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그리스도론.

 

히브리서의 그리스도론.


  1. 영원하시고 현양되신 아드님.


히브리서에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론적 전승의 갈래는 여러 가지다. 그렇다고 이 갈래 상호간에 때로는 부조화와 긴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여러 갈래의 전승들은 편지를 받는 공동체가 여러 가지 전례 기회에 고백하던 신앙 고백의 다양한 내용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3, 1; 4, 14; 10, 23). 편지 모두의 발제 부분은 고도의 그리스도론을 진술하는 전승 부분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의 창조와 보존의 협조자 또는 대리자이시며 하느님 말씀의 마지막 수탁자(受託者)임을 말하고 있다(1, 1-4). 이 그리스도론은 초대 교회의 다른 고도의 그리스도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지혜 사상을 활용하고 있다. `광채’와 `모상’이라는 상상은 지혜 7, 25에서 직접 유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저자가 직접 이 지혜서를 인용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런 구절을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따라 어떤 찬미가(讚美歌)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출처가 다양한 그리스도론적 여러 전승들을 인위적으로 한데 종합하다보니 무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양상은 이 저서의 모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도 이따금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7, 3; 13, 8). 아무튼 아들-그리스도론이 히브리서의 핵심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사실 1, 5-13에 이어지는 그리스도론은 그 전망이 앞의 모두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이 대목에는 일련이 구약 성서가 인용되어 나오는데 그 기능은 아마 그리스도의 부활을 현양과 오른편의 좌정(坐定)을 기리는데 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초기 교회에서 그런 목적으로 모아놓은 인용구집(引用句集=florilegium)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편 110, 1과 히브 1, 13 참조).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아드님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비록 종말론적 탄생이라고 하더라도- `낳으실 수 있는지’는 필자 자신도 잘 설명해주지 않는다(시편 2, 7과 히브 1, 5 참조). 혹시 그는 선재-강생-죽음과 부활이라는 소위 3단계 그리스도론의 구도(構圖)에 따라 이 다양한 그리스도론적 전승들을 종합하려 했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그가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할 의도가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주목적은 이 모든 다양한 그리스도론적 전승들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다시 활성화하는데 있었다고 하겠다. 어쨌거나 첫머리의 발제 부분과 거기에 이어지는 인용구들은 그리스도의 천상적 지위를 돋보여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고난의 아드님.


이어지는 그리스도론적 자료 뭉치는 그 출처가 또 다르다(2, 10-18). 여기에 소개된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지도자이시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예정하신 하늘의 영광에 다다르기까지(2, 10) 당신과 살과 피를 나눈(2, 14) 형제들을 위하여 길을 밝혀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스스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이 일을 해내셨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죽음과 그 공포에서 인류를 해방하셨다(2, 10.14-15). 지옥의 권세와 싸워 그 포로들을 해방하셨다는 상상은 해방 영웅에 관한  고전적 신화에 이미 널리 기용된 소재였다. 이 상상을 헬라계의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변형하여 응용한 것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역시 나름대로 그리스도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모형으로 이용한 것이다. 우리의 필자는 이 그리스도론 적인 상상을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활용하지는 않는다. 그 기능은 모두와 인용구 집의 아들-그리스도론적 긍정 내용을 다소 누그러트려 균형을 잡아주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이 상상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돋보여주려 한 것이다. 어떻게 보여주었는가? 우선 이 단락 초입에서 시편 8, 5-7(히브 2, 6-9)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재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라는 핵심적인 내용을 분명하게 해준다. 본래는 이 시편 인용구도 히브 1장의 인용구집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언어는 고대의 헬라계 신학 사상에서 여러 가지 그리스도론적 추리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 필자는 이 구절은 영원으로부터 아드님이시며 부활 후에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은 동시에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 그분이 그토록 드높은 자리에 올려지신 것은 그분이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낮춰졌다’는, 그분 비하(卑下)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할 것이다.


  3. 대사제.


필자는 2장 끝에 새로운 그리스도론적 소재를 이끌어 들인다. 영원하시고 현양되셨으며 그전에 고난을 받으셨던 아드님은 바로 이 고난 때문에 `자비롭고 충실한 대사제’시라는 것이다(2, 17). 이 대사제 그리스도론은 히브리서 교리 설명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이 주제를 독자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에게 대사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히브리서 뿐이다. 그러나 우리 저자가 이 칭호와 그에 관련된 그리스도론적 추리를 조작했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산만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생각하는 구절들은 후기 그리스도교 문학 여기 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다교에서도 천사들이 하늘에서 어떤 사제적 기능을 발휘한다는 추리와 공상이 널이 유포되어 있었다. 이 추리와 공상의 전승은 구약의 대사제직을 우의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하느님의 로고스를 신과 인간 사이의 으뜸가는 중재자로 소개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한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전승을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넘겨받아 그리스도를 천상의 중보로 소개하는데 이용했을 가능성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히브 2, 17에 처음 나오는 대사제 칭호는 아마 이런 유대교 전승을 응용하던 그리스도교 신학 전승에 그 근원을 둔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중재자라는 상상(4, 16; 7, 25)이 바로 이런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고리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승을 활용하되 거기에 매여있지는 않았다. 그가 발전시키는 대사제 그리스도론은 그 전망이 훨씬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다음 단계의 대사제 그리스도론 소재(5, 5-10)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 겪으신 고난과 거기에서 결과하는 현양을 돋보여준다. 여기에 이어 7장에는 또 다른 그리스도론적 갈래가 섞여 들어온다: 바로 시편 110, 4에 입각하는 이른바 `멜키세덱의 서계(敍階)를 따르는 대사제’ 그리스도론이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는 언제 대사제가 되셨다는 말인가? 우리 필자가 전승에서 물려받은 대사제-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천상 사제직에 집중되어 있었던 같다. 여기에 알맞은 표현 수단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시편 110이었다. 그러나 우리 필자는 이런 천상 중심의 대사제-그리스도론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서부터 벌써 사제직을 수행했다고 재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대사제직 이해의 전망을 확장했다. 이 점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창적인 기여이기도 하다. 이렇게 확장된 전망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상 사제직 수행을 다루는 것이 바로 5, 7-10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이 지상에서부터 기도와 탄원을 하느님께 올린 사제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그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결코 겟세마니에서 번민 중에 기도를 올리던 장면에서 암시를 받아 그린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언어는 헬라계 유대인들 간에 발달하고 있던 시편들의 언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정작 이 `멜키세덱의 서계를 따른 대사제’란 어떤 대사제를 두고 하는 말인가? 이 질문에 설명하려는 것이 바로 7장의 취지라고 할 것이다. 필자는 시편 110과 창세 14, 17-20을 재해석하면서 그리스도는 이 서계를 따르는 사제로서 영원한 사제요 따라서 레위 사제들보다 우월한 사제라는 것을 논증하려 한다. 사실 이런 영원한 천상의 사제만이 7, 12가 말하는 `완전’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멜키세덱 사제관은 유다교의 여러 가지 자료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꿈란(11QMelch), 2헤녹 위경, 필로 그리고 나그 함마디 계통의 영지주의 자료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키세덱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활용하는데도 절제와 한계를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대사제의 제사 또는 희생.


이 대사제직 이해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첫 번이자 마지막으로(7, 27) 봉헌한 그리스도의 제사가 어떤 성격의 제사인가를 설명해주는 8장-10장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전부터 벌써 일종의 속죄 제사로 이해되어 왔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매우 특별한 제사로서 유다교의 대속죄 축일에 대사제가 바치는 제사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유다교의 대사제와 마찬가지로 `영을 통하여'(9, 14) 참된 천상의 지성소에 들어가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사로 바쳐 백성의 죄를 씻었다는 것이다(8, 2; 9, 11-12; 9, 23-24). 이와 같은 비유법은 글자 그대로 알아들어는 물론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것을(10, 5-10)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천상의 사제직 수행이 지상에서 그분의 육을 통하여(10,10) 이뤄졌다는 저자의 논증은 언뜻 하나의 역설 같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 필자의 사제직 신학의 독창성이 아닐까? 그리스도 사건은 지상과 천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이고 그 가능성의 조건은 아드님의 사람되심이기 때문이다.


8장-10장의 지배적인 소재는 대속죄 축일 의식이라는 모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적 죽음을 해석하는데는 이런 고안(考案)만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죽음은 또한 새로운 계약을 맺게 하는 사건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9, 15-22). 이 새로운 계약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 새로운 계약의 성취요 실현이다(8, 7-13; 10, 16-17). 속죄와 사죄(赦罪)의 효과는 봉헌되는 희생의 가차에 달려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면 반드시 이뤄지리라고 약속해주신 죄의 용서를 성취시키고도 남음이 있다(8, 12; 9, 14; 10, 17). 동시에 하느님 쪽의 이런 조치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의 용서를 성취하게 할 뿐 아니라 새로운 마음의 계약(8, 10; 10, 10; 10, 16)을 맺으시리라는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렇게 새로운 계약을 개막한다. 아울러 이 사실은 이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된 신앙인들의 처신과 행동에 직접적인 함의(含意)를 띤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선례를 따라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12, 1-3). 이렇게 설명된 그리스도론은 히브리서의 필자가 의도하는 권고 및 경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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