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8 주일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제 1 독서 : 이사 25,6-10a
제 2 독서 : 필립 4,12-14, 19-20
복 음 : 마태 22,1-14
혼인잔치의 비유는 바로 앞의 두 개의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에서 이미 다루어진 신학적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의 역사뿐만 아니라 초기교회의 역사 및 스스로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접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사가들보다 더, 사람들―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건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이건―이 그리스도의 호소와 복음의 요구에 직면하여 취하는 구체적인 태도들을 통해 이미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의 ‘심판’의 극적 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전체적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 강조해야 할 점은 오늘의 제 1 독서와 복음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주고 있는 형태에 다른 예수의 비유 속에서는 제 1 독서의 내용이 상기되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야훼께서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사실, 좀 뒤늦게(그리스도 강생전 5세기) 집필된 것이 분명하며 학자들이 보통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일컫고 있는 이사야서 대목에 의한 오늘의 제 1 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초대하시고 계신 크나큰 ‘잔치’를 신선하고도 생기 넘치는 개념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푸시는 기쁜 구원의 잔치를 뜻하며 유다의 전승 속에 퍼져 마침내 신약성서에 이르게 되는 ‘메시아적’ 잔치에 대한 사상의 표현이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그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야훼께서 몸소 이 산을 지켜주신다’”(이사 25,6-10a).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다. 단순히 잔치의 성대함 때문만이 아니라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상징적 의미 그 이면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먼저 깊은 인상을 던져주고 있는 내용은 그 초대의 ‘보편성’이다. 즉 모든 민족들이 초대되고 있다(6절. 7절); 그들은 시온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7-10절). 그리하여 시온산은 장차 모든 민족들이 모여 와서 유일하신 참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 이사 2,2-6에 언급되고 있는 장중한 장면을 상기해 보라: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두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바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고찰해야 할 내용은 그 잔치는 목적을 잔치 자체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향연’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거기에 초대된 손님들 사이에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야기시키기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이 차라리 신비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표현들 “야훼께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7절 의 의미라고 여겨진다.‘얼굴을 가리우는’‘너울’은 하느님께 대한 무지와 영신적인 눈멀음을 뜻한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무지와 영신적인 눈멀음은 식사를 같이 나눔으로써 실현되는 상호신뢰와 상호인식의 교류를 통해 없어지게 된다.
또한 그 잔치는‘기쁨’과 생명력, 평온과 안정감을 고취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눈물’이 닦아지리라(8절)고 한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이사야 예언자는 이 크나큰 연회의 개념으로써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종말론적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는 결론 부분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9절).
오늘 응송의 후반부도 야훼의 각별한 배려를 아주 감미롭게 노래 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우정의 잔치에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손수 그 잔치를 ‘차리신다’:“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향기름, 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시편 22,5). 시편작가는 먼저 정감어린 ‘목자’의 비유로써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한 후, 여기서는 그분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평온의 상태(“내 원수 보는 앞에서”)를 연회의 상징적 개념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이 모든 상징적 개념들과 그것들이 뜻하는 실체의 전체적 배경이 하느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확실히 되새기고 계시다: 즉 하느님은 당신 자비로써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성대한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의 본문과는 달리 관심의 초점을 야훼의 각별한 배려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기쁨에 초대하고 있는 그토록 관대한 ‘임금’의 행동 앞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취하는 태도에로 옮기고 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유의 장막을 넘어서 한 가지 비극적 역사적 사실 즉 복음을 거부함으러써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구원을 스스로 저버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분명 이 모든 사실은 즉시 보게 될 것처럼 교회에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교훈은 그러한 역사를 밝히 드러내 보여줄 수 있었던 비유에서보다는 ‘역사’자체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자, 이제 비유의 말씀을 들어보자:“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하고 일렀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오너라’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마태 22,2-10).
이 비유는 여러 가지 접촉점을 갖고 있는 앞의 비유(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는 달리 루가복음(14,16-24)에서도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복음사가 자신들의 서로 다른 신학적 의도에 따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준비된 ‘잔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복음에서는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마련하는 어떤 ‘임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기 전에 종들을 한 번만 보내고 있지만 마태오복음에서는 두 번 보내고 있다.
더구나, 마태오복음에서는 문학적 체계상으로는 걸맞지 않으나 의미상으로는 분명한 내용 즉 자기의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이 살고 있던 ‘동네’ 전체를 파괴시키는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있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그런데도 임금의 초대를 기다리며 “길거리에서”(8절)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훈적 가르침 외에도 어떤 참된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같은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비유 자체에 첨가시킴으로써 방금 말했듯이 비유의 체계 자체가 어느 정도 혼란스러워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감안해야만 비유의 올바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동네’의 불은 분명히 70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암시하고 있다 ;복음사가는 그것을 임금의 ‘종들’의 초대를 거절했을 분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 중 일부는 ‘잡아 죽이고’ 또 일부에게는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들’은 분명히 구약의 예언자들과 또한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여기서 초대받은 무례한 사람들로 표상되고 잇는- 에게 제일 먼저 보내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우리가 두 아들의 비유에서 들었듯이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특히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구원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그에 응답하여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 즉 교회의 식탁에 앉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어떤 ‘행동적’ 요구에도 응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루가복음에는 없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문의 의미인 것 같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에는 앞의 내용과 잘 일치되지 않는 요소들이 들어있다:예를 들자면, 마지막 순간에 혼란스럽게 모아진 많은 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복을 갖추지 않아서 쫒겨났다고 하는 사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앞의 비유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해 일부 개작했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비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자, 그러면 비유의 내용을 보자:“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왓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쫒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1-14절).
그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12절)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잘못을 느끼고 잇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한편, 그 잘못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벌이 너무 무거우며 묵시록적 표현대로라면 구원의 나라로부터의 결정적인 추방 즉 영원한 처벌(마태 8,12참조)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예복’을 갖추지 않은 것이 설사 중대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사회적인 결례 그 이상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면 이 문맥에서 ‘혼인예복’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잇는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잔치의 식탁에 “나쁜 사람 좋은 사람”(10절) 할 것 없이 모두 모였다는 앞 문장에서 발견된다:예복을 갖추지 못했던 손님은 분명히 ‘나쁜사람; 의 부류로 판단될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은 좋은 씨앗 가운데서 가라지가 번성하는 교회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 하느님의 ’심판‘은 유다인들 가운데서 도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초대받은 것‘만으로는’구원받기에‘ 불충분한 교회 내부에서조차 행해진다.
이것이 이 비유를 끝맺고 있는 마지막 구절에 담긴 극적 의미이다:“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 이 구절은 구원될 사람의 수가 많다거나 또는 적다거나 하는 데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다만 신앙에의 ‘불립’이 곧 ‘구원받기에’ 불충분한 교회 내보에서조차 행해진다.
이것이 이 비유를 끝맺고 있는 마지막 구절에 담긴 극적 의미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 이구절은 구원될 사람의 수가 많다거나 또는 적다거나 하는 데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다만 신앙에의 ‘불립’이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자 할 뿐이다. 하지만 하늘 나라로부터 쫒겨남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시는“(1디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협력 부족에 완전히 달려 있다.
그러므로 ‘혼인예복’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실체 자체 즉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천상 성부의 뜻을 채운 자만이 영원한 잔칫상에 참여할 준비를 함으로써 뽑힌 이들의 대열에 들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할 때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꺾여져 불속에 던져질 자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W. Trilling, Vangelo secondo Matteo, vol. Ⅱ, Città Nuova Ed., Roma 1968, p. 206).
착한 행실의 ‘결실’을 내야 할 이러한 의무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무거울 것이 틀림없다. 사실 이 비유가 루가복음에서처럼 단순한 어떤 잔치가 아니라 합당한 혼인‘예복’까지도 요구되는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2절)에의 초대라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암시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은 하느님께서 육화의 신비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무한히 큰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실현시켜야 할 관대하고 개방된 사랑의 의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 전례의 본기도도 바로 이 사랑의, 또 사랑을 통한 행업을 우리 마음에 되새겨주고 있는 것 같다:“주여, 비오니, 당신의 넘치는 은총으로 항상 우리를 이끄시고 밀어주시어, 언제나 선업에 열중하게 하소서.”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매우 정감어린 짤막한 바울로의 편지에 의한 오늘 제 2 독서는 필립비인들이 그에게 에바프로디도를 통하여 보내준 경제적 도움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감사와 더불어 자기 자신의 사도적 사명은 어떤 외적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사도직의 모든 ‘결실’은 그의 ‘능력’의 유일한 원천이신(필립 4,13)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의탁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밖의 다른 것은 비록 어느 정도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라도 그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이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리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필립 4,12-14. 19).
보다시피,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을 크나큰 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이다: 그는 자기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주님을 위해 살거나 죽거나 어떤 경우에도 진실되이 자신을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의무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는다.

연중 제28주일
제 1 독서 : 이사 25, 6-10ㄱ
제 2 독서 : 필립 4, 12-14. 19-20
복 음 : 마태 22, 1-14
제 1 독서 :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기원전 8세기)에 예루살렘은 앗시리아 제국의 세력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예루살렘 주변 지역은 이미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황폐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나타나 믿어지지 않는 예언을 했다. 즉 이런 재난이 곧 끝난다는 것이다.
제1독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옛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잔치가 시온 산에서 있을 것이며, 모든 민족이 잔치 옷을 입고 그리로 모여올 것임을 예언자는 선포한다.
제 2 독서 : 필립비서 4장 10-20절은 필립비서에서 제일 먼저 쓰여진 부분으로서 필립비 교회에 보낸 첫 편지이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옥중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11절). 사도 바오로는 자기가 겪는 감옥살이의 고통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지만 필립비 교회의 신자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많이 베풀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서 4장 10-20절에서 그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궁핍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넉넉히 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필립비 교회의 신자들이 보낸 것을 기쁘게 받은 이유는 그것이 필립비 교회의 사랑의 표시였기 때문이었다. 필립비 신자들은 모든 선을 나누시는 하느님을 발견한 것에 대한 감사의 응답을 사도 바오로에게 보였던 것이다.
어쨌든 사도 바오로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고 감사드리는 법을 배웠음에 틀림없다. 사도 바오로의 뒤를 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 중에서도 감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미아노 신부님이다. 자기 몸이 문둥병으로 썩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다미아노 신부님은 자기 몸에서 문둥병의 기미를 발견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무렴, 그렇지. 앞으로 내가 강론할 때에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의 문둥이 동무들이여’라고 말하게 될 거야.”
복 음 :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다. 초대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요긴한 일 때문에 못 간다는 구실을 가지고 있다. 자기의 일과 습관을 더 소중히 여기는 소행이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해왔는데 왜 바꿔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대로가 좋아.”하는 타성이다. 사실 우리는 할 일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다 하려다 보니 걱정거리가 생기고 타성에 젖어 든다. 일에도 중독이 있다. 어느 지경에 이르면 사람은 생각하기가 싫어서 일을 만들어낸다. 걱정거리가 없어지면, 일거리가 없어지면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 대해야 하는 것이 겁나기 때문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유는 혼인잔치의 비유의 결론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독립적인 비유이다. 두 비유는 혼인잔치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잔치의 준비 과정을 말하고 있다. 당대의 풍속대로 임금이 잔치를 베풀 때 각 손님에게 예복을 선물했으며, 손님들은 임금의 마음을 알아주는 뜻에서 그 예복을 즉석에서 갈아입어야 했다. 그러나 잔치에 초대받고 예복까지도 거저 얻었는데 임금의 선물을 무시하는 사람을 화를 면할 길이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 주시고 의화(義化)라는 예복까지 마련해 주셨다. 그러나 임금이 예복을 강제로 입히지 않았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구원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세례 받은 신자는 선물을 베푸신 하느님께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은총이라면 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가 된 것도 큰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남의 권유에 의해서 마지못해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주위의 사람들, 친구나 친척들에 의해서, 혹은 태중 교우로 신자가 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주님께서 성령의 은총으로 보잘것없는 나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나라에 초대받은 이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체면 때문에, 눈치 때문에 남의 잔칫상에 앉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기쁨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초대의 응답은 곧 그 초대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어도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 즉 함께 있어도 기쁘지 아니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어도 마음에서가 아닌 겉치레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22, 1-14)의 말씀은 “하늘나라의 잔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고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신자들은 교만과 독선과 이기주의에 빠져 초대받은 기쁨을 전혀 모르는 냉정하고 몰인정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마음의 문을 다고 자기 집안일이나 개인적인 일에 몰두하는 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자들이 초대를 거절하자 거리에 나가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조건없이 초대하는 것은 초대가 곧 어떤 특정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열려있는 개방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초대의 보편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구나 임금님의 초대에 응할 수 있고 초대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조건없는 초대라 하더라도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의는 손발을 깨끗이 씻고 예복을 갖추어 입는 일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초대받은 자로서 예모를 갖추지 못해 추방되는 것은, 아무리 모든 이를 초대한다 하더라도 자격이 결여된 자는 잔칫상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달콤한 신혼 시절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훈련 교관이던 짐에게 켈리포니아 사보텐에 위치한 육군 훈련소에서 근무하라는 배속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사막 지역에다 무더운 기후 탓에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내 헬렌은 ‘사랑하는 짐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만으로 망설이지 않고 짐을 꾸려 부대 근처의 작은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상황은 헬렌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습니다. 연일 5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는 그늘에 앉아있기만 해도 숨막힐 지경이었고, 그녀의 이웃은 멕시코인과 인디언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줄곧 불어오는 사막의 거센 바람으로 음식을 먹을 때나 숨을 쉴 때마다 입안에 모래 알갱이들이 씹혔습니다. 얼마 후 남편 짐마저 두 달 동안 전투 훈련을 떠나게 되자, 작은 집에 홀로 남겨진 헬렌은 점점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슬프다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부모님께 보냈습니다. “—–이렇게 덥고 숨막히는 곳에서 있기보다는 차라리 교도소에 가는 편이 낫겠어요. 아무래도 짐이 돌아오는 대로 돌아가야겠어요.”
하루, 이틀, 사흘——. 짐이 훈련에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헬렌은 더 이상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녀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두 사나이가 교도소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진흙탕을,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본 것이다.” 단 두 문장이 쓰여진 아버지의 편지를 되풀이해 읽어 내려가던 헬렌의 눈가에 서서히 이슬이 맺혔습니다. 잠시 후, 헬렌은 짐을 풀고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가 지나자 헬렌의 오두막집에서는 향긋한 멕시코 요리 냄새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귀한 선물을 들고 찾아온 인디언, 멕시코인 이웃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면서 대화하는 헬렌의 목소리가 집밖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도소의 창문 밖으로 진흙탕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과 미래의 끔을 지닌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짐의 아내 헬렌이 아버지의 짧은 편지를 받고 자신이 놓인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여 오히려 역경을 극복하고 함께 사는 이웃들과 사랑과 정을 나누었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열려진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막노동을 어렵게 농사를 짓고 험한 일을 하는 자라도 자신의 처지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살 때, 이렇게 사는 삶은 부귀 영화와 학식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평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삶보다는 주님 나라에 더 가까이 가 있고 그분의 초대에 합당한 예모를 갖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초대에 응한다고 다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늘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삶, 감사의 삶을 살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서로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며 살 때 거기에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자로서의 예모를 갖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 인간 사랑이 하느님 사랑으로 바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합당한 삶을 살 때에 이것이 바로 초대받은 자로서 예모를 갖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연중 제28주일
1. 최기산 신부(가)/1 2. 강길웅 신부(가)/3
3. 조규남 신부(가)/4 4. 혼인 잔치의 비유(1)/7
5. 혼인 잔치의 비유(2)/9 6. 혼인 잔치의 비유(3)/10
7. 혼인 잔치의 비유(4)/없음 8. 인생은 혼인 준비(가)/12
9. 초대받은 당신(가)/14
1 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가) ‘초대받은 당신’
최기산 신부
권력자의 횡포
오래 전의 일이다.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아침에 전화가 왔다. ꡒ우리 의원님께서 인사차 방문하신 답니다.ꡓ 나는 시간약속을 하고 기다렸으나, 30분이 지나도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은근히 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국회의원은 시간을 마음대로 안 지켜도 된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이 세상엔 시간이 지나도 마냥 기다려 주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무장에게 ꡒ나 바빠서 나가니 국회의원이 오면 40분 기다리다가 나갔다고 하세요ꡓ라는 말을 남긴 채 사제관을 나왔다.
시골본당 신부로 사목할 때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하루는 군청에서 연락이 왔다. ꡒ도지사께서 오신답니다. 신부님께서도 참석해 주십시오.ꡓ 내가 군청에 도착하니 많은 이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온다던 도지사는 거의 한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참는데 한계를 느끼며 과거에 국회의원에게 당했던 수모를 또 당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났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 많은 사람들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그 심보가 어디서 나왔을까라고 생각하니 부화가 치밀었다.
그런 사람이 도지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나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돌아와버렸다. 그 뒤부터는 군청에서 어느 누가 온다고 해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 이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중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높은 사람을 만나서 악수라도 한번하고 김밥이라도 같이 어적어적 씹는 것이 소원이었을까? 힘깨나 있다는 사람 앞에서 굽신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권력 앞에 약한 인간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면 후보자가 기금마련을 위해 후원자를 모아 파티를 연다. 그 파티에 입장권이 1000달러나 되건만 거기에 끼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권력을 쥔 사람 앞에서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그저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은 영 딴판이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하기 위해 초청장을 보냈다. 소위 힘깨나 쓰는 사람, 돈푼 깨나 있는 사람들에게 보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전화나 편지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종들을 보내서 초청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려하지 않았다. 감히 임금이 잔치를 마련하고 초청했는데도 거절하다니 기이하지 않은가? 아마도 몇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임금에게 가져갈 부조금이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두번째 가능성은 임금을 너무 얕보았다는 것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선정을 베풀고 있는 임금을 고문관으로 보고 무시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오히려 한술 더 떠 왕의 종들을 작살내었다. 오만방자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은 화가 치밀었다. 너무나 분개하여 자신을 얕보고 욕보인 그들을 엄벌하였다. 그리고는 길거리에서 아무나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 했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겨냥하고 있다. 하늘나라 잔치를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난 사람들인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뽑아 초청하였으나 그들은 초청한다는 말을 전하러 간 종들인 예언자를 쳐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금을 얕본 그들을 가만둘 수 없었으며 결국 하늘나라의 잔치는 별 볼일 없던 이방인인 우리들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떨 결에 우리는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젠 우리에게 선택이 주어졌다. 우리는 과연 천상잔치, 하늘나라의 잔치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ꡒ시끄럽다ꡓ라고 소리치면서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지는 않은지? 이 세상살이에만 관심을 기울이느라 천상잔치는 관심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우리는 거부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뽑혔던 사람들이 거부한 것처럼 우리가 거부하면 다른 사람들이 또 초대받을 것이다. 우리는 천상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우리는 그 잔치에서 입을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갈 때도 최소한의 예복은 입어야 한다. 즉 반바지를 입고서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내 일상생활에서도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은 예의다. 초상집에 가는 사람이 빨간 셔츠나 노란 셔츠를 입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천상잔치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예복은 무엇일까? 구약성서에서 예복은 구원의 옷이었으니 의인들이, 선택된 자들이 입을 영광의 옷이다.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 즉 의화의 옷, 사랑의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초대받은 상태다. 임금의 초대를 받은 상태다. 머뭇거리거나 딴데 신경쓸 시간이 없다. 그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키고도 남는다. 차근차근 입고 갈 예복을 준비해야겠다. 하늘나라의 잔치는 언제 시작될 지 모른다. 내일 시작될 지 아니면 먼 훗날 시작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서 서둘러서 예복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2 연중 제 28 주일 마태 22,1-14 (가) 예복을 단정하게 입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25,6~10a (주께서 잔치를 차려 주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리라)
제2독서 필립 4,12~14.19~20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복 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해 오너라)
오늘 성서의 주제는 ‘잔치’입니다. 유대인에게 잔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가 바로 구원이며 그것이 또한 메시아가 오는 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의 잔치를 보면 아주 풍성합니다. 연한 살코기가 나오며 맑은 술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상을 차려 놓으시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잔칫상에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얼굴의 너울을 벗겨 주시고 억울함을 풀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그 잔치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한 세상을 살았던 것에 대한 하느님의 보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차려 주시는 천상의 잔치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기쁨이며 그것이 바로 천당의 행복입니다. 만일에 그 날이 없다면 인생은 허무요 신앙은 아무 쓸모없는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초대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잔치를 거절합니다.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오라고 해도 안 오고, 먹으라 해도 안 먹습니다. 그래서 초대의 손님이 바뀌게 되며 구원의 대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어떤 영감님이 자신의 생일을 맞이해서 음식을 맛있게 장만하고 는 자녀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회사일이 바쁘다고 했고 둘째 아들은 자기 처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으며 셋째 아들은 공직에 있는데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음식을 양로원에 가지고 가서 불쌍한 노인들에게 대접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노인들이 얼마나 맛있게 음식을 드시는지 자녀들로 인해 받은 상심을 모두 보상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말하며 특히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으며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렸던 백성이었습니다. 독서에 나오는 그 풍성한 잔치에 참석하기를 누구보다 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임금이 그들을 초대하자 초대에 응하지도 않으면서 심부름꾼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유대인을 넘어서 아주 넓게 개방됩니다. 이젠 하느님의 초대에서 벗어나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신분의 차이도 없습니다. 창녀나 도둑이나 강도도 가리지 않으십니다. 어떤 죄인에게도 구원은 열려 있으며 개방되어 있습니다. 다만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루가 23,39~43)는 죽기 전에 구원을 청했다가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간음했던 여인이나 문둥병 환자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매달렸다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구원의 길에서 멀리 있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복이 무엇입니까? 많은 신학자들이 여러가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와 믿음보다 더 좋은 예복이 없습니다. 구원은 율법이나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얼마나 큰 죄를 졌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격도 없는 인생이지만 영광의 자리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복 을 단정하게 입었는지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선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셨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주일 미사를 빠지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미사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잔치의 음식을 진정 하느님의 몸으로 믿고 감사드리고 있는지 반성해볼 일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초대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실로 은총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예복을 단정하게 입고 선행의 사랑을 나누면서 잔치에 참석하도록 합시다.
3 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가) 혼인 잔치의 비유
조규남 신부
우리가 방금 들은 세 개의 말씀은 천상잔치를 세상잔치에 비유하신 것으로 필립보서에서는 이 천상잔치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와 복음에서는 먹음직스럽고 풍요하게 차려진 혼인잔치를 말하며 제2독서에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어려움은 하느님께 맡기므로 평화로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다같이 이 천상잔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 본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인자치나 회갑잔치를 생각해 봅시다. 그와 같은 잔치는 어는 잔치든 그 자체는 대단히 기쁘고 즐거운 것이며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웃집에 잔치가 있다고 하면 그 잔치 집에서는 이웃사람들을 초청하고 또 이웃의 많은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잔칫집에 모여 잔치의 당사자와 가족들을 축하하며 하루를 기쁜 연회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상 잔치하면 기쁨 속에 초청하고 초대받는 것이 상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초대받는 우리로써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우선 가야합니까, 안가야 합니까? 간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가겠습니까? 또 안 간다면 왜 안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흔히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인 것 같으나 막상 위의 물음에 부딪치면 난처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좀 제쳐놓고 오늘 복음에서 말한 혼인잔치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 알아보고 가느냐 안 가느냐를 따져보고, 안가면 어떤 손해가 오는가 생각해 봅시다. 너무나 타산적인 것 같으나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천상잔치는 성부께서 당신 아들의 혼인을 위하여 차리신 것이며 손님으로 우리들을 초청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초청하신 혼인잔치에 신랑은 그리스도이며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두 분의 거룩한 일치와 결합에 우리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잔치에 차려진 메뉴는 다양합니다. 넘치는 평화, 풍성한 자비, 달콤한 사랑, 감미로운 기쁨, 따스한 온정, 그리고 희생, 봉사, 정의, 순명 등등의 맛나는 음식들입니다.
이런 성대한 잔치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잔치와 차여진 음식은 결코 저 피안의 것, 쉽게 그림의 떡은 아닙니다. 이는 현실로서 우리는 곧 기쁨 속에 축연을 가질 것이며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미 한번 맛들이면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잔치에서 주인인 하느님과 신랑인 그리스도, 신부인 교회에 우리가 하나로 일치되어 그분들과 더불어 맛갈진 풍성한 음식으로 배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잔치에는 이미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물론 세례를 받지 않은 외교인들도 초대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자도 가난한 자도, 선인도 악인도,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초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에 참석하고 안하고는 자신들의 자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세례성사로 초청장을 이미 받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기 싫으면 안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석치 않으므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결과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기에 참석 안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겠습니다만 이외로 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살펴봅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나 생각해 봅시다.
첫째 잔치집 주인과 마음이 크게 상한 자들, 즉 대죄 중에 있는 자들이 되겠습니다.
둘째 “내일도 바빠 죽겠는데 잔칫집에를 가?, 할 일도 없지”하며 비록 영세를 하였으나 자기 사업에만 열중하여 하느님을 까맣게 잊거나 관계없는 일과 같이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셋째 “이거 체면이 있지 이 꼴에 어떻게 가나”하며 친척, 친구, 직업 등등의 체면 때문에 못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넷째, “가기는 가야겠는데 집안이 이 모양이니”하며 가정의 매사에 걸려 못 가는 사람들 즉, 집안 일이 바쁜데, 입고 갈 옷이 없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등등의 이유를 대를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이외에도 얼마든지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잔치에 참석치 못한다고 한 그 결과들은 어떻겠습니까? 그 결과 그들은 시한적인 일로 영원한 것은 놓치고, 당장 눈앞의 일 때문에 미래 혹은 보이지 않는 영광을 상실하며 세상사의 몰두로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못 듣고 참된 삶을 영원히 놓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즉 이차적인 문제로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영육에 관한 일들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단돈 천원 때문에 수백 수천만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비참한 일입니까? 이보다 더 미련스럽고 우매한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다같이 생각해 봅시다. 우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마음의 준비가 없이 잔치에 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주인과 마음 상한 일이 있다면 화해하고 초대해 줌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 다음 준비해 둔 깨끗한 옷을 입고 선물을 준비하며, 내가 잔치에 가서 할 일이 있는가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 다음 잔치에 나가 주인을 축하하며 자기의 할 일을 성실히 하고 차려놓은 연회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형자매 여러분! 이런 천상잔치는 어디에서 베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잔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미사를 통해 베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이며 이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며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하나로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차려진 음식 즉 화해와 평화, 기쁨과 환희, 희생과 봉사 등등의 감미로운 음료인 사랑이 넘치는 성체의 음식을 마음껏 먹고 마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속에 하나가 되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잔치에서 그런 기쁨과 평화를 느끼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분은 틀림없이 앞에 열거한 이유들 또는 그 외의 이유로 잔치보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며 고민하고 계시는 분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하여 필립보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전생을 모두 하느님께 맡기시오. 그러면 어떠한 처지에서나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잔치를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불타게 되면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사랑과 기쁨과 희망 속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며 이 잔치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필립보 4,11-13; 4,19)
4 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가) 혼인 잔치의 비유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맨 먼저,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합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이유로 잔치에 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느님이십니다.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은, 일찍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우리들 즉 믿는 이들입니다. 잔치 상 위에는 ‘소와 살찐 짐승’ 등 푸짐한 음식이 준비되었는데도 맨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 음식들의 진미 참 맛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단지, 밭에 나가고 장사하러 가기에 분주할 뿐,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려 할 뿐, 하느님이 부르심에 냉정한 거부와 거절로써 응답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첫째 부분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너무 바빠서, 또는 성당에 나오면 누가 보기 싫어서, 아니면 형식적으로 하는 미사 참례에 싫증을 느껴서 등등 여러 구실을 붙여 하느님의 초대장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또 다른 초대장을 보내시는 대신 경고장을 보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신부이고, 여러분이 열심한 신자라고 해서 마음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기보다 뽑히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이방인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 대한 초대입니다. 첫 번째로 초대한 사람들이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이유로 잔치에 응하지 않자, 임금은 당신을 초대를 포기하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거리의 사람들 맹인, 절름발이, 나병환자, 술주정뱅이, 귀머거리를 불러다가 잔치자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마태오 복음 21장 28절 이하를 보면 먼저 신앙에로 초대받고 믿음의 길로 들어선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또 나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항상 언제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조심하고 정신차리라는 경고장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을 적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잔치에 참석한 이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불러 놓고,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라고 책망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고,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지만, 초대받은 사람이 최소한의 예의, 즉 예복을 갖추지 않고 참석한다면 벌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자신의 예복을 살펴봅시다. 신사복을 입고 전국체전에 나갈 수는 없습니다.
누더기를 입거나 벌거벗은 몸으로 잔치에 참석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슬리퍼를 끌고, 미니 스커트를 입고 미사에 온다면 다른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입혀진 예복이 어떠한가 입니다. 하나의 옷(예복)은 씨줄과 날줄로 되어 있습니다. 가로로 짜여지는 씨줄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세로로 짜여있는 날줄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이 사랑의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복 없이 잔치에 참석할 수 없듯이, 미사에 참석하는 우리도 이 사랑의 예복을 입고 성당에 들어와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거나 나중에 부르심을 받았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 부르심에 성실히 응답하고 있느냐가 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떤 교우는 제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언제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초대)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
저는 최근에 고해소 안에서 나를 불러주신 하느님을 만나곤 합니다. 오랫동안 냉담하다 다시 돌아온 어느 교우의 진한 통회의 눈물 소리에서, 성당에는 나오나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혼자만의 아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교우들을 대할 때, 저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간적으로 다음과 같이 응답하곤 합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본당 성모상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신자들, 밤늦게 찾아와 마음껏 울부짖던 어느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나를 불러 주신 하느님께 응답합니다. “이들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위로해 주소서” 하느님께서 나는 불러 주셨는지 아닌지 깨닫기 어려운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씀이나 소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있다면 그 소리나 말씀은 그대로 공중에 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응답을 매 순간 순간 원하십니다. 부르심 받은 상태에서 뽑히는 영광에도 도약하고 상승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이 계속해서 응답하려는 노력을, 모습을 내가 만나는 사람과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진 예복을 입고 푸짐한 음식이 차려진 잔치(미사)에 정식 초대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씨줄만 있고 날줄이 없거나 날줄만 있고 씨줄이 없는 예복을 입고 나온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핀잔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너는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 아멘
5 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가) 혼인 잔치의 비유
오늘의 복음에서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임금님이 잔치를 베풀고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어 주려고 잔치를 베풀었으나, 위로와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그 복된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주님의 예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 주님은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크신 사랑으로써 항상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시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의 교만과 재산과 지식과 정욕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를 불행과 타락 속에 내던지고 만다.
이 세상에 어떤 바보스런 사람이 왕의 초대를 거절하겠는가? 물론 그 왕이 독재자이거나 혹은 왕답지 못한 나쁜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첨하지 않고 청렴하게, 의리와 충성을 다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임금님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도 참석하지 않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에서 나오는 임금님은 전능하시고 사랑 자체이시며 항상 자비와 너그러움이 계시고 만민을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시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 영예롭고도 복된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초청을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이 얼마나 임금에 대한 모욕적이며 무례한 태도인가? 진정 임금의 잔치를 거절할만한 이렇다 할 두드러진 사랑의 실천을 위한 일이라면, 임금님을 모욕하는 것도 아니고 무례한 행동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잡다한 일상생활로 해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할 때 현세의 우리들은 과연 그러한 무리보다 무엇이 더 나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외면한 채 그들의 잡다한 일상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 당신이 먼저 부른 사람들, 즉 권력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 그 밖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참견하시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아예 그들을 없애버리고, 당신의 하인들을 시켜서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 받은 사람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주님의 교회는 “나쁜 사람이거나 좋은 사람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다 불러들여 주님의 품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시어 순진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모두 받아들이신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서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하고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임금의 잔칫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에 열중한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의 잔치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 현세의 이득이나 쾌락, 호기심 등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버림받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불리움을 받고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역시 버림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복이란, 성령을 의미한다고 본다. 성령의 뜨거운 사랑 없이 습관적으로, 혹은 채면 때문에 나가는 믿음, 자기만이 옳다고 착각하는 바리사이적인 믿음, 율법이나 예식에 참여하는 그것만으로서 만족하는 믿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가정이나 이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믿음은 모두 성령에 인도되지 못한 믿음의 가면이다.
우리는 모두 헌옷(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예복(새 인간)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6 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가) 혼인 잔치의 비유
유대인들은 메시아 시대나 메시아 왕국이라는 것을 즐거운 잔치라는 면에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저녁 잔치의 비유로써 말씀하실 때 당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임을 바리사이들은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잔치를 차려 놓고 청한 그분의 친구들은 다름 아닌 선민들의 지도자인 자기네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직접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판에 주께서는 그들을 맞대어 놓고 그들은 교만하고 세속 일에 골몰하기 때문에 스스로 메시아의 초대를 거절함으로써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에게 이르노니, 먼저 청하였던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1. 우리는 가난뱅이요, 병신이요, 장님이며, 절름발이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태어남으로써 천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구원이란 태어날 때부터 갖는 권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갈릴레아 여인에게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마태 15,21-28 참조)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간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은 먼저 불릴 수 있는 기득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사용하는 순서를 눈여겨보십시오 –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교인의 사도라는 성 바오로도 유대인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기 전에는 외교인에게로 가지 않았으며, 성 베드로에게 고르넬리오를 씻어 주어야 한다는 하늘로부터의 계시를 받은 다음에야(사도 10,1-33 참조) 외교인에게로 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뱅이요, 병신이요, 장님이며, 절름발이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만약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신앙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또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2급 크리스천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아무런 공로도 없이, 또 천주께 요구할 아무런 권리도 없이 아주 공으로 그리스도 왕국의 신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구원은 언제나 천주께서 자유로이 아무 공로도 살피지 않고 주시는 것이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나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빛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도록 간택하신 것은 우리가 무슨 모범적인 크리스천이 될 거라는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천주께서 우리를 간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간택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주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유는 당신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겸손과 감사, 다른 사람에 대해 관용과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기 전에 무슨 일로 해서 신앙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 세례를 받은 후 천주의 위대한 은혜를 힘입어 했다는 일도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 전체가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에 대해서 교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도 양심을 살펴보면 겸손해야 할 이유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천주께서 간선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서 천주께 이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3.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은 바리사이적인 버릇이다.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같은 자만과 교만에 빠지기 아주 쉬우며 그렇게 되면 똑같은 결과가 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왕국으로부터 배척받고 추방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불림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제1차적이요 가장 기초적인 덕행인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 없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를 찾아보려는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우리들의 종교가 그런 것을 갖추어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우리보다 더욱 천주를 섬기고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따라서 우리보다 한층 더 종교적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는 세상을 구원의 가망이 없는 비종교적이며 더러운 것이라고 보고 크리스천으로서 그것과 많은 접촉을 하지 않도록 피해야 한다는 등의 상아탑적인 태도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 역시 바리사이들의 태도였으며 예수께서는 그것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랬듯이 천주의 백성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에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고 말했듯이 주께서는 우리에게 “나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 너희를 모르노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 마태오가 기록한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즉 거리에서 불려온 자들이 혼인 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았지 때문에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오늘 신앙의 신비인 성체를 온 정성을 다해 받아 모심으로써, 이 신앙의 은혜를 사용합시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우리 주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그 관심과 관용과 동정심, 그들의 인품과 자유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우리 자신들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과도 이 신앙의 은혜를 나누어 받도록 노력합시다.
8 연중 제28주일 마태오 22,1-14 (가) 인생은 혼인 준비
우리의 세상살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일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우리의 일생은 탄생으로 시작하고 죽음으로 끝난다. 탄생에서 죽음까지가 우리에게 살아가라고 주어진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극히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고 세상에서 오직 그 시간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시간이다. 우리의 生死苦樂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정하게 흐르는 것이 시간이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타고 우리의 일생은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자. 얼마나 빨리 지나간 세월이었는가? 까마득한 과거도 바로 앞서 지나간 어제와 같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처럼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시간도, 역시 그렇게 빨리 지나갈 것이다. 우리의 시간이 다 지나가서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 온 과거를 돌아볼 때도, 우리는 확실히「인생이란 단 한 번의 날 숨과 같다(시편 38,12)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하루살이의 짧은 일생을 한탄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생 역시 보잘것없는 하루살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덧없이 흘러가는 우리 인생의 끝은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
죽음은 시간의 끝이고 영원의 시작이다. 죽음은 현세의 덧없는 생명의 끝이고 내세의 끝없는 생명의 시작이다. 이렇게 빠르고 짧게 지나가는 인생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이다. 덧없이 흘러서 죽음으로 끝나는 우리의 일생은 아무리 길게 산다 하더라도 끝이 없이 계속되는 영원과 비교한다면 숨 한 번 쉬는 순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일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저 세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운명이 영원히 행복 할 수도 있고 영원히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사는 일생을 통해서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에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설명하신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이 무엇이고 죽음에 뒤따르는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 지를 알아 볼 수 있다. 이 비유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죽음이란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영원한 혼인예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일생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혼인을 준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어진 모든 시간들 그 안에서 겪는 모든 사건들 – 수행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혼인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생을 통해 하느님과 결합할 자격을 갖춘 사람의 영혼이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혼인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결합한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기쁨을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누리게 된다. 여기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더할 수 없이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다.
이때 인간은 지극히 복되신 하느님의 생명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일생을 통해서 하느님과 결합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영혼은 “하늘나라의 바깥 어두운 곳으로 추방되고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운명을 끝없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불행한 운명으로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 세상에서 하느님과 결합할 자격을 얻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 자격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하느님과 갈라서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죄 뿐이다. 죄는 인간을 하느님과 갈라놓고 사람들 사이도 서로 갈라놓는다. 죄는 본질적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거부하거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만족과 불만을 돌아보지 않고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게 된다.
우리 안에 사랑이 있으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이고, 우리 안에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다. 사랑을 지닌 영혼만이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 일생을 사랑으로 살 줄 안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얻는다. 사랑으로 산 시간․사랑으로 한 말․사랑으로 한 생각, 사랑으로 한 행동만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받아 주시는 가치 있는 예물이 된다. 사랑으로 살지 않은 모든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고 사랑으로 하지 않은 모든 행동은 무가치한 행동이다.
9 연중 제28주일 마태 22, 1-14 (가) 초대받은 당신
권력자의 횡포
오래 전의 일이다.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아침에 전화가 왔다. “우리 의원님께서 인사차 방문하신답니다.” 나는 시간약속을 하고 기다렸으나, 30분이 지나도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은근히 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국회의원은 시간을 마음대로 안 지켜도 된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이 세상엔 시간이 지나도 마냥 기다려 주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무장에게 “나 바빠서 나가니 국회의원이 오면 40분 기다리다가 나갔다고 하세요”라는 말을 남긴 채 사제관을 나왔다,
시골본당 신부로 사목할 때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하루는 군청에서 연락이 왔다, “도지사께서 오신답니다. 신부님께서도 참석해 주십시오.” 내가 군청에 도착하니 많은 이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온다던 도지사는 거의 한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참는데 한계를 느끼며 과거에 국회의원에게 당했던 수모를 또 당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났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 많은 사람들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그 심보가 어디서 나왔을까? 라고 생각하니 부화가 치밀었다.
그런 사람이 도지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나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돌아와 버렸다. 그 뒤부터는 군청에서 어느 누가 온다고 해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 이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높은 사람을 만나서 악수라도 한번하고, 김밥이라도 같이 어적어적 씹는 것이 소원이었을까? 힘깨나 있다는 사람 앞에서 굽신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권력 앞에 약한 인간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면 후보자가 기금마련을 위해 후원자를 모아 파티를 연다. 그 파티에 입장권이 1000달려나 되건만 거기에 끼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권력을 쥔 사람 앞에서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그저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은 영 딴판이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하기 위해 초청장을 보냈다. 소위 힘깨나 쓰는 사람,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에게 보냈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전화나 편지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종들을 보내서 초청을 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려하지 알았다. 감히 임금이 잔치를 마련하고 초청했는데도 거절하다니 기이하지 않은가?
아마도 몇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임금에게 가져갈 부조금이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두 번째 가능성은 임금을 너무 얕보았다는 것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선정을 베풀고 있는 임금을, 고문관으로 보고 무시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오히려 한술 더 떠 왕의 종들을 작살내었다. 오만방자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은 화가 치밀었다. 너무나 분개하여 자신을 얕보고 욕보인 그들을 엄벌하였다. 그리고는 길거리에서 아무나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했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겨냥하고 있다. 하늘나라 잔치를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난 사람들인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뽑아 초청하였으나 그들은 초청한다는 말을 전하러 간 중들인 예언자를 쳐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금을 얕본 그들을 가만둘 수 없었으며, 결국 하늘나라의 잔치는 별 볼일 없던 이방인인 우리들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얼떨결에 우리는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젠 우리에게 선택이 주어졌다. 우리는 과연 천상잔치, 하늘나라의 잔치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시끄럽다”라고 소리치면서,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지는 않은지? 이 세상살이에만 관심을 기울이느라 천상잔치는 관심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우리는 거부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뽑혔던 사람들이 거부한 것처럼 우리가 거부하면 다른 사람들이 또 초대받을 것이다.
우리는 천상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우리는 그 잔치에서 입을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갈 때도 최소한의 예복은 입어야 한다. 즉 반바지를 입고서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내 일상생활에서도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은 예의다. 초상집에 가는 사랑이 빨간 셔츠나 노란 셔츠를 입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천상잔치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예복은 무엇일까? 구약성서에서 예복은 구원의 옷이었으니, 의인들이, 선택된 자들이 입을 영광의 옷이다.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 즉 의화의 옷, 사랑의 옷을 입어야7한다.
우리는 지금 초대받은 상태다. 임금의 초대를 받은 상태다, 머뭇거리거나 딴데 신경쓸 시간이 없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키고도 남는다. 차근차근 입고 갈 예복을 준비해야겠다. 하늘나라의 잔치는 언제 시작될 지 모른다. 내일 시작될 지 아니면 먼 훗날 시작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서 서둘러서 예복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