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와 큰 비에 고생이 많으시지요? 꾸준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8월 한달 동안 휴강합니다. 감사합니다.
물 위를 걸으시다 (마태 14,22-33).
I. 분석.
1. 짜임새.
22f절은 앞 절의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이야기에 이어주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의 대단원을 매듭짓는다. 그래서인지 그 장면 묘사가 14, 13f와 아주 비슷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배에 오르게 하시고 당신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동안에 당신은 백성들을 해산시킬 셈이었다. 그리고는 혼자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다. 13절에서도 예수는 요한 세례자의 소식을 듣고 물러가서 배에 오른 다음 혼자서 사막으로 가신다. 마태오는 이 대목에서(23절) 예수께서 혼자이셨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한다.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였는가? 아마도 예수의 부재 사실이 공동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미리 암시하려는 듯하다. 긴장 조성은 24절에서 역풍으로 노를 젓는데 제자들이 애를 먹었다는 언급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향해 걸어가시는 장면으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풍랑의 묘사(24절)와 그 풍랑의 진정(32절)이 대칭을 이루어 긴장 고조와 긴장 해소의 역동성을 잘 살리면서 전개되었다가 마무리된다고 하겠다. 마태오의 이야기 틀 안에서는 이 고비에서 베드로의 구조 요청(30절)과 예수의 구조 동작(31절)은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다고 하겠다. 그러나 긴장 고조의 전반부는 그 후반부에 비해서 더욱 전개되었다: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25-27절)과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28-31절)을 두 단계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에서는 제자들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말씀은 전해졌지만 그들의 구조요청은 전해지지 않았다. 마태오는 8,25와는 달리, 여기서는 베드로에게만 이 구조 요청을 하게 했다. 그가 베드로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한 가지 표시이다. 오히려 마르 6,51처럼 마태 14, 27에서 32절로 뛰어넘어가도 이야기의 흐름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데도 말이다. 그만큼 28-32절에서 베드로가 각광을 받고 나타난다. 예수를 유령으로 오인한 제자들의 착각과 예수의 신분 확인 끝에 그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신분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고 이어서 자신의 요청과 예수의 명령에 따라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다가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긴장 고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32절은 이적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이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의 신앙 고백(33절)은 이 이야기의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이야기의 점고법(크레셴도와 클라이맥스와 데크레셴도) 구성과는 상관없이 모든 비중이 이 신앙 고백에 실려 있다. 따라서 “나다”라는 예수의 신분 확인과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은 이 이야기가 노리는 최종적인 신학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이 이야기의 문학 유형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생각된다. 흔히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자연기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적어도 일방적인 명칭인 것 같다. 바람과 풍랑이 날뛰는 가운데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고 또 바람을 명령하여 가라앉게 하셨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여준 모양이다. 바람, 풍랑, 물이 자연 요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런 자연 요소와 그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초월하여 기적을 행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연 현상들은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의 시현(示顯)을 위한 무대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가령 야훼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출애 3,1-6)가 그렇고 소리와 짙은 구름이 그렇다(출애 19,9). 출애34, 5-6에서는 구름이 하느님을 수행한다. 엘리아에게 야훼께서 나타나셨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19,11-13): 강한 바람, 지진, 불, 여린 소리가 그것이다. 물 위를 걸어가신 이적과 한 가지 다른 점은, 구약의 선례들은 자연현상이 그야말로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데 비해서 우리의 이적사화에 나타나는 역풍과 풍랑은 마치 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상은 그야말로 인상뿐이다.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기보다는 “나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정체를 밝혀주시는 예수님의 계시에 따르는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자연현상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은 이런 예수님의 자기소개에 잘 호응한다. 아울러 16, 16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27, 54의 백부장의 신앙 고백을 연상시켜 주기도 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이야기의 쟝르를 시현사화로 규정하는 의견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러나 여기에 맞서 구조사화(救助史話)를 주장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적어도 제자들과 베드로가 구조 받는 부분(30.31절)은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적 이야기는 시현 사화와 구조사화를 혼합한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확한 관찰이라면 이것은 이 이야기의 생성을 풀어주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본래 독립된 시현사화와 구조사화가 각각 따로 전해 내려오다가 어느 과정에서 혼합되면서 오늘 우리가 마태오 복음에서 보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시현사화와 구조사화가 따로 존속해 왔다는 가정에서, 시현사화의 원형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베드로의 구조사화는 마태오만이 전하는데 그 출처는 어디인가? 마지막으로 마태오가 이 베드로의 구조사화를 첨가한 동기와 의도는 무엇인가? 다른 한편 시현사화와 구조사화를 너무 경직하게 구별하지 않고 시현사화에 구조사화의 소재들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는, 절충적인 견해도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견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과연 시현 사화에 구조 사화의 소재들이 동반하느냐를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페쉬(Pesch)는 매우 긍정적이다. 특히 편집사적으로 볼 때 마태 14, 28-31의 삽입구가 마태오의 작업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할 것이다. 정체 확인과 구조 소개가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를 유령으로 착각했다는 부분은 예수의 정체를 묻게 하고 이것은 시현사화의 소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의 마태오의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는 구조사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짜임새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I. 상황묘사:
1)앞 단락과의 연결 상황: 22절
2)뒤 단락과의 연결 상황: 23절
II. 풍랑 묘사:
1) 무대설정: 예수와의 거리와 역풍(24절); 시간자료(25절a);
2) 물 위를 걸으심(25절);
3) 예수와 제자들과의 만남과 반응(26-27절);
4) 베드로와의 만남과 반응(28-30절);
III. 구조:
1) 베들로의 구조와 바람이 가라앉음(31-32절);
IV. 이적의 확인: 제자들의 신앙 고백(33절)
II. 자료와 전승.
이 이야기는 마태오가 마르 6,45-52을 이 자리에 옮겨 쓴 것이다. 옮기면서 더러 첨가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고 손질을 하기도 했다.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면, 우선 22절에서 마르 6,45의 벳사이다라는 지명이 빠졌다. 벳사이다를 언급해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었는가? 마르코의 지명이 정확하지 않다고 해서 그랬는가? 잘 알 수 없다. 벳사이다는 고라진과 함께 예수의 저주를 받은 고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Gnilka의 추측은 역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셨다고 한다. 마르 6, 48에서 마르코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물 위를 걸어가셨다고 분명 도착 목표를 밝히면서도 예수께서 그저 지나치려 하셨다고 다소 모순된 보도를 한다. ‘그저 지나치다’는 시현사화의 한 가지 소재로 볼 수 있어 마르코의 이야기 틀 안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언급이다(출애 33,19.22; 34,5f; 1열왕 19,11을 참조할 것이다). 마태오는 이 언급을 삭제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닥친 위험에 무관심해 보일까 보아서 그랬을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르코는 6,49에서 제자들이 유령인줄로 생각했다고 서술한다. 마태오는 여기에 비해서 제자들이 “유렁이다!”하고 소리 쳤다고 직접화법을 사용해서 보도한다. 예수의 정체를 착각했다는 직접화법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면서 예수의 정체를 천명하는 신앙 고백의 직접 화법과 좋은 대칭을 이룬다. 마태오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28절부터 31절까지는 마태오의 고유 부분이다. 마르코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이 부분은 마태오가 작성했을까 아니면 그 이전의 전승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대체로 마태오의 편집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 근거는 이 부분의 어휘와 어법이 마태오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일이 지적할 수는 없지만 마태오가 25-27절에 사용한 어휘와 표현을 재활용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마태오는 왜 베드로의 구조 이야기를 삽입했을까?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처음으로 제자로 불림 받았다(4,18). 그는 12 제자의 대변자이기도 하다(15,15; 17,4.24-27; 18,21; 26,33.35). 그는 또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고백했고(16,18), 동시에 “사탄아!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16,23). 그는 예수가 체포, 연행되었을 때 대사제의 공관 안뜰에까지 따라갔으나 결국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잡아뗐다(26,69-75). 이렇게 놓고 볼 때 베드로는 열렬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추종한 제자이면서도 왜소한 믿음과 의심으로 해서 스승을 배반한 신앙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겁도 없이, 어쩌면, 주제넘게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말하는가 하면 -그러나 믿음이 아주 없었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 참조!- 사정이 급하게 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면서 비명을 지른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 어쩌면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오는 이런 베드로의 모습이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매우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물 위를 걸으신 이적 이야기는 공동체에게 하나의 신앙 예화가 된다. 교회 공동체도 시련에 시달리게 마련이다(5,10-12; 7,15; 10,17-25). 그럴수록 믿음을 공고히 하고 이를 흔들림 없이 보존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사수해야 한다.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데 항구해야 한다(10, 37ff; 11,29f; 16,24-26).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시련을 견뎌내고 끝내는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동나고 의심에 사로잡히면 인간의 영적-종교적 운명은 끝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여기에 응답하는 예수님의 내뻗친 손은 구조의 닻이 된다. 더 이상 흔들림 없이 항구에 안착하게 한다.
이 삽입 부분이 마태오의 편집 이전에 하나의 독립된 전승으로 전해져 왔을 가능성 또는 개연성은 없을까? 일차적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요한 21,7이다. 이 대목을 찬찬히 읽어보면 마태오 14, 28-31의 베드로의 구조 사화와 접촉되는 점이 몇 가지 발견된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 이야기는 일종의 시현사화이다; 예수와 베드로와의 만남이 바다 곧 호수에서 이뤄진다; 호숫가에 서계신 분이 주님이라고 알아보는 소재가 나온다;
이 만남에 앞서 부활하신 주님이 기적으로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신다. 이것은 물론 구조사화가 아니고 일종의 선물사화이다; 베드로가 호수에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대로 배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시현사화 전승자가 성서에 전해지는 비슷한 다른 이야기들(출애굽, 요수아와 엘리야와 엘리사의 요르단 강 건넘,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 몇몇 시편들의 언급)과 여타의 예화들(유다교 문헌과 헬라 문학 작품들 그리고 붓다의 경전에도 그런 예화들이 전해진다)을 참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미 마태오 이전에 베드로의 구조사화로 그 꼴을 갖추어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마태오 자신이 마르 6,45-52과 이런 자료들을 이용해서 독자적으로 베드로 구조 사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Gnilka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추리한다: 처음에 구전하던 부활 발현 이야기가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베드로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요한 21,7에 전해진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시면”이라는 예수의 정체 확인 정식과 “주님이시다”라는 애제자의 예수의 정체 확인, 베드로가 호수에 빠짐과 뛰어듬,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부활 신앙 고백의 핵심이라는 사실 등 몇 가지 점을 고려할 때 부활사화에 근거를 둔 베드로의 구조사화 전승이 하나의 독자적인 구전 전승으로 마태오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우리 이적 사화의 이해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III. 주석.
22절. 상황 묘사에서 뒤 단락과의 연결 부분에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헤어짐이 눈에 띈다: 예수는 뭍에 있고 제자들은 바다 곧 호수에 있다. 이 점은 8,23과 다른 점이다. 제자들에게 닥칠 위기를 예고한다: 예수의 부재는 그들에게 위기를 고조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벳사이다라는 행선지 이름이 생략되었다. 부정확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사실 벳사이다는 겐네사렛 호숫가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둘러댈 만한 행선지도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23절: 예수는 혼자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다. 산은 하느님과 통교가 이루어지는 거룩한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더구나 때는 밤이었다. 혼자 계셨다. 혼자 계셨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예수의 홀로 있음은 공동체에게는 그분의 부재를 의미한다. 예수 없이 홀로 있다는 것은 버림받았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 공동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헤아려 보라는 경고 같기도 하다.
24절: 이야기꾼은 시선을 이제 제자들에게 돌린다. 호수 한가운데로 저어나간 배는 호숫가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다. 1 스타디온은 그리스식 거리 단위로 2미터가 좀 못 미치는 거리이다. 출발지로 다시 되돌아올 수도 없고 호수 한가운데 떨어져 있으니 물도 깊을 것이다. 위험의 심각도를 예감하게 하는 소재이다. 제자들은 앞바람 때문에 노를 젓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위험 지대를 빨리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위기가 점점 심각해진다. 폭풍과 풍랑과 밤- 이것들은 인간의 곤궁과 불안과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25절: 밤 4시는 밤 시간을 4등분하여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오전 3-6시 사이이다. 전날 저녁에 헤어졌는데 예수께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첫새벽에 나타나신 것은 어떤 의미로 너무 늦게 나타나셨다고도 할 수 있다. 시현 지연이 늦어진 것은 위험을 고조하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도 이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수는 호숫가를 소요하신 것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 이것은 하나의 초능력이오 성서적인 용어로는 하나의 이적이다. 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나 천사나 어떤 인물이 물 위를 걸었다는 정확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야훼께서 태초에 카오스를 정복하여 질서 있는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한 하느님이시기에 그분만이 홀로 바다 위에서 걸어 다니실 수 있다는 표상이 두어군데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편 77,20; 이사 43,16이 그것이다. 우리 이적 이야기와 가장 가까운 표현은 역시 욥기 9,8에 나온다고 할 것이다: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 구약에서 바다를 건너지른 이적 이야기들은 제법 많지만 우리 이야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애굽 때의 골풀 바다의 횡단, 요수아, 엘리아와 엘리사의 요르단 도강, 요나 예언자의 구출 이야기 등이 비슷한 예화들이고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바다나 강을 갈랐지 물 위를 걸었다고는 볼 수 없다. 헬라 세계와 불교에도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있다. 특히 Jetavana라고 하는 경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떤 재가불제자(在家佛弟子)가 스승의 설법을 들으러 길을 나섰다. 가다 보니 강이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강 건너에는 배가 한 척 대 있었지만 사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도 불제자여서 설법을 들으러 갔던 것이다. 예의 우리 불제자는 그래도 부처님 생각에 기쁨에 넘쳐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 한가운데 즈음해서 물결을 바라보니 부쩍 겁이 났다. 부처님 생각이 사그라지더니 발이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부처님 생각을 열심히 떠올리면서 강을 건넜다. 그는 물 위를 걸어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우리 복음서의 이야기와 그렇게 닮을 수가 없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날은다는 것 못지않게 옛 사람들의 꿈이었던 것 같다.
26: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를 제자들은 유령으로 오인한다. 시현사화의 소재라는 것은 이미 누누이 말했다. 겁에 질렸다는 것도 같은 시현사화 소재에 속한다. 공포는 귀신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지만 구약성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나타났을 때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은 공포와 당황과 속수무책이다. 일종의 심리적인 행동 마비 상태라고나 할까?
27절: 시현사화에서 시현한 장본인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신분 확인이다. “나다.”는 설명어가 없는 신분 확인이다. “나는 아무개다”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나다.”라고 만 말해도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구약성서에도 설명어가 있는 표현 정식과 없는 표현 정식이 엇갈려 나온다. 앞의 예로서는 창세 15,1(“나는 너의 방패이다.”); 26, 24를 들 수 있고 뒤의 예로서는 신명 32,39; 이사 41,4; 43,10; 45,18f; 48,12; 51,12 등. 뒤에 든 예 중에도 엄밀한 의미에서 설명어가 전혀 없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내가 그다.”(히브리어로 “아니 후”)라는 구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히브리어로는 “나다.”라는 문장을 아무런 설명어 없이 작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술어동사(영어에 be 동사에 해당하는 것)는 없을 수 있지만 “나”라는 대명사만 가지고는 문장을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 술어동사 “에이에”가 단독으로 쓰인 예는 출애 3,14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예수님의 “나다.”라는 신분 확인은 단순히 나자렛의 예수요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신분 확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예수의 이 시현을 통해서 구약의 하느님의 계시가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28-31절: 베드로의 요청은 이 신분 확인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주님”이라는 칭호는 제자들이 스승을 부를 때의 칭호이지만 그리스 계의 이방인 출신 교우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 칭호로 불렀다. 베드로의 요청은 신앙에 근거하는 요청이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그의 행동은 만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지만 스승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앙의 결단이기에 그만큼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력에만 의지하려는 태도는 자만이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모험을 무릅쓰는 짓도 하느님이 약속하시고 보장하시는 보호를 시험하는 유혹일 수 있다.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다. 이 무서움은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했던 제자들의 무서움과도 다르다. 폭풍과 풍랑과 심연 앞에서의 무서움이다.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이 구조요청의 언어는 시편 69,15f를 떠오르게 한다. 비명이 아닌 기도이다. 죽음에서, 불안에서, 불확실성에서, 좌절에서, 질병에서, 실업에서, 죄에서 구해주시라는 기도이다. 다른 제자들은 계속해서 배 속에 있었다. 베드로만 구조요청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 개인이 당하는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실은 개인으로서 당하는 이 시련이 더욱 견디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고독이라는 것, 혼자 버려져 있다는 고통이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데 나 혼자만 당한다고 하는 느낌은 절망하게 한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손을 뻗쳐 물에서 건져낸다. 시편의 여러 개인 탄원시가 떠오른다. 특히 시편 144,7을 참고할 것이다.
32절: 이야기는 매우 급하게 끝맺음을 향해 달음질친다. 예수와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바람은 자자든다. 예수가 폭풍을 진정시킨 것이다. 기적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33절. 제자들이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스승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 중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칭호이다.
IV. 오늘을 위한 의미.
한두 가지만 지적하고 마치겠다. 물 위를 걸으신 이 이적 사화를 오늘의 독자들이 읽으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기껏 예화나 신화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 역사성을 고증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실로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솔로몬의 송시라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옛 문헌에 이런 구절이 전해진다:
주님은 당신 말씀으로 폭풍에 다리를 놓으시고
그 위를 발로 걸으시며 건너신다.
그분의 발자국은 물 위에 굳게 찍혀 없어지지 않고
마치 진리 위에 세워진 기둥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무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안다. 1930년대라고 짐작되는데 일본에 프랑스 대사로 와 있던 폴 클로델이라는 가톨릭 작가의 희곡 “비단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옮겨보면 이렇다.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의 식민주의자들이 선교사들을 앞세워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해적선을 만나 모두 포로가 된다. 선교사는 배 위의 기둥에 묶인 몸이 된다. 때마침 불어 닥친 폭풍으로 배가 산산 조각이 난다. 다 익사하고 그 선교사만 기둥에 십자형으로 묶인 채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주님, 다 죽고 저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묶여서 말입니다.” 그 선교사의 기도였다. 예수님은 우리와 떨어져 계시다. 우리가 풍랑을 만났는데 어둑새벽까지 방치하신다. 어설픈 신앙으로 그분의 말씀을 좇으려 하지만 이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분은 우리를 건져주신다. 우리가 심연에 빠져 인생과 역사에 절망하고 싶을 때 그분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우리를 십자가에 억지로라도 묶어서 우리를 살려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