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의 경전 수용(經典 受容)과 중요성.

 

나. 이 편지의 경전 수용(經典 受容)과 중요성.


사도들의 으뜸이었던 베드로는 과연 명성이 높았던 모양이다.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경전과 위경(僞經)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 꽤 많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베드로 전서, 베드로 묵시록, 베드로 복음서,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 행전(行傳)이 그런 것들인데 여기에 하나 더 곁들여지는 것이 우리의 베드로 후서이다. 정통 주류 교회이든 이단 비 주류 교회이든 어디서나 베드로의 후광을 업고 자기들의 신앙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자기네 신념과 확신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후서는 전체 교회에서 경전으로 인정받기까지 많은 곡절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초 세기 교회 집필 가들은 이 편지를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편지를 인용하거나 암시하는 집필 가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편지의 경전 수용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라고 하겠다. 이 교회의 주교 글레멘스는 다른 가톨릭 서간들과 함께 이 베드로 후서도 해설해 주었다고 전해진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 14, 1). 서기 200년 조금 전의 무라또리 경전 목록에는 유다서는 들어 있는데 베드로 전후서는 빠져 있다. 이 편지를  인용한 사람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교부는 바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게네스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서기 185/6년 출생, 254년 사망). 같은 3 세기에 가바도키아의 가이사레아의 주교 피르밀리아노와 리키아의 올림포스의 주교 메토디오가 이 편지를 경전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오리게네스는 또한 이 편지를 신약 성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려 준다. 에우세비우스(서기 340년경 사망)도 이 편지가 성서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교회사 6, 25, 8).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편지를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4 세기에는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바실리오, 4 세기 후반에는 디디모스 등 동방 교회 교부들의 저서에 이 편지가 인용되어 나온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로니모가 이 편지를 경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일조를 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같은 이들은 시리아 교회의 영향을 받아  베드로 후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예외였다고 하겠다. 하지만 4 세기 중에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편지를 경전으로 인정하게 된다. 367년 아타나시오의 39번 때 부활 교서, 360년의 라오디캐아 지방 공의회, 397년의 카르타고 지방 공의회는 이 편지를 경전 목록에 포함시켰다. 시리아에서만은 6세기에 가서야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시리아 교회에서는 베드로후서뿐만 아니라 도대체 ‘가톨릭 서간’ 전체를 경전으로 받아들이는데 꽤나 주저했다. 그러나 성서의 필사본 전승은 좀더 적극적인 증언을 전해 준다: 이집트 방언으로 된 한 두 번역 필사본(사히드 번역 사본과 보하이르 번역 사본)에는 이 편지가 들어 있고 3세기말의 파피루스 72(파피루스 보드메르 VII)에도 수록되어 있다.1) 다만 이 파피루스 72 사본이 전하는 본문 자체는 시대적으로 후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베드로 후서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으려면 거기에 앞서 우리 시대를 위한 그 현실적 가치와 의미를 캐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다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편지를 읽고 당혹(當惑)하게 된다. 특히 2베드 2장 같은 대목을 읽는 현대 독자들은 반대자들에게 비난과 모욕과 저주를 서슴지 않고 퍼붓는 필자의 태도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이 편지는 우리 시대의 일반적 감수성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만큼 호소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편지를 무가치하다고 내동댕이칠 것인가? 이 편지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 제기하는 또 다른 이의는 고도의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독일의 개신교 신약학자로 유명한 캐제만(E. Käsemann)은 베드로 후서의 내용으로 보아 예컨대 바울로 사도의 복음 정신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고 일축했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베드로 후서의 신앙관과 윤리관이 바울로 사도와는 판이하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교리 내용에 대한 동의(同意)로 파악되어 있으며 윤리관은 사후의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지극히 공리적 자연 윤리에 입각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론적 복음 선포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판단이 옳은가? 그렇지 않다.


아래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캐제만의 이의 제기는 그 동안의 연구로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드로 후서는 초창기 그리스도 교 문헌으로서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중요한 가치를 계속 견지하고 있다. 이 편지는 사도 시대에서 속 사도시대(續使徒時代)로 넘어가는 중대한 과도기에 다원적 문화 환경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온몸으로 겨루고 있다. 따라서 이제 막 마감되려는 사도 시대의 유산을 충실히 지켜 주고 아울러 새 시대의 새로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한 사려 깊은 사목자로서의 대처 방안을 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문헌이다. 이 편지를 사목 서간(司牧書簡)의 하나로 분류해 온 전통이 타당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이 편지는 성서의 영감과 그 해석에 대해서 매우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성서는 아무리 그 저자들이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하느님의 영에 감도(感導)를 받아 집필한 것임을 처음으로 공언한다(1, 20-21).


아울러서 이 성서는 그 해석 여하에 따라 오용될 수도 있고 남용이나 악용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성서의 사용’(usus scripturae)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다. 구약의 예언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놀라우려니와 이러는 가운데 사도들의 증언이 일단 마감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도 확실시된다(1, 19; 3, 2).


또한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이 수집되어 일종의 서간집(書簡集)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언도 처음으로 전해 줄 뿐 아니라 그의 편지들을 성서라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그 일부라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3, 15-16).


마지막으로 이 편지는 초창기에 하나의 무거운 부담이었던 이른바 ‘재림 지연’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이를 정면으로 맞겨루고 있다는 사실도 결코 사소하달 수 없는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사정과는 정 반대였다고 하겠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자(時限附 終末論者)들 때문에 야기된 사회 혼란으로 곤욕을 치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네 정신사적-사회적 맥락에서는 주의 재림이라는 신앙 고백을 어떻게 일상의 언어로 고백하고 그 구체적-실천적 관련성을 행동으로 번안(飜案)할 것인가라는 매우 중대한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 역시 이 편지가 아직도 우리에게 현실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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