 하는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 바오로 종도는 말하기를 ‘천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속가지 오려내는 정신의 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일마다 봉헌되는 미사 동안에 천주님의 말씀인 성경들이 낭독되고, 이에 대한 설명 및 교훈의 말씀이 강론하는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이 때에 우리들은 천주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내 영혼 안에서 충분히 작용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말의 책임감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말한 바 모든 것을 다 심판날에 헤아릴 것이니 너희가 한 말로 인하여 죄의 판결을 받으리라.(마태오 12,36-37)’하셨습니다. 말이란 좋건 나쁘건 한번 우리 입에서 나가면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것입니다. 또 말이란 이익을 가져오기도 하고, 손해를 가져오기도 하며, 복을 가져오기도 하고, 화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에는 큰 책임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날에 말에 대한 천주님의 심판을 모면하려면 자연 말을 삼가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 야고보 종도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 만일 말에 있어 잘못됨이 없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능히 자기의 전신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보라! 배가 있어 극히 크며 폭풍에 휩쓸릴지라도 그 조그마한 키로서 능히 조종사의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이 혀도 조그마한 지체에 불과한 그 도량(度量)하는 세력은 막대하니라. 보라! 극히 조그마한 불이 이 얼마나 큰 산림을 살라버리는고! 혀도 또한 불이며 불의 전체니라(야고보 3,2-5).”
이 말씀으로서 야고보 종도는 우리가 함부로 하는 말이 가지는 그 영향과 아울러 책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언어를 조심하여 친절하고 명랑하고 고무적인 언사를 통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말만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17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말이 곧 인격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집회 27,4~7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말아라)
제2독서 Ⅰ고린 15,54~58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복 음 루가 6,39~45 (마음 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에는 일종의 큰 힘이 있어서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 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성서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매에 맞으면 맷자국이 날 뿐이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고. 그리 고 이런 말도 있습니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많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은 더 많다.\”(집회 28,17~18)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압니다. 고상한 사람은 역시 하는 말과 행동에 예의가 있고 단정하며 품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천한 사람은 역시 하 는 말과 행동이 그저 천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 있는 것이 고작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말은 이처럼 사람의 됨됨이를 거짓없이 드러내 줍니다.
성서는 말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말은 곧 인격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며 말이 아닌 것은 하질 말아 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을 일컬어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좀 비약이긴 하지만 사람은 곧 말이요 말은 곧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말의 가치는 그만큼 큽니다.
제가 자주 다니는 목욕탕에서는 말많은 어떤 형제를 늘 만나게 됩니다. 저는 그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사는 지도 모릅니다. 다만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매일 목욕탕에서 구두를 닦아 신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걸핏하면 욕이요 상소리를 합니다. 듣기가 너무 거북합니다. 그래도 그는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한번은 탕에서 일하는 젊은이가 그 형제에게 물을 좀 아껴쓰라 는 말을 했습니다. 샤워기의 물을 틀어 놓은 채 그는 탕 안에 앉아 있기가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형제가 젊은이의 따귀를 때리면서 욕지거리를 하는데 그 욕이 입에 담지도 못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도 같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그 형제에게 대들었습니다. 그 날 그 형제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골라서 써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 자기도 상처를 받습니다. 좀 품위있고 고상한 말을 써야 하지만 말이 아닌 것 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입이 가벼운 자들은 입 조심 을 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다 전하고 헤프게 지껄여서는 안됩니다. 남의 대죄를 말하면 그는 대죄를 짓는 것이고 남의 소죄를 말하면 소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뭣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에도 나왔습니다. “그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흠 없는 사람 없고 티 없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남을 판단하는 일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사적인 감정이나 단순한 느낌에 의해서 나와서는 안됩니다.
저도 말과 판단에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저놈은 공부가 틀린 놈이라고 했는데 그 애가 어느 날 의과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절대로 안된다고 했는데 그가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과 판단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입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는 그가 부족하게 보이나 하느님 앞에는 내가 더 부족한 것이며 또 그가 설혹 부족하다 해도 하느님께선 그 자체를 사랑해 주십니다. 판단은 실로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주어 진 하느님의 몫이라면 또 아무리 어려운 말도 용기있게 외쳐야 합니다.
지난 유신시대에 우리는 용기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 에 칼이 들어가도 의롭다고 여겼던 것은 굽히지 않고 외쳤던 그 예언자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말에는 인내가 있어야 하지 만 또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해야 할 말을 안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아주 용기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가끔 사기꾼의 말이 솔깃하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공손하며 고상한 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신들의 말은 항상 편하게 들리며 충신의 말은 가시 같아서 입에 쓰고 거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말은 사람을 속이 기도 하며 멍청하게도 만듭니다. 말은 정말 큰 힘이 있어서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좌우간, 말 가지고 말많은 세상입니다. 따라서 말이 아닌 것은 절제하고 말이 되는 것만을 골라 이롭게 쓰도록 합시다. 말은 인격입니다. 내 인격을 말로써 다듬어야 하지만 남의 인격도 말로써 도 와 줘야 합니다. 말이 곧 \’말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18 연중 제8주일 루가 6, 39-45 (다) 주제 파악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8 주일입니다. 오늘로 연중 사순절 前 연중 주일은 끝나고, 오는3월 4일 재(灰)의 수요일부터는 올해의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참회와 보속의 시기입니다. 올해의 사순절을 거룩하게 보내어 거듭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습니다. 시쳇말로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바르게 사는 지름길이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데서부터 나의 행동 원칙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그러면 천주교 신부답게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가장답게 남편답게 아버지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한 가정의 주부이며, 한 남자의 아내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면 주부답게 아내답게, 어머니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제 파악 곧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가장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인 사람이, 직장에 가면 또 다른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직장에서의 이 대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과장이다. 그러면 과장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장이 마치 부장처럼 흑은 대리처럼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은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의 처지에 맞는 처신을 하게 될 때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이 가장답게 처신하지 않을 때, 그 가정은 엉망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남편과 아내답게 처신하지 못할 때, 부부 관계는 파탄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직장에서 역시 여러분이 맡은 지위와 신분에 맞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직장은 엉망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정직한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면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바뀔 것이고, 우리는 사는 보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도 말하기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수신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처지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자기 가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천하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행동의 출발점은 “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밝게 눈을 뜨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길잡이가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나 자신이 밝게 눈을 뜨지 못하면, 스스로 괴로움을 당할 뿐 아니라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려는 온갖 고뇌와 번민은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까? 우리 속담에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뱁새인 주제에, 황새처럼 걸으려 하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뱁새가 황새가 될 수 있습니까? 뱁새는 뱁새지 황새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신부인 주제에 돈 많은 사장을 부러워하고, 그래서 그 사장 흉내를 내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사장이 그랜저라는 값비싼 차를 타니 나도 그 차를 타야 되겠다고, 저 사람이 50평짜리 큰 아파트에 사니 나도 그런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 온갖 번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망치는 초기 단계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처지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려서, 스스로 번뇌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니, 자신도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고, 다른 사람도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어느 소경이 등불을 밝히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소경이 등불을 밝혀 들고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이상히 생각하고 물었습니다. “형제여, 당신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똑같지 않소? 그런데 이 어두운 밤에 등불을 밝혀 들고 어디로 가고 있소? 더구나 당신에게는 그 등불이 필요 없지 않소?” 그러자 그 소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등불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오……”
소경에게는 밤과 낮의 구별이 없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밤에는 언제나 등불을 들고 외출을 하였습니다. 그 등불은 눈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눈뜬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눈뜬 사람
들은 밝은 대낮에는 모든 것을 잘 볼 수 있으나, 밤이 되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소경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눈뜬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과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늘 등불을 들고 바깥 나들이를 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그 소경은 이미 소경이 아닙니다. 눈뜬 사람보다 더 밝게 앞을 보는 사람이지요. 그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등불을 밝혀 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비추어서 바른길로 인도할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 눈 속에서 들보를 꺼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 속에서 들보를 꺼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남의 눈에 든 티끌은 그리도 잘 보이는데, 내 눈에 든 그 큰 들보는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청정(淸淨)한 마음을 지니지 못한 탓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즉 마음과 양심에 때가 묻어 있어서 자기 스스로를 잘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정한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양심을 깨끗이 닦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양심의 거울을 닦는 일은 잠시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 겉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 즉 유리 거울을 닦지 않고 내버려 두면 금방 먼지가 끼고 때가 묻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거울, 양심도 그렇습니다. 잠시만 내버려두면 때가 끼고 먼지가 묻어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양심이라는 거울은 유리로 된 거울보다 훨씬 쉽게 때를 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번 묻은 때는 쉽게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더욱 묘한 것은 이렇게 양심의 거울에 때가 끼여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볼 수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눈은 더욱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양심의 거울이 더러워졌기에, 자기 몸에 묻은 똥은 보이지도 않고, 남의 몸에 묻은 재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허물과 탓을 남에게만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행의 관원이 됩니다. 자기의 탓은 없고 남의 탓만 있기에 서로 헐뜯고 싸우게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부모는 자식을 탓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를 탓하는 중에 싸움과 불화는 끝이 없고 그래서 함께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시작하면서 “내 탓이요.” 하며 가슴을 치는 것은 나를 바로 보고자 하는 것이며, 나를 바로 보고 모든 탓을 나의 것으로 돌리게 되면, 여기서부터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지고, 평화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꺼내 주려 할 것이 아니라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꺼내려고 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마도 이기적인 탐욕일 것입니다. 무엇엔가 마음을 사로잡히고 있거나 혹은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자기 눈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집(集)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물욕과 애욕에 집착하고, 그것 때문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이것이 번뇌의 시작입니다.
돈과 재물에 눈이 멀고 애욕에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게 되고 이웃과 형제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가족마저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아니 자기 자신마저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결국은 장님이 되어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망침은 물론이요,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집(集)의 늪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밝게 등불을 켜고 길을 비추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난한 마음, 청정한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의 뒤를 따르도록 합시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19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부끄러움의 덕
홍금표 신부
유가의 가르침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예(禮)가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가 기울고, 의(義)가 없어지면 나라가 위태롭고, 염(廉)이 없어지면 나라가 전복되고, 치(恥)가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가 기울면 바르게 고칠 수 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다시 편안하게 할 수 있고, 나라가 전복되면 다시 일으킬 수 있으나, 나라가 멸망하면 다시 회복시킬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잘못보다 더 큰 망국적 행위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부처님도 유교경(遺敎經)에서 부끄러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 중략 –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잠시도 그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부끄러워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모든 공덕을 잃게 될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들은 곧 착한 법을 가질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라고. 길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수줍어하는 마음과 양심의 가책을 받는 모습을 표현하는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덕이고, 어쩌면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덕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남의 칭찬에 낯을 붉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차마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의 여인네 상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그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몇 가지 단절어를 포함해 소경의 비유와 들보의 비유가 나온다.
두 가지 비유 모두 그 뜻은 명확하다. 남의 길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눈을 떠야 된다는 것, 그리고 남의 허물을 보고 지적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신 의도는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동 때문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종종 율법의 세칙에 얽매여, 율법의 참뜻을 보지 못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부 아는 양 행동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예수님은 소경이라고 질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 소경의 비유와 들보의 비유는 우선적으로 백성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 즉, 스스로 남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들을 의인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반성하기에 앞서 남을 판단하는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한 질책일 것이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고자 하는 것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욕구가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는 기본 욕구이고, 인간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고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고 교육자가 학생을 장상이 제자들을 지도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류 유산의 계승과 발전, 개인의 인격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요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은 가르침과 배움의 현장에서 가르침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데 가장 주요한 요인인, 지도자의 겸손함과 개방성을 지니기 위해 어떠해야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라는 것이다. 즉,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가르침은 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한 개혁과 회심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들이 가지는 뜻인 것이다.
오늘 이 복음에 나와있는 내용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앞의 유교와 불교에서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부끄러움의 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을 때, 필연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만이 타인의 길잡이라는 오만함과 타인을 판단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눈만 뜨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개혁, 개혁이란 소리를 듣게된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개혁에 뒤쳐져 있다는 반증일 것이고, 우리사회는 개혁되어야만 될 사회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웬지 쓸쓸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개혁의 합창 속에 살면서도, 우리 모두는 개혁에 그다지 큰 희망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대통령과 여당부터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나 다 개혁을 외치지만 자시자신을 개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나 언론,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나 기업가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시대의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개혁」이 아니라,「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와「부끄러움」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20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눈 안의 들보
신은근 신부
들보는 지붕을 바치고 있는 나무다. 기둥을 가로질러 천장의 무게를 견뎌야 하기에 크고 튼튼한 나무다. \’제 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에 티를 찾는다\’니 얼마나 씁쓸한 비유인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다. 자신의 잘못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잘못에 분노하고 매몰차 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난 뒤 남을 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신다. 어떻게 하는 것이 눈 안의 들보를 빼내는 것인가.
인간은 이중적 존재다. 두 얼굴을 지녔다. 인간 본질이 그렇다 보니 두 개의 잣대를 갖고 살아간다. 자신을 재는 잣대와 남을 재는 잣대다. 누가 그랬던가. 자신이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두 잣대의 차이를 드러내는 말이 아닐는지. 그러니 들보를 빼내는 작업은 분명하다. 이중 잣대를 하나의 잣대로 만드는 것이다. 두 얼굴을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인을 보는 시각과 자신을 보는 시각을 동일시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쉽겠는가. 어렵다. 그러기에 참고 희생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한다.
못 보기에 소경이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못보고 그 분께서 하신 일을 못 깨닫기에 소경인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면 신앙이 기쁨으로 바뀌지 않는다. 신앙이 기쁨이 아니면 주님 또한 전할 수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그러니 먼저 그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날의 삶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만남을 축복으로 마무리해주셨던가. 그분께서 봐주셨기에 지금의 운명이 가능한 것이다. 모르면 소경이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내 눈의 들보도 남의 눈의 티도 보지 않으려 한다. 평생 자기 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의 티만 보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슬픈 운명인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무엇이 좋은 나무인가. 건강한 뿌리를 가진 나무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온갖 양분을 줄기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건강하면 줄기도 건강하고 열매도 알차다. 나쁜 나무는 뿌리가 약한 나무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도 뿌리가 약하면 결국은 시들어버린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뿌리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그분의 간섭이다.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이다. 그러니 타인을 위한 기도는 곧 바로 그를 위한 영적인 힘이 되고 뿌리가 됨을 깨달아야 한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저 할머니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 본당의 뿌리인 것이다. 그분들이 있기에 본당은 언제나 건강한 나무로 남을 수 있다. 그러니 기도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만큼 삶은 강해진다. 튼튼한 뿌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베풀어야 한다. 베풀지 않는데 누가 기도하겠는가. 사랑과 애정을 지녔기에 기도의 보답을 받고 영적 에너지를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열매를 보고 싶어한다. 희망과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한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좋은 나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 그러니 눈 안의 들보를 빼내는 작업을 시작하자. 좋은 열매는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21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억울한 아이들의 죽음
서경윤 신부
신문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달려 던 화물 트럭에 받쳐 승용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이렇게 죽은 사람은 얼마나 억울할까 생각했습니다.
고속도로를 가다보면 유난히 빨리 달리는 차를 자주 보게 됩니다. 아마도 대단히 바쁜 일이 있을거라 여기지만, 다음 휴게소에 가면 영락없이 거기서 만납니다.
우리가 충분히 휴식하고 떠날 때까지 그 차는 그냥 있었지만, 우리가 얼마 안 가서 그 차는 우리 옆을 스치며 신나게 달려갑니다. 가끔 그런 차가 경찰한테 붙들려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
그 차는 두 가지 이유로 빨리 달립니다. 첫째는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휴게소에서 좀더 오래 될 수 있기 위해서 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이러한 것들을 즐기기 위하여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속의 대상이 됩니다.
요즘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누가 그러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건물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는 사람 밑에 깔러 죽은 사람이라 합디다.
사람이 많아지니까 별별 사람도 다 있지만, 죽는 사람도 많아지니까 죽는 형태도 여러 가지 일 뿐 아니라, 억울하게 죽는 경우도 점점 다양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근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얘기도 적잖게 들어왔습니다.
어떤 이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했고, 어떤 이는 고문에 못이겨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죄는 보통 죽은 자들이 다 뒤집어씁니다. 그러면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은 다음에는 더욱 억울합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많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향락 때문에 희생된다는 것은 인권유린이라도 보통의 것이 아니므로, 인신매매범은 사회로부터 보다 큰 지탄을 받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또 다른 부류가 생각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그 수많은 아이들이 연간 1백30만에서 1백50만으로 추산되는 아이들이 햇빛도 보지 못한채 사라져갑니다. 이 숫자는 연간 태어나는 아이들의 숫자를 훨씬 상회한다니, 생겨난 어린 싹의 절반 이상은 부모에 의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옛날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나 걱정이 돼서 태어날 때 운다고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가장 위험한 시기를 거쳐 살해사망률이 2대 1이 넘은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했기에 감격의 울음을 운다고 합니다.
「개구리 소련」 5명을 위하여는 온 나라 국민이 떠들썩한데 또 인신매매범은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데는 모두들 숨소리를 죽이고 묵묵히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결코 위선자는 아니란 생각을 합니다.
이 억울한 죽음에 목소리를 높혀 봤자 자신의 양심만 켕길 테니까, 아예 모른 체하고 지내는 것이 속 편하리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는, 생긴 아이 때문에 몰래 병원에 갔다 와서“낙태하지 맙시다!”하고 다닌다면, 선거 철에 “부정한 돈은 주지도 받지도 맙시다”하는 사람들이 주는 돈은 챙기고, 안 주면 달라하는 사람들, 표를 얻기 위하여 법을 어겨가며 물래 돈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긴 낙태도 엄연히 법적으로는 마구 못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들은 법을 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재수가 없어 들키는 것이 문제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그런 일이 없었다」「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 뒷탈이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신문과 TV들 통하여 외국 가수가 왔을 때에 난장판을 보면서, “적게 낳아 잘키우자” 는 구호가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적게 낳긴 했어도 잘 키우진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갓난 아기 시절엔 소한테서 우유 먹여 키우고, 겨우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는 속셈, 주산, 미술 피아노 학원에 맡겨 키웠으니, 그 이유 또한 자녀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은 잘 교육시키겠다는 생각과 함께 자녀를 학원이나 학교에 맡겨버림으로써, 자신은 자녀 교육이라는 짐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마음도 큽니다.
적게 낳은 이유가 솔직히 잘 키우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이제는 자식 때문에 부모자신의 삶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는 생각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가족계획도 성공적이고, 또한 쉽게 병원도 찾는 게 아닌지? 되도록 적게 낳고 “우리도 인생을 즐기자”하는 것은 참 매력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가 부모의 머릿속에 있어 생활을 지배하는 한, 우리의 자녀들은 바로 TV에서 본 그 학생들 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학생들을 지탄도 하고 걱정도 하지만, 사실은 그 부모들을 지탄하고 더욱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학생은 나중 걱정이고 부모들은 지금 걱정이니 말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오늘 성서 말씀대로 “장님에게 장님을 인도”하게 한 꼴입니다. 수많은 태아들은 부모가 즐기며 살 수 있도록 죽어준 아이들입니다. 위령비를 세워준다면 죽어서도 약이 오를테니, 차라리 효자비를 세워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자신이 즐기기 위하여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는 차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므로 경찰이 단속을 한다면, 부모가 즐기기 위하여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도 더욱 단속해야 할 건 같은데, 그러면 자신들도 단속의 대상이 되니까 묵계하에 서로 가만히 있기로 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생겨나서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살해되어도 아무도 규탄하거나 아쉬워하지도 않은 억울한 죽음, 이 또한 부모의 안락한 삶을 위하여 자기 부모에게 버림받아 살해된 억울한 아이들의 죽음이, 이 땅에서 사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아이들을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
22 연중 제8주일 루가 6,39-45 (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차 있는가?
임용환 신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밀 알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언행일치\’의 좌우명 앞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글의 일부입니다.
“채 질을 하면 찌꺼기가 드러나듯이/ 그 사람의 결점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를 기른 사람의 기술을 나타내듯이/ 말은 사람의 마음속을 드러낸다.\”
기원전 175년에서 기원전 270년 사이에 쓰여진 집회서의 말씀은, 그 기나긴 역사의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 마음속 깊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나의 말에 책임을 질 수가 있는가. 정말 나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인가. 아니면 순간 순간을 넘기기 위한 입마른 소리는 아닌지! .\”
한때 말을 거의 안하고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3, 4학년 때였습니다. 말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냥 신학교의 하늘이며 땅, 나무, 풀들만 보고 다녔습니다. 그들과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대화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말을 한다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저 자신이 확실치 못했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겠죠. 그 이후로 제 책상 머리맡에는 이런 글이 붙어있었습니다. ‘言行一致.\’
신부가 된 지금은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낍니다. “신부가 자기 한 말대로만 산다면 성인된다\”는! 누군가의 말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올 서품식에서 “사제도 인간이다\”라고 말씀하신 추기경님도 떠오릅니다. 내 몸뚱이 하나 제대론 추스르지 못하면서 신자들 앞에 서야 하는, 더욱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지내는 요즘은, 더욱더 저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당시 고린토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바울로 사도의 말씀은 제게 큰 힘을 줍니다.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나의 말은 부족함에도, 주님은 나를 도구로 쓰고 계신다는 것, 내가 할 일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것, 이것을 알기에 저는 오늘도 주님의 제단에 오릅니다.
재앙을 불러오는 지도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도력에 관계된 말씀입니다. 즉 지도자들(교사들)이 범하는 가장 흔한 오류는,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지도받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에게는 자기를 아는 정직한 지식이 필수적이며, 이 지식이 없으면 그들은 소경인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행사하는 지도권은 그들 자신과 지도받는 자들에게 재앙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도자이면서 지도받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가족들과 아이들, 나의 직원들에게 나는 과연 올바르고 자격있는 사람인가? 설사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 무조건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는가? 서로간의 진솔한 대화가 요청됩니다.
저 역시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자격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데서만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대로, 우리의 지도자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거짓말이 너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이제는 거짓말을 듣고도 ‘그런가보다\’하며 무심코 넘어갈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라 하셨습니다. ‘아니오\’라고 할 것에 ‘아니오\’라고는 못할망정, ‘예\’라고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니 우리에게는 ‘아니오\’라고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그릇된 지도자들에게 혹독한 질책을 퍼부으신 예수를 생각해 봅시다.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가는구나.\” 아모스 예언자도 생각납니다.
윤리․공동선에 일치하는 법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힌 대로 “사적이거나 공적이거나를 막론하고, 인간 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목적에 봉사하며, 온갖 사회적 내지 정치적 노예화를 거슬러 투쟁하고, 어떠한 정치 체제하에서나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도록 진력해야\” 합니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29항).
우리는 그런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국가 권력이 올바로 행사되고, 국법이 윤리원칙과 공동선에 일치되도록 그 의견을 관철시켜야\” 하는 것입니다(평신도사도직에 관한교령 14항).
예수의 말씀대로,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속을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차 있는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도자들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입니다. 물론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증거하고, 판단하기보다는 구원하며, 봉사를 받기보다는 봉사하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려는 것\” 뿐입니다(사목헌장 3항).
“보아라, 사람도 이와 같은 것이다. 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썩은 생선 묶었던 새끼줄처럼 고약한 냄새가 나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향을 쌌던 종이처럼 맑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것이란다\”(고 은 엮음,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이야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