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주석

 

제2 장: 구원은 말씀으로 선포되었다.




1. 짜임새와 주제:


– 1-4절: 권유와 회고: 들은 말씀에 대한 충성과 말씀의 실체.


– 5-9절: 천사와의 비교를 통한 그리스도의 비하와 현양


10-13절: 비하와 현양의 목적: 형제들을 위하여.


14-18절: 형제들을 위하는 길: 동참과 해방.




(1)1-4절.


첫째 권유. 히브리서의 5개의 권유 중에(3, 7-4, 13; 5, 11-6, 12; 10, 19-39; 12, 14-29) 첫째이다.


  1절: 우리 귀로 들은 것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빗나갈지도 모른다. 선포된 말씀에 대한 충성이 구원의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라고 할 것이다.


  2절: 우리가 들은 것은 천사들이 전해준 말씀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있다. 그런데 천사들이 전한 말도 진실하다는 확증이 있어 이를 어긴다거나 건성으로 듣는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하물며


3절a: 이렇듯이 귀중한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그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어찌 우리가 모면할 수 있겠는가? 천사들이 전해준 말씀은 시나이 산에서 공포된 율법을 안중에 두고 있다. 당대 유대교에는 율법이 천사들의 매개로 공포되었다는 견해가 착실하게 자리잡고 있었다(신약성서에서는 갈라, 3, 19와 사도 7, 53에 이런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선포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말씀을 능가하는, 결정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기본적인 신앙 교리가 깔려있는 이해 지평이라고 할 것이다.


3절b-4절: 과거의 구원-선포의 회고.


그런데 이 구원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또 그분이 이 말씀을 선포하셨기에 이 구원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역사에 구체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 말씀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이뤄지고 구원 역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말씀의 사건으로 실현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말씀-사건이 역사 안에서 구원을 하나의 현실로 일으킨다고 할 것이다. 구원은 말씀-사건의 일환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 사건+구원이 믿을 만하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되었다: 이들의 말씀과 구원에 관한 증언이 있었기에 우리는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이 믿음을 통해서 말씀 사건의 동시대인이 되고 구원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선배들이 듣고 우리에게 전해준 주님의 구원-말씀과 말씀-구원은 하나의 전승을 통해서 대대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전통의 역사요 증언의 역사이며 전통과 증언은 그대로 선포의 본질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 4절: 이 선포와 증언에는 하느님께서 몸소 거드셨다: 하느님도 주님과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그 제자들과 함께 말씀과 활동하심으로 이 거대한 구원 역사에 동참하셨다. 어떤 모양으로 동참하셨는가? 징표와 위업과 기적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동참하셨다(마르 16, 17-18.20; 사도 5, 12; 로마 15, 19; 2고린 12, 12 참조). 징표와 위업과 기적과 성령의 은사는 오늘에도 증언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다짐해주는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이지만 이 수단과 방법은 우리가 멋대로 조작할 수도, (기도로) 강요할 수도 없고 오로지 그분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5절-9절: 비하와 현양의 과거와 미래.


5절: 소주제: 미래 종국의 세계는 천사들의 것이 아니다.


6절: 그 이유는,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각별한 배려와 사랑은 천사들과 비길 바가 아니다. 여기의 사람과 사람의 아들은 7절을 감안할 때 예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절: 강생과 구속의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잠시동안 낮춰진 것은 사실이지만 곧 이어서 영광과 영예를 되 찾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 예수의 존엄한 지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8절a: 그리하여 하느님은 만물을 아드님께 복종시켰다.  8절b: 천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물을 하나도 예외 없이 그에게 복종시켰기 때문이다. 


8절c: 그러나 이 복종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종말론적 유보”라는 견지를 잘 유지하고 있다. 필자의 훌륭한 현실 감각과 역사 의식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환상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요 몽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뛰어난 의미의 현실주의자라고 할 것이다. 


9절: 비하의 원인은 예수의 이를테면 본성상의 어떤 열등한 지위 때문이 아니다. 비하의 동기는 어디까지나 구원론적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혹은: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죽음의 체험은 그의 본성상의 열등함이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이뤄진 것이다. 달리 말해, 비하와 현양을 통한 구원의 전 과정은 하느님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3) 10-13절: 비하와 현양의 목적: 형제들을 위하여.


10절: 하느님의 주도로 이뤄진 구원의 전 과정에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명문으로 밝힌다: 다른 모든 형제들(‘아들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가시는 구원의 영도자인 예수를 고난을 통해 완성하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의 최종적인 존재 이유가 되신다: 구원의 역사 하심까지도 포괄하는 만물의 주재자이시라는 뜻이겠다. 예수의 비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비하와 고통과 죽음과 수모와 무기력, 국사범으로서 공개 처형된 죄인…등을 십자가의 표면이라고 한다면 그 배후에는 앞서 말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계획과 그 추진 과정 또는 시행 과정에서 예정된 거이었기에 이 모든 비하와 고통과 죽음과 수모와 무기력은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는다는, 일종의 비하의 신학적 변론이라고 할 만하다.


11절- 종말의 그리스도론적 완성의 목적론적 근거: 앞 절에서 예수를 고난을 통해 완성하려 하셨다고 했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구원은 하느님의 ‘자의적인’ 시혜인가 하는 의문이 일 수도 있는데 이런 의문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론적 완성의 목적론적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필자는 말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된 이들’이나 그 뿌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여기의 ‘뿌리’를 신론적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면 필자가 영지주의적으로 기울어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공동의 뿌리’는 예수와 여타 형제들이 공동으로 나누는 ‘신성’이 아니라 이 두 동기(同氣)들이 나누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동기간이 인간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고통을 맛봄으로써 그 인간성을 우선 그 비하의 차원에서 철저하게 나누고 -얼마나 철저하게 나눴는지 예수는 인간들을 자기 형제들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필자는 말한다(11절b)- 이를 바탕으로 그의 인간 동기들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도 인간으로서 완성되도록 했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게(10절 참고) 필자의 확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의 이 그리스도론적 완성은 동시에 대사제인 그분의 제사 행위이기도 하다:


“그분은 한 번의 봉헌으로써 거룩해진 사람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10, 14). 그리스도를 일러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한 것은 그분의 죽음으로 이뤄진 그 봉헌 또는 그 제사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자기 헌신이요 동시에 그 형제들의 봉헌이기도 하다. “한 분에게서 비롯한다”: 보통으로는 ‘한 하느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2, 16을 고려하여 아브라함을 그리스도와 그 동기들의 공동 근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2, 10의 보편주의적-우주론적 전망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도 인류의 공동 조상인 아담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상 필자는 현재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하신 인간 동기들 사이의 연대성을 부각시켜 구원의 인간론적인 근거를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12절: 여기에 인용된 것은 시편 22, 23이다. 박해받는 의인이 하느님께 드리는 하소연과 종국적인 승리와 개선을 노래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하느님께 올렸던 마지막 기도도 이 시편에서 인용한 것이다(마태 27, 46. 그밖에도 27, 35.39.43 참조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 하소연을 들어주셨기에 의인은 마지막에 가서는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인은 박해를 받던 때 소외되고 버림받아 외톨이가 된 줄 알았으나 그는 절대로 외롭지 않았다. 그러기에 형제들과 함께 이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함으로써 인간 조건의 조건 없는 수용과 비하와 고통과 죽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승리와 개선에 있어서도 그 형제들과 연대를 나누셨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13절: 2사무 22, 3(LXX)의 인용이다. 이사 8, 17에도 다시 한 번 나온다. 


(4) 14절-18절: 인간들과의 연대성의 여러 차원들.


12절: ‘나의 형제들’은 선포와 찬양과 거룩한 모임 곧 하느님 백성이라는 공동체에서 연대를 이룬다;


13절: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 있어서나 하느님께서 주신 자녀들과 함께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점에 있어서나 그리스도와 그 동기들은 연대를 이룬다. 다만 여기의 자녀들이란 하느님의 자녀들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아담의 자손들’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 것이 현재의 맥락에는 더 잘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14절: 같은 연대성을 시각을 다소 달리하면서 다시 한번 부각시킨다: 한 아버지에게서 난 동기들은 으레 혈육을 함께 나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다른 동기들과 같은 혈육을 나누고 같은 운명을 나눠 연대를 이룬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론적인 동기에서 그런 것이다: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이를 사실상 철저하게 겪음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인간의 마지막 적 곧 악마의 힘을 무력하게 만들자는 데 이 연대성, 이 역사적이며 운명적인 연대성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