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뱅이의 마지막 작품 로시니의 <월리엄 텔>
로시니는 당시로서는 최장수급에 속하는 76년 간의 생애를 살았지만 일생 동안 자기 생일을 18회밖에 쇠지 못했다. 왜냐 하면 그의 탄생일이 1792년 2월 29일, 즉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윤년의 2월 29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아버지는 가축 도살장의 감독관이었다. 태어난 날도 범상치 않거니와 부친의 직업도 음악가 아버지로선 썩 어울리는 직함이 아니랄까. 아무튼 그런 출생이어서 그랬던지 로시니라는 사람은 게으름뱅이에 익살꾼, 대식가에 방탕아 등등 썩 바람직하지 못한 온갖 것을 겸비한, 모범생이라든가 사회의 귀감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나이였다.
어머니는 지방극장에서는 좀 알려진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의 소리를 물려받았음인지 로시니도 소년 시절에는 아름다운 보이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일생 동안 그는 39곡이나 되는 오페라를 썼다. 그 중에서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빌랴의 이발사>는 그의 나이25세 때의 작품이다. 전곡 연주에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가극을 불과 13일만에 써제끼는 속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곡에서는 야바위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 <세빌랴의 이발사 서곡>으로 널리 애청되는 유명한 서곡도 실은 그 가극을 위해 쓰여진 서곡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5년 전인 1811년에 작곡한 가극 <지나친 오해>를 위해 쓴 것을 2년 후인 1813년에 작곡한 가극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에서 재탕으로 써먹었고, 다시 1년 후에 작곡한 가극 <영국 여왕 엘리자베드>에서 삼탕으로 써먹었으며 다시 3년 후에 작곡한 가극 <세빌랴의 이발사>에서 써먹었으니 사탕째인 셈이다. 그 밖에도 로시니의 야바위 이야기는 많지만 다 털어 놓으면 그의 인격이 너무 깎일 듯 하니 이쯤해서 덮어 두고, 그의 최후의 오페라 <월리엄 텔>에 얽힌 얘기를 좀 살펴보자.
월리엄 텔은 자기 어린 아들을 저 멀리 세워 높고는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그것을 과녁 삼아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는, 스위스의 한 독립투사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다. 작자는 베토벤의 <제9교향악>합창에 사용된 시’환희에 부쳐’를 쓴 실러이다.]
로시니는 <월리엄 텔>을 쓰는 데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9개월이나 걸렸다. 집필은 프랑스 파리에서 했고 초연도 그 곳 오페라좌에서 했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 그의 나이 38세, 그것을 끝으로 그는 오페라 작곡의 붓을 꺾어 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내가 오페라를 한참 쓸 때는 멜로디가 먼저 떠오르면 그것을 따라가면서 그저 적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멜로디를 찾아다녀야 할 때가 되었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형편 없는 게으름뱅이입니다. 내 쪽에서 찾아나선다는 것은 영 귀찮은 일이죠. 그래서 오페라 작곡을 집어치운 겁니다. 알아 들으시겠어요?”
그렇게 38세에 오페라 작곡의 붓을 던지고 나서도 다시 38년, 꼭 곱절로 더 살면서 76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로시니는 파리 교에에 지은 호화저택에서 그간 축재한 돈을 물쓰듯 하면서 미식, 미주, 미녀, 하여간 미자가 붙는 건 다 끌어다 놓고 거기에 둘러싸여 호화로운 여생을 보냈다. 그렇게 오랫동안 돈 걱정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항상 자질구레한 병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요독증도 앓아 봤고 심기증에다 불면증 등등이 늘 그를 괴롭혔다. 오죽했으면 로시니는 친구에게 이렇게 푸념했다고 한다.
“난 여자들이나 걸림직한 자질구레한 병은 죄다 앓았네. 자궁 관계만 빼고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