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후서 강의
유다서 다음으로 이 편지를 강의하는 것은 베드로 후서가 유다서를 인용하고 있고 인용이 아니라면 적어도 유다서를 이용했을 공산이 거의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 후서의 어느 대목은 유다서를 통해서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 집필 동기와 내용 소개.
필자는 독자들을 격려하고 경고하며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들의 신앙을 돌이켜 보고 미래의 전망을 내보여 주면서 그 미래에 대비하여 현재에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권고하고 훈계하려 한다고 하겠다. 쟁점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부인하고 따라서 윤리적으로도 ‘자유롭게’ 살자는 거짓 교사들의 교리적이며 윤리적인 오류를 반박하고 이런 오류의 위험에서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필자의 의도가 집필의 직접 동기로 작용한 것 같다.
우선 필자는 자신을 간단히 소개한다: 시메온 베드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쯤은 독자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1,1a). 다만 이 편지가 필자의 자기 소개대로 베드로의 친서인지는 저자 문제를 다룰 때 가려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편지 첫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신약 성서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매우 특이하다. 대부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하느님’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좀처럼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신인 곧 독자가 누구라고는 지목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어 볼 수 있고 읽어 마땅한 편지 그러니까 ‘공동 서간’, 곧 ‘가톨릭 서간’이라는 전통적인 명칭이 그럴싸하게 어울릴 법도 하다. ‘가톨릭 서간’이란 특정 독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일반을 상대로 쓴 편지라는 뜻으로 사용해 온 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은총과 평화를 비는 축원이 따른다. 하느님과 주 예수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처음부터 강조한다(1,1b).
1, 3에서 11까지에서 필자는 독자들의 신앙의 과거를 회상한다: 하느님은 독자들을 부르셨으며 그때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일체의 은혜를 선물로 주셨다. 새 신자들을 부르신 최종 목적은이 새로운 생명과 경건에 힘입어 하느님의 본질에 참여케 하는데 있다. 하느님 본질에의 참여는 이처럼 현재 누리고 있는 구원 현실이 아니라 세말에 또는 종말에 실현될 약속의 대상일 뿐이라고 하겠다. 이 부르심은 물론 세례 때의 부르심을 안중에 두고 있다. 여기까지가 독자들의 신앙의 과거 회상이라고 하겠다(3-4절). 이제 이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힘써야 할 처신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인식, 자제, 경건, 형제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완성되는 여러 가지 덕목을 실천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권한다. 여기까지가 독자들의 신앙의 현재에 관련되는 처신이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를 원론적으로 제시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5-7절). 이어서 이런 미덕이 가져다주는 효과와 이런 미덕을 소홀히 할 때 생기는 결과에 대한 부연의 말이 따른다(8-9절). 다시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부르심과 선택을 견지하도록 노력하라는 일반론적 권고와 함께 여기에 언약된 최종적 희망과 보상을 다짐해 준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그야말로 왕도(王道)라는 것이다(10-11절).
이어서 이 편지를 집필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말해 준다: 필자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이다(14-15절). 독자들이 현재 처하고 있는 신앙 상황은 결코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것도 아니고 위험천만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절망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매우 건전하고 정상적이라고까지 말한다(12절). 그럼에도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은 필자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과 또 한가지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고 그 교리를 왜곡하고 비아냥거리며, 재림도 없고 심판도 없고 따라서 처벌도 없으니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식으로 공동체를 위협하는, 매우 곤혹스럽고 우려할 만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아래 참조. 1, 16; 2, 1b-3a.. 13b-15a. 17-22; 3, 4). 필자는 이런 위험에 직면한 독자들을 경고하고 격려하면서 그 위험에 대처하도록 하려는데 이 편지의 집필 목적이 있었다.
필자는 우선 자신이 전한 예수의 재림 선포는 결코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역설한다.1)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의 증언에 입각한 것이라고 한다(1, 16a). 그렇다면 필자는 주의 재림을 목격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목격했다면 그것은 자기 모순이다. 그 대신 그가 내세우는 증거는 그 재림을 다짐해 주는 예표(豫表)를 그가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곧 주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했다는 것이다(1, 17-18).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예수의 거룩한 변모(=transfiguratio. 顯聖容)를 부활의 예표가 아닌, 재림의 예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색다른 재해석이라고 하겠다. 이 예표로 재림에 관한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들이 어김없이 실현되리라는 확실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의 초점이 재림에 관련된 이 예언들의 해석으로 옮겨지게 된다. 필자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 초점 이동이라고 하겠다. 이제 재림에 관한 모든 쟁점은 결국 이 예언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 예언들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1, 19-21). 이 대목은 성서 영감설이라는 주제가 처음으로 명문으로 밝혀져 나오는 대목으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어서 이 예언에 입각해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났던 것처럼 지금 다시 거짓 교사들이 출현했다고 말한다. 이미 예언된 것이기에 예상했던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적당하게 대처하기 만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물론 바람직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아니, 매우 개탄할 만한 상황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상할 것도 별로 없고 당황해 할 것도 없으며 무서워 할 것도 없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준다고 하겠다(2, 1-3). 거짓 교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분열을 일삼고 주님을 부인하며 방탕하고 탐욕에 빠져 있으며 속임수로 잇속을 챙기는 자들이라고 한다(2, 1b. 2. 3). 또한 이들에게는 예정된 처벌이 어김없이 닥치리라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2, 1b. 3b). 이 단락의 역점은 역시 이단자들 곧 거짓 교사들의 출현이 예언에 이미 예고되어 있다는 사실 지적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들에 대한 처벌 심판 예언은 다음 단락에서 본격적으로 거시(擧示)하고 있다.
처벌 심판 예고에서 거시된 선례는 다음과 같다: 1)죄를 범하고 타락한 천사들(2, 4); 2) 노아 때의 대홍수(2, 5); 3) 소돔과 고모라 도시들의 처벌(2, 6).
여기서 한가지 특기할 것은 하느님의 처벌 심판이 처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의인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전한다는 것이다: 노아와 그 일가 여덟 명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구원받은 의인들이다(2, 5b. 7). 이 두 부류의 의인들을 범례로 내보이면서 하느님은 의인들을 구하시지만 죄인들은 반드시 벌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2, 9). 특히 거짓 교사들처럼 욕정을 만족시키며 육의 쾌락을 추구하고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당하리라고 한다(2, 10).
2, 13b에서 22절까지는 이처럼 처벌 심판을 모면할 수 없는 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그려 준다. 그들의 인상(人相)을 그리는데 사용된 표현 수단들은 매우 다양하다. 악덕목(惡德目)을 나열하기도 하고(방탕:2, 13b; 탐욕: 2, 14b; 범법: 2, 16a), 여러 가지 은유(샘, 태풍, 안개: 2, 17a)와 직유(개와 돼지: 2, 22)를 써 가면서 그리고 때로는 아예 노골적 직설로(대낮의 잔치 판: 2, 13b; 저주의 자식들: 2, 14b; 탈선: 2, 15; 부당 수입과 뇌물 받기: 같은 곳; 거만과 허세, 퇴폐적 육욕, 그리고 선량한 신자들을 유인함: 2, 18; 허황한 자유 약속: 2, 19; 새로운 종살이: 같은 곳; 기성 신자인 그들의 타락상: 2, 20-22) 신랄하게 비난하고 고발하고, 벌을 받아 끝내는 망해 버릴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 이단자들이 차라리 신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고 까지 말한다.
2, 13b에서 22절까지는 거짓 교사들의 오류와 비행과 윤리적 퇴폐를 폭로하고 개탄하고 고발하면서 이들이 처벌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3, 1 이하 13절까지는 쟁점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교리를 변호한다. 이를 부인하는 이 거짓 교사들의 오류를 예언자들과 사도들로부터 이어 받은 전통에 입각하여 반박하고 아울러 독자들을 타이르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우선 필자는 이 편지가 독자들에게 써 보내는 두 번째 편지라고 한다. 아마도 베드로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베드로 전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만큼 그의 권고는 간곡한 것이 되고 경고는 엄중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형식일 뿐, 지금의 베드로 전서와 후서 사이의 쟁점상의 동일성이나 계속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지적이다. 이단자들의 오류를 반박하는데 사용된 수단은 ‘기억’이라는 것이다. ‘상기하라’, ‘기억하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 1, 12:‘상기시키다’(ὑπομιμνῂσκειν); 1, 13:‘이렇게 상기시킴으로써’(ἐν ὑπομνήσει); 1, 15:‘이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τὴν τούτων μνήμην ποιείσθαι). 여기 3, 1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아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킴으로써’(ἐν ὑπομνήσει)” 타이르고 깨우치려 한다. 또 3, 2에서도 ‘기억하라’고 한다. 무엇을 상기시키고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인가? 아마도 예언자들이 미리 예고해 준 말씀, 사도들의 계명들 곧 우리 주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상기하고 기억하라는 뜻일 것이다. 전통과 정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보인다. 적어도 3, 1의 문맥에서는 그렇다.
이어서 필자는 거짓 교사들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도전적으로 던지는 재림 부인의 질문을 인용한다: 재림할 것이라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으며 주 예수를 비롯하여, 신앙의 첫 조상들 곧 첫 그리스도 인들 특히 사도들이 잠든 이후 세상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3, 4).
필자는 이 질문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여기에 답변한다. 옛날에 기존하던 당시 세계가 대홍수로 망해 버린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현존하는 세상도 언젠가는 -이번에는 물이 아닌 불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한다(3, 5-6. 7)
결국 재림 지연은 하느님의 신의와 권능에 대해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재림 여부는 곧 변신론적(辯神論的) 문제로 확대된다. 이 문제에 필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우선 하느님의 시간 차원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3, 8b). 다음으로 하느님이 재림을 미루시는 것은 신의가 없어서도 아니고 권능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분의 재림 지연은 하느님의 인내와 관용의 또 다른 증거라고 한다(3, 9): 사람들이 회개하여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 재림 지연의 본래의 의미라고 말한다. 재림이 지연된다 하여 방심하거나 냉소하거나 방탕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김없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3, 10). 이어서 재림 때 이루어질 세계의 종말을 묵시문학적 소재들과 표상들을 빌어 소묘(素描)한다. 그 목적은 독자들을 경고하고 격려하여 세상 종말에 대비해서 거룩하게 살 것을 권고하고 아울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싱싱하게 불러일으키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3, 11-13).
마지막으로 필자는 세말 때 재림하실 주님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하라고 권고한다(3, 14). 하느님이 재림을 지연시킨다고 비웃고 있지만 그분의 이 참을성이야말로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섭리의 지름길임을 깨달으라고 한다. 이어서 바울로 사도의 편지를 제대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3, 15b-16). 이러한 권고는 바울로의 “모든”(3, 16) 편지들이 -적어도 그 일부가- 이미 수집되어 있었다는 것, 바울로의 이 편지들을 다른 성서 곧 구약성서- 어쩌면 신약 성서까지 포함해서?- 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는 문서 곧 지금의 우리가 말하는 경전으로 이미 받아들였다는 것, 나아가 그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로 의견이 엇갈리고 오해와 남용이 있었던 것을 전제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도 바로 이 바울로를 내세워 자신들의 재림 부인과 방탕한 생활 방식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해명된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바울로의 편지라는 ‘성서’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들은 성경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16b).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확신을 잃지 말고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인식을 계속 키워 갈 일이다(3, 18). 이 마지막 줄에서 다시 ‘인식’(γνώσις)울 강조한다. 1, 2의 ‘예수를 앎으로써(ἐπίγνωσις)’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짤막한 영광송으로 이 편지는 마감된다.
익명의 이 필자는 한편으로는 유대교 계통의 묵시문학적 소재를 풍부하게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헬라 문화권 특유의 표현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문화권에 정통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표현의 양면성은 그의 유대교 배경과 독자들이 헬라 계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에서 해명된다고 생각된다. 그의 유대교 배경은 그 유구한 전통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재림 부인을 반박하고 세상 종말에 대한 희망을 떨쳐 일으키는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얻어 낼 수 있었다. 그의 헬라 문화는 독자들에게 현재 요구되는 윤리적 처신을 권고하고 격려하는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와 같이 그의 윤리는 그리스도 인이라는 기정 사실과 주의 재림이라는 미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종의 ‘중간 시기를 위한 윤리’라고 할 수 있겠다(John H. Elliott, in: Second Epistle of Peter, ABD 5, 283). 나그네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그 공동체를 위한 일종의 ‘잠정 윤리’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윤리의 근거는 하느님의 일관성 있고 신의에 찬 역사내 행동에 있다는 점도 밝힌다(과거: 1, 3-4; 2, 3-8; 3, 5-6; 현재: 1, 20-21;2, 3. 9-10a; 3, 8-9; 미래: 3, 7. 10-12). 한마디로 윤리학의 기초는 신학이라는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