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마태 13,24 이하)






I. 형식 – 구조.


가. 마태오의 7개의 비유들 중에 둘째이다. 첫째와 마찬가지로 비유의 해설이 곁들여 전해졌다(36-43절). 소재도 첫째 비유와 마찬가지로 씨 뿌리기이다. 다른 점은 첫째는 성장에 집중하고 있는 인상을 주는데 이 둘째는 수확 때의 가라지와 밀의 분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분리는 심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비유의 주제를 최후심판의 지연문제라고 못 박는 학자도 있다. 물론 하느님 나라라는 더 큰 주제의 한 면모를 다루고 있다. Hagner에 따르면, 이 비유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선포했다. 이 선포를 듣는 청중들은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느님 나라가 현재 현존한다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왜 아직도 악이 하나의 엄연한 현실로 존속하고 있는가?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로마 제국의 지배가 아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는 구원과 민족의 정치적 해방이 동일시되어 있는 셈이다. 적어도 민족 해방이 구원의 일부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요쳥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가 예수의 현재 안에 현존한다니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역설이다.이것이 과연 이 비유의 역사적 배경인지는 이제부터 우리가 검토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이 비유가 이 자리에 배치된 것은 씨 뿌리기라는 농사의 소재가 첫째와 같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수확의 결과가 다르다는 소재도 이 두 비유에 공통한다.






II. 자료와 편집.


마태오의 고유 자료에서 취재한 것 같다. 마르 4,26-29에 전해진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는 너무 다르다. 마르코의 이 비유를 마태오가 확장했다고 하는 Gundry의 이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마르코의 비유와 공통하는 요소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Luz는 마태오가 가라지의 비유로 마르코의 ‘저절로 자라나는 비유‘를 대치하려 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태오가 이 가라지의 비유를 임의로 창작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용된 언어가 매우 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마태오가 손질을 했다는 흔적도 보이기 때문이다 전승되어 오던 이 비유를 마태오가 넘겨받아 다시 손질을 했다면 마르코의 ‘저절로 자라나는 비유’를 참고했을 가능성은 시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에서 마르코의 ’저절로 자라나는 비유‘가 그동안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마르코의 비유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전부터 교회 공동체 안에 전해지던 가라지의 비유를 마태오가 넘겨받아 손질을 한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코의 비유에 대한 일종의 비판으로 그동안에 겪은 교회 공동체의 경험을 살려서 하느님 나라는 결코 저절로 자라나는 것도 아니며 싹과 줄기와 열매가 순서대로 그리고 순조롭게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악과 선은 엄연하게 공존하는데 이것은 교회 공동체 자체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 처하게 된 교회 공동체는 새로운 형태의 처신을 개발해야 했다. 그것이 곧 공존과 관용과 인내라는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내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된다는 격려와 교훈의 비유라고 할 것이다.


이 비유를 이끌어들이는 첫머리의 표현정식은 판에 박은 표현으로 마태오의 손질인 것 같다. 이 표현 정식은 셋째 비유를 도입하는 31절에서 정확하게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리고 넷째 비유를 시작하는 33절도 이와 대동소이이다. 그러니까 마태오는 이 비유들을 한데 이어서 이 자리에 소개하겠다는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고 할 것이다.






III. 편성과 짜임새.






Hagner가 보는 이 비유의 짜임새는 너무 세분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1) 비유의 주제: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농부 또는 집주인)(24절),


(2) 원수의 훼방, (a) 독보리를 뿌리다(25절)와 (b) 밀과 독보리가 함께 자라다 (26절);


(3) 대화, (a) 독보리의 출처를 묻는 종들의 질문(27절)과 (b) 예수의 답변(28절a);


(4) 대화의 계속, (a) 독보리 벌초에 관한 종들의 질문(28절b)과 예수의 답변(2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5)밀과 독보리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버려두라는 지시(30절a)와 (a)심판 때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완결될 것이라는 것, 곧 처벌(30절b) 과 축복(30절c)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짜여져 있다. 이 단락에서는 비유에 흔히 관용되는 대칭법과 병행법 수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대화가 이야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다소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조적 병행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밀과 가라지의 대조가 그것이다. 파종과 성장과 특히 수확 후의 운명에서 밀과 가라지는 매우 극렬한 대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Luz는 주제와 몇몇 낱말 (밭, 씨 그리고 씨 뿌리다)이 앞의 비유와 공통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가라지의 비유의 해설이 별도로 37-43절에 수록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특이하다고 관찰한다. 예수님이 비유를 해설해주시는 곳도 집안으로 바뀌어 나온다. 짜임새는 상황묘사(24-26절)와 대화(27-30) 두 부분으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단순한 짜임새다. 그러나 대화 내용은 상황묘사에서 소개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좋은 씨를 밭에 뿌렸다는 것과 (24b.27b) 그리고 원수의 훼방 짓거리(25a.28a.)가 그것이다.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대화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Hagner와 마찬가지로 Luz도 지적한다. Luz는 또한 이 이야기의 시간적 차원에도 주목한다: 파종의 시기, 성장의 시기, 추수의 시기. 그래서 이 비유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볼 때는 3막으로 구성된 한 토막의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 제3 막은 실제로 연출되지는 않고 다만 예고되었을 뿐이라는 점도 잊지 말자! 한편, 앞뒤가 다소 맞지 않는 요소들도 더러 눈에 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농부인데 후반부에서는 많은 종들을 거느리는 집주인으로 탈바꿈한다. 그런 집주인이 어떻게 직접 씨를 뿌렸겠는가? 그리고 종들이 집에 많이 있는데 추수꾼을 따로 고용해서 수확을 거둔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원수가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가라지 씨를 밤에 밀밭에 뿌렸다는 것도 어색하다. 원수인 밀밭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이런 서툴고 번거롭고 효과적이지도 않은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비중은 종들의 질문을 유도하고 그에 대한 집주인의 답변을 부각시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 전승사와 출처.


위에서 본대로 이 비유 이야기는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곳이 많다. 전승사적인 해부를 요구되는 것도 당연하다. 해부의 가능성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이야기에서 원수를 퇴장시킨다. 그러면 밀과 가라지의 대조가 뚜렷하게 부각된다: 지금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리지만 이 다음 추수 때 이 밀과 가라지는 분리되고 그들의 운명도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30절에서 추수 때를 내다보면서 말하는 집주인의 세부적인 답변을 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일단 제쳐놓는다. 그러면 이 비유는 굳이 최후심판과 결부시킬 필요가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수있는 분석으로는, 위의 두 가지 해결 방안을 혼합해서 어떤 제3의 해결책을 강구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해결 방안은 모두 이 비유 이야기를 완전히 달리 꾸며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고 또 가라지의 비유에 어떤 원형이 있었으리라는 가정 하에서 분석 작업을 한다. 다만 이 원형을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비유도 때가 되기 전에 사람들을 흑백으로 가르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와 추수 때까지 참고 견디라는 격려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거룩하고 선한 사람들로만 이뤄지는 순수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도 생전에 소위 “참된 이스라엘”로만 구성되는 공동체를 따로 세울 뜻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이렇게 반분파주의(半分派主義)의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려면 30절의 마지막 추수 때를 내다보는 전망이 이 비유의 원형에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실상을 말하자면 이 30절은 설화적으로 볼 때는 정말로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요컨대 이 비유의 원형이 있었다고 해도 그 본래의 뜻을 헤아리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마르 4,26-29을 처음부터 의식하고 이 비유에 그 비유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려 했다고 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더 이상 가라지의 비유를 전승사적으로 비판하고 분석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결과는 매우 소득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비유는 처음부터 하나의 우의적인 비유(寓意的譬喩)로 치밀하게 구성된 비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비유의 여러 가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요소들도 하나의 우의를 위한 플롯(plot)의 일부로 매우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그 종말의 중간 시기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이 시기에 맞다들지 않을 수 없는 문제, 곧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배태하고 있는 말씀의 씨앗은 뿌려졌는데 악의 세력은 공동체 안팎으로 여전히 실세를 떨치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어떤 답변을 제공하고 아울러 경고와 격려를 보내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친히 발설하셨느냐 하는 질문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사상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다. 






V. 주석.


개관. 이 비유는 처음부터 이상한 느낌을 준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당연히 좋은 씨를 뿌리게 마련인데 좋은 씨를 뿌렸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이 비유 이야기의 결론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의 원수가 밤에 가라지 씨를 뿌렸다니 말이다.


24절. 가라지는 독보리의 일종으로 중동 일대에 널리 서식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가라지에는 그 안에 독성을 띤 버섯이 있는데 그 독성은 여기서 온다고 한다. 흔히 가라지는 다 자란 다음에라야 밀과 구별된다고 하는데 최근의 관찰에 따르면 성장기에도 그 잎이 좁다라서 밀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추수하고 나서 밀을빻을 때 밀가루에 함께 섞여 들어오게 되면 밀가루가 못 쓰게 된다고 한다. 일년생으로 키는 대략 1미터 안팎까지 자란다고 한다.


26-27절. 종들의 질문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당연히 좋은 씨를 뿌렸으니까. 아마 싹이 돋아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가라지도 그렇게 극성스럽게 많이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밀밭에 독보리는 으레 섞여 자라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종들의 질문은 불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28절. 다소 의외이지만 주인은 그의 원수가 그랬다고 한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또 아무리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누가 가라지 씨를 사전에 충분히 준비해두었다가 한밤중에 나가 이 씨를 뿌리겠는가?  차라리 낫을 들고 나가 밀을 베어버리든지 아니면 밭에 불을 지르는 편이 훨씬 쉽고 효과적이엇을 것이 아닌가? 종들의 제안은 오히려 이치에 맞는다: 아주 다 자라기 전에 뽑아버리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정상적인 농법이라고 할 수 있다.


29절. 그런데 밀밭 주인은 다른 의견이다: 가라지를 뽑다가 다른 멀쩡한 밀을 뽑아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정상이 아니다. 다 자리기 전에 김을 매는 것이 정상이다. 이 집주인 식으로 밀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을 맬 때 함께 뽑히는 밀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이다. 그리고 김을 매는 것도 밀을 아끼고 그 수확량을 늘려주는 지름길이다.


30절. 이 사실은 비유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추수 때 추수꾼이 와서 가라지를 모마 단으로 묶은 다음 불에 던진다는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수확 전에 김을 맨 다음, 그래도 살아남은 가라지가 있으면 그대로 놔도었다가 나중에 거둬서 닭 모이 감으로 쓰거나 아니면 아예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VI. 종합.


이 비유 이야기의 농사짓는 법은 희한하다.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도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라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종, 추수, 원수 등은 유다교 문헌에서도 흔히 사용되던 소재였다. 원수는 마귀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집주인은 하느님을, 종들은 의인들이나 예언자들을 상징하는 은유였다. 밀과 가라지의 공존 또는 대치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간의 적대 관계를 표현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추수 또는 수확은 심판을 상징하는 은유로 널리 사용되었었다. “뿌리를 뽑다”:라는 표현도 같은 심판의 맥락에 속한다. 독보리 짚단을 모아 불에 태운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유다교의 종말 사상에 따르면 종말의 환난이 닥치거나 종말의 파멸 심판이 오면 악인들은 영멸하고 선인들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주인에게 질문을 던진 종들은 의인들로서 밀을 베는 추수꾼과 구별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밀을 베는 추수꾼들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처벌을 집행하는 천사들의 역할을 떠맡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비유를 듣는 초기 공동체에서는 일종의 수수께끼 특례 비유를 연상했을 법하다. 상식에 어긋나는 전의(轉義) 또는 은유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뜻에 따라 상식적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공동체는 이 비유를 무엇과 연관시켜 알아들었을까?  어쩌면 이스라엘 선민 가운데서도 소수집단을 이루고 있던 자신들과 대부분의 다른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공존해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면서 이 비유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다. 전통 유다교의 비유들과는 달리 공동체는 가라지의 은유를 일차적으로 예수와 관련지어 재해석했을 것이다. 즉,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이스라엘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를 반대하는 이스라엘 대부분의 사람들을 너무 서둘러 배척하고 단죄하고 저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실 대부분의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 비해서 초창기 교회 공동체는 소수집단,달리 말해 숫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그들과 결별한다는 것도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칫 하나의 도피요 자위책이었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하느님은 머지않은 장래에 예수를 충실하게 믿고 따른 이스라엘과 그렇지 않은 이스라엘을 가러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태오가 속해있던 공동체에서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악인들이 뒤섞여 자라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 비유를 자신들에게 적용하면서 재해석했을 것이다. 마태오는 바로 이 점을 노린 것 같다. 선인들, 의인들, 성인들만으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실을 시인하면서도 이 현실과  안이하게 타협하지 않으며 공범(共犯)에 연루되지 않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이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인내와 관용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관용은 한쪽에서 베푸는 일방적인 관용일 수 있으나 달리 보면 관용은 베푸는 쪽과 받는 쪽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공동체 내에서 선과 악, 흑과 백은 당연히 가려지게 마련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서 선과 악, 또는 흑과 백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공존을 가능하게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최후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애써보라고 격려하시는 듯 하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집주인은 그리스도이시고 종들은 그 제자들이다. 종들이 집주인을 “주님”(=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검불은 불에 태우고 곡식은 곳간에 쌓으라는 은유에서 이들은 요한 세자의 설교를 연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마태 3,12). 요한은 하느님의 종말 심판을 안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와 이스라엘과의 결별은 그 동안에 이미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얌니아에서 람비들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유다교에서 추방한 것은 이 결별을 공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에서 요한 세례자의 설교를 이어받은 예수님의 이 비유 이야기를 더 이상 최후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되었고 또 교회 공동체 자체 안에도 의인과 악인들이 공존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이 비유를 재해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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