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과 부인

 

사이버 신약성서 강좌 4






고백과 부인


– 연중 제12 주일 복음 주해-




1. 맥락과 짜임새.


오늘의 복음 단락은 마태 10장의 일부에 속한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긴 연설이 5개 수록되어 있다. 5장-7장의 산상설교, 10장의 파견설교, 13장의 비유설교, 18장의 교회 공동체 규율, 24-25장의 심판설교가 그것이다.


10장에 앞서 지난 주일에 읽은 9, 35-38은 이 파견설교의 무대를 설정해준다. 10, 1-4에서 예수님이 12 제자를 직접 뽑아서 파견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따라서 이 12 제자들을 파견할 때 이들을 상대로 하신 설교로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10, 17서부터는 딱히 12 제자들만을 청중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용상 여기서부터 전개되는 부분은 12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도 얼마든지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오의 경우 제자의 개념이 흔히는 12 제자로 한정되어 나오지만 쉽게 그 범위가 확장되는 실례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장의 짜임새는 보통 선택(1-4)과 파견사(5-16)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전반부에 배치된 자료들은 다시 몇몇 단락들은 세분할 수 있다: 선택 단락에서는 선택 사실과(1절) 12 제자 명단을 전하고(2-4절), 이어서 후반부에서는 이들이 파견 받아갈 행선지를 지정 또는 제한해주며(5절), 파견 받아가서 벌이게 될 활동 사항을 지시하신다: 설교, 치유(7-8a), 대가성 없는 봉사(8b). 이어서 여장 지침(9-10절), 유랑 여행 시에 취해야 할 행동 지침(11-15), 마지막 경고와 선전을 부탁하는 당부의 말씀으로(16) 나눠볼 수 있다. 이것이 12 제자들을 상대로 주신 파견 설교의 제1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제2부는 17절에서 32까지는 선포 활동에 따르는 박해를 주제로 일반 제자들에게 주신 격려사로 생각할 수 있으며 여기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파견 받아 수행하는 사명과 관련해서 몇몇 단편적인 말씀들을 엮어서 보탰다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우리 단락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짜임새를 확인할 수 있다: 26-31절까지는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32-33절은 마르코(8, 38)와 루가(9, 26)와는 다른 맥락에서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태오가 박해 중에라도 스승이신 예수님을 두려움 없이 고백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이 말씀을 이 자리에 갖다 붙인 것 같다. 따라서 이 마지막 로기온은 비교적 맥락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유통되던 전승 단계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26-31절을 다시 분석해보면 하나의 동심원과 같은 짜임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동심원의 맨 한 가운데에는 28절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하나의 대립 명제를 구성한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 두려워하시오. 이 절을 앞뒤로 에워싸며 바깥에서 두 겹으로 울타리처럼 에워싸면서 동심원을 그리는 것이 26-27절 그리고 29-30절이다. 31절은 29절을 다시 넘겨받아 이 소 단락을 떠받쳐주면서 마무리 짓는다(Luz).




2. 자료. 


루가 12, 2-9에 이용된 자료가 그렇듯이 마태오 역시 이 소 단락을 구성하는데 이른바 Q 자료를 이용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26a는 마태오가 이 단락에 붙여준 표제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가 작성한 것이다. 27절 역시 적어도 예수의 숨은 선포를 공공연하게 선포하라는 것은 루가 12, 3에서 말하듯이 제자들이 어둔데서 들은 것이 밝은데서 들릴 것이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공공연하게 선포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과는 대조적이다. 주체가 제자들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마태오의 손질이다. 반면에 28-31절은 어록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다. 32-33절에서 인자 대신 ‘나’,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들’ 대신 ‘나의아버지’로 바꾼 것도 역시 마태오로 생각된다.




3. 전승사.


26b-27, 28-31, 그리고 32 이하는 모두 처음에 독립된 말씀으로 전해졌던 것 같다. 26b는 어록(루가 12, 2)에도 전해지고 마르 4, 22에도 전해지고 있는 사실이 이 결론을 밑받침한다. 이 말씀이 전승의 어느 단계에서 27과 결합해서 어록자료에 전해졌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역으로 27도 단절어 곧 일정한 맥락 없이 떠돌던 말씀임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루가 12, 3의 번안과 마태오 10, 27의 번안 중 어느 것이 더 원형에 가까운지도 단언하기 어렵지만 마태오의 그리스도 중심 사상을 감안할 때 루가의 것이 원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8-31절은 루가가 전하는 12, 4의 말씀과는 다소 다르다. 내용상으로 볼 때는 어떤 박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말씀인데 이 박해가 예수 자신을 위협하던 박해였다면 그의 생애 마지막에 발설하신 말씀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를 안중에 두고 있다면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어떤 예언자나 어록 전승자들이 박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건네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매우 오래된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다. 32절 이하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마르 8, 38; 루가 9, 26에도 그 변체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 맥락은 마르코와 루가는 같지만 마태오는 다르다. 루가는 마르코를 따라 첫째 수난 예고 뒤에 이 말씀을 전하면서 십자가에 이르는 추종을 강조하는 데 이용한다. 그러나 마태오는 같은 말씀을 박해에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고백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그 맥락을 바꿔서 전한다. 마태오의 이런 수법은 그가 속해있던 초대 교회의 정황을 반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추종과 고백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추종이 박해에 이르기까지 연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7절에서 루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름이 아니라, 루가는 장차 모든 것이 공공연하게 밝혀질 것이고 선포될 것이라고 하면서 미래의 예측을 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현재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할 명령으로 전하고 있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예측과 지시는 확실히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루가가 예측하는 그 미래는 언제 실현되는가? 예수님의 생전이 아니라면 교회 공동체에 -예수님이 가시고 없는 상황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이뤄진다는 말인가 아니면 종말에 가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밝혀질 것이라는 말인가? 어록 전승에서는 이 미래를 세상의 종말로 전망했을 것이 공산이 크다고 하는 의견이 있지만(Luz) 루가 12, 3에 사용된 용어를 보면 성급한 결론에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둔데서 여러분이 말한 것이 들려지다”와 “골방에서 귀에 대고 한 말한 것이 선포될 것이다”는 하나의 엄격한 병행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선포되다”와 “들리다”는 사실상의 동의어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포하다”는 초대교회의 선교 용어이다. 이 말은 여기 루가 12, 3에도 해당한다(Merk, Exeget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제2 권, 쪽 715 참조). 따라서 여기 어록전승의 단계에서 안중에 두고 있는 미래도 초대교회의 미래이지 세말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이 로기온이 부활 이후 공동체의 조성임을 암시해주는 대목임을 말해준다. 즉, 초대교회의 어느 예언자가 예수의 말씀이나 잠언을 공동체에 적용하여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니 지금처럼 집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선포하지 말고 밝고 넓은 세상에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라고 격려하려는 뜻에서 이 말씀을 손질하여 예수의 말씀으로 전해주었을 것이다. 교회가 얼마나 세계를 향해 개방적이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28-29.31절은 본래부터 한 덩어리로 단위를 이루어 전해졌을 것이다. 30절은 그 사이에 나중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 30절이 없어도 29와 31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이 로기온은 양식으로는 지혜문학 계통의 격언 또는 경구(警句)류에 속한다. 금령과 명령을 동시에 나란히 그러면서도 대조적으로 병행시켜 경고로서의 구실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게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경구이지만 실제 문맥상으로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친히 발설하셨는가 아니면 공동체에서 조성한 것인지는 어느 쪽도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후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할 것이다(정양모, 마태오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3,쪽 100=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2001, 쪽 69 참조).


32-33절은 본래 인자에 관한 로기온이었다. 그 변형이 마르 8, 38과 루가 12, 8-9에 전해졌는데 이 셋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이 루가의 본문이다. 마태오는 어록에서 이 로기온을 받아 전하면서 인자를 “나” 곧 예수님으로 바꿔놓았다. 루가 9, 26은 마르 8, 38을 옭겨 적은 것이다. 고백과 부인에 관한 이 말씀이 박해에 대비시키는 격려의 말씀이라는 맥락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다.




4. 주해.


26절: 이 단락의 주제다: 박해 때 겁을 먹지마라는 것이다. 24절에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듯이 사제간에 당하는 운명에 있어서도 제자는 당연히 스승을 따라야 한다. 스승이 박해를 당해 끝내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그 제자도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을 것은 뻔한 이치이니 당연한 거로 알고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제자로 끝까지 남아있으려면 박해는 불가피하지만 겁낼 것 없다. 이 26절은 그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 독자들에게는 이 이유가 언뜻 납득되지 않는다. 숨겨진 것이 예수의 선포라면 이 선포의 진실이 밝혀져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람들까지도 이 선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언제 그런 일이 이뤄질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 아니겠는가?(그리스식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현세의 역사적 시간 안에서 그런 일 이뤄진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교회는 박해가 끝나고 종교의 자우를 얻어 예수의 말씀을 마음껏 선포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 박해는 일시적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선포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2) 그러나 이 구절을 최후심판과 연관지어 하느님이 세말에 가서 진리를 계시해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려는 견해가 옛날부터 있어 왔다. 최후심판이 있을 저 가공할 분노의 날(dies irae) 숨겨진 것은 무엇이나 드러날 것이고 철저하게 보복 당할 것이다(quidquid latet apparebit, nil ultum remanebit). 박해를 가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것으로 위안을 삼고 지금 박해를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박해자들이 앙갚음을 당하고 심판으로 단죄 받아 지옥에 떨어져서 영벌을 받을 테니, 지금 용기를 내라! 그런데 이 구절 말씀의 뜻이 정말로 이런 것이라면, 이런 복수심은 우리로서는 소화하기가 힘들다. 정의의 이름으로도 이런 복수심과 증오심은 정당화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편 현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느끼는 이런 이질감, 이런 반감에도 한계는 어쩔 수 없이 있게 마련이다. 복음을 거부한 유다인들을 향해 발의 먼지를 털어버린 바울로의 몸짓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사도 13, 51 참조)? 마태오도 이런 뜻으로 알아들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들려지고 선포될 것”이라는 미래 시칭(루가 13, 3)이 어록전승에서는 세계 종말의 미래로 파악되었을 것이고 또 마태오 자신도 다른 데도 아닌 바로 이 10장에서 최후심판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10, 15.23.28-31.32등. 39.41)을 눈여겨볼 일이다(Luz).


27절: 세말에나 가서야 일어날 일을 제자들은 지금부터 해야 한다: 결정적, 종국적 계시에 상응하는 행동방식에 따라 지금부터 처신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마태오는 예수의 교훈을 자기 당대의 교회를 위해 곧잘 현실화하는데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종말에 오실 하늘나라를 기다리면서도 지금부터 벌써 그에 상응하게 행동해야 한다(6, 33 참조). 10, 24 이하부터는 이미 말한 대로 파견연설이 12 제자뿐만 아니라 일반 제자들을 위한 훈계로 그 적용범위가 확장된다. 즉, 이 교훈은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해당한다는 것이 마태오의 생각이다.


28-31절: 몸만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순교 사화의 문학 전통에 속한다( 2마카 6, 30 참조). 다만 여기의 psyche를 목숨으로 알아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몸에 대비되는 영혼으로 알아들어야 하느냐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번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미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목숨으로 알아들어도 어차피 생리학적 목숨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몸은 죽일 수 있는데 목숨은 죽일 수 없다면 그 목숨은 보통 우리가 알아듣는 생리학적 의미의 목숨은 아닐 터이다. 번역상의 일관성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영혼과 육신의 구별은 그리스의 이원론적 인간관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 사상은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이 영혼도 지옥에서 영멸시킬 수 있다고 표상한다는 점이다. 곧 영혼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을 일러 불멸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지옥은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벌 받는 곳으로 전제하고 있다.


전통 기독교에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소위 사말(四末) 교리, 곧 죽음, 심판, 천당, 지옥에 관한 전통 교리를 옹호하는데 많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육신은 죽은 다음 썩어 없어지고 감각적인 사랑도 아울러 소멸한다. 육체는 영혼의 한낱 마스크, 얼굴에 덮어쓰는 하나의 탈에 지나지 않는다. 탈은 벗어던지면 그뿐이다. 따라서 죽는 것은 육신일 뿐, 영혼은 불멸이므로 육신이 죽어 없진 다음에도 계속 살아남는다.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생명이다”하고 말씀하신 분을 영원히 잃는다는 것이다. 이 분을 모시지 못한 영혼의 불멸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세말의 육신 부활 때 육신과 재결합한다. 그런데 비록 부활은 했다고 하지만 생전의 육신과의 재결합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부활한 육신과의 재결합인가? 생전의 육신은 육신인데 부활과 함께 완전히 거듭난 육신과의 재결합인가? 하느님은 지옥에다 영혼과 육신을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라고 28b에서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론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하느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그야말로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남겨두신다고 할 때 그 영혼에게 무엇을 어쩌시겠다는 것인가? 그 영혼을 그야말로 영원토록 고통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영벌이다. 우리의 정서와 이해력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대목이다.


연옥이 있다는 가톨릭의 교리는 이 점에 있어 다소 위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옥의 교리는 가톨릭의 전유물은 아니다. 유다교 일부에서도 그렇게 믿었다. 셔올 또는 게엔나 또는 지옥에서 정화의 단련을 받고 에덴 동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죄 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12개월동안 지옥에서 벌을 받고 나서 영혼과 육신이 다 함께 멸망해서 면지로 돌아간다고도 생각했다. “사람아! 그대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9) 한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사후관은 어떤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이것은 가톨릭의 전통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갈라진다. 육신은 땅에 묻혀 썩었다가 세말에 공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할 것이다. 영혼은 불멸이다. 육신이 죽은 직후 개인적으로 심판을 받고 천당, 지옥, 아니면 연옥으로 간다. 천당이 지옥은 영원하다. 한번 이곳에 가면 다시는 추방당하거나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 대신 연옥에 가면 일정 기간 단련과 정화의 잠벌(暫罰) 즉 일시적으로 벌을 받은 다음 천당에 오른다. 세말에 가면 죽은 모든 사람들이 그 육신과 함께 부활하여 공심판을 받는다. 공심판은 공개적인 활인 심판이다. 사심판 때 이미 받은 선고를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심판이다. 이런 전망에서 우리 구절을 다시 한번 돌아볼 때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 이 구절에서는 아직 연옥에 대한 표상이 시야에 나타나지 않는다.


– 사람들이 육신을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을 죽이지는 못한다는 것은 영혼이 반드시 불멸이어서만은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제 맘대로 죽이거나 살릴 수 없다는 점이다.


– 지옥이 영원한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지옥은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욥기의 말씀대로 지옥조차도 사람이 안전하게 숨을 곳이 못된다. 지옥에까지 쫓아와서 인간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박해 앞에서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육신을 영혼보다 낮게 평가한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박해의 한계는 육신까지 뿐이라는 것을 잘 돋보여주는 대비 수법으로 영혼을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 있다.


– 영혼과 육신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개념하고 있었는지 이 구절만 보아서는 알알 볼 길이 없다.


– 이 구절을 전하는 전승의 사생관에 대해서도 이 본문은 아무런 정보가 없다.


–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주제는 구약성서와 유다교 전통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의 문맥에서는 잘못을 처벌하고 시비를 공정하게 가리시는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처지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로서는 이런 하느님이 보살펴주시기에 더욱 마음 든든하고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처벌이 무서워서 그야말로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처벌도 처벌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분께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게 유다교 신앙의 확신이다. 사랑과 두려움은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순종으로 구체화한다. 유다교의 하느님은 공포의 하느님이고 기독교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마르키온 계통의 사고방식이나 정서와는 거리가 먼 하느님 이해이다.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인간은 안심할 수 있으며 박해 중에도 용기를 낼 수 있다. 하느님이 권능뿐이라면 그분이 폭군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고 그분이 사랑뿐이라면 그분을 무능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 사랑어린 권능으로 해서 인간의 폭력은 제 아무리 용을 써봐도 인간의 육체만을 해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폭력은 인간의 참된 자아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부당하게 박해받는 힘없는 예수의 제자들의 희망이고 모든 약자들의 희망이시다.




29-31절.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성찰이 한층 더 깊어진다. 이 막강한 하느님은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참새들까지도 돌보시는 자상하고 어지신 분이시다. 참새는 시장에 내다파는 흔한 싸구려 먹을거리였다. 한 푼은 아스의 번역이다.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사용하던 로마의 화폐 단위로 두 아스이면 하루치 빵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절반만 내도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다니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그래서 서민들은 즐겨 참새를 구이해서 먹고는 하였다고 한다. 이 값싼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즉, 사냥감으로 희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분명 그 표현이 과장되었다. 과장이 아니고 진지한 표현이라면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 참새 한 마리라도 땅에 떨어져 참새구이 신세가 된다면, 그런 희생을 허락하거나 묵인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그대로 인간 세상에로 연장 확대된다. 과연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그렇게 잔인하신 분이라고?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한계에 이른다. 하느님의 신비를 더 이상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우리 구절은 이런 질문에 답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배려와 관심은 미물 날짐승에 이르기까지 그만큼 자상하고 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 할 뿐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미 6, 26의 말씀으로 보아 이런 하느님의 권능과 자상함을 일상생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새와 인간을 비교하는 이 시각이 매우 재미있다. 전혀 비교할 만한 상대가 못되는데 이 둘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우월을 내세워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돋보여주려 한다. 유머러스까지 하다(Luz). 인간은 참새보다 얼마나 더 값진 존재인가? 그러나 값진 존재여서 사랑과 배려의 대상이 되는가? 아니면, 사랑과 배려 때문에 값진 존재가 되는가? 이 질문에의 답은 결코 양자택일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30절. 하느님의 권능과 자상함을 다시 한번 은유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이 삽입구이다. 머리카락 하나도 다 세어놓고 계신 하느님이시다. 교회 공동체는 박해와 고통 중에도 이런 아버지 하느님의 지원과 격려를 받고 있다. 10, 20에 보면 영께서도 이런 하느님의 지원에 한몫 거드시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28, 20에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다짐하신다. 해석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 진술과 성찰에서 이 구절은 가히 고전적이라고 할 만한 소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느님은 자연 법칙과 세계 전반의 질서를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재하시고 관장하신다. 이런 시각에서는 우연이란 없다.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을 규정하는 여건과 조건 하나하나까지 모두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추상적인 섭리론이다. 자칫 신학적 결정론에 떨어질 우려도 없지 않은 시각이다. 전쟁과 자연재해에서부터 땅에 떨어지는 참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하느님께 떠넘기고 이 세상의 불행은 도저히 극복할 길 없는 스캔들이 되고 만다. 하기는 우리 이 구절은 이런 하느님의 섭리관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어떤 답을 주자는 게 아니다. 대답 없는 이런 질문 한가운데서도 하느님은 사랑이 지극하신 섭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게 하고 이 믿음에서 위로를 받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구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거해서,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짐해 준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리고 엄연하고 처연하기까지 한 현실을 떠나서는 아무리 하느님의 섭리를 소리높이 외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진실 호도일 것이고 이 진실의 종교적인 미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섭리론이 설득력을 발휘할 리가 없다.




32-3절. 마태오는 이 구절에서 이 다음 심판 때, 생전에 예수를 고백한 제자들에 관해서 예수가 진술하시는 증언을 직접 청위하시는 판관으로 묘사한다. 어록 전승에서는 이 증언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진술한다고 전한다(루가 12, 8-9).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증언을 청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하느님이 천사들을 옆에 거느리고 좌정하신 자리에서 이 증언을 청취하는지는 논란은 벌일 수 있겠지만 그 소득은 별로 없을 듯하다. 다만 마태오는 이런 수법으로, 하느님이 예수를 고백하는 그 제자들의 아버지이시며 사랑해주시고 배려해주시는 아버지이시라는 것, 제자들이 기도할 때도 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려 한 것 같다. 그 이유도 매우 단순하다. 그분은 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하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6, 5-14). 이 하느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들 하고는 다르시다(10, 35.37). 요컨대, 박해 중에도 믿을 수 있고 위로와 용기를 주십사 하고 기도할 수 있는 분이시다.




5. 오늘을 위한 해석학적 반성.


지금 우리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은 박해의 상황이 아니다.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북한을 포함하는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직도 자유로운 선교가 제약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라도 이슬람 국가나 러시아나 그리스 정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나라에서도 다소 간 선교에 제약을 받고 있고 차별을 받고 있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또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 종족간의 주도권 전쟁에 휘말려 교회가 박해받고 성직자나 일반 신도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현대의 상황은 우리 교회가 대처해야 할 전반적인 박해의 상황은 아니다. 북한의 경우도 여기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공부한 구절의 말씀들이 그만큼 현실성이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고백은 반드시 박해의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제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교 간의 분쟁에 민감해야 하고 (카슈미르 국경 지대에서 이슬람과 힌두교의 충돌을 생각하자!) 종교가 어떠한 명분으로든지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배적인 종교는 항상 소수파 종교에 민감해야 되고 그들의 종교 자유도 우리의 것 못지않게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관용이 필요하다. 반대로 우리가 소수파일 때는 너무 우리의 선교 자유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말고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나누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 일상생활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때의 고백은 증언이 된다. 증언이나 고백이 비슷한 뜻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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