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11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11주일

8. 김수창 신부(나)/13

         9. 유진선 신부(나)/14                10. 김철재 신부(나)/17

         11. 이규철 신부(나)/19               12. 김영진 신부(나)/21

         13. 강길웅 신부(나)/23               14. 강명구 신부(나)/25



8          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나)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하여

                                                       김수창 신부



정치적 발언도 예언직 수행의 하나

신성해야 할 교회에서 강론 시에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 끊임없이 데모를 하느냐, 하는 거센 항의 전화가 가끔 걸려 온다. 그 전화를 들어주다 보면 너무나 무지막지한 소리에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당연히 그래야 한다,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다.



이 시대에 사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민주헌법, 국민 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인권을 존중하는 정권과 정책 등이다. 교회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억눌리고 소외된 형제를 돌보며 복음의 빛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가의 눈에는 정치적으로, 기업가의 눈에는 노동쟁의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보이든 교회는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며, 정권 획득을 위한 정치 발언이나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나라가 망하고 정권이 무너지는 말세에는 종교행사가 성했다. 종교행사가 운수, 점, 기복 등 미신적으로 성황을 이루고 이것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을 때는 말세 현상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이 예언적인 말씀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봉사할 때는 사회개혁과 구원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의 오늘의 종교 실태는 여러 면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어떤 양상의 성황인가에 따라 이 나라의 미래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리라.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이 시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떠야할 것이다.



우리 교우들만큼 성직자를 위해주는 분들도 없을 것이다. 성직자의 의식주, 건강, 취미, 노후문제 등 모든 면에서 염려해 주신다. 무슨 운동이 좋고, 체통에 맞는 승용차를 타야한다는데 까지 관심을 갖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성직자로서의 정도(正道)를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외형적인 기준, 즉 신자수, 대지와 건물 평수, 수입 등을 따져서 가치 평가를 하는 수가 많다. 교회를 주식회사나 돈벌이의 도구로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 본당에서는 예비자와 신자 교육을 위해 성지순례를 자주 한다. 이는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신앙을 이어 받아 이 시대의 증거자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지에서 일하는 분들은 순교자의 정신을 전해주기 위한 봉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성물 판매와 헌금에만 정신을 쓰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게 된다. 돈을 요구하고 많다 적다 시비하는 그들은 우리를 너무나 실망시키곤 했다. 성지 개발을 위한 열성이 지나쳐서 그만 그런 실수로 번졌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앞뒤는 바로 가려야 할 것이다.



서구 선진국가에서는 생필품의 값이 싸고 언제나 변동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살기가 편하고 기본 생활은 안정되어 있다. 이것은 생산업자에게도 안정감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생필품의 값에 변동과 농간이 많아서 서민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주고 있다.

농산물의 가격도 안정되지 않아 늘 불안하고 이 때문에 농민들에겐 불만이 많다. 생필품과 농산물의 값을 안정시켜 서민과 생산업자에게 기본 생활을 보장해 줄 시책을 결행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서, 성가책, 기도서 등이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도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구입해야하는 거기서 매상을 올리려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성서를 보급할까하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싼값으로 보다 널리 보급될 때 수입에 차질이 올 것을 우려하는 인상을 준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가톨릭 성서 모임」에서 주선하여 3천원에 「성서」(신구약 합본)를 보급하게 된다는 소식은 우리를 너무나 기쁘게 하며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하고 있다』(I고린 9,23)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생각난다.









                                                

9         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나) 겨자씨의 비유

                                                    유진선 신부



우리 민족은 말로만 유구한 역사니 빛나는 전통이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이제까지는 참된 종교를 가져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참된 종교적 열정은 그 민족의 성쇠를 판가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서구의 역사에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확장시키고 자연정복의 기상(氣像)을 드높이며 근면과 검소한 생활태도, 협동 봉사정신의 함양 즉 정신혁명의 밑바탕으로써의 종교적 생활태도가 오늘의 서구문명을 탄생케 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한편 정체와 파쟁과 혼란의 극만을 달려왔던 우리민족은 종교가 없어서가 아니라 종교의 내면적 진수(眞髓)를 실천하지 못하고 외곽만 흉내내었을 뿐이었습니다.



먼 옛날 우리 조상이 이 땅에 새로운 살림을 시작할 때 소위 「샤머니즘」이 민족고유의 종교로서 등장하였으나 이는 주술성(呪術性)과 현세 이익을 위주로 하는, 현세 추구를 위주로 하는 자연숭배의 민속의식(民俗儀式)이었습니다. 그 후 삼국시대에 들어와 고려조의 국교가 된 불교는 이 「샤머니즘」과 융합하여 귀신숭배의 공허적 사고와 현실도피의 소극적 은둔사상을 빚어내었을 뿐 불교 본래의 자비나 포용성은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으며 유교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현실적 생활에 기반을 둔 이상주의적, 도덕적 윤리관은 점차 거세(去勢)되고 형식윤리로 변화되었고 당쟁과 파쟁의식을 조장하였으며 이조 멸망의 소인(素因)이 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 서구문명의 이입(移入)과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왔던 초기에는 굳건한 자기신앙의 고수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바쳤던, 빛나는 기개가 있었던 시대에는 무엇인가의 목표의식이 확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보건데 불안감을 가득히 안고 있는 80년대가 아닌가 합니다.

큰 사건은 반드시 어떤 큰 교훈이나 철학을 남겨주기 마련입니다. 아폴로 13호의 사고는 우리에게 커다란 묵상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주항공국이 장담한 99.99%의 안전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말미암아 과학에 대한 신뢰도가 거의 절대화되어 과학만능 내지 과학신화의 사조까지 일어나고 있는 판국에 그 사고는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사고는 바로 인간의 기술만능적 오만성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인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교만에 대한 무서운 하느님의 일침이었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돌아오는 과정은 참으로 서커스보다 더한 불안과 긴박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때 인간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맨 먼저 미국의 국회는 전국민이 하느님께 기도 드리기 위해 하루의 휴무를 결의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다급하면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1969년 아폴로 11호때는 우주항공국 책임자인 브라운박사가 우주선을 발사한 직후에 「이제 남은 것은 기도뿐이다」고 담담하게 말한 것은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의 진실한 태도라고 찬양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폴로 11호가 온세계 모든 사람의 기도나 안타까움에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여러 고비의 위기를 모면하고 남태평양의 바다 위에 안착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천지가 떠들썩하게 환호의 함성을 울렸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과학과 인간의 승리를 구가하였고 매스컴은 한결같이 용기와 인내와 침착성 등 – 인간의 승리만을 찬양했을 뿐이지 한마디도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든 성취되는 것은 자기의 힘이라고만 생각하여 끝없는 교만을 부립니다.



그러나 2000년전 오늘의 기적보다도 더 엄청난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겨자씨의 비유,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겨자씨를 비유하여 설명하셨듯이 과연 오늘의 하느님의 왕국 건설 사업은 엄청난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자렛 청년목수 예수는 결국 동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로마인들의 손에 무참히 처형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완전히 무(無)의 상태로 짓밟혔고 무덤에 갇혀 버렸습니다. 겨자씨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간주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도 미미하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간주되던 예수께서 시작한 신국운동은 예수의 부활을 전환점으로 하고 폭발적으로 장성하고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자씨는 땅에 떨어져서 먼저 죽고 썩습니다. 그러나 그 속의 생명은 움이 터서 하나의 채소로 자랍니다. 그 성장한 채소와 그 씨앗과의 비례는 그 어느 채소의 경우보다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께서 이끌고 들어오신 하느님 나라의 발전은 그 처음과 나중의 비례가 너무도 엄청나기 때문에 예수 당시의 인간이 통속적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 중에는 겨자씨가 제일 적합하다고 봅니다. 제일 작은 것이 제일 큰 것으로 변하는 실 예가 바로 겨자씨의 경우였으니까 말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그와 같이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크게 발전하고 자란다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꾀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식물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자라는 것처럼 그 나라도 하느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해서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신비스럽게 자란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도구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이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 자신에 의해서 신비스럽게, 그리고 엄청나게 발전하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겨자나무가 자라서 가지가 크게 뻗어 그 그늘과 가지에 새들이 와서 보금자리를 만들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왕국은 자라고 자라서 세상 만국 백성들이 그 안에서 보금자리를 꾸미고 안주할 수 있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과연 이것이 예수의 천국관입니다. 예수께서 구상하신 것은 온천하가 즉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어느 부분도 빠짐없이 다 하느님의 영토가 되고 그가 지배하시는 세계가 되기까지 발전 확대 할 것이며 마침내는 모든 인간도 그에게 굴복하고 그의 왕권 앞에 귀의하여 그를 주님으로 모시게 될 때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가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시킬 것이며, 그 후에는 주권을 아버지 하느님께 돌리게 되면 완전히 하느님께서 왕노릇 하시는 왕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I고린토 15:24)

이 겨자씨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는 계속 발전하고 또한 자라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가 예루살렘 북문 밖 골고타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어느 누가 오늘의 교회를 상상이나 했을 것입니까?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 정도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생일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한 것은 인위적인 일임) 그런데도 오늘날은 전 세계에서 제일 큰 종교로 발전되었고, 온 인류가 교회의 막대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온 인류 역사의 소망은 예수의 예언대로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어 살 듯이 하느님의 지배세계에 온 인류가 깃들어 살 때에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염려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하여 그의 계획대로 그 일은 지금까지 놀랍게 진행되어 왔고 결국 성공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나) 겨자씨의 성장

                                                      김철재 신부



씨가 땅 속 깊은 곳에 묻혀 있고 밭이 경작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듯이 복음도, 일상생활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재료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이고, 그 내용 또한 쉬운 것이어서 예수님의 비유는 쉽게 이해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도 우리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라고 하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냉면 집의 겨자라면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냉면의 맛을 돋구어 주고, 사람들이 “울면서도 먹는” 겨자는 개자초(芥子草)의 씨를 빻은 것입니다. 이 개자초의 씨앗은 작기로 이름나 있습니다.



그 크기가 바늘의 구멍보다 작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겨자씨가 자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크게 됩니다. 그것의 크기는 난초나 백일홍의 씨에 비할 바 아닐 정도로 작지만 싹이 트고 자라면 난초나 백일홍의 키를 몇 배나 능가하는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라면 3m가량 되어서 새들이 그 그늘에 와서 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겨자씨에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미미하고 작게 출발하지만, 이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인간들의 추측을 훨씬 능가하는 결과를 냅니다. 예수께서 온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3년 동안 하늘나라를 선포한 결과로 제자 12명과 몇몇 부인들의 추종을 얻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도 없었고, 이렇다 할 권리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제자라 불리는 열 두 사람들의 출신 성분은 어부가 대부분이었으며 세금쟁이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권력이나 재산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비유를 써서 쉽게 설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지도 못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도 이들은 참으로 미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감히 예상할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토록 영향력이 없던 자들을 통하여 시작된 교회가 300년도 채 지나기 전에 로마제국을 정복하였고, 2000년이 지난 오늘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게 시작하시고 엄청난 일을 이루십니다. 오늘 성서에 나온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들의 지식을 능가하시며,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의 예측을 불허합니다.



복음의 이 비유를 우리 신앙인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복음의 씨를 뿌리시고 큰 결과를 얻으려 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복음의 씨가 뿌려진 밭입니다. 우리에게 심어진 씨는 참으로 겨자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도 크나큰 성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와 교리 또는 여러 가지 교회 서적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배우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하느님의 거대한 신비 앞에서는 미소합니다. 인간이 어찌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지식, 즉 복음의 진리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겨자씨 같이 작은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서 큰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우리 안에 이미 심어진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밭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씨가 땅 속 깊은 곳에 있거나 씨가 심어진 위에 흙을 많이 얹어 둔다면 씨가 자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씨도 인간이 자신의 안일과 이기심에 집착한다면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이미 뿌려져 있는 복음의 씨에는 무관심할 때 복음의 씨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듣고 배운 복음에 대한 지식의 양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겨자씨 같은 데서도 큰 성공을 얻으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에게 심어진 복음의 씨는 겨자씨와 같은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리를 얼마나 생활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협력이 없어도 하느님은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으시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작은 노력을 가상히 보십니다.



 비록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리가 겨자씨 같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가꾸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작은 우리의 노력이 자라서 하늘의 온갖 새를 불러들일 수 있을 만치 크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뿌려질 때는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지만 뿌려진 다음에는 어떤 푸성귀보다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됩니다.”











11                 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나)

마음 밭을 문전 옥답으로 가꾸게 하소서 

                                                                  이규철 신부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26~29)



요셉에게는 냇가 옆에 콩밭을 유산으로 줄 테니,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 해보도록 —- 1958년 초등학과 5학년 이른 봄, 아버님께서는 아들 넷을 불러 앉히신 다음, 큰아들(필자의 큰 형)에게는 한길가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논을 유산으로 주셨고,(당시 논은 밭보다 두 배 이상 값이 비쌌음), 둘째 아들에게는 마을 건너편 과수원과 도라지 밭을 주셨고, 셋째 아들인 저에게는 냇가 옆에 붙어있는 콩밭(홍수가 나기 전에는 논이었는데 장마 때 떠내려온 돌과 모래가 쌓여 자갈밭으로 변함)을 주셨고, 막내인 넷째 아들에게는 마을 앞, 집에서 제일 가까운 배추와 무를 심어 김장을 장만하던 제일 좋은 밭, 문전옥답을 유산으로 주시면서, 각자 관심과 열성을 갖고 농사를 지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수확의 반은 각자에게 돌려주신다고 하시면서‥‥

  장마 때 떠내려온 자갈(돌멩이)와 모래뿐인 돌무지 땅을 하필 저에게 주셨는가?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땅의 넓이로 따진다면 제일 넓지 않은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기뻐하였습니다.

  논이 밭으로 변한 자갈밭에 마땅한 재배 식물이 없고, 논농사와 밭농사가 많아 일에 지치신 아버님께서는 매년 콩 농사를 짓던 콩밭이기에 유산으로 받은 첫 해인 1958년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일단 콩을 심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학교 가는 길에 콩밭에 들렸더니 싹이 나오긴 나왔는데, 자갈밭이기에 이곳 저곳의 많은 새 싹들이 주먹만한 돌멩이에 짓눌려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당시제일 인기였던 눈깔사탕(잘 녹지도 않고 소 눈알만큼이나 큰 사탕) 하나씩 사주기로 하고, 남자 여자 친구 15명을 데리고 가서 우선 주먹만한 돌멩이를 밭둑으로 주워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새 싹을 누르고 있는 돌멩이를 주워내고 보니 욕심이 생겨, 냇가에 있은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 나무가지로 모래밭을 긁고 파면서 돌을 주웠더니, 콩밭 주위 이곳 저곳에 돌무덤이 생길만큼 돌멩이가 높이 쌓여감을 보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날 학교 갈 때에는 집에 있는 호미들을 자루에 담아가지고 학교까지 가지고 갔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밭으로 달려가, 마치 전쟁놀이를 하듯 남자 친구들은 호미로 땅을 뒤집어 돌을 골라 놓으면, 여자 친구들은 자루에 담아 밭둑으로 옮기며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날이 어두워져 컴컴할 때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웃으시며 서둘러 보리밥에 된장찌개를 해주셔서 푸짐한 만찬을 먹었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등하교 길에는 으레 콩밭에 들리는 일이 일과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돌맹이가 쌓여가는 모습과 잡초 하나 없는 콩밭을 보면서, 금년 콩농사가 잘 될 것만 같은 막연한 생각으로 콩밭이 아니라 꼬마대장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엉성하게 만든 원두막에서 한여름 내내 방학 숙제도 하고 콩잎을 따서 말리며(겨울철 소먹이로는 콩잎 말린 것이 최고의 사료가 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났기에), 초가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웬 일입니까? 콩을 뽑는 날 아버님이나 어머님, 형님들 말씀이 타작해 보나마나 콩알이 달린 것을 보니 지난해보다 소출(수확)이 두 배는 되겠군 ! ‥‥매년 20여가마 하던 콩밭에서 38가마가 나와, 주위 사람들도 이건 요셉이가 농사지은 것이 아니라,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농사지으신 거야 ! ‥‥하시며 어리둥절하시던 모습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확이 끝나자마자 아버님은 콩 4가마를 팔아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아버님께 청하여, 큰 형님 논에서 좋은 흙을 마차로 실어다만 주시면 객토하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30마차 이상의 흙을 실어다 주셨기에 겨울방학동안 리어카로 흙을 날라 콩밭 전체에 폈습니다. 참깨가 잘 될 것 같다기에 참깨를 심었는데, 콩 농사보다 5배 이상 수확을 거두어 형님 들고등학교 등록금과 소신학교 입학금을 내고도 남았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왜 일찍이 유산으로 주신다고 하셨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 밭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분명히 싹이 트고 자라나고 있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우리 마음 밭이 어떤 상태인지를 생각해 보면 십인십색이듯이 제각기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길바닥처럼 굳어진 마음 밭이기에 싹이 나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쪼아먹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 밭은 아닌지?‥‥ 돌밭처럼 흙이 깊지 않기에 싹이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리는‥‥, 아니면 가시덤불처럼 숨이 막혀 간신히 싹은 나오지만 숨이 막히는 마음 밭은 아닌지‥‥‥‥, 좋은 땅에 뿌려져서 싹이 돋고 풍성하게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낼 수 있는 마음 밭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마르 4,1~8참조).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 밭에 돌맹이가 있다면 주워내는 수고를, 가시덤불처럼 엉켜져 있다면 그 뿌리까지 송두리채 왑아 버림으로써 옥토로 바꿀 수 있는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문전옥답처럼 자주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 밭을 보살피며 돌볼 수 있는 열성을 가질 때에 맺는 열매가 풍성할 것이며, 풍성한 열매를 나누는 기쁨이 우리의 믿음을 충만케 할 것입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단 들고 올 때, 춤추며 기뻐할 것입니다」(시편 126,5)라고 하신 주님! 당신의 은총으로 비를 뿌리시고 알맞은 햇빛을 비추시어, 저희들 마음 밭을 기름진 문전옥답으로 가꾸게 하옵소서. 아멘.











12          연중 제11주일   마르 4, 26-34 (나) 씨뿌리는 마음으로

                                                            김영진 신부



비가 찔끔찔끔 매일 같이 내리고, 기온조차 초가을 날씨처럼 썰렁하여 농사꾼들 걱정이 여간 아니다. 논에 있는 모와 들판에 심은 곡식들이 차가운 날씨로 인해 자라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위암으로 고생하시던 한 자매의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나니, 내 마음도 잔뜩 흐린 하늘처럼 우울하여 장터에 나가, 고추모 토마토모 가지모, 꽈리고추모 등을 사 가지고 왔다. 모종을 하기에는 다소 늦었지만 그래도 저놈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 달릴 열매를 생각하면 희망도 생기고, 인내심도 기를 수 있겠지 하는 마음과, 열매를 꼭 따먹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호미로 땅을 파는 마음을 농촌에 살면서 너무 잊고 있어서, 아쉬운 마음에 조금 사왔다.

  

호미질을 하노라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위암으로 곧 돌아가실 운명에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못한지 오래 되어 온 몸이 여위었고, 기운도 없으셨는데 배추, 상추, 열무, 가지, 고추 등의 씨앗을 내가 사는 성당 뒤뜰은 물론, 강가의 둑 주변에도 여기저기 심어 놓았다. 성당 뒤뜰에 심은 것은 나와 수도자들이 뜯어먹으라는 배려였고, 강변 둑 이곳저곳에는 아무나 필요한 사람이 뜯어먹으라고 심으셨다고 하였다.

  

어느 것 하나 잡수어 보시기는커녕 자라나는 것도 못보고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께서는 씨앗을 심으시며 생각하셨을 것이다, 이 씨앗들이 지금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이지만, 언젠가는 자라나서 사람들의 음식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셨을 것이고, 이 씨앗들은 틀림없이 싹을 내고 자라서, 심은대로 가꾼대로 수확을 준다는 믿음을 가지셨을 것이며,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을 동안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된다는 것도 생각하셨을 것이다.



희망과 믿음을 심는 농부의 마음 



 그리하여 씨앗을  심는 아버지의 호미자루에는 희망과 믿음과 인내가 함께 심어졌을 것이다. 싹이 나서 자라는 모습들, 어느 것 하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먹어 볼 수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면서도,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뜯어다 반찬을 하라고 여기저기다 심어 놓으신, 아버님의 그 넉넉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하며 호미질을 해보았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농부가 뿌린 씨앗에 비유하셨다. 하늘나라를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에 비유하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씨앗을 심으시던 아버님 생각을 하노라니 이해가 되는 듯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씨앗이긴 하지만, 틀림없이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심는 농부의 마음, 그리고 그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서는 아무리 급해도 열매가 열릴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 인내를 심는 농부의 마음, 그것이 바로 천국을 심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일하지 아니하면서 열매를 거두려 하고, 심지도 않으면서 수확을 욕심내고, 성실하게 한푼씩 모으려 하기보다는 한탕주의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으로는, 천국을 심을 수가 없다. 천국은 농부의 손에 쥐어진 작은 씨앗처럼 미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훗날 큰 축복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갖는 사람과, 백배 수확을 거두리라는 확신을 갖고 씨앗을 뿌리는 농부처럼 확실한 믿음을 갖는 사람, 그리고 결실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심어놓은 신앙이 열매맺을 때까지 인내롭게 가꾸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몫이다.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희망과 믿음, 그리고 인내심을 갖자.

확실한 희망과 믿음은 인내심을 생기게 한다, 또한 인내심은 희망과 믿음이 열매를 맺도록 한다,



왜 자꾸만 씨앗을 캐 보는가



 미국에서 열리는 성령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담벼락 밑에 호박씨를 심었다. 그런데 아들은 가끔씩 나가서 땅에 묻혀있는 호박씨를 캐보곤 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왜 자꾸만 호박씨를 캐보느냐\”고 물었더니, 어린 아들이 “왜 호박이 빨리 생기지 않아요? 저 호박씨가 진짜 호박씨예요?\”라고 묻더라는 것이었다,

  

희망과 믿음이 희미하면 기다릴 줄 모르게 되고, 기다릴 줄 모르는 마음, 인내심이 없는 마음은, 희망과 믿음마저 병들게 한다. 살아가는 것이 재미가 없고, 신앙생활이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방법, 단 한가지는 한번만 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인내롭게 전진하는 것이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으로 하늘나라를 마음에 심어가면서 말이다.

13       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나) 작은 자의 하느님

                                                                 강길웅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자 안에서 성장이 됩니다. 사람이 고통이나 슬픔을 만나게 되면 작아지게 됩니다. 부끄럽고 허망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은 작아졌을 때 눈이 번쩍 뜨이게 되며 하느님 역시 작은 자 안에서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걸림돌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의 긴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시련과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에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난 뒤에는 전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으며 후에는 그리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갖은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실로 운명이 기구한 민족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얘기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귀양갔을 때의 일입니다. 나라는 이미 망했고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처참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희망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습니다. 이때 예언자 에제키엘은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소망과 힘을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연한 가지의 작은 순처럼 보잘 것 없지만 그 순이 자라서는 주위의 다른 나라보다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다고 해서 슬퍼할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작다는 것은 키가 작다는 것도 아니며 크기가 작다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가난한 자나 병든 자, 실패한 자나 고통받는 자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 작은 자 안에서 빛나고 성장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창녀나 세리, 나병환자나 귀머거리 등이 구원을 받았지만 잘나고 똑똑했던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이 자라서는 어떤 나무보다도 더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 신앙은 겨자씨보다 더 작게 보입니다. 믿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믿어서 팔자가 고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바쁜 세상에 그것은 시간 낭비요 돈 낭비요 또한 정력 낭비입니다. “믿음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말은 그 단적인 예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정말 우리의 팔자를 고쳐 줍니다. 그리고 또 믿음이 밥먹여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실로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밥먹는 은혜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밝고 풍요롭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돈이나 세상의 지혜로써는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작아져 봐야 그 오묘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식모가 있었는데 과부였습니다. 부자는 사장이었고 돈도 많아서 부인도 자녀들도 호사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월급이 적었고 사는 것도 아주 오죽잖았습니다. 그런데 그 식모는 성당에 다니는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일이면 머리를 곱게 빗고 헌금 돈을 챙겨서 성당에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주인 식구들은 웃었습니다. 종교는 없는 자들이나 믿고 매달리는 허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장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돈도 소용이 없었고 의학박사라는 높은 의술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심부름 왔던 식모 아줌마가 죽어 가는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나그네길이니 세속의 때를 다 털어 버리고 하느님을 믿어 보라고 했습니다. 환자는 감격해서 울었고 잘못 살아온 죄악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차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식모 아줌마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저처럼 크고 위대한 사람이 있나 할 정도로 그 집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 딸이 먼저 믿었고 나중에는 사장 부인도 성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돈도 지식도 믿음 앞에는 한낱 작은 티끌이요 먼지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믿음이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믿음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자들만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진정 작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크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크고 위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실로 작아졌을 때 믿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작은 자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사람은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작은 자가 아닙니다. 그 믿음은 세상의 어떤 지혜나 능력보다도 훨씬 크고 위대합니다. 따라서 작은 마음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그 안에서 건설하도록 합시다. 작은 자는 진정 큰 사람입니다.



        















14                연중 제11주일   (나) 일꾼을 찾습니다

                                                    강명구 신부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은 군중들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물과 풀을 찾아 헤메일 것입니다. 때로는 들짐승이나 도둑들에게 잡혀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자가 있다면 양들은 안심하고 살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도둑과 들짐승에게서 보호하고 양들을 풍부한 물과 푸른 풀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돌보고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ꡒ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ꡓ

추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혼자 하실 수 있지만 일꾼들을 원하십니다. 일꾼은 하느님의 일을 거드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제자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어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능력을 주시어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는 권능을 주시어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훌륭하다거나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일꾼으로 부르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명을 받아 복음을 전하러 떠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당신 구원사업의 협조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분의 협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움추리거나 초라한다고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당신 구원사업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많은 은총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줍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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