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악단원의 시위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하이든이 쓴 교향곡의 수는 엄청나게 많아서 번호가 붙은 것이 1백4곡, 그밖에 3곡이 더 있어 현재는 총 1백7곡이 정설로 되어 있다. 개중에는 딴 사람이 하이든의 이름을 빌려 출판한 위작도 더러 있다고 한다. 그 당시는 판권도 느슨했던 시대였고, 또 마음씨 좋은 하이든이 자기 명의를 도용하는 것을 묵인했기에 그렇게 되었으리라는 설도 있다.
하여간 그의 이름으로 된 교향곡의 수가 하도 많다보니 교향곡 번호만으로는 곡이 구별되지 않았을 뿐더러, 교향곡에 무슨 별명이 붙어야 악보 출판도 잘 된다는 인식이 있었던 시대였기에, 주로 출판업자 등에 의해 별명이 지어지곤 했다. 오늘날에도 그때 지어진 별명이 통용 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악보 출판사에서는 아직 별명이 없는 하이든의 교향곡에 어울리는 그럴싸안 닉네임을 공모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이든의 교향곡 중 ‘호른 신호’, ‘슬픔’, ‘마리아 테레지아’, ‘수난’, ‘사냥’, ‘왕비’, ‘경악’, ‘옥스포드’, ‘군대’, ‘사계’, ‘큰북 연타’, ‘런던’ 등은 그나마 점잖은 별명이다. 좀더 재미있는 닉네임으로는 ‘곰’, ‘암탉’, ‘멍청이’, ‘교장선생’, ‘철학자’, ‘화재’ 등이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하이든 특유의 익살이 엿보인다.
그의 교향곡 제45번은 <고별 교향곡>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어 유명한데 내력 또한 이채롭다.
하이든이 출사하고 있던 에스테르하지의 니콜라우스 공은 1766년 노이지트라 호숫가의 풍광이 수려한 곳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호화판 궁전을 짓고 ‘에스테르하지 궁’이라고 명명했다. 처음에는 그 거성이 채 완성되지 않아 거처가 비좁아 관현악단의 단원이나 하인들은 가족들을 떼어 놓고 홀몸으로 와서 지내야 했다. 특히 갓 결혼한 악사들은 음악도 좋지만 애처와 떨어져 있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1772년 여름에 통상 그 곳에 머물러야 했으므로 견디다 못한 악사들은 악장 하이든에게 이런 불편한 생활을 해소할 길이 없겠느냐고 건의해 왔다. 위트가 풍부한 하이든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며칠 후 하이든은 새로 작곡한 교향곡의 발표연주회를 가졌다. 시종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음악을 감상하던 니콜라우스 공은 곡의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연주를 하던 악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연주를 끝내더니 악기를 치우고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는 퇴장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에는 불과 몇 사람만이 남아서 가냘프게 연주를 끝냈다. 연주를 들은 니콜라우스 공이 악단의 우의를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 단원들의 애절한 소원대로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으리까. 휘황한 조명 장치가 완비된 현재의 콘서트 홀에서도 이 곡을 연주할 때만은 그 때처럼 전기조명을 다 끄고 어두운 촛불을 각 보면대의 촛대에 꽂아 놓고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 곡으로 말미암은 웃지 못할, 아니 웃어도 괜찮은 ‘믿거나 말거나’의 일화가 또 한가지 있으니 때는 19세기 중엽, 오스트리아의 온천 휴양지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날 저녁의 콘서트에 모인 청중은 거의가 벼슬아치 나으리들이거나 아니면 목에 힘깨나 주는 돈 많은 부호 부부들이었다. 마지막 연주 곡목인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종악장 후반이 이르니, 프레스토로 빠르던 곡이 안단테로 템포가 떨어지고 관례대로 악사들이 한 사람씩 자리를 뜨고 밖으로 퇴장했다. 어느 백작 부인쯤으로 보이는 비계덩어리 귀부인이 옆에 앉은 남편에게 귓속말로 말하였다.
“어머, 저 사람들 온천물을 생으로 마시고 죄다 설사 났나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