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 예수

 

III. 비유의 본래 의미


이 비유의 본래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야심 찬 계획이기는 하겠지만 기대되는 효과는 미심쩍다. 우선 이 비유의 원형, 이를테면 예수님이 발설하신 그대로의 원형을 복원하여 그분이 의도하신 의미를 추적하는 일이겠는데 이런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원형을 추구하는데는 다음 몇 가지 점을 길잡이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1. 이 비유는 일반 비유인가 특례 비유인가? 특례 비유로 보는 사람들은 이 비유 이야기에 사용된 동사들의 시칭에 주목한다. 그 시칭은 부정과거(소위 아오리스트)인데 이것은 과거에 일회적으로 있었던 일을 회고할 때 사용되는 시칭이다. 한 번만 있었던 일은 늘 반복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 이야기도 하나의 특례 비유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과거에 한 번만 있었던 이야기를 술회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는 일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체험이다. 씨를 뿌리는 작업 끝에 여러 가지 체험을 겪은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체험이라기보다는 수확을 거두는 같은 작업에서 겪은 여러 가지 체험이다. Luz는 그래서 이 비유를 하나의 비유라고 하기보다는 여러 비유들이 겹쳐진 비유라고 하고 싶다고 한다. 이 비유가 특례 비유라는 것을 결론지으려면 이 비유를 전승사적으로 해부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냥은 특례 비유로 분류되지 않는다. 




2.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인가? 이 비유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는 말은 그 어느 복음사가도 하지 않는다. 전반부의 은유들도 하느님의 나라의 처음의 실패와 종말의 성공을 대조하려는 뜻을 비치지 않는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부지부식 간에 이 비유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고 단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그런가?




3. 마르 13-20은 이 비유에 대한 해설을 전해준다. 그런데 보통으로 사람들은 비유 자체에 비해 이 해설은 나중에 갖다 붙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비유에 비해 해설은 전승의 2차 단계에 속한다는 것이며 그 근거로 이 해설부분의 선교 용어와 비유부분의 셈 족어 특유의 어법을 지적한다. 물론 이 해설이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선교 용어를 활용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대보다는 한 단계 뒤늦은 전승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비유 이야기에 셈 족어 특유의 어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해설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고 하는 주장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더구나 비유 이야기가 본래 의도한 의미와 해설이 제시하는 의미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격차를 자신 있게 지적해 내기는 쉽지 않다. 학자들의 의견도 너무 분분해서 어떤 사람은 본래의 의미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 방면의 노력을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 과연 비유 이야기의 본래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 답을 잠시 보유하기로 하고 다음 단계로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4. 비유를 특례 비유로 분류하려면 이 비유 이야기를 전승사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위에서 말했다. 그런데 마르 3-8의 비유 이야기를 과연 전승사적으로 해부가 가능하며, 또 가능하다고 할 경우 과연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가? 원형 복원의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닌데 결과는 학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보통으로 본래의 원형에 덧붙여지고 불어난 부분이 없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그 작업과정이 참으로 복잡하기도 하고 환상적일 때도 있다. 비유의 원형을 다시 복구하기보다는 저마다 자신이 제시하는 비유 해석에 더 걸맞은 원형을 복원한다는 인상을 풍길 정도이다. 물론 세대 간에 전승을 주고받고 하다보면 전해지는 이야기를 다소 손질하기도 하고 각 시대의 상황에 알맞게 응용하기 위해 줄이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고 강조점을 달리 찍을 수도 있다는 것은 누구나 시인한다. 우리도 성서를 주석하면서 사실은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마르 4, 3-8에 전해진 이 비유 이야기를 다시 세부적으로 해부해서 전승사적인 어떤 편차를 가려내는 작업은 본문의 실태로 보아 그 현실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이 비유의 본래적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 절실하게 제기된다.


학자들의 견해는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음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Luz의 생각이다:




가)첫 유형의 해석에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결론에 가장 무게를 실려준다. 곧, 씨 뿌리는 사람이 좋은 땅에 뿌린 씨가 풍부한 수확을 거뒀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 다른 세 가지 실패한 경우는 이 마지막 성공을 돋보여주기 위한 소극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며 긴장을 고조시켜 마지막 결과를 그만큼 더 인상 깊게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 부정적인 사례들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대치해야 하는 시련과 어려움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마지막 성공을 다짐하면서 힘을 내라는 격려의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선포는 시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머잖아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복음 선포자들을 격려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유형의 해석에서는 시초의 실패와 종말의 대성공의 대조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비유를 대조의 비유라고도 한다. 성장의 비유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비유를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 이해한다.




나)둘째 유형의 해석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 예수가 자신의 선포 활동의 성공과 실패를 스스로 돌아보는, 일종의 자기 성찰의 비유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이 해석에서는 마지막의 성공 못지않게 그에 앞서 있던 실패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 자기반성의 비유이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와 자신의 선포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묵상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이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희망과 불굴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제자들을 거느리는 스승으로서 실패 끝에 밀어닥치는 좌절에 항복하지 않고 이에 대비하면서 말씀의 선포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겠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말씨”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위험을 무릅쓸 때 비로소 이 말씀의 선포는 예수님의 사명의 정당성과 그 의의를 입증해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역사의 예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은 말할 나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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