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집필 목적

 

E. 히브리서의 집필 목적.


섬세하고 난삽한 히브리서는 여러 가지로 그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해석의 대원칙은 이 문헌의 모든 내용과 문학적 구성을 한 측면도 빠짐없이 감안하면서 균형 있게 해석하는 일일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의 하나는 히브리서는 말하자면 `비고 논증법’을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그가 이룩하신 업적의 여러 측면을 구약의 인물 또는 제도와 비교하면서 전자가 후자가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하려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아드님으로서 천사들보다 우월하고(1, 5-14), 모세보다도 훌륭하며(3, 1-6), 아아론보다도 뛰어나시며(5, 1-10), 레위 사제들을 멀리 능가하는 분이시다(7, 1-28). 그리스도의 제사는 구약의 성막에서 지내던 제사들보다 나으며(9, 1-14),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로운 계약은 첫 계약보다 낫다(8, 7-13; 9, 15-22; 12, 24). 그러나 이러한 논증 전개가 유다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호교론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다교는 현세적이며 육적인 제도와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던가(7, 18; 9, 10), 그 교리가 산만하고 이상하다던 가(13, 9) 하는 따위로 유다교를 폄하하려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 편지의 훈계와 경고와 권고 부분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 권고 부분에는 유다교의 전승들이 독자들에게 아직도 매력을 느끼게 해서 이들이  혹시 유다교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대처하려는 태도와 의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교리 설명 부분을 보고 독자들이 혹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신앙 교리나 그릇된 교리를 바로 잡아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히브리서가 전개하는 고도(高度)의 그리스도론(1, 3; 7, 3; 13, 8)은 독자들의 너무 저급한 그리스도론을 바로 잡아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행하는 중보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를 바로 잡아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고도의 그리스도론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2, 6-18; 5, 7-8). 이런 관점에서는 오히려 독자들의 지나친 고도의 그리스도론을 교정해주려 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교부들이 이 히브리서를 이용하여 그들의 고도의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필자도 나름대로의 논거를 가지고 일종의 고도의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려 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일종의 시대 착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성사(聖事) 문제를 다루고 거기에 어떤 적절한 답을 제시하려 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저서에 세례(6, 4; 10, 22)와 성체 성사(13, 10)에 대한 암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암시가 매우 막연하다는 것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혹시 그리스도의 제사(9, 11-10, 10)를 논의하면서 필자는 성체 성사를 변호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는가? 물론 그렇게 보는 학자들도 없지 않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그리스도의 제사와 희생은 첫 번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7, 27; 9, 26; 10, 12) 또 여러 가지 제의(祭儀)와 관련이 있는 범주를 우의적(寓意的`)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보면(13, 15) 그는 가톨릭 식의 성사관(聖事觀)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는 견해를 내세우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가 종교 개혁 이후 미사를 둘러싼 논란을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필자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교리 설명 부분과는 달리 권고 부분을 읽어보면 이 편지의 독자들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었는가를 어느 정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 독자들이 박해를 당한 것은 사실인 것 같고 이런 상황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던 같다(10, 32-34; 13, 3). 그래서 히브리서의 주요 의도 중에 하나는 분명 세속 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반대와 비난에 시달리고 있던 교우 독자들을 이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를 격려하고 힘을 보태주는 데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가서 신앙에 관해서 전개하고 있는 설명은 분명 이런 격려와 강화(强化)에 그 기능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드는 신앙의 전범들도 이런 시각을 확인해준다: 그가 드는 신앙의 전범들은 주로 소외와 박해와 고통을 당했다(11, 9.13-16.26). 특히 그들이 당한 고통은 이들의 인내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11, 35-38). 그러나 이들의 모습도 예수께서 순교자-증거자로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한낱 전주(前奏)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예수는 고통을 이겨내신 당신의 인내로 믿음을 완성하셨던 것이다(12, 1-3). 히브리서는 결코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반박문이 아니라 그 독자들에게 순교를 격려하는 권고문 또는 격려문이라고 할 것이다.


저자의 설명 부분에서 우리가 이 편지의 독자들에 관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들 독자가 속해있던 공동체의 어느 구성원들은 예수를 끝까지 추종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했다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10, 25; 참조 3, 12). 무슨 이유로 탈락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필자 자신도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미래의 심판은 확실하며(2, 2-3; 6, 8; 10, 25.20-31; 12, 18, 24. 26-29) 그리스도께서는 끝 날에 주님으로 계시될 것이라는 것(2, 8; 10, 13)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독자들은 혹시 예수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실망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림 지연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믿음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라면 비록 그 방식은 간접적이고 완곡할지라도 우리의 필자는 이러한 믿음의 이탈에 대처하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듯이 훌륭한 구원을 소홀히 하면 하느님의 보복을 받으시라고 경고도 하고(2, 3), 또한 이들의 신앙 생활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활기를 잃고 맥풀려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닐까?(5, 11; 6, 12). 이런 공동체는 최초의 열성이 점점 줄어들어 신앙 생활에 나태해진 공동체이며 한때는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받아 모셨지만 갈수록 외부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그리고 처음에 기대했던 희망이 이뤄지지 않거나 지연됨으로써 신앙 생활에 좌절하거나 냉담해진 공동체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필자가 독자들의 믿음을 다시 활기 차게 하고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투신에 좀더 든든한 기반을 제공하려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도(企圖)에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서 사용했다. 엄중히 경고하기도 하고 배교(背敎)를 하면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그려주기도 한다(6, 4-6; 10, 26-31; 12, 15-17; 참조 13, 1-19; 4, 11). 이러한 부정적인 경고에 못지 않게 긍정적인 격려와 권유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고가 반드시 공동체가 현재 처해있는 바람하지 못한 상황을 전제하거나 반영한다기보다는 자칫하면 끝에 가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서 발하는 경고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좀더 긍정적인 격려로 말하면, 한편으로는 특히 각자의 신앙 고백을 끝까지 견지하라는 내용이 많다(3, 6.14; 10, 23; 참조 2, 1). 다른 편으로는 독자들에게 ‘움직여라’고 권고하고 독촉한다: 은총의 옥좌에 가까이 가자던가(4, 16)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붙잡기 위해 안전을 찾아 도망 나온 우리가 좀더 용기를 갖도록 하자고도 말한다. 그래서 삭막 뒤에 있는 성소(聖所)에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하자고 한다(6, 18-20). 또는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신앙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자고도 한다(6, 1). 마침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영문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 치욕을 겪자고 한다(13, 13). 이러한 신앙에 어떤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희망이기도 하고(3, 6; 6, 11; 7. 19; 10, 23)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담대하게 행하는 `고백의 연설’이라고 하겠다(3, 6; 4, 16; 10, 19.35).


그러나 권고와 경고 부분을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의 투신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이 투신의 근거와 바탕이 되는 신앙 자체를 가능하게 하신 분이 누구 신가를 좀더 잘 이해시켜 이 투신 자체를 다짐해 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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