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10일 (수) 신선마을
주님의 만찬4
2.공관복음서.
2.2. 마태오복음서의 최후만찬기.
I. 분석.
1. 짜임새.
이 최후만찬기는 절대 속격을 사용한 26절ㄱ과 함께 시작한다. 이 최후만찬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26절ㄴㄷ은 빵의 축복과 분배와 해석 말씀, 27-28절ㄱ은 잔의 축복과 돌림 그리고 해석의 말씀, 그리고 29절은 마지막 약속 또는 다짐의 말씀이다. 빵과 포도주 잔에 관련된 부분은 서로 비교해 볼 때 거의 완벽한 병행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6절: 빵을 드시고 축복하신 다음 떼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27절: 잔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모두 그것을 (돌려) 마시시오.
이는 내 계약의 피입니다.”
다만 28절ㄴ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 병행성을 깨기 때문에 눈에 튄다. 그날 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 형식을 보면 뭔가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동작과 말씀에 집중되어 있고 반면에 제자들이 빵을 먹었다든가 잔을 돌려 마셨다든가 예수님의 해석 말씀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일절 언급이 없다. 마치 지금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 빵과 포도주의 축성 직전에 최후만찬을 회고하는 양식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달리 말해 마태오는 자기가 속해있던 교회에서 거행하던 성만찬례문을 원용하여 수난사라는 큰 틀 안에서 예수의 최후만찬을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 보도는 양식사적으로 보면 성만차례 거행을 그 제정 경위를 회고함으로써 정당화하고 근거 세워주는, 이른바 의식 원인담(儀式原因譚)으로 분류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행하라”는 반복 명령은 없지만 “받아 먹으시오… 그것에서 마시시오”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성만찬례를 반복해서 거행하고 거기에 참례하는 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명령 말씀이기도하다.
2. 자료비판. 마태오가 이 최후만찬기를 작성하는데 사용한 자료는 마르코의 최후만찬기임이 확실하다. 물론 주님의 만찬 제정 기사는 이미 말한 대로 마르코 이외에도 바울로도 전해주었고 (1고린 11,23-25) 루가도 전해주었다. 루가는 루가 22,19이하에서는 바울로와 일치하는데 루가 22,15-18에서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하는 제정 말씀을 전하지 않고 그 대신 종말론적 미래를 내다보는 마지막 다짐 말씀을 두 차례나 전해준다(“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해방절이)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습니다.[16절]”; “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지금부터 결코 마시지 않겠습니다[18절]”.). 루가의 이 번안에서는 최후만찬이 해방절 만찬이었다는 것을 명문으로 밝히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22,15). 또 빵에 대한 설명 말씀에 이어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19절]라는 반복 실행 명령의 말씀을 전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바울로는 이 반복 명령을 알다시피 빵과 잔에 대한 설명 말씀에 이어 각각 한 차례, 모두 두 번 전했다(1고린 11, 25.26). 이렇게 루가 22, 15-18의 성만찬 제정 말씀은 마르코나 바울로와는 다른, 루가 이전의 전승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고 할 것이다.
마태오의 최후만찬기가 마르코의 최후만찬기를 대본으로 작성한 것임은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만찬기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이 차이들 중 어느 것이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어느 것이 마태오의 손질인지는 밝히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 동기를 밝히기는 더욱 어렵다. 마태오는 26,26에 “예수”라는 이름과 “제자들”이라는 말을 명문으로 집어넣었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매끄럽게 하고 앞뒤 맥락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는 다른 곳에서도 예수 또는 제자들이라는 말을 자주 보충하고는 한다. 마르코는 14,24에서 모두가 그 잔에서 마셨다고 보도하고 이어서 잔에 대한 설명 말씀을 직접화법으로 전하는데 마태오의 예수님은 26,27에서 먼저 잔을 들고 내주시면서 그 잔에서 모두 마시라고 명령을 내리신다. 그리고 즉시 이어서 잔에 대한 설명 말씀을 덧붙이신다(28절). 마르코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는 대목에서 “위해서”라는 전치사를 그리스어 hyper을 사용했는데 마태오는 그 대신 peri라는 전치사를 기용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는 이 두 전치사의 의미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마태오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또는 “죄를 용서해주려고”라는 말을 끼어 넣었다. 마르코는 14,25 첫머리에 “아멘”이라는 말로 이어오는 다짐 말씀을 이끌어 들임으로써 이 다짐 말씀을 그야말로 다짐해준다. 마태오는 이 “아멘”을 생략했다. 그 대신 “마시지 않겠다”에서 “않겠다”는 부정사를 마르코의 “더 이상…않겠다”는 뉘앙스의 ouketi ou me대신 단순하게 ou me라는 부정사로 고쳐 썼다. 부정의 효과가 다소 줄어드는 느낌이다(Gnilka). 이어지는 29절ㄴ은 성서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성대한 느낌을 준다: “…할 그날까지; 그날; 포도나무의 난 것=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송이, 포도주. 이사 32,12). 같은 29절ㄷ에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을 덧붙이고 ”하느님의 나라“ 대신 ”나의 아버지의 나라“로 고쳐 썼다.
이상의 마르코와 마태오의 차이들 중에서 마태오의 편집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는 대목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마르코의 “받으시오”를 “받아서 먹으시오”로 고치고 이어서 27절ㄴ에서 “그것에서 마시시오”라는 명령으로 바꾸어 쓴 것은 “먹으시오”와 “마시시오”를 병행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 병행 명령구가 마태오가 처음으로 짜 맞춘 것인지 아니면 그가 속해있던 공동체의 성만찬례문의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내 생각에는 후자가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죄의 용서를 위해서” 또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는 마태오의 편집임이 거의 확실하다: 마태 3, 11에 보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한 마르코 1,4의 요한 세례자의 참회설교 내용을 손질해서 :나는 회개시키려고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로 고쳐서 전한다. 달리 말해 요한의 세례로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예수께서 쏟으신 피만이 죄의 용서를 가져다준다는 확신을 드러내는 수법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그 이름이 가리켜주듯이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신 분이 아니신가?!(마태 1,21 참조).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마태오 개인의 확신만이 아니고 분명 그가 속해있던 교회 공동체의 확신이기고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오의 편집 작업은 공동체의 전례전승과 밀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II. 주석.
26절. 그들이 먹고 있을 때는 물론 예수와 그 제자들이 식사하고 있을 때이다. 마태오는 이를 명문으로 밝혀준다(예수와 제자들의 언급). 이 식사는 현재의 앞뒤 문맥으로 보아서는 최후만찬이요 또 분명 파스카 해발절 만찬이다. 이 경우 빵을 들고 떼어주는 동작은 전식이 끝나고 이제부터 본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동체의 성만찬례에서는 식사의 처음에 있던 빵의 의식을 마치 주님의 최후만찬 때를 역사적으로 회상하면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님이 하신대로 지금 성만찬례를 지낸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절 만찬이었다는 사실을 명문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해방절은 일년에 한번밖에 지나지 않지만 성만찬례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지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는 이런 의미에서도 성만찬례는 유다교의 해방절 만찬은 이미 아니었다. 생전의 예수가 최후만찬을 언제 어떻게 지내셨는가를 회고하는 경우라면 얼마든지 유다교이 해방절 만찬을 거론할 수 있었다. 그 좋은 실례가 곧 우리의 지금 복음서와 같은 예수님에 대한 회상록이라고 할 수 있다. 빵을 들고(labon) 찬양의 기도를 드리고(eulogesas) 나눠주는(dous) 동작은 모두 분사법으로 처리되어 있다. 따라서 26절의 주동사는 “쪼개다“(eklasen)와 “말씀하셨다.”(eipen)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구절의 “쪼개다“와 “말씀하셨다” 두 활용 동사는 특이한 인상을 준다. 그런데 “말씀하셨다”는 바로 이어서 예수님의 설명 말씀을 직접화법으로 도입하는 구실을 떠맡고 있으므로 이 구절의 본래적인 비중은 “쪼개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매우 특이한 시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쪼개서 나눠주는 빵이 예수님의 죽음에서 바수어지고 조각나는 몸을 사전에 암시한다는 것을 말해주려 하는 것일까? 지금 한창 식사 중인데 빵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은 무의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빵이 특별한 빵이라는 것을 벌써 암시한다: 이것은 “나의 몸”이라는 말씀이고 그리고 여러분은 이 빵을 먹으라는 명령이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동작을 이제는 성만찬례라는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 거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몸”이라는 말을 인간학 개념 -해부학적 개념이 아니다!- 으로 파악할 때 그것은 “이것은 나입니다.”라는 뜻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다. 이 등식, 이 동일화가 어떻게 이뤄지느냐를 설명하는 일은 다른 문제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이 빵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다는 것이다.
27절. 빵을 떼서 주실 때는 찬양을 드리셨다고 하는데 잔을 내주시며 돌려 마시라고 할 때는 감사를 드렸다고 마태오는 고쳐 썼다. 찬양을 드리다와 감사를 드리다는 사실상 같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으나 빵을 떼어주실 때는 본식을 시작하는 것이므로 찬양을 드렸다고 하고 이 본식이 끝난 다음 식사를 마감하는 뜻으로 드는 마지막 잔을 내주어 돌려 마시게 할 때는 감사를 드렸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다만, 이 후자의 경우 전제해야 할 것은, 마태오가 전하는 최후만찬은 현재의 문맥에서는 해방절 만찬이므로 빵 나누기와 잔 돌려 마시기 두 동작 사이에 진행된 해방절 만찬의 본식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생략했다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해석 가능성은, 마태오의 공동체에서는 성만찬례 때 먼저 빵을 나눈 다음 저녁 식사를 들고 마지막으로 잔을 돌려 마실 때 감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마태오가 잔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해방절 만찬 절차의 마지막 부분으로 개념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 차라리 그가 속해 있던 교회에서는 아직도 성만찬례 때 식사를 겸하고 있었으므로 이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잔을 돌려 마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는 추측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이미 바울로가 세운 고린토 교회에서 잔을 돌려 마신 것을 보면(1고린 10,16) 같은 잔에서 포도주를 돌려 마시는 관습은 일찍부터 교회 안에 정착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28절. 이 절은 잔을 돌려 마셔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이 잔이 생전에 예수가 당신 제자들과 마시는 마지막 잔이기 때문에 돌려 마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별의 잔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계셨고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알려주셨다고 생각된다.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당신의 피는 계약의 피이고 (출애 24,8) 계약 체결의 제사에 희생으로 바치는 동물의 피를 쏟듯이 이제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그 새 백성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체결된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백성을 많은 이들이라고 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만 마태오의 맥락에서는 그 범위를 넘어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포괄하는 하느님의 새 백성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고(이사 53, 10),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이사 53,11)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것이며 (이사 53,12)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같은 곳) 이사야 예언서의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 마태오는 분명 예수님을 이 야훼의 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실을 방증하는 대목이 바로 마태 8, 17이다: 이 구절에서 마태오는 이사 53,4를 인용하는데 히브리 원문을 인용하는 것도 아니고 칠십인역을 인용하지도 않고 나름대로 매우 독특한 본문을 전한다: 칠십인역과 비교할 때, “그는 우리 죄들을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는 도다.” 대신에 “그분은 몸소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질병을 짊어지셨다”로 바꿔서 인용한다. 그러니까 “죄들” 대신에 병고, “짊어지다” 대신에 “떠맡다”라고 고쳐 씀으로써 예수는 스스로도 병고에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고 사람들의 죄를 속바치는(=속죄) 야훼 하느님의 종일 뿐 아니라 병자들을 치유하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야훼의 종임을 드러내려 했다고 본다. 이런 관찰이 옳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죄를 용서해서 많은 이들을 구속하기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는 야훼의 종이시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 맥락이 다소 인위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태오 전체의 맥락 안에서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이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출애 24,8에 관한 유다교의 해석 전승과도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실상 에제 45, 18 이하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바빌론 유배 이후부터는 파스카 어린양의 피가 속죄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는 고증이 있다. 이처럼 성만찬례에 동석하는 사람들은 이제 수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를 이루고 친교를 나누며 이 성만찬을 통해 속죄를 입고 그분이 당신 피로 맺으신 계약에 참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계약의 피로서의 예수의 피는 시나이 계약 전승, 야훼의 종의 전승,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예레 31,31의 새로운 계약의 전승을 종합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29절. 이 말씀은 마르코의 최후만찬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전망과 기대를 표출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의 미래 희망과 확신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과 나누는 만찬은 이 지상에서는 마지막 만찬이지만 그분은 당신도 참석하실 메시아 시대의 잔치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이 지금 임박하고 있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죽음 다음에도 자신이 구원을 받아 이 잔치에 동석할 수 있다는 구원 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확신에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명문은 없지만 이를 반드시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던 이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과 양상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메시아 시대의 잔치는 묵시 사상에서는 매우 익숙한 주제이기도 하다(헤녹 62,14; 시리아 역 바룩 묵시 29, 8; 꿈란의 1QSa 2,11-22). 마태오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메시아 잔치에 제자들이 자리를 함께 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로써 제자들에 대해 책임 있는 스승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분으로 나타나며 아울러 이 메시아 잔치의 좌장 또는 주인으로 그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그는 이 메시아 왕국의 아버지로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자신이 이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만민을 심판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선택 받은 이들을 초대하여 그 나라를 상속 받게 할 것이다 (25,34). 성만찬례는 이처럼 처음부터 종말에 대한 미래 전망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성만찬례는 이제 이 종말의 메시아 잔치를 앞당기는 잔치이고 지금 성만찬례에서 나누는 일치와 친교가 이 종말의 메시아 잔치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식탁에 기대 눕고 영원한 향연을 즐기게 될 것이다. 바울로는 이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성을 주님의 재림과 같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1고린 11,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